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7월 10일 연중 제15주일

Margaret K 2022. 7. 10. 06:22

2022 7 10일 연중 제15주일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루카 10,25-37)


“Teacher,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Jesus said to him,

“What is written in the law? 
How do you read it?” 
He said in reply,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being,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He replied to him, “You have answered correctly;
do this and you will li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 가까이, 곧 입과 마음에 있기에,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를 드시며,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이르신다(복음).

마음으로 가는 길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키엣 대주교-
 
영원한 행복,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은 염원은 시대를 떠나 모든 사람들의 꿈입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일상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죽을 만큼 얻어맞아 길가에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사제가 지나가다 그 사람을 보았지만 그냥 피해서 지나갔고 레위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종교가 없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 다가가서 그에게 붕대를 감아주었고 뿐만 아니라 여관으로 데려가 여관 주인에게 그가 회복될 때까지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며 돈을 주고 떠났다.”

예리코로 가는 길은 하늘나라로 가는 험난한 길입니다. 언제나 강도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위협하고 시련에 빠뜨리는 험한 길이지만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가지려면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타인을 보는 세심함, 타인을 보는 배려심

말을 타고 급히 가던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걸어가던 사제와 레위인은 쓰러진 사람을 지나갔음에도 그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보고 들었지만 닫힌 마음이 그를 향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도와주다 피라도 묻게 되면 미사를 올리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역시 시끄러운 소음 속에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눈과 귀가 아닌 마음, 즉 사랑의 마음으로 보고 들었습니다. 세심한 사랑의 마음과 열인 귀가 있었기에 신음하는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타인을 향한 열려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그에게 주님은 신기하도록 밝은 눈을 주셨기에 다른 사람의 심연에서 흘러 나오는 아픔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가가는 관심

관심은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관심은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그를 위해 어떤 일을 하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관심을 갖고 쓰러진 사람을 보자 즉시 다가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관심은 다른 사람을 보살펴 줄 붕대와 약을 준비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의술은 모르지만 보살펴 주려는 마음으로 그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노새 등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다 주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관심이 행동과 실천으로 옮겨질 때 진정한 사랑이 됩니다.

나와 타인을 향한 성실한 마음

성실함은 피곤하다고 그만 두지않고 끝까지 일을 마치는 것입니다. 바쁜 사마리아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그를 끝까지 보살펴 주었습니다. 떠나야하는 시간이 되자 여관 주인에게 그를 보살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다시 돌아와 그가 다 나을 때까지 돌봐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내가 아닌 타인에게도 성실한 마음이 있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는 길은 지금 우리들이 가고 있는 이 길’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이 길을 갈 때만이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사랑의 마음이 없기에 영원한 생명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자비롭고 배려심 많은 성실한 마음을 지닌 사마리아 사람은 마치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심 많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지니고 떠나십시오. 마음으로 듣고 마음을 따라 하고 마음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마음으로 가는 길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겸손하고 어지신 예수님, 저희가 주님을 닮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사제와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 중 나는 어떤 사람과 비슷합니까?

2. ‘마음을 지니고 떠나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3.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열려 있는 사랑은 어떤 사랑을 의미합니까?
 
말씀의 실천

1. 우리의 가족과 주변에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멈춰서서 돌아보고 고개를 숙여 그를 보고, 돌봐줘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실천해보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교통 체증이 심할 때, 앞의 차가 너무 느리게 가서 계속 다른 차들이 그 앞으로 끼어들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대부분 화를 냅니다. 자기 앞으로 많은 차가 끼어들수록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늦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차를 향해 욕을 하기도 합니다. 형편없는 운전 실력으로 길을 더 막히게 한다는 말도 합니다.

자기는 잘한다는 ‘우월함’ 환상에 자주 빠지는 우리입니다. 운전만이 아닙니다. 다른 이를 향한 ‘뒷담화’ 역시 내가 더 낫다는 ‘우월함’ 환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변해보십시오.

“운전을 못 하는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부족한 사람인가요?”

“뒷담화로 비판하는 대상과 나를 비교하면, 나는 대단한 사람인가요?”

나는 낫고, 상대방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보다 과장하여 터무니없는 헛된 생각을 하는 과대망상 증세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증세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주님께 계속 말씀하셨고, 당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낮추는 겸손입니다. 겸손을 통해 ‘판단’보다 ‘이해’를 가져올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전개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현실적인 문제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율법 교사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신봉하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는지를 묻지요. 그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정답이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제한적이었습니다.

번제물 바치는 것으로만 하느님 사랑을 대신했으며, 이웃 사랑은 동족 사랑에 국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하나로 묶으셨지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면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교만에서 벗어나 이웃을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역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도를 만나 길에 버려진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고, 여관 주인에게까지 부탁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사랑을 외면한 사제나 레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가 되기는 쉽다. 그러나 아버지답기는 어려운 일이다(세링그레스).

 '착한 사마리아인 되기'는 나에게 '권고'인가 '법'인가?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DmqPvbugfVs 

1928년 미국의 한 부둣가, 산책을 하던 한 남자가 실수로 바다에 빠졌습니다. 친구들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고지점 불과 몇 미터 거리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그 사람이 도와주었으면 자녀가 살 수 있었다며 그를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굳이 도와주어야만 하는 법은 없다며 그 남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만약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가톨릭 국가라고 볼 수 있는 프랑스는 이 법이 있습니다.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구해주어도 자신이나 제삼자에게 위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도와주지 않는 자는 3개월에서 5년까지의 징역과 360프랑에서 1만5천 프랑(한화 약 40만 원~1,700만 원)까지의 벌금을 물을 수 있습니다. 이 법을 호주와 폴란드, 일본에서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이 법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인간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한다는 반발 때문에 통과가 못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산 여중생 사건’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지나가던 많은 사람이 여중생의 구타 현장을 목격했지만, 오히려 간섭하면 안 좋아진다는 인식으로 인해 방관하였고 피해 여중생은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무려 한 시간 반 동안 폭행당했습니다. 신고가 늦어져 경찰이 출동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수없이 많습니다. 신고만 해 주어도 사람이 사는데 구해주지 않습니다.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어야만 하는 의무는 종교인에게만 있습니다. 

  

    저도 오늘 복음에서처럼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주지 못한 사제였던 적이 많습니다. 사고 난 사람을 전화로 신고만 해주고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차에 불이 나거나 그 사람의 출혈이 심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신고만 해 주었으니 할 건 다 했다고 여겼습니다. 아무리 착한 사마리아인 강론을 많이 하더라도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잘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자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아가 원하는 것을 따라주는 것을 자유라고 여깁니다. 결국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은 소유욕, 성욕, 지배욕으로 나아갑니다. 그것도 노예 생활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도 법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남을 도와줄 의무는 없습니다. 그런 법에 지배받지 않는 것입니다. 천국은 다릅니다. 천국은 더 높은 수준의 법이 있습니다. 우물에 빠진 형제를 구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오는 자녀를 부모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권고로 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권고가 아닙니다. 법입니다. 법이 아니면 우리는 지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안의 자아는 ‘법’이고 그 법을 이길 수 있는 수준의 명령은 ‘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저 법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법에는 반드시 그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대가가 따릅니다. 하지만 권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권고로는 자아가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입법자로서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벌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해리 포터 – 비밀의 방’(2010)에 도비라는 집 요정이 나옵니다. 도비는 사실 좋지 않은 주인에게 속해있습니다. 아무리 해리포터를 도와주려고 해도 주인의 명을 어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도비는 주인에게 새로운 옷을 선물 받았을 때는 주인에게서 자유로워집니다. 해리포터는 자신의 양말을 주인 것으로 속여서 선물합니다. 그리고 도비는 말합니다. 

    “도비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해리포터를 도와줍니다. 이상하게 자유라고 하면서 해리포터를 섬깁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법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법을 해리포터가 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해리포터를 구하려다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도 행복하게 죽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 가죽옷을 주셨습니다. 그 가죽옷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입니다. 우리는 그 의로움을 입고 더는 돈과 쾌락과 명예로 우리를 치장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뱀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주인이 주는 명령은 법입니다. 자아가 우리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세속-육신-마귀는 법입니다. 이 법을 누를 수 있는 새로운 법이 아니면 우리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법을 이기는 것은 법입니다. 권고로는 법을 이길 수 없습니다. 권고는 안 해도 되지만 법은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그것이 나의 법이여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지 않을 수 없을 때, 나는 지금 이미 천국의 법을 따르는 것이고 천국에 사는 것입니다. 나의 입법자를 하느님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유를 옹호하는 자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착한 사마리아인 법의 제정을 스스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어야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법입니다. 이 법이 없으면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은 권고가 아니라 법이어야 합니다.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시는 하느님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nKDUJAyDasc

 -조재형신부-

 

가끔씩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올 때가 있습니다대부분 스펨전화입니다한국어는 거의 없고 영어스페인어중국어로 전화가 옵니다잘 못 알아듣기도 하지만 받으면 바로 끊어버립니다스마트폰을 수리했더니 수리한 내용에 대해서 설문조사를 한다는 문자가 왔습니다간단한 줄 알았는데 5분 정도 걸리는 내용이었습니다항공사에서도 가끔 설문조사를 한다고 문자를 합니다대부분 그냥 지나가는데 한번은 설문조사에 응했습니다출발시간을 잘 지키는지짐 부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는지게이트에서는 친절했는지승무원의 태도는 좋았는지 등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사실 상담원에 대해서설문조사 담당자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대부분 다음에 할게요운전 중입니다지금은 바쁘네요.’라고 말했습니다어떤 분이 상담원의 전화를 기쁘게 받아 주었다고 합니다질문에도 성실하게 응답했다고 합니다그러자 상담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오랜만에 사람하고 통화했다며 고마워했다고 합니다상담원의 이름을 입력해 놓았고가끔 상담원이 전화를 하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화하였다고 합니다.

 

저도 신문 홍보 때문에 신부님들께 전화를 할 때가 있습니다사제 모임에 가면 홍보를 할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합니다언제든지 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먹구름이 걷히고 밝은 햇살이 비추는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본당은 신자가 적어서 큰 도움이 안 될 겁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저를 걱정해 주는 것인지오지 말라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그래도 그런 경우는 홍보 약속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한번 연락 주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언제 한번 밥 먹자.’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다시 연락드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요즘 종이 신문을 누가 봅니까직원들 월급은 줄 수 있나요다른 방법을 찾아보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맛 집을 찾아갔는데 내부 수리중이라는 푯말을 볼 때처럼 허탈하기도 합니다미주 지역에 단 하나뿐인 가톨릭평화신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 복음을 전한다는 사명으로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2022년에 필라델피아의 홀리앤젤스와 홀리메리 성당으로 홍보를 다녀왔습니다버지니아의 성 정 바오로 성당과 워싱턴 디시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도 홍보를 다녀왔습니다뉴저지의 데마리스트 성 요셉 성당에도 홍보를 다녀왔습니다기회를 주신 신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강도를 당한 사람이 있었는데 레위와 사제는 그냥 지나갔습니다강도당한 사람이 그들의 이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여관에 데리고 갔고필요하면 치료비를 더 주겠다고 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율법학자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맞습니다첫째가는 율법은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나의 이웃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세상 모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특별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오늘 제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랑할 이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 입니다.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입니다!

 -양승국신부-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떠나보냈다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참변을 당한 사람들, 혹독한 곤경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가르침에 따르면 사목자로서 당장 달려가 구체적인 도움을 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허락하지 않아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사목자로서 맡은 소임에 충실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이 여의치 않습니다. 수도자로서 정주(定住)의 기본 원칙을 지켜야 하니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제 모습과 죽을 위험에 처한 행인을 보고도 못 본 척 지나간 사제나 레위인의 모습이 어찌 그리 닮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척에 있는 동료 인간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고통과 슬픔을 강 건너 불 바라보듯 도외시하면서, 아무리 복음적 사랑의 실천을 큰 목소리로 외친다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사랑의 성체성사 역시 그것이 전례로만 이해되고 성전 안에서의 예식으로만 끝난다면,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 혼자만 요란스런 꽹가리, 속이 텅텅 빈 강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성스럽게 매일 하느님께 올리는 분향이 거룩하고 감성적인 분위기, 자기도취에만 머물러있지 구체적 사랑의 실천이나 나눔, 희생이나 봉사로 건너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행동 하나하나는 우리에게 큰 의미와 자극으로 다가옵니다. 그에게는 다른 무엇에 앞서 큰 불행 앞에 선 한 동료 인간을 향한 자비와 연민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강한 측은지심이 있었습니다.

  

사실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은 가진 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방어하다가 강도들로부터 엄청난 폭력을 당했겠지요. 여기저기 얻어터져 피범벅이 되었고 초주검이 된 상태라 스스로 거동도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도 갈 길이 바빴지만 가던 길을 멈추어 서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도와주겠지 하고 발뺌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강도당한 사람에 대한 응급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준 것입니다.

  

참사랑은 그런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입니다. ‘나중에’가 아니라 ‘바로 지금!’입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 29)

-한상우신부-

우리자신이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이웃은
신분이 중요하지
않다.

이웃은 이웃의
아픔에 마음으로
반응하며
실천의 길을
따라간다.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복음의 참된
이웃이다.

공동체의식을
깨닫게하는
가장 좋은
공통어
이웃이다.

일체감을
체험하게 하는
이웃이다.

우리자신이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이 삶을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길이 된다.

좋은 이웃은
실천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다.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돌보아주는
사랑을 실천한다.

좋은 이웃은
수 많은 이유와
핑계를 멀리한다.

좋은 이웃의
시작은
예수님이시다.

좋은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상처난 손으로
우리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신다.

좋은 사람은
좋은 이웃이
되어 함께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좋은 이웃을 통해
전달하신다.

자신에게
우리에게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 37)

살아있는 이웃
살아있는 삶이다.

살아있는 이웃은
자비를 베푸는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
좋은 복음이다.

말씀 나누기 - 연중 제15주일-다가감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