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7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가서 하늘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오 10,7-15)
"As you go, make this proclamation: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Cure the sick, raise the dead,
cleanse the lepers, drive out demons.
Without cost you have received;
without cost you are to gi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연민이 북받쳐 오르시어, 타오르는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으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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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본당의 청년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영화를 즐겨 보지 않습니다. 영화만 보면 왜 이렇게 졸린 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전과 마찬가지로 졸다 나올 것 같아서 청년들만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 여럿이 함께 보면 절대로 졸 수 없다고 하더군요.
결과는 전과 마찬가지로 시작과 동시에 잠들었다가 끝날 때쯤에 깨고 말았습니다. 내용을 전혀 알 수가 없었지요. 극장에 나와서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영화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보는 관점이 모두 다른 것입니다. 재미있었다는 사람, 약간 지루했다는 사람, 영화를 분석하며 의미를 찾는 사람, 배우의 연기에 집중하는 사람….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르게 보는 것을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영화 보는 눈이 모두 다른 것일 뿐,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는 맞고 남을 틀렸다고 단정 지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정작 나만 틀리고 남들이 맞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늘 내가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믿지 않고 반대하는 자들과는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이교도 지방에서 돌아올 때 발에 묻은 이방의 흙을 털어 버리고 자기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우상 숭배로 더럽혀진 모든 것을 거룩한 땅에 묻히지 않으려는 행위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거절하며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우상 숭배의 이방인과 같이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의 악행으로 가혹한 천벌을 받은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이 도시의 벌보다도 더 엄중한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왜 주님의 기쁜 소식을 거절했을까요? 자기만 옳고 남은 틀렸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이십니다.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할 수 없음에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호세아 예언자의 말이 마치 지금 우리를 바라보며 하시는 주님의 슬픔 가득한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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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AUqMmVo1Zfs
선교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행복을 주려면 가진 것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앓는 이를 고쳐주고 죽은 이를 일으켜주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마귀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이 능력을 주시며 파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저도 새로이 본당에 가서 많은 이에게 주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큰 기적이 한 번만 일어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내가 모든 것을 거저 받는 처지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거저 받는 처지라면 나는 나의 힘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가진 돈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는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말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개는 훌륭하다’에서 ‘폭군 형과 껌딱지 동생’, 망고와 링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히 망고는 지나치게 일찍 입양해서 소유욕이 강합니다. 집이 자기 것이라 여기고 문으로 누가 들어오려고 하면 난리를 칩니다. 이것을 말리려고 링고가 달려듭니다. 그래서 둘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망고에게 주인이 칭찬해 주어야 할까요? 하지만 보호자는 안쓰럽다고 간식과 말로 타이르려 합니다. 그러나 강 훈련사는 이 집이 망고의 것이 아님을 인식시킵니다. 그리고 결국 작은 강아지 집에 들여보냅니다. 자기 위치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보상을 주면 안 됩니다. 보상은 손님이 왔을 때도 자기 위치에 머물 수 있었을 때 줍니다. 그전에는 결핍을 줍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위치를 잘 모르고 내 힘으로 무언가 해보려 할 때는 당신 은총의 힘을 거두십니다. 그러나 나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주님께 온전히 위탁할 때 그분은 성령의 힘으로 도우실 것입니다. 이 방법이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입니다. 재물은 결국 내가 의지하는 힘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전에서 앉은뱅이를 고칠 때는 은도 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기적이 일어나는 힘이었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당시 교회가 유럽에게 큰 권위를 행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티칸으로 들어오는 돈의 행렬을 보며 교황은 옆에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자, 보게. 저 긴 돈 수레 행렬을.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는 지났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이제 ‘일어나 걸으시오’하고 말하던 시대도 끝났습니다.”
‘개는 훌륭하다’에서 외로운 엄마가 리트리버에게 수많은 간식을 시도 때도 없이 주어서 개가 주인을 거의 끌고 다니다시피 하게 된 상황이 나왔습니다. 강 훈련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할리가 잘할 때 간식을 보상으로 주세요. 예쁜 것은 잘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잘할 때 주님께서 성령의 힘을 주실 것입니다. 착하디착한 리트리버도 간식을 아무 때나 주면 고집 센 개로 변하듯, 인간도 주님께서 시도 때도 없이 은총을 주시면 인간은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먼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는 의미로 ‘십일조’를 봉헌합시다. 에덴동산에 머무는 법은 선악과를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은총으로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힘입니다. 돈도 힘입니다. 내가 힘을 빼지 않으면 무법자가 되기 때문에 주님은 기적의 힘을 주실 수 없습니다. 얌전하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수 있는 가난한 목자가 될 때 주님은 기적의 힘을 상으로 주실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6KUwBEFV1k0
-조재형신부-
‘궁하면 통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교님을 공항에 모셔다 드렸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놓고 짐을 부치러 갔습니다. 주교님은 2일전에 코비드 검사를 받았습니다. 짐을 부치는 직원이 신속항원 검사는 24시간 전에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주교님을 모시고 코비드 검사 받는 곳으로 갔습니다. 일하는 직원이 ‘QR’에 정보를 입력하라고 하였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주교님께서도 그런 것은 해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스마트폰 카메라를 큐알코드에 놓고 입력정보를 다운 받았습니다. 인적사항을 다 입력하고, 계산을 하니 코비드 검사 서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서류를 가지고 검사를 받고, 20분 후에 결과는 음성으로 나왔습니다. 드디어 주교님은 짐을 부칠 수 있었고, 무사히 출국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주교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안 해서 그렇지 하니까 저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변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볼리비아로 의료 선교를 다녀오신 분들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을 치료해 주고, 약을 주었습니다. 헌혈증을 가져오면 국밥을 무료로 주고 헌혈증을 모아서 아픈 아이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형제님도 보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무료로 법률상담을 해 주는 분도 보았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이 있습니다. 매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집니다. 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연을 접한 많은 분들이 신문사로 성금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충분히 할 수 있지만 기다려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뜻을 어겼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예수님께서도 용서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했던 여인을 용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하느님나라에서는 우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도 좋아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돌아오면 더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형제의 잘못이 있다면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노에는 더디시고, 자비는 넘치신다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들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용서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선행이 있다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를 그저 그런 존재가 아니라 죽고 못사는 연인처럼 대하십니다!
-양승국신부-
호세아 예언서 내에 표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당신 백성을 향한 말투는 마치 죽도록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주고받는 것 같은 스타일이라 정말 놀랍습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호세아 예언서 11장 8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 당신만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는데,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니 그분의 눈에서는 분노와 실망감으로 불길이 이글거리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그러나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들은 바알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우상들에게 향을 피워 올렸다.”(호세아 예언서 11장 1~2절)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를 그저 그런 존재, 당신과는 별 상관없는 존재,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생명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죽고 못사는 연인처럼 대하는 모습에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때로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질타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공포스런 내용이라 할지라도,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두려워하는 대신 빨리 하느님 경고 말씀의 진의와 핵심을 깨달아야겠습니다. 망설이지 말고 그분께로 돌아서야겠습니다.
호세아는 기원전 8세기 후반에 북왕국, 곧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였습니다. 호세아 예언자에게 주어진 가장 큰 소명은 이스라엘 왕조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조의 멸망에 대한 호세아의 예언은 특이합니다. 그는 주님과 불충실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자신의 결혼생활을 통해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느끼시는 이스라엘을 향한 감정을 자신이 아내를 향해 느낀 감정을 통해 표출합니다.
호세아 예언서의 주된 강조점은 남편을 떠나 외간 남자 품을 전전하는 아내 이스라엘을 남편이신 주님께서 어떤 모습,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토록 사랑해줬고, 그토록 용서해줬으며, 그토록 기회를 줬고, 그토록 기다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를 떠나 외간 남자들의 품에 안긴 고메르의 모습에서, 주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모습, 주님을 떠나가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거듭되는 우리들의 배신과 불효, 냉담함과 무응답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십니다. 배은망덕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 바보같은 사랑이 놀랍고도 고맙습니다.
끝도 없는 반역과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우리의 회개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돌아서는 자들에게는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정도의 넘치는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호세아 예언서 14장 6~7절)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영근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가 무엇인가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곧 타자와의 교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는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받고 싶은 것은 잘 받아들이고 받기 싫은 것은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욕이나 모욕, 꾸중이나 비판은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는 것에 있어서도 사실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 시간과 노고, 마음을 내어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주고받음’이라는 놀이 속에는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
자기 자신’이 한 가운데 떡 버티어 서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것은 남이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먼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가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선사 받아서 가지게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존재의 원천적이고 본질적인 깨달음에 해당합니다.
곧 우리가 “거저 주어라.”라는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거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먼저' 하늘나라를 '거저 받아들여야'만이 내 안에 하늘나라를 지니게 되고, 다름 아닌 바로 받은 그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지게 됩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바로 이렇게 하느님의 자애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는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곧 우리가 만든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다.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기에 앞서, 먼저 ‘거저 받은 것’, 그것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또한 그것이 ‘거저 받은 것’임을 명확히 아는 일입니다.
이토록 신앙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 어떠한 방식으로든 선포되고 증거됩니다.
그러나 만약 실제로 받아들이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한다면, 그것은 그릇되게 선포되거나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는 이미 이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곧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고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흐르는 이 생명을 건너 주어야 하는 일을 사명으로 받았습니다.
거저 받은 것이니 거저 주되, 그분께서 목숨까지 거저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목숨까지도 거저 내어주어야 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 가져가지 말라.”
(마태 10 9)
주님!
길을 떠나면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음은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더 이상은 제 말로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제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제 무능과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의 삶의 기본자세를 철저한 무소유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사도직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에서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 자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돈에 사로잡히고 출세를 노리는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대신에 출세하려고 안달하고, 돈에 얽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제들과 주교들이 그러고 있는지 보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슬픕니다. 아닙니까? 복음의 근본, 예수님의 부르심의 근본은 이것입니다. 봉사하는 것, 자기 자신을 잊고 봉사에 몸 바치는 것, 멈추지 않고 언제나 저 너머로 가는 것입니다. 지위의 편의성. 저는 하나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광장을 지나다니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바리사이들처럼, 정직하지 않게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봉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를 장사꾼이 되게 합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곳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잠시 맡겨 주신 것이니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 해야 합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성 마더데레사).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그리고 결코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거저 받고서는 선심 쓰듯이 주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요?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송영진신부-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 10,7-11).”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근처 어딘가에 가까이 와 있다는 뜻도 아니고, 곧 시작된다는 뜻도 아니고,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을 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루카 24,47).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등의 기적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를 확증해 주는
‘표징’이 됩니다(마르 16,20).
(병자들 입장에서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는 일이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은 무상의 선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선교활동은 자기가 이미 거저 받은 그 선물을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활동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바라시는 것은 당신이 주시는 구원을
사람들이 잘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는 지시는,
재물에 대해서 ‘빈 마음’으로 가라는 지시입니다.
그 ‘빈손’과 ‘빈 마음’도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징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속의 재물(물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이
처음부터 ‘빈손’과 ‘빈 마음’으로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예수님의 지시에 토를 달지 말고
그냥 실천할 수는 없는가?
여러 가지 그럴듯한 말로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지시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어설픈 합리화가 될 수도 있고,
구차한 변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활동비 없이 어떻게 복음 선포 활동을 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드시 돈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일은 ‘사람의 일’이지 ‘하느님의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체험에서 온 확신입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당연히 먹이신다.” 라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빈손’과 ‘빈 마음’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속의 재물에만 의지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안 받겠다고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1티모 6,8).” 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대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어디서 오는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정답은 ‘주님에게서.’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직접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내려오나?” 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로 하늘에서 직접 내려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천사를 시켜서 보내주실 수도 있고,
마음 착한 사람을 통해서 보내주실 수도 있습니다.
11절의 ‘마땅한 사람’이라는 말은 바로 그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라는 말씀은,
“누군가가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한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숙식을 제공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 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입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0,12-15).”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예수님의 평화를 선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평화를 받아 누리려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평화를 전해 주는 사람 자신이 그 평화를 이미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없는 평화를 남에게 전해 줄 수는 없습니다.
재물에 대해서 ‘빈손’과 ‘빈 마음’이 되어서 가라는 지시는
평화를 전해 주는 일에도 연결됩니다.
세속의 재물에 대해서 ‘빈손’과 ‘빈 마음’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평화를 누리기는커녕 마음속에 ‘돈 걱정’만 가득 차게 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 보면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성공했다고 교만해지면 안 되고, 실패했다고 좌절해도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뿐이고,
응답할지 안 할지는 전해들은 그 사람이 선택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하신 것은,
복음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의 죄보다 복음을 전해 듣고서도 거부한
사람의 죄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4주 목요일-분노대로 행동하지 않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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