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7월 5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2. 7. 5. 07:02

2022 7 5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 신심 미사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 태어났다. 양반 가문이었으나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집안이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열여섯 살인 1836년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진자샹[金家巷]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고국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삼았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과거 대축일이었던 7월 5일에 성대하게 신심 미사를 드리기로 하였다(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마태오 10,17-22 
 
you will be led before governors 
and kings for my sake 
as a witness before them and the pagan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언젠가 지방 강의 때문에 숙소를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 호텔에 대한 소개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힐링, 행복, 영혼의 정화’ 등의 표현을 거의 모든 숙소에서 홍보 문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호캉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호텔에서 바캉스를 보내는 휴가 방식으로 호텔에서만 지내면서 진정한 휴가를 즐깁니다. 이런 이유로 호텔 광고에 힐링, 행복, 정화 등의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는 청년이 있는데, 이 청년은 자주 호캉스를 가서 쉬고 온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숙박비로 너무 큰 비용을 쓰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휴식으로 얻는 힘의 가치를 알기에 계속해서 이 호캉스를 즐긴다고 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안에서 휴식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힐링, 행복, 영혼의 정화’ 등은 사실 주님 안에서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 안에서 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주말에 휴식을 주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얻으려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휴식은 주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주님을 제대로 느낀다면, 그래서 이곳에서 ‘힐링, 행복, 영혼의 정화’ 등을 체험하게 된다면 혹시 이제 ‘성캉스’(성당에서 바캉스를 보내는 휴가)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을까요?

주님 안에서만 진정한 기쁨을 느꼈던 분들이 계십니다. 세상의 것을 다 뒤로 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주님을 위해 내어놓았습니다. 바로 순교 성인·성녀들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 미사를 봉헌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이셨습니다. 비록 사제 생활을 1년밖에 하지 못하셨지만, 신부님께서 보여주신 삶은 한국 성직자들을 비롯한 모든 교우들의 진정한 모범이 되셨습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심지어 환난도 자랑으로 여기셨습니다(로마 5,2.3 참조).

주님 안에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걱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이를 통해 죽음의 위협이 와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있을까요? 세상의 것에서만 힐링, 행복, 영혼의 정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찾아보십시오. 세상에서 주는 것 이상의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의 특징은 그것이 불행한 것인 줄 알면서도 그쪽으로 가는 점에 있다. 우리 앞에는 불행과 행복의 두 갈림길이 언제나 있다. 우리 자신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A. 링컨). 

 사제가 외로움을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pwXxOfHsX3k 

 

김대건 신부님의 일대기를 보면 그분은 무엇보다 선교 사제들이 입국할 길을 개척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포졸에게 쫓기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넜으며 지도를 그렸고 수많은 편지를 썼습니다. 이렇게 길을 내신 이유는 조선에 선교사가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찾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당신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자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커다란 바다가 놓여있습니다. 사제들은 라파엘 호를 만들어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이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길을 내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어떤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키 작고 운동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고 사교성도 없어서 매일 혼자였습니다. 잘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자기 자신도 “난 안 돼!”라는 마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좋아하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만화 그리기였습니다. 만화를 그릴 때만큼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커서 만화가가 되겠다고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만화를 그리는 실력도 그리 출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도 그의 그림을 실어주지 않고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할 만큼 한 그는 이제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왜 “난 안 돼!”라는 생각이 깊이 자리하고 있는지 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다 누구도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없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만화에다 자기를 위로해주는 캐릭터를 넣었습니다. 자기보다 몸집이 커다란 로봇 고양이였습니다. 고양이는 외로워하는 작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마.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 네 안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너만의 보석이 분명히 들어있을 테니까.”

이 고양이가 ‘도라에몽’입니다. 그리고 이 작가는 후지코 후지오입니다. 그는 만화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항상 자신을 위로해주는 도라에몽과 함께. 

  

    만약 하느님께서 후지코 후지오를 통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아이들에게 힘을 주시고 싶으셨다면 어떻게 하셔야 했을까요? 먼저 그를 외롭게 만들고 그 외로움을 극복해가게 해야 하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도라에몽을 통해 많은 아이가 힘을 얻습니다. 

  

    길을 닦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위해 친구들을 떠나야 합니다. 이 과정을 이겨낼 때야만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삶이 됩니다. 사제는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분명 많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이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 같습니다. 중국에 있으면 조선으로 입국해야 하고, 조선에 있으면 다시 중국으로 나가는 길을 개척해야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 부모와 가족, 친지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신자들을 떠나고 그들을 고생시키기까지 해야 했습니다. 길을 개척하는 자로서 겪어야만 하는 외로움, 이것은 아버지의 필수 아이템입니다. 

  

    아버지가 가장 힘든 것은 밖에서 일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집에 돌아와도 나만 소외되는 느낌일까요? 자녀들은 엄마가 고생하는 것에 비해 아빠가 고생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엄마와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남모르는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가장 힘든 것은 이것을 알아주지 못하는 가족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신부도 아버지이기 때문에 마찬가지입니다. 

  

    MBC 예능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22년간 돌산을 깎은 ‘마운틴맨’ 다쉬라트 만지히 씨의 사연이 공개됐습니다. 

    지난 1960년 인도의 한 남성 다쉬라트 만지히는 인도 비하르주 겔라우르에서 일하며 점심을 가져다줄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산길을 가던 중 뜻밖의 사고를 당했습니다. 아내를 데리고 다쉬라트는 병원으로 급히 향해야만 했지만, 겔라우르에서 시내까지 직선거리 3km를 돌산이 가로막아 55km를 돌아 이동해야 했습니다. 결국 다쉬라트의 아내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다쉬라트는 자기 아내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망치와 정을 사들여 돌산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망가져도 날이 좋지 않아도 다쉬라트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망치질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쉬라트는 22년 만에 길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55km가 넘던 시내까지의 거리가 불과 3km로 단축됐습니다. 

22년 동안 망치와 정으로 길을 만든 다쉬라트에게 주민들은 ‘마운틴맨’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이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만지히-더 마운틴 맨’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됐습니다.

  

    만지히는 산에 길을 내기 위해 마을 사람에게도, 또 이웃 마을에도 이방인이 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그 노력으로 두 마을 사람이 쉽게 만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비웃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VIPg5zXa3hI

 -조재형신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고복음을 전하셨고죽으셨지만 부활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베들레헴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성모님의 순명과 요셉 성인의 순명이 만나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곳입니다나자렛은 어린 시절 예수님께서 부모님께 순명하며 꿈을 키운 곳입니다요르단 강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느님으로부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선포하신 곳입니다광야는 예수님께서 40일간 단식하시고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았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곳입니다가나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청을 받아들여 처음으로 표징을 일으킨 곳입니다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많은 표징과 가르침으로 새로운 권위를 드러내신 곳입니다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곳입니다무참하게 굴욕을 받으신 곳입니다예수님께서 죽으신 곳입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곳입니다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신앙인들에게는 기쁨입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를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백문이 불여일견이기 때문입니다성지를 순례했다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백견이 불여일행이기 때문입니다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은 솔뫼입니다솔뫼는 소나무 숲이 청청하다는 뜻을 지닌 송산(松山)의 우리말입니다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고 했던 솔뫼는 김대건 성인이 태어난 생가 터일 뿐 아니라 증조부 김진후(비오, 1814년 순교)를 시작으로 4대에 걸쳐 순교자 11위를 낸 성지입니다한국을 방문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솔뫼를 방문하셨습니다성지는 2004년에 복원한 성인의 생가와 함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관소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 및 기념탑 등으로 조성됐습니다기념관은 성당을 비롯해 성인의 생애와 사목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김대건관대전교구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내포교회관기증 유품실소영상관 등으로 이뤄졌습니다김대건 성인의 삶과 신앙을 보고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솔뫼에서 태어난 성인이 순교로 생을 마감한 곳은 서울 새남터입니다새남터에서 순교한 분은 김대건 신부님뿐만이 아닙니다한국교회가 낳은 순교 성직자 14명 가운데 11명이 이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그리고 11명 가운데 8명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샤스탕 신부님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새남터에는 현재 이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전통 한옥 양식으로 세워진 새남터성당에서 꼭 둘러봐야 할 곳은 2006년 문을 연 '새남터 기념관'입니다모두 4개 공간으로 이뤄진 기념관에서 '도입 공간'(입구)은 새남터성지 역사와 103위성인 성화를, '전시 공간'은 천주교 수용과 창설박해 및 순교과정 유물들을 전시했습니다또 '추모의 장'은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 14인의 흉상과 부조 및 추모대가 있습니다. '체험 및 교육 공간'은 김대건 성인 유해를 모신 조배실과 영상물 상영실박해 체험 공간 등으로 꾸며졌습니다.

 

경기도 안성 산골짜기에 있는 미리내는 성인이 묻힌 곳입니다당시 대역죄로 처형당한 김 신부님의 유해를 거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습니다성인이 순교한 지 40일이 지난 후 목숨을 걸고 성인 유해를 거둔 이가 있었으니바로 이민식 빈첸시오(18291921)입니다미리내는 다름 아닌 이민식의 고향입니다성인이 미리내에 묻힌 사연입니다미리내(은하수의 우리말)는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신자들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달빛 아래 냇물과 어우러져 은하수처럼 보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경당 앞에 있는 네 개의 묘 가운데 성인의 묘는 왼쪽에서 두 번째입니다성인의 왼쪽은 강도영 신부오른쪽은 차례대로 페레올 주교최문식 신부의 묘입니다묘역 위편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어머니 고 우술라와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있습니다.

 

성인이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들어와 붙잡힐 때까지 활동한 기간은 반년 남짓입니다짧았던 만큼 성인의 자취가 남은 곳은 많지 않습니다나바위와 용수리 포구는 성인의 조선 입국과 관련된 성지입니다나바위는 성인이 1845년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함께 서해를 통해 귀국하면서 첫발을 디딘 곳입니다이곳에는 성인 일행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을 기념해 세운 나바위성당이 있습니다일행은 나바위에 도착하기 전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표류하던 일행이 도착한 곳이 바로 제주도 용수리 포구입니다일행은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면서 배를 수리하고 먹을 것을 구한 뒤 다시 뱃길에 올랐습니다제주교구는 이를 기념해 용수리 해안에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관과 기념 성당을 세웠고성인 일행이 타고 왔던 라파엘호를 복원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옥중에서 신자들에게주교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신부님의 굳은 신앙과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저는 신부님의 편지 중에서 최양업 신부님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내용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머지않아 천당에서 영원하신 성부 대전에서 서로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저를 대신하여 모든 공경하올 신부님들께도 인사드려 주시기를 청합니다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한 저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하느님께서 저로 하여금 모든 혹독한 형벌을 끝까지 용감하게 이겨내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하느님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여누가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토마스여잘 있게이후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그리고 내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기를 그대에게 부탁하네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들안녕히 계십시오무익하고 부당한 종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조선 선교지의 교황 파견 선교사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편안하고 쉬운 길보다는 어렵고 힘든 길 그러나 보람되고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그 길은 때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줍니다하지만 그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그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키워주고 그러한 끈기는 영원한 삶을 갈망하는 희망을 낳습니다또한 그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우리들 또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 걸어가신 신앙의 길희생의 길순교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더 이상 피를 흘리는 대박해가 없는 이 시대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길은?

 -양승국신부-

 

더 이상 목이 잘리고  피를 흘리는 대박해가 없는 이 시대, 순교 영성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것은, 순교자들의 후손인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중차대한 과제입니다.

  

나와 너무나 다른 그,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그, 해도 해도 너무한 그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인내롭게 견뎌내며 축복해주는 일이야말로 순교 영성을 생활화하는 길입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 초라하고 남루한 나란 존재일지라도,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시고, 내 이마에 그분의 인호가 새겨져 있으니, 각별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존중하는 태도 역시 순교영성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내 인생을 보다 희망적, 낙관적 바라보고, 내 인생에 대한 점수를 30점, 50점, 박한 점수가 아니라, 80점, 90점, 후한 점수를 주는 것도 순교영성을 사는 길입니다.

  

내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열악하고 암담한 현실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꺼이 살아내는 것 역시 순교 영성을 사는 길입니다. 

  

남과 북으로뿐 아니라, 동과 서, 남과 여, 기성세대와 신세대로 갈라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이토록 심각한 분열과 대립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인내롭게 화해와 통합의 길을 모색하는 것도 순교 영성을 구체화하는 길입니다.

  

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경축하며 대한민국 1호 사제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를 묵상합니다. 오랜 고달픈 유학 생활을 끝낸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조선 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시는데, 그런 노력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신비스럽습니다.

  

조선 입국 즉시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축하연이나 감사패가 아니라 입국 즉시 체포와 투옥, 혹독한 매질과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꿈결조차 그리웠던 고국의 산천, 입국을 위해 그 숱한 나날들을 기다려왔던 조국인데...이제 그 고향 땅에 들어가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죽음이라니...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박해가 가라앉을 때까지 좀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국할 수도 있었습니다. 박해의 세월이 지나가기를 기대하면서 다른 학문을 공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쉽지만 입국을 뒤로 좀 미루고 중국에서 사목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의 뇌리 속에는 오직 목자 없이 길 잃고 방황하는 동포들의 고통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목자 없어 서러운 민중들 한 가운데로 투신할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김대건 신부님의 길, 예정된 죽음의 길, 굶주림과 고문, 갖은 조롱과 처참함만이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제가 가고 있는 길을 반성합니다.

 

죽기를 작정하고 시작한 사제의 길이었습니다. 양보하고 희생하는 일은 기본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한 수도자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작은 것 하나 양보하지 못하고 티격태격하는 제 모습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 하찮은 고통 앞에서도 세상이 끝난 듯이 불평불만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제 삶이 참으로 한심하기만 합니다.

 

오늘 하루 김대건 신부님처럼 죽기 살기로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지는 못하더라고 평소보다 좀 더 희생하고 좀 더 자신에 대해 죽는 ‘작은 순교’를 실천하기를 다짐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송영진신부-

 

예수님의 ‘박해 예고 말씀’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신앙인은 항상, 무조건, 심한 박해를 받게 되는가?

정말로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 선포 활동을 할 수 있겠는가?

(“신앙생활은 무조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생활인가?”로

바꿔서 물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무조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한다면, 또는 줄곧

십자가의 길만 걸어가야 한다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항상, 무조건,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7).”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3ㄴ-14).”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고, 백성이 사도들을 존경하던 시기는

박해를 받지 않고 평화를 누리던 시기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보면, 평생 수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박해를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곳 유다인들은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보다 점잖아서 말씀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믿게 되었다. 지체 높은 그리스

여자들과 남자들 가운데에서도 믿게 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사도 17,11-12).”

 

<교회 전체 역사를 보면 박해를 받은 시기보다 안 받은 시기가 더 많습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도 옛날과 같은 박해는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해를 받으면 신앙을 포기하는 일이 많고,

박해가 없으면 자만심에 빠지는 일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개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항상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편안할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힘들면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경우가 있고,

편안하면 방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힘들든지 편안하든지 간에 변함없이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마태 10,17).”

 

여기서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뜻이 아니라,

박해 때문에 신앙을 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사업의 대상이고, 우리의 선교활동의 대상입니다.

만일에 ‘사람들’을 조심해서 피한다면, 그것은 복음 선포 활동을 안 하겠다는

것이고, 그러면 그것은 교회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구원을 갈망하면서,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18-22).”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가 오히려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박해를 받아도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중단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인간적인 말재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인간적인 지식이나

말재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신념으로) 하는 일입니다.

“일러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성령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라는 말씀은, 신앙인들이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성령께서 다 말씀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도움을 받으려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21절에 언급되어 있는 ‘가족의 박해’는, 모든 가족이 박해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도 박해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정이 안식처와 피난처가 되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혈육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신념이 더 강하면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을 텐데,

“어찌 가족이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옛날의 박해시대 때에는 권력자들의 박해보다

가족의 박해가 더 고통스러웠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성가정을 이루는 것은 대단히 큰 은총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박해자들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박해를 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를 받아도 죽지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박해가 있든지 없든지, 유혹이 있든지 없든지,

어떤 인생을 살든지 간에 잘 견디고 끝까지 가야 합니다.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념을, 또 자신의 믿음과 희망을 중간에 꺾는 일이기

때문이고,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얻게 될 궁극적인 은총을,

즉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고,

나중에 후회만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마태 10, 18)

-한상우신부-

이 땅의
성직자들이
참으로
행복하길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하느님께
온전히
자기자신을
내어맡기는
믿음이
가장 큰
믿음이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 땅의
첫 사제를
다시 만나는
축복의
시간이다.

가톨릭과
우리 역사의
만남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뇌와
절망속에서도
끝까지
진리와 더불어
이 시간을
헤치고 나간
첫 사제의
순교가 있었다.

이렇게
죽는 밀알이
되는 신앙의
새 역사를
맞이했다.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헌신적인 삶으로
이 시대를 밝히셨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한국 교회의
등불이 되셨다.

첫 시작은
언제나
철저하고
치열한
기다림이라는
실천을
동반한다.

김대건 안드레아
첫 사제는
우리 성직자들에게
실천을 보여주셨다.

진실과 힘은
참된 실천으로
탄생한다.

참된 사람은
진리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주어진 진리와
함께 주어진
길을 기쁘게
걸어가신
첫 사제의 삶에서
진리와 실천은
둘이 아님을
배우게된다.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인내하는
성직자들의
삶이다.

자기모순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이시여
한국 성직자들을
위해 빌어주소서!

뜨거운 이 땅에
뜨거운 성직자들이
신앙의 뜨거운
중심을 되찾고 있다.

행복한 성직자
행복한 믿음이다.

행복의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는다.

말씀 나누기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축일-각오의 기도와 기대의 기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7월 5일 주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2020년 7월 7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