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3일 연중 제14주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다
(루가 10,1-12)
Into whatever house you enter, first say,
‘Peace to this household.'
If a peaceful person lives there,
your peace will rest on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그곳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고 하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토마스 길로비치라는 심리학자가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한 실험 참가자에게 오래전에 큰 인기를 가지고 있던 가수의 얼굴이 크게 들어가 있는 티셔츠를 입게 한 뒤, 다수의 다른 참가자들이 모여 있는 방 안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티셔츠 입은 참가자에게 다른 참가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 예측해 보라고 했지요.
그는 사람들이 옛날 가수의 얼굴이 크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자신을 이상하게 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그의 티셔츠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기억하고 있었던 사람은 실험자 중에 10%도 되지 않았습니다.
타인이 나에 대해 관심을 두고 바라볼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 머리 스타일이 어떤지, 피부가 어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신경 쓰는 사람은 높이 잡아도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했었어도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내게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다른 사람의 기준과 잣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약한 ‘나’가 늘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세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지, 남들의 시선 때문에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닌,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지금보다 훨씬 위험과 고난이 따르는 길입니다. 그런데 주의 사항이 조금 이상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편안한 여행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 입고 먹는 것 모두 하느님께 맡기고 오로지 하느님 나라 전파에만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것도 인사하느라 긴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교 사명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고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 말씀을 철저하게 따랐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집 떠나면 고생이라면서, 너무 힘들다고 불평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마귀들까지 복종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으며, 동시에 큰 기쁨을 갖게 됩니다.
남들의 시선, 세상의 관점에 신경 쓰고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평화를 줄 수 없으면 길들일 수 없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czUBj20Y_aM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느 집을 들어가든지 먼저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것은 엄청 중요한 말씀입니다. 선교의 본질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개들에게 평화를 주지 않습니다. 거의 학대 수준입니다. 실제로 동물 보호단체에서 강 훈련사가 심한 학대를 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행복과 평화를 주어야 하는데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훌륭하다'에 어미로부터 애정을 한 달밖에 받지 못하고 데려온 천둥이가 나왔습니다. 집에 오는 손님은 물론 주인까지 자주 무는 개입니다. 교만이 하늘까지 이른 상태입니다. 이런 개에게 어떻게 평화를 줄까요? 아무리 잘해주려고 해도 주인은 개가 무서워 두려움에 떱니다.
이런 개에게는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평화는 주인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당신이 파견하시는 제자들이 남의 집에 들어가 주인처럼 먹고 마시고 잠을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발에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누가 갑인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평화는 생존욕구에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생명이 보장되면 평화가 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며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합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부모가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주는 부모에게 자녀들은 순종합니다. 길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부모가 사는 세상에 살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참 평화를 주어야만 누군가를 길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주는 존재가 두려운 존재입니다.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부모를 잃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를 싫어할까 봐 가장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힘이 강하면 자기가 부모에게 무언가 해 주는 것처럼 여기고 부모가 평화를 주는 존재가 아니라 귀찮은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는 자녀를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은 두려운 것을 섬기는 법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보다 돈을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지배당하고 그것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에 내가 속하고 그것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주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향을 미치고 싶으면 내가 먼저 그것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주는 생명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디팩 초프라가 자녀에게 한 일이 이것입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먹고살 것은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먼저 평화를 주지 못하면 “너희는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평화가 집입니다. 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주인만이 그 집에 사는 이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진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평화가 없는 사람이 평화를 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풍랑에 죽기 직전이었던 사도들을 배 위에서 안심시키시며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 것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도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읍시다. 그러면 평화가 옵니다. 그 평화는 세상 어떤 것도 빼앗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차인표 씨는 모태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한 번만이라도 듣기를 원했습니다. 평화를 갈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돈 한 푼 안 받고 ‘지저스, 지저스’란 뮤지컬에서 예수님 역할을 무려 4년이나 했어도 그분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컴패션이란 단체에서 인도 콜카타에 봉사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함께 가는 사람들에게 시달릴까 봐 차인표 씨는 1등석을 타고 갔습니다. 왕처럼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것 자체가 이미 자기 평화는 자기가 책임져 하느님을 평화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도에 도착해서 목사님이 아이들을 안아주면서 “너희는 소중한 존재다. 너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라는 말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한 지저분한 아이가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런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소중한 존재다.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
그분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그분이 주시는 평화가 필요 없는 사람이었음을 그때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평화를 돈이나 명예, 사람들에게서 얻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 평화를 주시는 당신께 길들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도 평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못 됩니다.
평화를 줄 수 없으면 길들일 수 없습니다. 먼저 평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의 집에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 곧 죽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군가에게 평화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평화이신 분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평화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이웃을 평화가 필요한 사람으로 만듭시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의로움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K9u2SkA30c4
-조재형신부-
저는 아버지의 체질과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습니다. 아버지는 혈압이 높았고, 머리카락이 일직 하얗게 되었고, 치아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판단력이 좋았고, 결단력도 좋았습니다. 어머니는 혈압도 정상이고, 머리카락도 검었고, 치아가 좋았습니다. 어머니는 부드러웠고, 유순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체질과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사제가 되면서 아버지의 판단력과 결단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의 건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체질을 닮아서 혈압도 높았고, 머리카락도 하얗게 되었고, 치아도 좋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성격을 닮아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31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의 체질을 닮은 것도, 어머니의 성격을 닮은 것도 모두 감사 할 이라고 생각합니다.
혈압이 높기 때문에 건강에 유의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매일 걷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아직도 혈압은 높은 편이지만 건강에 큰 무리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염색을 했지만 코로나를 겪으면서 하얀 머리카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염색하는 번거로움도 없고, 하얀 머리카락도 나름 좋았습니다. 치아도 치과에 자주 다니고, 신경을 썼기 때문에 아직도 큰 이상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체질을 바꿀 수 없다면 잘 관리하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어머니의 성격을 닮은 것이 본당 생활에 도움이 되 때도 많았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가 다양하듯이 본당에서 지내면 다양한 은사를 지닌 분들이 있습니다.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끌고 가는 것도 좋겠지만 부드러움과 유순함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좋았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십자가는 세상의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십자가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뜻하지 않는 사고로 장애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도 있습니다. 나의 뜻과 나의 행동이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은데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데 가난한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직장을 가지고 싶은데 실직한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의 십자가는 원하지 않는 고통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모두 십자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지고 가신 십자가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이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연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고난의 잔을 기꺼이 마시려는 순명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은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에게 이러한 십자가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십자가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지혜의 십자가였습니다. 주변을 보면 구원의 십자가를 힘차게 지고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웃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십자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나에게도 십자가가 주어진다면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아래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이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평화를 빌어주고,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여라.”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바쳐야 할지 모릅니다. 병자를 고쳐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 세상이 주는 기쁨, 세상이 주는 행복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 명예, 권력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는 손을 움켜쥐고 나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손을 편다고 합니다. 내가 움켜쥐려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하면서 내가 놓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한 주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들은 각자 자기 고향이 있으면서도 마치 타향살이 나그네와 같이 삽니다!
-양승국신부-
복음선포 여행을 떠나는 72 제자들을 향해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이, 때로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사람이 일단 삼시 세끼 든든히 먹어줘야 복음을 선포하든 뭐든 할 텐데, 지갑에 단 몇십만 원이라도 있어야 장거리 여행길에 숙소도 잡고 씻기라도 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냥 맨땅에 헤딩하라 시니, 제자들입장에서 참으로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의 배경에는 하느님 나라 도래와 관련된 긴박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 그리고 공생활과 더불어 이제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과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목 빠지게 기다려왔던 인생 최고의 가치, 구세주 하느님께서 강생하셨고, 생명의 말씀이 시시각각으로 선포되고 있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냐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대상들,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대상들을 초스피드로 내려놓고,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긴박함과 시급함의 결론이 곧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인 것입니다.
2세기 중엽 한 익명의 신앙인에 의해 쓰인 글귀는 ‘진정한 나그네’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고향이 있으면서도 마치 타향살이 나그네와 같이 삽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만, 나그네와 같이 모든 것은 참아 받습니다. 타향 땅이 고향 같고 고향이 다 타향과 같습니다. 그들은 지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란 사명을 제자들을 부여하고 나서 세상으로 파견하십니다. 파견에 앞서 간단한 당부를 하시는데, 그 핵심이 어느 한 곳에 연연해하지 말고 ‘무심한 나그네’처럼 처신하라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복음선포에 매진하려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무소유’, ‘집착으로부터의 탈피’, ‘버림’, ‘떠남’을 강조하십니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보다 영원한 가치관, 보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대상, 그래서 인생과 목숨을 걸어 볼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작고 부차적인 것을 과감히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말씀의 선포와 기쁨과 '평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귀양살이 후에 있게 될 예루살렘의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곧 ‘평화와 위로’에 대한 선포라 할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이사 10,12-1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로운 창조를 입었음을 자랑하며, 주님의 ‘평화와 자비’를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
~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갈라 6,16-17)
그리고 복음 역시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선포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일흔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장면과 당부 말씀, 그리고 돌아온 제자들의 활동 보고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루카 10,2)
이 말씀은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곧 복음 선포의 시급성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먼저 필요한 것이 ‘기도’임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추수는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기를 명하십니다.
이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몸소 가시려는 곳으로 앞서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 10,3)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리 떼’가 없는 곳이나 ‘이리 떼’를 제거해 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화로운 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에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서 보내졌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요, 내가 파견된 곳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앞 장에서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권고하셨듯이, ‘하지 말 것’과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 어떤 안전장치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신발이 아니라 ‘주님의 신발’을 신고 걸으며,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짊어지고 다니며,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고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면서 먼저 축복의 인사를 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 함은 빈부귀천 없이 어느 집에든지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이요, 인사를 받으려 하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인사를 나누라는 말씀이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에서 오는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단지 서로 만날 때 주고받는 인사가 아니라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선물, 곧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표현이며 선물을 말합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단지 평화의 전달자만이 아니라 평화의 건설자, 평화를 이루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은 먹어라” 함은 참으로 혁명적인 발언입니다.
곧 ‘차려주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음식물에 대한 유다적 관습에 매여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방해 받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요, 일꾼으로서 정당한 삯을 마련해 줄 것이니 먹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함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이 소명(예언직)임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파견의 본질과 당부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곧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과 ‘주님께서 하시고자 한 일’을 깨달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며’, ‘먼저 신뢰하고 먼저 평화를 빌며’, ‘먼저 하느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파견 받은 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행위’에 앞서 먼저 ‘존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파견하신 분’을 섬기고 따르는 존재말입니다.
먼저 자신의 정체성과 신원을 알아야 그에 합당하게 그분이 ‘하라 하신 일’을 하고 ‘하지 말라 하신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두 번째 부분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마치고 돌아온 일흔두 제자의 기쁨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기뻐하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루카 10,20)
이는 전교 활동의 성공에 대한 기쁨보다도 하늘의 영광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십니다.
사실 사탄을 번갯불처럼 하늘에서 떨어지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선물들은 개인적 고양이나 특권의 동기가 되기보다 공동 이익을 위해 베푸시는 주님께 대한 감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 10,3)
주님!
이리 떼에 둘러싸인다 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허리에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주머니를 차게 하시고,
등에는 여행보따리가 아니라 믿음의 보따리를 지게 하시고,
발에는 신발이 아니라 희망을 등불로 삼고 당신께만 의탁하게 하소서!
길에서 인사하느라 서성거리지 않고,
오로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따름이 오로지 저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 2)
-한상우신부-
곡식은 계절을
탓하지 않는다.
영글어가는
실천으로
계절을
따른다.
기도도 실천이고
일꾼들도 실천이다.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과 확신이다.
일꾼들은
가슴 설레는
새로운
일들을 통해
희망찬 기쁨을
몸소 체험한다.
진정한 삶의
가르침을
파견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전달하시는
주님이시다.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듯
예수님을
따르면서
공동체의
시각이 다시
열리게 된다.
만남의 깊이는
따름의 깊이이며
공동체의 깊이로
이어진다.
몸소 체험하는
것보다
더 힘찬 것은
없다.
파견의
시작과
돌아옴의
봉헌에는
삶의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중심이
되어 주신다.
변화의
이 모든 여정에
함께 하신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 지를
우리들에게 몸소
제시하여 주신다.
제자들의
마음에
빛을 주시고
제자들의
생활에
따르는 기쁨과
보람을 알맞게
베풀어 주신다.
기도에서
기도로
실천에서
실천으로
전달되는
일꾼들의 참된
정체성이다.
실천 없는
정체성은
언제나
요란하다.
파견은
실천으로
결정된다.
소유가 아니라
기도이다.
기도는
전적으로
주님께
맡겨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다.
좋으신
주님 안에
좋은 제자들이
뒤를 따른다.
기도로
영글어가는
제자들이다.
기도하는
주일이다.
말씀 나누기 - 연중 제14주일-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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