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7월 4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2. 7. 4. 09:06

 2022 7 4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마태오 9,18-26)

 

"Courage, daughter! 
Your faith has save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아내로 삼으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혈루증을 앓는 여자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하시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어 그의 죽은 딸을 일으키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기 삶에 대해 100%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변화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변화는 과연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거의 모든 이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변화라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변화가 어렵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은 사실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특별한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보다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반드시 해낸다’라는 생각을 무의식 속에 설정해놓고 집중하는 사람만이 변화를 가능한 것으로 이루게 됩니다.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생각으로는 자신의 원하는 것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또 상상만 해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체화해나갈 때 조금 더 변화에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마음보다는 의심과 불신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자기 변화에서 더 멀어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믿음을 갖춘 사람이 아닐까요? 실제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주님께서 대한 긍정적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의심과 불신으로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딸이 죽었는데, 와서 손을 얹으시면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다인들은 종종 다른 이의 머리에 양손을 얹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 경우 보통 ‘손’이 복수로 쓰입니다(양손이니까요). 그러나 여기에서는 복수가 아닌 단수로 쓰입니다. 단수로 사용할 때는 예수님의 카리스마적인 행동과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즉, 회당장이 손을 얹어 달라는 것은 단순히 의식적인 행위가 아닌,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주어져서 살아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믿음을 통해 회당장의 딸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 역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믿음이 그의 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입으로 믿는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생각만으로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회당장과 같이 예수님을 찾아가야 하며, 혈루증을 앓던 여자처럼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려는 용기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믿음을 통해 진짜 자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느님이 함께하신 기억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교황 베네딕토 16세).

 죽은 소녀가 살아나고 앓던 여인은 치유받고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ti2Wj85uXmY

 -조재형신부-

 

병원 예약이 있어서 지하철을 탔습니다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내려서 옆에 있는 지하철로 옮겨갔습니다저도 덩달아 옆에 있는 지하철로 갔습니다나중에 보니 옮겨 탄 지하철은 급행이었습니다맨해튼까지 빨리 가려는 사람들은 당연히 급행으로 옮겨 탔습니다그런데 제가 가려는 병원은 완행 노선에 있었습니다저는 제가 내려할 역을 놓치고 6정거장 더 간 후에 다시 완행으로 바꿔 타고 병원으로 갔습니다제가 가야할 곳을 지나치는 것은 급행이라도 제게는 소용이 없었습니다돌아보면 부화뇌동한 적이 많았습니다필요 없는 지출을 한 적도 있습니다아까운 시간을 허비한 적도 있습니다지나친 음주로 다음 날 힘들었던 적도 있습니다그래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군자는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고소인은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

 

성서에 보면 부화뇌동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모세가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으러 갈 때입니다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그 앞에 절하였습니다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습니다모세는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었습니다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쳤던 군중들이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그랬습니다.” 부화뇌동하지 않고 화이부동 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예수님을 따랐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당당하게 빌라도에게 갔습니다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을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무덤에 모셨습니다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과는 달리 주님이 묻혀있던 무덤으로 갔습니다그리고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미는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습니다따뜻하게 잡아 주셨습니다자비를 청하였던 소경이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들것에 실려 온 중풍병자가 일어나서 걸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이방인 여인의 간청을 들어 주셨고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오늘 복음에서 하혈하던 여인은 단지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그것만으로도 하혈이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용기를 내어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처럼 주님께 의탁하면 좋겠습니다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자비를 청했던 소경처럼 주님께 자비를 청하면 좋겠습니다우리들 또한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면 좋겠습니다밤하늘이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주님이 말씀하신다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뿐입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모든 희망이 무너져 버린 참담한 순간입니다.

 

또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은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느라 고생하였지만, 가진 것마저 모두 탕진해 자포자기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바로 이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이 순간, 하염없이 넘어지는 이 순간이 그들에게는 더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의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이 그를 더 깊은 믿음으로 이끄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혈루증 여인도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믿었지만, 사실 그들의 믿음은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언뜻 보기에는 미신적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주술적이고 마술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미 죽은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회당 장의 믿음 역시 억지 부리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짓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실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습니다.”

 

바로 이 순간 주님을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의 옷깃을 만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만약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한 까닭일 것입니다.

베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의심과 이중성으로 주님께 다가가기 때문에 만져도 만져지지 못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거나, 예수님이 손을 얹어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곧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줍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이 끝까지 믿고, 오로지 예수님께만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전능한 손길에 우리의 손을 맡겨드려야 할 일입니다.

믿음의 손으로 그분의 옷을 부여잡고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우리들 안에 흘러들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마태 9,18)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마태 9, 25)

-한상우신부-


모든 치유의
시작에는
소통이 있다.

먼저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이시다.

소통하는 법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신다.

믿음은
소통의
본질이다.

성장할 때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믿음을
지켜주고 있다.

아버지의
올바른 믿음은
딸 이야기를
제대로 듣는
경청이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신다.

간절함과
간절함의
만남이 참된
치유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더 간절하시다.

예수님의
간절함은
관점의 변화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관점의 변화가
치유이다.

믿음에 눈뜨는
시간이다.

믿음과 치유는
시점을 바꾸는
우리들 관계의
새로운 시도이다.

자고 있는
우리를
깨우시는
예수님이시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4주 월요일-주님의 청혼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7월 6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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