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6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마태오 10,1-7)
Jesus summoned his Twelve disciples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unclean spirits to drive them out
and to cure every disease
and every illnes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은 죗값을 치러야 하고 사마리아는 망하리라고 하며,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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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제 위의 형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집 옆에 다리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근처를 가면 꼭 다리 밑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혹시 나의 진짜 부모님이 계시지 않을까 싶어서였지요.
다리 밑에서 주워 온 ‘나’라는 말을 계속 믿게 되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형, 누나들과 저는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힘도 약하고, 운동도 못하고, 그림도 잘 그리지 못하고…. 그 밖에도 못 하는 것투성이인 저와 달리 형, 누나들은 모든 것을 잘했습니다. 그래서 진짜로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어려서 못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어느 날, 어머니 친구분이 집에 놀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고는 제 위의 형과 쌍둥이냐고 묻습니다.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이 말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다리 밑에서 주워 온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부정적인 이유만을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통해 긍정적인 생각을 전혀 떠오르지 못하게 합니다.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없이 이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을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불가능한 이유를 찾는다면 계속해서 찾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파견 명령을 받아들여서 전교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공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믿었기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만 긍정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대시하는 지방에 가지 말고 우선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고 하시지요. 사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민족과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이 어떤 곳인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곳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반대편에 있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기쁜 소식인 복음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굳게 믿은 제자들이 성공적인 전교 여행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호세 10,12)라고 하시지요. 부정적인 생각으로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닌, 지금 당장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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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믕화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QoAkw1W3n_4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RFVaK0pAQlQ
조재형신부-
지난 교구 사제모임 때입니다. 20명의 사제들이 제대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 후에 신부님들의 소임지와 이름을 소개하였습니다. 신자분들에게 유독 박수를 많이 받았던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남미에서 선교하는 신부님들을 소개할 때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곳에서 사목을 하기 때문입니다. 신부님들은 한국에서의 사목을 포기하고 먼 남미에서의 사목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한 신부님도 신자분들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신부님께서는 8년 동안 그곳에서 사목했었기 때문입니다. 신자분들과 동고동락을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듯이 신자분들과 함께 지금의 새 성전을 신축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곳에서 2달 동안 미사를 도와 준 적이 있었습니다. 아는 분들이 있었기에 마음이 편했습니다. 20명의 사제들은 주교님의 강복을 받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사울은 전쟁터에서 승리한 다윗을 향해 박수를 보내는 백성들을 보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승리를 축하하는 마음보다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렇게 사울의 마음에는 질투와 시기가 들어왔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질투해서 죽였던 것처럼 사울도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마음을 열고 다윗을 받아들였다면, 백성들과 함께 다윗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느님의 축복 속에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지금 있는 본당신부님은 모든 행사를 차질 없이 준비해 주었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신자들과 회포를 풀고, 주일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겨울과 봄이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겨울은 봄에게 새로운 자리를 내어주고, 봄은 가는 겨울에게 수고했다고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전임과 후임도 그렇게 아름다운 만남을 가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르신 12명의 제자들의 이름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병자를 고쳐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모든 사제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 또한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쫓아내야 할 마귀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태함입니다. 불의와 맞서지 않고 타협하려는 비겁함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신뢰하지 못하고 숨으려고 하는 열등감입니다. 우리가 고쳐주어야 하는 병자는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입니다. 자본과 성공이라는 ‘늪’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은 예수님께서 전한 하느님나라입니다.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삶으로 실천할 때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마귀를 쫓아낸 자리에, 병자를 고쳐준 자리에 정의를 뿌리는 것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고, 하느님나라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이영근신부-
오늘부터 우리가 듣게 되는 말씀은 마태복음의 다섯 개의 설교모음집 중에 두 번째에 해당하는 제10장의 '파견 설교'입니다.
앞 장면에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37)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당신의 일꾼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사도로서의 권위와 힘을 부여해주십니다.
곧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이는 제자들의 권위와 능력이 그들 자신들이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온 것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요,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징표가 됩니다.
이제 제자들은 단지 예수님만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 스승과 하늘나라를 증거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특별한 이들, 곧 사도가 된 것입니다.
이는 여기 모인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들이지만 동시에 예수님께로부터 파견 받았다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소명을 부여받은 특별한 이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마태 10,5-6)
복음전도의 대상을 이스라엘로 제한한 이러한 사실은 민족적 편견이나 영원히 지켜져야 할 지침이 아니라, 복음이 하느님의 경륜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아직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된 것은 사도행전에 따르면, 스테파노가 순교한 후라 할 수 있습니다(사도 11,19-20).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하시니, 우리는 먼저 내 곁에 있는 우리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이 누구인지를 찾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인 것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선포되고, 하늘나라가 '우리 안에' 흘러넘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분의 나라, 그분의 지배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그분의 제자요 사도임을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그리하여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이 선포됩니다.
‘가까이 왔다.’라는 말의 원어의 뜻은 ‘주먹 안에 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하늘나라가 이미 너희 안에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선물로 주어진 나라요, 동시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협조를 통하여 함께 이루어나가는 나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나라를 우리 안에서 발견하고, 또 실현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약속을 기억하라」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았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삶의 자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처지,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서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자매의 부르심에 대한 묵상글을 적어봅니다.
나를 부르신 주님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부르셨는데
파아란 잔디 위에서도
잔잔한 호숫가에서도
때로는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저무는 낙조의 여울 속에서도
그분은 밤낮없이 부르고 손짓하셨는데도….
스쳐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노도와 같은 파도 속에서도
당신의 손길 속으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셨는데도…
나는 외면하고 뒤돌아서며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분은 조금도 섭섭해 하거나 노여워하지도 않으셨으며
끊임없이 기다려 주셨고
내가 방황의 끝자락에서 지치고
좌절과 절망 속에 일어설 수 없어 누워 있을 때에
그분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주시며
“나다, 일어나거라. 나와 함께 가자.” 하고 나를 일으켜 주신 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그 한 말씀으로
내 온 생애의 모든 어둠과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이라는 한 말씀으로 죽음의 긴 터널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신 내 사랑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우선 하기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복음은 바로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부르심과 응답』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마르코복음을 보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3,13).
요한복음에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5,16).
이 표현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로 ‘사도단’을 구성하신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먼저 ‘주님의 부르심’이 있고, ‘인간의 응답’은 나중입니다.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주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먼저 하십니다.
열두 사도는 주님께서 특별히 뽑으신 사람들입니다.
“......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예수님께서 어떤 기준으로 열두 사도를 뽑으셨는지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아마도 믿음, 사랑, 열성, 충성심 등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앞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뭔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하고 뛰어난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들의 직업이나 경력 등만 보고서
그들을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나자렛이라는 시골의 가난한 목수’로만
생각하는 것과 같은,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더러운 영들’(마귀들)에 대한 권한을 주신 것은,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 권한과 힘으로 많은 마귀를 쫓아냈습니다(마르 6,13).
그런데 그랬던 사도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일이
생긴 적이 있습니다(마르 9,18).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마태 17,20).”,
또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권한을 주신 일은, 아주 넘겨주신 일이 아니라,
‘위임’하신 일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대리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한을 행사해야 합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자기의 권한이라고 착각해서 교만해지면,
권한 자체의 힘을 잃게 됩니다.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마귀들과 악의 세력들에 맞서 싸워서
그것들을 물리치는 임무를 맡기셨고,
또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임무를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임무는 교회 전체의 임무입니다.
교회는 마귀들과 악의 세력들에 맞서 싸워야 하고,
그것들을 물리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또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해서 세상과 상관없이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ㄴ-5).”
여기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말은 뽑으셨다는 말이기도 한데,
뽑지 않고 버린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과 구원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특별히 선택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고, 응답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버림받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신앙과 구원으로 부르신다고 해서 그 부르심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특별함이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일을 각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나’를 부르시는 일입니다.
주님 앞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입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부르심’의 목적도 ‘나의 구원’이고, ‘응답’의 목적도 ‘나의 구원’입니다.
사도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사도 직무 수행의 일차적인 목적은 바로 그들 자신들의 구원입니다.>
신앙인들의 충실한 신앙생활에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과
희생과 사랑 실천도 포함됩니다.
교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아서 봉사하는 것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나는 직책 같은 것은 맡고 싶지 않다. 그냥 조용히 신앙생활만 하고 싶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절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공동체와 상관없이 그냥 혼자서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것이
왜 잘못이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스스로 혼자 고립되어 있는 상태로는 사랑 실천을 할 수 없고,
사랑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일은 ‘공동체’를 통해서, 즉 ‘사랑’을 통해서
구원에 도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4주 수요일-안에서부터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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