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오 9,14-17)
People do not put new wine into old wineskins.
Otherwise the skins burst, the wine spills out,
and the skins are ruined.
Rather, they pour new wine into fresh wineskins,
and both are pres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야곱은 어머니 레베카의 도움으로 아버지 이사악이 맏아들인 에사우에게 내리려던 축복을 받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당신 제자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하시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형제님으로부터 “이번에는 다이어트에 성공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종합검진을 받은 뒤, 체중을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 메시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선언하신 것이지요. 저는 다이어트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곧바로 1년 치 헬스장 이용권을 끊었지요.”
건강에 대한 경고 때문에 열심히 하겠지만, 사실 헬스장 이용권을 끊어놓고도 1년 동안 몇 차례 가지 않는 분을 너무 많이 봤었습니다.
꿈이나 목표는 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은 하지 않고 성과만 기대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영어로 대화하고 싶다고 하면서, 영어책만 사놓고 영어 공부는 전혀 하지 않는 경우도 알고 있습니다. 취미를 살려 사업을 시작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관련 조사는 전혀 하지 않는 경우는 어떨까요?
신앙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열심한 신앙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세상일에만 관심이 있고 주님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면 어떨까요?
실행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계속 미루기만 하는 우리의 게으름을 몰아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작은 실천이라도 성과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게으름이 습관화되지 않고, 어떻게든 행동하려는 의지가 나의 소중한 습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단식에 관해 질문합니다. 즉, 자기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예수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는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단식은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식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 변질했습니다. 율법에 나와 있으니 하는 것이지, 결코 하느님 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장차 올 하느님 나라의 기쁨에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새 모습으로 복음을 들고 오셨습니다. 그에 반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헌 것이라 할 수 있는 과거의 율법에 매여있습니다. 어떤 것이 하느님 뜻인지를 또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율법을 무조건 따르면 그만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앞서 헬스장 이용권을 끊었다고 다이어트가 되지 않는 것처럼, 율법을 무조건 따른다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랑의 실천만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도 얻게 됩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전구자이시며 보호자이신 성모 마리아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NSee3Sz52mk
-조재형신부-
교구 사제 모임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친교를 위해서 관광과 운동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와 미사가 있었습니다. 주체한 본당 공동체의 교우들과 미사를 하였고 맛있는 식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이번 교구 모임의 프로그램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시노드의 여정을 함께한 것이었습니다. 두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질문에 응답하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눌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교회의 공동체는 함께 걷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교회의 구조와 제도 속에서 사제가 교우들과 함께 걷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응답도 있었습니다. 사제가 결정하면 신자들은 따른다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5년 있다가 떠나는 교포사목의 사제는 언어 문제도 있고, 현지 적응의 문제도 있기에 함께 가기 보다는 따라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350년 된 성당에서 선교하는 신부님은 꾸준히 신자들과 함께 하니 나중에는 신자들이 마음을 열고 본당의 열쇠를 신부님께 맡겼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함께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신부님의 의견도 있었습니다. 교구 사제들이 함께 만나서 친교를 나누니 힘이 난다는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선택적으로 함께 걷고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 성 소수자, 장애인, 혼인 조당자, 낙태한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부유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건강한 사람, 봉사하는 사람들과 주로 함께 걷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이 함께할 공간이 없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세리, 죄인, 장애인, 이방인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면 교회가 함께 걷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독선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함께 걷기 위해서는 제도와 역할을 분명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의 역할, 보좌 신부의 역할, 수도자의 역할, 신자들의 역할을 규정하고 교회는 그런 역할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신앙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다면 가족이 따로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와 함께 걷고 있는지, 나는 가족들과 함께 걷고 있는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함께 걷기 위해서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가?’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성령의 이끄심을 많이 체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선교 사제들은 함께하는 데는 언어가 중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언어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교우들은 사제들을 위해서 더 가까이 했다고 합니다. 성당에 전등이 나가서 걱정하면 누군가 전등을 교체해 주었다고 합니다. 성당에 누수가 있어서 걱정하면 누군가 고쳐주었다고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문홍보를 갈 수 없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새로운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3달 동안 사제가 없는 성당에서 미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2년 가까이 미사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는 것 같았지만 저 역시 공동체와 함께 하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잘 느끼지 못하지만 태양은 언제나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공기가 있기에 우리는 숨 쉴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면 성령께서 늘 곁에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성직자, 수도자, 교우들이 함께 걷는 것이 새 포도주입니다. 권위와 독선으로 혼자 걷는 것은 낡은 포도주입니다. 타성에 젖어서 현실에 안주 하는 것은 낡은 포도주입니다. 무관심으로 공동체의 어려움을 방관하는 것 또한 낡은 포도주입니다. 새 포도주는 어려움과 갈등이 있을지라도 함께 걷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깊은 연민을 갖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늘 감사하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 언제나 기뻐하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것이 새 부대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느끼며 함께 걷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상처와 회복
-양승국신부-
나이 들어갈수록 시가 점점 좋아집니다. 언제나 상처와 상처의 극복, 그리고 희망을 노래하시는 박두순 시인의 ‘상처’라는 시가 오늘따라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무줄기를 따라가 보면
상처 없는 나무가 없다.
그렇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눈보라에 시달리지 않는 나무가 어디 있겠는가.
흔들린 만큼 시달린 만큼
높이와 깊이를 가지는 상처
상처를 믿고 맘 놓고 새들이 집을 짓는다.
상처를 믿고 꽃들이 밝게 마을을 이룬다.
큰 상처일수록
큰 안식처가 된다.
‘꽃을 보려면’이라는 시는 또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모릅니다.
채송화 그 낮은 꽃을 보려면
그 앞에서 고개 숙여야 한다
그 앞에서 무릎도 꿇어야 한다
삶의 꽃도 무릎을 꿇어야 보인다.
‘burnout’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거듭되는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심신의 탈진상태를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이 burnout 증후군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신체적, 정서적극도의 피로감은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 직무 거부로 연결됩니다. 마치 연료가 다 타버린 것처럼 갑자기 일할 의욕을 잃고 업무에 적응할 수 없게 되는 현상입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기’입니다. 때로 죽도록 집착하고 갖은 애를 쓰며 견뎌내는 대신 그냥 한 걸음 ‘쓱’ 옆으로 비켜서는 것이 의외의 좋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때로 옆으로 비켜선다는 것, 놓아버린다는 것, 참으로 자존심상하는 일이며, 어려운 일이지만 어차피 우리네 삶이란 것은 ‘놓아버리기’의 연속입니다. 일, 명예, 돈, 사람, 관계, 욕심, 자리...
사실 우리가 그토록 목숨을 걸고, 또 절대적인 것이라고 여기던 것들도 사실 그리 오랜 세월 지나지 않아 상대적이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진정한 새로움을 발견하고 싶다면, 인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를 원한다면 잔뜩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려야만 합니다.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섬을 통해 우리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움 중의 새로움이신 예수님, 너무나 ‘특별하신’ 예수님이시기에 그분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한다면 가급적 많이 비워내야만 합니다.
기존의 인생관, 과거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인간적 가치들, 변화무쌍한, 그래서 세월의 흐름 앞에 어쩔 수 없이 빛을 바래가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이탈시키면 시킬수록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 더 많이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결국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더 크게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지금보다 자세를 훨씬 더 많이 낮춰야만 합니다. 겸손의 덕으로 우리의 온 몸과 마음을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미래지향적인 삶」
-반영억신부-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하지만 과거의 허물이 또는 옛 생각이 오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기 위해서는 오늘에 충직해야 하고, 오늘에 충실한다는 것은 희망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만큼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오늘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옛 것에 매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늘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마음 써야 합니다. 껍데기에 치중한 삶이었다면 알맹이를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스승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사실 단식은 그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 것은 밥을 굶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식할 합당할 이유가 있어서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식을 한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잔칫집에서는 함께 웃고 축하하는 것이요, 상가에서는 함께 울고 슬픔을 나누면 됩니다.
슬픈 일이 생기고, 새 삶의 시작을 위해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웃과의 나눔을 위해서라면 단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을 통해 새 생활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에페4,22-23).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흔히 말하는 다이어트와는 분명 다릅니다. 단식의 정신은 주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를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분별없이 외적인 형식에 매여 단식을 논하였습니다. 형식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내용이 중요하고 지향하고 있는 바는 더 소중합니다. 누구 마음에 들기 위해서 단식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에 악에 대해서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침묵 중에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말씀하시면서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씀은 사랑이요 자비이고 용서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은 심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구원됩니다. 만일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저는 단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그분에 의한 단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내리는 단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2013년 3월 29일 콜로세오 십자가의 길에서 행한 연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 17)
-한상우신부-
새 부대가
새 포도주를
지킨다.
우리의
일상 안으로
들어오신
새 포도주이시다.
비우지 않고서는
채울 수 없는
새 포도주이다.
채우지 말아야
할 것을 가득
채우고 산
어리석은
지난 시간들이다.
담아야 할 것을
담지 못했다.
다시 찾고
다시 비워야 할
우리들
새 마음이다.
어제의 부대를
내려놓는
새 마음이다.
새 포도주로
사는
새 부대의
새로워진
삶이다.
새 포도주를
담는
가장 좋은
오늘이다.
새 포도주를
우리에게
주셨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다.
예수님을
따라야
둘 다 보존되고
둘 다 함께
깊어질 수 있는
사랑의 삶이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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