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베드로 사도는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수에 인접한 벳사이다 출신으로 본이름은 시몬이다.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어부 생활을 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베드로(반석)로 바꾸시고, 그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삼으셨다. 복음서에 소개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소박하고 단순하다.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여 칭찬받기도 하고, 예수님의 수난을 반대하다가 심한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로마 교회의 첫 주교로서 첫 번째 교황이기도 한 베드로 사도는, 67년 무렵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제자와는 달리, 비교적 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열성적으로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뒤 유다교에서 개종하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이 사는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웠다. 그 공동체들에 보낸 많은 서간이 오늘날 『성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67년 무렵 로마에서 참수되었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오 16,13-19)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헤로데 임금이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지만, 천사가 나타나 그를 빼내 준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티모테오에게 고백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시자, 베드로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한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두 달 전, 5년 동안 써왔던 스마트폰을 교체했습니다. 더 쓸 수도 있었지만, 오래되어서인지 배터리도 금방 방전되었고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느려졌다는 것도 교체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마트폰 교체를 오랫동안 망설였던 진짜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자료들을 옮길 생각을 하니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료 옮기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몇 번의 클릭만으로 전에 있었던 모든 자료를 다 옮길 수 있었습니다. 기술의 발전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대로 옮겨졌나를 확인하다가 사진첩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참 많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찍은 사진이 없는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이 1월에 찍은 것이었습니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데도 말입니다.
보통 사진을 언제 찍을까요? 아마 기쁨과 설렘을 선사하는 풍경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몇 달 동안은 기쁨과 설렘이 없었다는 것이 아닐까요? 기쁨과 설렘을 가지고 풍경이나 사물을 보지 않았으니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쁨과 설렘은 다른 이의 것이 아니라 나만의 감정입니다. 따라서 그런 감정을 가지려 노력하고, 그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나만의 기쁨과 설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쁨과 설렘을 통해 우리는 행복한 나를 만들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모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으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요? 주님을 기쁨과 설렘의 감정으로 계속해서 만나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바오로는 당시 유능한 젊은이였습니다.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유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미래는 확실히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 회개한 뒤에 세상의 것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주님께 의지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열심히 신앙을 전파합니다.
베드로는 바오로처럼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서 아주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교회의 반석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지요.
이렇게 세상의 것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안에서 기쁨과 설렘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감정으로 주님과 함께했기에 하늘의 커다란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쁨과 설렘보다 슬픔과 무엇인가를 바라는 욕심이라는 감정으로 주님을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하느님 나라에 속한 이들이 보여주어야 하는 표징은?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f8H_JM4nQOQ
베드로와 바오로, 교회의 주춧돌 사도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o7nSUqvw6YY
-조재형신부-
1980년대에 ‘홍콩영화’를 많이 봤습니다. 그중에 ‘영웅본색’은 으뜸이었습니다. 동생은 경찰이었고, 형은 암흑가에서 활약하는 조폭이었습니다. 동생과 형은 더 큰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 비슷한 영화가 나왔습니다. ‘첩혈쌍웅’입니다. 암흑가에서 활약하는 킬러와 정의를 실현하는 형사의 이야기입니다. 형사는 사람냄새가 나는 킬러에게 매력을 느낍니다. 킬러는 자신 때문에 눈이 먼 여인을 위해서 자신의 안구를 기증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킬러와 형사는 더 큰 악을 물리친다는 이야기입니다. 1980년대에 한국은 군사 독재의 시대였습니다. 그런 어두운 시대에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했던 영웅본색, 첩혈쌍웅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김영삼과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의회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하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해외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첫 번째 문민정부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IMF'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남, 북 정상회담을 개최하였습니다. 두 분 모두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한 큰 별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영웅본색, 첩혈쌍웅이 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입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 야단을 맞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야 할 길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고 가겠다고 했지만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3번 물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한 번의 설교로 3,000명이 넘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갔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독실한 유대인이었고, 바리사이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가 죽을 때 박해자들의 편에 있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야!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선교여행을 다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서간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위로를 주었습니다. 때로는 엄하게 야단을 쳤고,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위험도, 칼도, 두려움도, 박해도, 천신도, 악신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놓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 신학의 ‘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들 또한 말과 행동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 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되었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다양한 측면의 결핍과 인간적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를 수제자로 발탁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거듭 실수하고, 불충실했으며,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스승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을 잘못을 성찰하고 뉘우칠 줄 아는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되돌이킬 수 없이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 와중에도 가슴 치며 주님께로 시선을 되돌리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며 돌아설 줄 아는 용기,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런 솔직함과 겸손함 위에 또 다른 한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니, 스승님의 정체성에 대한 명료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 사도는 지체 없이 대답하는데, 예수님께서 그토록 바라셨던 정답이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 복음 16장 15절)
이런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선물과 은총을 베푸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오 복음 16장 18~19절)
하느님 섭리의 손길은 참으로 오묘하십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길로 사도 바오로를 이끄십니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낙마와 실명을 한 후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간 상태에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행전 26장 14절)
온몸으로 생생하게 예수님을 체험한 사울은 이름도 바오로로 바꾸지만, 삶도 180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가 그토록 박해했던 예수님을 위해 지닌 모든 에너지와 모든 열정, 삶 전체를 바쳐 사랑합니다. 그가 얼마나 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빠져버렸는지는 서간 여러 곳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장 20절)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서 14장 8절)
“나에게는 그리스도의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리피 1장 21절)
바오로 사도는 다그치는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외침에 언제나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분의 강한 요구에 매일 ‘예’라고 응답하며 평생에 걸친 목숨 건 전도 여행에 나섰던 것입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이 두 분은 예수님께서 특별한 직무를 맡기신 으뜸 사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베드로는 교회의 ‘주춧돌’로 삼으셨고,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주님께서 베드로를 감옥에 갇혀있는 베드로를 빼내주시고 보호해주시며,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를 주님께서 바오로 사자의 굴에서 구출해주시고 굳세게 해 주십니다.
복음에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는 교회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먼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이렇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 16,16)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으로 그리스도의 신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예언자들이 보증해 왔던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인 것만이 아니라,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는 베드로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밝혀주고 알려주신 계시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것을 베드로에게 알려주셨다.'(마태 16,17)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곧 교회는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
이는 반석 위에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이 교회가 이 세상 끝 날까지 지탱해 나갈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6,19)
여기에 또 하나의 놀라운 신비가 있으니 그것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권한을 통해 드러난 교회의 신비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특별한 권한이 그에게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 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곧 '매고 푸는' 권한을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 준다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인 것입니다.
이토록 베드로 안에서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하늘이 활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모두가 용서를 하면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우리 안에서 하늘이 열리게 됩니다.
곧 내 안에 하느님 나라가 열리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제 형제를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제 형제를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
-반영억신부-
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께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베드로, 바오로성인의 삶을 본받고 복음전파의 열정에 목말라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모든 사람이 갈망하던 하느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구세주(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 기름부음 받은 사람)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백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나도 당신의 길을 가겠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안다는 것은 곧 내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확실히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하였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환시를 통해 “너는 누구냐?” 는 한 소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예수의 데레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꼬마에게 묻습니다. “너는 구구냐?” 그에 대한 소년의 대답은 “데레사의 예수다.”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그리고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화답해 주실까요? 베드로 첫째 편지 4장12절이하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을 시험하려는 것이니 무슨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때에 기뻐서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이 여러분에게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달라도 너무 다른 분이었습니다. 출신부터가 베드로는 배움이 부족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바리사이파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을 위해, 바오로는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두 역할이 합하여져 모든 민족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함께 협력하며 교회의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성향을 충분히 존중하시며 당신 구원사업을 완성하십니다.
바오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헤치며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도였으며 스승 가말리엘 밑에서 제대로 된 신앙수업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많은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체계화하신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 덕에 이방인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흔들림 없는 신앙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하고 말한 그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어 주시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7). 하셨습니다. 세 번의 배반을 세 번의 사랑으로 감싸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함께했었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봉자였던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말합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4,6-8).
베드로, 바오로! 그들은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는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느님 안에서 노력했고 어려움 중에서도 희망을 찾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열정을 가진 신앙인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하며 도대체 나에게 주님은 어떤 존재인가? 묻고,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2,20-21.29).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2,14).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반석, 걸림돌』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5-19)”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반석으로 삼아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일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와 허례허식에 빠져 있는, 즉 영적으로 죽어 있는
구약시대의 성전을 허물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3-24).”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외적으로만 예배를 드리던 예루살렘 성전 시대는 끝났고,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영적 성전’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0-22).”
신앙인의 공동체 자체가 성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에페 4,11-12).”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에페 4,15-16).”
예수님께서 ‘영적 성전’인 새로운 교회를 세우신 것은
‘모든 사람’을(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하나의 지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내가 성전이고, 내가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은,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라고 ‘임무’를 맡기신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신앙인은 사도들의 인도를 받아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동시에 각자 한 사람의 사도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일은 ‘온 삶’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그 자신도 하느님 나라로
못 들어가지만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문을 막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을 막아버리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큰 죄’가 됩니다.)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다는
예수님 말씀의 바로 뒤에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이 나옵니다.
두 말씀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교회의 반석이 되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은 일은 ‘권력’을 얻어 누리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말리다가 크게 혼나게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2-23)”
조금 전에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되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은 사도가
금방 ‘사탄, 걸림돌’이라고 혼나는 상황은 우리 눈에는 놀랍게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엄하게 꾸짖으셨지만,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을 취소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를 꾸짖으신 일을, 그가 사탄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또 그가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그를 지켜 주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돌이라도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면 반석이 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걸림돌이 됩니다.
<‘걸림돌’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일과 자기 자신이 구원받는 일을 모두 방해하기만 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모든 신앙인에게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가 걸림돌이 된 것은 아니고,
그는 걸림돌이 될 뻔 했지만, 충실한 반석으로서 살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걸림돌이 되어서 그렇게 끝나버렸습니다.)
말씀 나누기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신앙의 담금질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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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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