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2. 6. 30. 06:32

 2022 6 30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얘야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오 9,1-8)

 

 

"Courage,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가 아모스를 비난하자, 아모스는 자신이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던 사람으로 주님께 붙잡혀 예언자가 되었다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거듭 예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치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 심리학자가 다음과 같이 실험했습니다. 두 그룹으로 나눠서 첫 번째 그룹은 ‘일을 좋아한다.’, ‘자신감이 넘친다.’ 등의 긍정적인 말을 외우게 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허풍이 심하다.’, ‘거만하다’ 등의 부정적인 말을 외우게 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문장들을 다 외웠다는 생각이 들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만 들어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제시하는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평가하게 했습니다.


긍정적인 말을 외운 사람은 긍정적인 평가를 했습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말을 외운 사람은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가 긍정적인 사람, 부정적인 사람으로 나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이를 손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는 신부 중에 어떤 일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신부가 있습니다. 아마 늘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신부를 대부분 사람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쳐 달라고 중풍 병자를 데리고 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다른 것을 보십니다. 바로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그 누구도 고치지 못하는 중풍 병자이지만, 예수님만은 고쳐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뿐인데도 이를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긍정적으로 보시고는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병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과 정반대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이 자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 학자 몇 사람이지요. 그들은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을 가지고서,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확대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부정적인 생각이 가져왔던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믿음 없는 자로 만들 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으로 삼았지요. 그래서 이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심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확실한 사실을 보고도 믿지 않습니다.

믿음은 무조건 주님 곁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계속하면, 주님 곁으로 갈 수 없습니다. 계속된 의심과 불평불만만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안녕하십니까?
관심이란 곧, 나 아닌 타인에게 마음 한 자리를 내어주는 일입니다. 나 아닌 타인에게 내 시간을 내어 주고, 내 삶을 조금 나눠주는 일입니다(송정림).

 고해 성사를 부정하는 것이 어째서 '악한 생각"일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933YFOkuqcQ

 오늘 복음은 죄의 용서에 대한 논쟁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시며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라고 말씀하십니다. 

  

    병을 고치는 힘도 성령이시고 죄를 용서하는 힘도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러니 병에 대한 치유가 일어난다면 또한 죄 용서의 권한도 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교회에 부어주실 때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만 싹 빼고 주셨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모든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면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자기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고 믿으면 엄마는 아이를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실수하며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74회에 약한 엄마에게는 화를 내고 싫어하며 강한 아빠에게는 순종하는 금쪽이가 나왔습니다. 아빠는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당연히 아빠 편이기 때문에 금쪽이는 가족에서 왕따인 엄마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생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존 욕구보다 더 컸던 것은 엄마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아이는 어릴 때 할머니와 아빠가 너무 무서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 엄마는 금쪽이와 함께 있어 주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쪽이는 원망스러운 엄마를 뒤로하고 살기 위해 두려운 아빠와 할머니 편에 서야 했던 것입니다. 

     

    어쨌건 아빠가 엄마에게 자기 권한을 다 주지 않으면 아이는 비뚤어지게 됩니다. 순종할 수 없고 질서도 모르는 아이로 자라는 것입니다. 아빠에게 순종한다고 엄마를 막 대하는 이 아이가 커서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일단 자녀를 낳았으면 아내에게 모든 권한을 주고 남편은 빠져주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엄마를 무시하고 계속 아빠에게만 갈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이것 자체가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고해성사의 목적은 ‘순종’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순종할 줄 알면 성장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의 신랑인 그리스도는 신부인 교회에 당신 모든 권한을 맡기셨습니다. 그 권한을 ‘성령’을 통해 내어주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을 누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만 싹 빼고 성령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런 생각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이고 또한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악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빠의 파견자입니다. 파견할 때는 자신의 권한도 함께 줍니다. 엄마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어서 아빠에게 직접 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엄마만이 아니라 아빠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 자녀에 대한 자신의 모든 권한을 다 내어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그리스도께서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심하는 ‘악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아버지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음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마태 9,4)라고 말씀하십니다. 

  

    ‘개는 훌륭하다’에서 주인에게 입질하고 현관문까지 물어뜯는 영구가 나왔습니다. 영구는 보호자보다 자신이 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이제 와서 보호자가 영구를 길들이려 해도 잘되지 않습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먼저 자신이 영구를 제압합니다. 그리고 주인 옆에서 영구를 제압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되자 영구도 조금씩 주인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누군가를 순종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권한’입니다. 이 권한은 강 훈련사에게 있습니다. 강 훈련사는 자신의 이 권한을 주인들에게 줍니다. 주인들은 그 권한으로 개를 훈련시킵니다. 그렇게 영구는 순종하는 개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당신의 피로 우리 죄가 용서받습니다. 그러나 그 용서하는 권한을 교회에 이양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시기에 당신께 순종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것으로는 순종을 배우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할 때 진정으로 순종을 배운 것입니다. 고해성사도 이를 위한 하나의 권한입니다. 

    가르칠 때 한 번 정도 물렸을 때 그 개를 몰아붙일 수 있겠지만 또 용서하며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개가 성장합니다. 강 훈련사의 권위를 등에 업어야 순종을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그리스도의 권위를 등에 업고 신자들에게 죄를 용서해 주며 순종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이 ‘악한 생각’입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에게 자녀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부인 교회에게 다 내어주지 않는 비정한 남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녀가 진정한 순종을 배울 수 없게 됩니다. 권한이 이양된 이에게 순종할 수 있을 때 진정 순종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순종할 수 있을 때 아빠에게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부정하는 우리 안의 나쁜 생각을 빼어버립시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uh32aASQBMk

 -조재형신부-

 

3년 만에 교구 사제모임을 했습니다선교사제 6교포사목 사제 12유학사제 1미주가톨릭평화신문인 사제 1주교님 포함해서 21명이 모였습니다첫날 저녁기도를 마치고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마치 복음을 선포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신부님들은 모두 저마다의 소임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나누었습니다한국에 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해외에서 만나니 더욱 반갑고기뻤습니다페루콜롬비아과테말라에서 선교하는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복음의 기쁨을 알 수 있었습니다공소가 20개 있는 성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의 열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10월부터 눈이 오고 5월에야 꽃이 피는 알라스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의 용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전 세계를 멈추게 했던 코로나의 팬데믹도 신부님들에게는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축복하신 것처럼 주교님께서도 각자의 소임지로 돌아가는 사제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신부님들은 내년의 만남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하였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는 것과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사목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저는 본당 사목도 신문을 만드는 것도 다 좋은 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본당 사목은 신경 쓸 일이 많지만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사목의 기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신문을 만드는 것은 홍보를 다니는 부담은 있지만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보람이 있어서 좋습니다마치 우산장수와 짚신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의 마음과 같습니다비가 오면 짚신장수 아들이 걱정되고해가 나면 우산장수 아들이 걱정됩니다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모두 기쁨입니다비가 오면 우산장수 아들이 우산을 팔 수 있어서 기분이 좋고해가 나면 짚신장수 아들이 짚신을 팔아서 좋습니다본당 사목도신문을 만드는 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감사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마귀 들린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병자들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사람들은 구름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기도 하셨습니다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도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 것도 세상을 위한 것이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도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 것도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는 혼자서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동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평상에 들고 예수님께로 데려 왔습니다동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치유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작은 수고와 노력은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봉사자들의 마음을 보시고중풍병자를 고통에서 치유시켜 주셨습니다하느님의 사랑은 중풍병자를 평상에 들고 왔던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착한 이웃들을 생각합니다그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느님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하느님나라는 그런 이들 가운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우리의 몸은 밭과 같고그릇과 같다고 생각합니다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몸은 변화됩니다하느님의 말씀을 담고예수님의 가르침을 담는다면우리의 몸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살게 됩니다하지만 우리가 악한 것들을 담는다면 우리의 몸은 악한 기운에 의해서 이끌려지게 됩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기를 바라셨습니다.

 애야, 고생 많았다. 그 모진 세월 견디고 기다리느라 애썼다!

 -양승국신부-

 

평상에 뉘어’라는 표현을 통해 중풍 병자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잘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웬만한 중풍 병자들은 힘겹지만, 안간힘을 다해 홀로 걷고자 애를 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병자는 병세가 깊을 데로 깊어진 말기 중풍 환자였음이 확실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 고장 나고 AS를 받으러 부지런히 병원을 다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초기 증세라든지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 않으면 대체로 스스로의 힘으로, 아니면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을 가는데,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온 병자의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워 보입니다.

  

중증 중풍 병자의 하루는 어떠했을까요? 보통의 사람들은 기상 알람이 울리면 힘겹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는 기상 알람이 울려도 스스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워서 떡 먹기인 화장실 한번 가는 것이 세상 어렵습니다.

  

세수를 할 수 있나, 샤워를 할 수 있나? 매사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도움받는 것도 한두 번이지 도우미의 짜증이 하늘을 찌릅니다. 누군가가 밥 한 숟갈이라도 떠먹여 주면 감지덕지한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쫄쫄 굶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어 백방으로 노력해 보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이런 중풍 병자가 기적적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갖습니다. 측은지심의 주님께서 세상 가련한 그를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그를 눈여겨보시며 격려하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오 복음 9장 2절)

  

이어서 놀라운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일어나 내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오 복음 9장 6절)

  

우리도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중증 중풍병자 못지않은 심각한 고통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는 비참한 현실 앞에 서게 됩니다. 아무리 발버둥쳐 봐도 그물에 걸린 가련한 한 마리 물고기처럼 참혹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벽 앞에 서게 됩니다. 다 때려치고 싶은 순간, 모두 포기하고 싶은 순간...

  

그러나 결코 때려치거나 포기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하느님의 시계는 우리 인간의 시계보다 훨씬 더디게 때문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충분히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조금 더 기다려봐야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느 날 기적처럼 따스한 예수님의 손길이 내 혹독했던 삶을 어루만져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상 따뜻한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애야, 고생 많았다. 그 모진 세월 견디고 기다리느라 애썼다. 이제 고생 끝이니 안심하거라. 이제 나와 함께 새 삶을 한번 멋지게 살아보자꾸나.”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영근신부-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는 몸이 마비가 된 지라 제 발로 걸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하인의 중풍을 치유하셨듯이,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질병의 치유에 앞서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 9,2)

 

“애야.”하며 사랑스럽게 부르시며, 먼저 영혼을 치유하십니다.

이 엄청난 사실 앞에, 감히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죄의 용서’를 선포하신 이 사실 앞에, 아니 이 무뢰하고 불경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죄를 용서받았다.”고 누가 선언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말입니다.

 

히에리무스는 말합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중풍병자가 용서받았는지는 용서하실 수 있는 오직 한 분만이 확실히 아십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마태 9,6)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당신이 용서권자요 하느님이심을 직접 드러내시며, 당신의 권한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의 치유를 보여주십니다.

곧 영적 표징의 증거를 위한 육체적 표징을 보여주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태 9,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가 평상을 가지고 가게 함으로써 육신이 병과 고통에서 벗어났음을 똑똑히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중풍병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이 아담의 죄로 떨어져 나온 낙원으로 가는 길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힐라리우스).

 

이렇게 하느님이신 당신께서 영혼과 육신 모두의 창조주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영혼과 육신의 마비 모두를 고쳐주십니다.

그리하여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마태 9,8)

 

그렇습니다.

용서는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셨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태 9,6)

 

주님!

당신께서는 치유 받은 이에게 평상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으나 평상을 가지고 가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의 상처를 가지고 가셨듯이, 구원의 표시로 들고 가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이 흘러나오는 그 상처를 더 이상은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그 구원의 샘에서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픈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평상이 되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신다」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중풍병자는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죽음에 직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생명과 활력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병의 근원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주셨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인을 다스리는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견지망월)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이지 병의 치유가 모두는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만남을 위해서 그분께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과 사랑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실 중풍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하기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 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 내가 죄인이라서 벌을 받는구나. 또는 내가 못나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 하고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외부에서 오는 위기인지 아니면 연약한 내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책’을 생각합니다. ‘주책’ 아시죠? 주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으로 산다. 마음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송영진신부-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2-8).”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증언이고 신앙고백입니다.

‘그들의 믿음’이라는 말에서 ‘그들’은,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병자 자신을 모두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보시고 죄를 용서한다는 말씀을 먼저 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라는 말을 ‘그들의 회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회개’에 초점을 맞추면, 지금 이 상황에서는 병자 자신의 믿음과 회개가

다른 사람들의 믿음과 회개보다 더 중요합니다.

남이 회개를 대신 해 줄 수 없고,

회개는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행동을 겉으로만 보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은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병자 자신이 치유보다 용서를 먼저 간청했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치유보다 용서가 더 급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병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 병자의 병과 죄는 상관이 없습니다.

죄 때문에 병이 생긴 것은 아닌데, 병을 계기로 해서

자신의 죄를 더 잘 의식하게 되고, 더 잘 회개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의 영혼과 몸이 모두 병들어 있음을 보시고

우선 먼저 영혼부터 치료해 주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용서는 영혼의 치유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사람을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율법학자들이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고 생각한

것은, 하느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 자체는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는 것은, 또는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생각이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안 믿는 것이 악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하느님의 뜻과 일’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악한 일’입니다.)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둘 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렵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요즘에도 중풍은 고치기 어려운 병인데,

당시에는 하느님만이 고치실 수 있는 병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질문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둘 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라는 말씀은, “내가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되면, 너희는 내가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있음을

믿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의 표현만 보면, 율법학자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증명해 보이려고

병자를 고쳐 주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이 이야기는

당시 상황을 목격한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한 마디 말씀만으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니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증언하기 위해서이고, 이야기 속에 율법학자들을 등장시킨 것은,

그 증언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배경 설정’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마디 말씀만으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본 군중이

두려워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모두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했음을 나타내는데,

그 ‘인정’이 ‘믿음’으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이라는 말은,

군중이 여전히 예수님을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만 생각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치유 기적 이야기를 대할 때,

‘믿음’만 강조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만 강조하는 것으로 그치면,

“믿기만 하면 병이 낫는다.(구원을 받는다.)”로 오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회개’해야 하고, 믿음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회개도 하지 않고, 실천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병이 낫지 않는 사람에게 가서

“당신의 믿음이 부족한 탓이다.” 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자동 응답기가 아닙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함부로 남발해도 안 됩니다.

믿고 청하면서,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다 하는 것,

그리고 결과는 주님께 맡겨 드리는 것, 그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우리가 진정 치유되기를 바라야 할 것은?

 -김찬선신부-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진정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들은 죄를 용서하는 주님에 대해 분노하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나무라며 당신 사랑의 행위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어떤 태클에도 당신 사랑이 막힐 수 없다는 듯이 행위를 이어가시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멈추지 않는 주님의 사랑도 고맙지만

육신의 병을 넘어 영혼의 병까지 고쳐주시는 사랑이 더 고맙습니다.

 

중풍 병자가 당신께 왔을 때 주님께서는

육신의 병만 가엾이 보신 것이 아니라 영혼의 병까지 가엾이 보셨습니다.

아니, 육신의 병보다 영혼의 병, 곧 죄를 더 가엾이 보셨습니다.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의 경우 육신의 병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과 영혼까지 병들었을 수도 있는데

오늘 중풍 병자도 어쩌면 이런 사람일 수 있을 겁니다.

 

육신의 병으로 인해 오히려 성덕에로 더 나아간 영적인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의 경우 육신의 병이 마음도 병들게 하거나

육신의 병 때문에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 수도 있으며

그런데도 그저 육신의 병만 고치려고 들 수도 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더 가여운 사람입니까?

육신이 병든 사람이 더 가엾습니까?

영혼이 병든 사람이 더 가엾습니까?

 

영혼이 죄에 억눌려 있고,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을지라도 정신이 육의 정신으로 가득하며,

존재가 미움과 분노와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런 사람이 더 가여운 사람이 아닐까요?

 

그래서 다시 또 묻습니다.

어떤 사람이 더 가엾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암에 걸렸을 때 의사를 찾아가는 사람과 주님을 찾아가는 사람 중에 누가?

병을 낫기 위해 약이나 음식을 챙겨 먹는 사람과 성체를 영하는 사람 중에 누가?

 

물론 우리는 둘 다 해야겠지만,

꼭 하나만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냐 그 말입니다.

 

사실 저는 환자에게 성체를 영해주면서 주님께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듯

이 환자의 병을 이 성체로 치유해주소서 하는 마음으로 영해줍니다.

 

실제로 우리는 성체를 영하기 전에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지금 이런 생각을 그저 관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수도자로서 삶을 마칠 때를 생각하며 진지하게 이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병이 들거나 죽게 되었을 때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충실히 따르는 수도자로 죽어갈 수 있도록

오늘 중풍 병자처럼 저도 영혼의 죄까지 고쳐주시길 청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앓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리고 나는 앓는 형제에게 부탁합니다.

모든 일에 대해서 창조주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건강하든 병약하든 건강에 있어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십시오.
그러나 만일 누가 하느님이나 형제들에게 흥분하거나 화를 내고

곧 죽을 육신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너무 갈망한 나머지 조바심에서

지나치게 약을 요구한다면 이는 악에서 나오는 것이며 육적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영혼보다 육신을 더 많이 사랑하기에 형제다운 사람이 못 됩니다."

오늘과 내일 상반기 공동체 피정을 하러 갑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리지 못함을 양해바랍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