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8일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레네오 성인은 1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프랑스 리옹에서 사제품을 받고, 뒤에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이레네오 주교는 특히 프랑스의 영지주의의 오류를 거슬러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았다. 2세기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한 그는, 영지주의 이단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한 「이단 논박」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성인은 200년 무렵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마태오 8,23-27)
"Lord, save us!
We are perishing!"
"Why are you terrified,
O you of little fait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선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약하다고 꾸짖으시며 바람과 호수를 잠잠하게 하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성인께서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의 믿음은 어떨까요? 당연히 믿음이 컸기에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인 역시 이 세상 안에서 믿음의 문제로 고민하신 분이 많다고 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믿음이 없어. 나는 믿지 않아.”
성인이 된 마더 데레사도 믿음에 관한 고민을 많이 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믿음이 약하다’라고 고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닐까요? 오히려 ‘나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만큼 교만하다는 증거일 테니 말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문명의 발달로 볼 것도 많고, 들리는 것도 너무 많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주님을 보기도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보는 것, 주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아예 포기한다면 믿음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약한 믿음이 아니라, 없는 믿음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믿음 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한 믿음에서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즉 주님을 보고 주님 말씀을 들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 성인들의 믿음에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오늘 복음에서 봅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라운 표징들을 직접 두 눈으로 봤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을 때,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 할지를 모릅니다. 사실 제자 중에는 어부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돌발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자기의 능력도 믿지 못했고, 또 함께하는 주님의 힘도 믿지 못했기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자 아주 고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처럼, 자연의 힘을 향하여 ‘주님’으로서 명령하십니다. 그만큼 자연을 향해서도 명령을 내려서 복종하게 하시는 큰 힘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분과 함께할 믿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떨까요? 예수님과 늘 함께했었던 제자들도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하물며 우리의 믿음은 어떨까요? 한없이 약한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이 약함을 인정하면서, 조금 더 나아지는 노력을 계속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조금씩 주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성체를 영해도 변하지 않는 이유: 나는 두려운 것을 닮아간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x7pJeL9pyDI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에 죽을까 봐 두려워하다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고는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제자들의 두려움은 이제 자연에서 주님께로 변화되어갑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기적으로 원하신 일입니다.
우리 안에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체성사로 그분을 모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킬 힘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두려워하기 전까지는. 왜냐하면 사람은 두려운 것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개는 훌륭하다’에서 배은망덕 견 영구가 나왔습니다. 영구는 착한 주인들을 뭅니다. 특별히 소유욕이 강해서 집을 자신의 것으로 여깁니다. 마당만 들어오면 통제가 안 됩니다. 주인들은 개에게 모든 것을 맞춥니다. 물리기 싫기 때문입니다. 문을 들어갈 때도 허락받고 산책할 때도 개에게 맞춰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개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은 두려운 것에 의해 변화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체 앞에서 두려워 떨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손바닥보다 작은 밀떡 덩어리를 두가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속에 누가 계신지, 그 실체를 알면 어떻게 될까요? 까무러치고 말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우리는 이래라저래라 청하기만 합니다. 그분이 이 세상 모든 걱정과 두려움을 한순간에 없애버릴 능력을 지니신 분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청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사제가 들고 있는 그 작은 밀떡이 무엇인지 안다면 기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합니다. 타볼산에서 잠깐 신성을 보여주셨을 때도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서 요한이 그분을 천상에서 보았을 때는 납작 엎드렸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하느님으로 보고 두려워할 줄 알 때만 그분은 나를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나의 노력으로 성장시켜야 합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동석은 엄마를 매우 싫어합니다. 아빠의 친구였던 사람의 첩으로 들어가서 그 집에서 형들에게 매를 맞으며 자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엄마는 한 마디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비뚤어진 성격으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말기 암에 걸렸습니다. 동석은 놀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왜 그리 모질게 대하셨는지 알아보기 위해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동석 의붓아버지의 제사에 모시고 갔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엄마 옥동은 동석의 편을 들어줍니다. 전에는 그렇게 해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 세 끼 밥을 먹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석도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읽으며 조금씩 엄마를 용서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점점 두려워집니다. 엄마를 잃을까 봐. 사랑은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잃게 될까 두렵습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을 잃는 일입니다.
옥동은 동석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끓어놓고 더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동석은 죽은 엄마를 끌어안고 한없이 웁니다. 이때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죽은 어머니를 안고 울며 난 그제서야 알았다. 난 평생 어머니, 이 사람을 미워했던 게 아니라 이렇게 안고 화해하고 싶었다는 걸. 이렇게 오래 안고. 지금처럼 실컷 울고 싶었다는 걸.”
어머니는 약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분이 사라지면 나의 변화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세상 것들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노예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동석이 어머니와 동행하며 어머니를 잃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게 되었듯,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분을 잃는 것을 두려워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내 안에 가장 두려우신 분이 하느님임을 안다면 세상 다른 것은 두려운 것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변하게 됩니다. 그분처럼 변하게 됩니다.
기억과 희망의 지침이가 되어야 할 파스카 시대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DxN6Ml4AeZ8
-조재형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물을 더 깊은 곳으로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던지라고 한 그물과 제자들이 버린 그물은 같은 그물이지만 잡으려는 것들이 달랐습니다. 우리는 그물을 던지면서 무엇을 건지려고 할까요? 성공, 명예, 권력을 잡으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들을 잡기 위해서 그물을 촘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모두들 그물을 던지니 경쟁도 치열합니다. 남의 그물을 찢어 놓기도 합니다. 남이 잡은 것들을 빼앗아 오기도 합니다. 공정과 정의를 지키지 않고 편법과 불법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욕망을 향해 그물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끊임없이 총기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욕심을 향해 그물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기후 위기가 오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은 이기심을 향해 그물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물을 던져서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들을 하나도 잡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던지면서 무엇을 건지려고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건지려고 하셨습니다. 그곳에는 믿음, 희망, 사랑이 넘쳐납니다. 이웃에 대한 헌신, 하느님께 대한 순명, 소유가 아닌 존재가 있습니다. 사막에 물이 넘쳐나듯이,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놀듯이, 늑대와 어린양이 손을 잡듯이 경쟁과 투쟁이 없습니다. 오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곳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그물에 가득 잡아 올린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교회에 봉헌하였습니다. 가난한 이, 과부, 고아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이상 슬픔의 눈물, 고통의 눈물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찬양과 기도가 넘쳐났습니다. 복음의 기쁨이 향기가 되어 이웃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물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잡으려 하는 대상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에 흔들리는 배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곧 바다에 빠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편안한 자세로 누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을 흔든 풍랑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의 바람이었습니다. 스승까지 팔아넘기려는 탐욕의 바람이었습니다. 스승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던 두려움의 바람이었습니다. 욕망과 탐욕이 없으신 예수님에게는 두려움이 없으신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풍랑이 없었습니다. 평온했던 저의 마음에도 거센 풍랑이 불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나의 욕심을 채우려는 욕심의 바람이 불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삶을 살기 보다는 섬김을 받으려는 교만의 바람이 불기 때문입니다. 사제직에 충실하기 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게으름과 나태함의 바람이 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희망을 갖기 보다는 두려움과 근심의 바람이 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믿음이 약하냐!” 우리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 수 만 있다면 욕망의 바람이 불어도, 교만의 바람이 불어도, 두려움과 근심의 바람이 불어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평온함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미끼가 없는데도 새가 땅에 있는 그물로 내려앉겠느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땅에서 그물이 튀어 오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양승국신부-
정의감으로 활활 불타오르던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기원전 760~750년 경이었습니다. 묘하게도 그 시기는 북이스라엘이 다윗왕 시절 못지않은 전성기랄까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배경에는 너무나도 당연히 당신이 선택한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속성상 잘 나갈 때 꼭 문제가 생깁니다. 자신의 힘으로 잘 나가는 줄 알고 기고만장합니다. 예로보암 2세 왕을 비롯한 정신 나간 측근들, 우둔한 지도자들은 잔뜩 겉멋이 들어 속병이 깊어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점점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풍요로움과 세속적인 향락에 깊이 빠져들어가 헤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 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수금 소리에 되잖은 노래를 불러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를 만들어 낸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아모스 예언서 6장 4~7절)
성전 역시 타락하여 빈껍데기뿐인 허례허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돈맛을 들인 지도자들과 부자들은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가난한 백성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불의가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불의한 상황 앞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모스 예언자는 그야말로 철퇴로 뒤통수를 치듯, 마치 한 마리 사나운 사자처럼 포효하며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섬뜩한지 모릅니다.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나는 모든 사림이 허리에 자루 옷을 두르고 머리는 모두 대머리가 되어...”(아모스 예언서 8장 9~10절)
아모스 예언자의 날 선 발언에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잠시 멈칫하였지만, 결코 물러선다거나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심기가 잔뜩 불편해진 그들은 슬슬 반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가 대체 뭔데? 어디 배워먹지도 못한 남유다 출신의 듣보잡, 깜도 안 되는게 나타나 요란을 떠는가냐?’며 콧방귀를 끼었습니다.
거침없이 당당한 아모스 예언자의 말이 귀에 몹시 거슬렸던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는 화가 잔뜩 나서 아모스를 베텔에서 쫒아냅니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아모스 예언서 안에서 마치 후렴구처럼 자주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다양한 징벌들, 재앙들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께로 돌아서지 않았음을 아쉬워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하나입니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살리라.”
불의한 현실 앞에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하느님의 음성을 전하는 또 다른 아모스 예언자들이 필요한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언자는 악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정의, 불의와 관련해서 사소한 일에도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빛나며 불타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한 옥타브 높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우상을 타파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엄정함과 동정의 사람입니다.(아브라함 헤셀)
「믿는 만큼 보게 된다」
-반영억신부-
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으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보게 될 뿐 아니라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굳센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믿음이 큰 만큼 하느님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믿고 의탁하는 만큼 강하게 만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믿음은 삶의 모든 순간들을 빛내주는 예수님의 자비를 경험으로 알게 되는 그분과의 살아 있는 만남을 통해 태어나고 또 새로워집니다. 예수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을 매일 접할 수 있는 것이 좋습니다. 말씀을 읽고 침묵의 기도 안에서 주님의 사랑에 들어가십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성장과 견고함을 위해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한배를 탔는데 어떤 이는 잠을 자고 있고, 어떤 이는 겁에 질려 허둥거립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있었기에 무서울 것이 없으며 절박한 생존의 난국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는 위기는 아예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문제시하십시오.' 믿음이 없으면 믿음을 더해달라고 매달리면 됩니다. 그냥 덮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을 깨운 것을 보면 아직 그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품 안에 있었으면 아무 걱정할 것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였지만, 철저히 맡기지 못했던 제자들입니다. 아마 우리도 같은 위험에 처했더라면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려움에 맞서 주님께 살려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완전하지 못한 채 그렇게 있어야 하나요? 두려워 말고 주님을 바라봅시다.
허둥대던 제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권위를 가지고 선포한 주님의 가르침에 놀랐고, 풍랑과 파도를 지배하는 주님의 능력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이제는 단순한 무서움의 차원을 넘어서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하며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접하면서 커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따른다기보다 따름으로써 성장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있기보다는 두려움과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혹 어려움에 직면할 때 아직도 허둥대고 있다면 믿음의 부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1베드5,7).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25.3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주님께 떠맡기고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성경을 보면 롯의 가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하는 천사의 말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19,26).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구리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민수21,9).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어찌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마치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역사가 하느님의 선물인 것처럼 말입니다”(까롤로 까레또). 믿음 안에서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3-27)”
마르코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4,38).
마르코복음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라는 제자들의 말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살려 달라고 간청하는 말이 아니라,
모두가 위험한 상황인데도 예수님 혼자서만 태평스럽게 주무시는 것을
원망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이 일에서 요나서에 있는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 배 밑창으로 내려간 요나는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선장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요나 1,5-6)”>
마르코복음과 상관없이,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라는
말을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생각하면,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주님께 살려 달라고 간청하는 말로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라고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 상황에서 제자들은 어떻게 했어야 했나?
믿음이 있어도 겁이 나는 상황에서는 겁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만 보고 믿음이 부족하다고 꾸짖을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상태에서(구해 주신다는 믿음도 없이)
‘말로만’ 구해 달라고 간청한 것이 됩니다.
그 상황에서 필요한 믿음은,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이었는데,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 그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기적들을, 즉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등의 기적들을 직접 보았지만,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는 일은
완전히 차원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일이어서,
제자들이 그 믿음을 갖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신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느라고(마태 8,16) 피곤해서
주무셨을 텐데,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처한 상황을 모르시지는
않았을 것이고, 제자들의 상황에 대해서 무관심하셨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주무실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이고,
또 어부 출신 제자들의 경험과 실력을 믿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주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믿으시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못 믿을 때가 많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라는 말입니다.
이 질문의 답은, “예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지배하는 주님이신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라는 증언이고,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을 온전히 믿게 되면,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겨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님께 구해 달라고 간청하면(믿기만 하면)
주님께서 반드시 구해 주신다고 믿는 믿음은 초보 단계의 믿음입니다.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겨 드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바로 그 단계에 도달한, ‘완전하고 성숙한 믿음’을
베드로 사도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헤로데가 야고보 사도를 죽인 다음에, 베드로 사도도 죽이려고
감옥에 가둔 일이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네 명씩 짠 네 개의 경비조에 맡겨
지키게 하였다. 파스카 축제가 끝나면 그를 백성 앞으로 끌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사도 12,4-6).”
베드로 사도는 그를 구해 주려고 온 천사가 옆구리를 두드려서
깨워야 할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사도 12,7).
그 모습은 큰 풍랑 속에서도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 모습,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생사에 초연한 모습, 그 모습이 바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고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음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신앙인은 항상 ‘주님의 뜻’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뜻’대로 해 달라고 고집부리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죽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조금 더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특별한 방법은 없습니다.
꾸준히 기도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다 하고,
결과는 주님께 맡겨 드리면 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마태 6,27)”
언제 어떻게 떠나느냐가, 즉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준비한 상태가 되어서 하느님 앞으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3주 화요일-꾸짖음 당하지 말고 꾸짖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0) | 2022.06.30 |
---|---|
2022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0) | 2022.06.29 |
2022년 6월 27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0) | 2022.06.27 |
2022년 6월 26일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 (0) | 2022.06.26 |
2022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0) | 2022.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