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Margaret K 2022. 6. 25. 06:35

2022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는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었고, 2005년부터는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마태오 18,19ㄴ-22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권고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프리카 정글에서 학자들이 의미 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곳에 사는 많은 종류의 짐승들을 한 종류씩 없애 보기로 한 것입니다.


먼저 새를 없애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새소리가 없어지면서, 정글은 마치 공동묘지처럼 적막한 숲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원숭이들을 쫓아냈습니다.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나뭇가지를 꺾으면서 숲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숭이가 떠난 숲은 나무들이 서로서로 엉키면서 썩어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징그러운 뱀들을 다 제거했습니다. 그러자 천적이 없어진 쥐들이 그 숲에서 판치며 날뛰기 시작했고 쥐들로 인해 해충을 잡아먹던 벌레들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숲이 병들어 죽어갔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학자들은 모든 것이 함께 살아갈 때 건강하고 질서가 잡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가 서로 도우며 함께할 때 건강하고 질서가 잡힙니다.

자동차에는 가속페달과 브레이크페달이 함께 있습니다. 만약 가속페달만 있다면 어떨까요? 멈출 수가 없어서 계속 앞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금방 커다란 사고가 날 것입니다. 또 브레이크페달만 있다면 어떨까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늘 그 자리에 서 있어야만 합니다. 자동차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각자의 역할이 모두 중요하며, 이렇게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남북통일 기원 미사를 봉헌합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이후 분단된 우리나라는 아직도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 남과 북으로 오랫동안 갈라져 있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또 서로를 향한 미움과 적대적인 말과 행동도 계속되었습니다. 상대가 없어야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시는 용서를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흔일곱은 단순히 일흔일곱 번 용서하고 그다음부터 미워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무한정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횟수를 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모든 친구는 우리 안에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그들이 오기 전에는 없었던 세계, 만남을 통해서 태어나는 새로운 세계를(아나이스 닌).
 

 마음을 모아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1k2--dopYbw

 -조재형신부-

 

스마트폰의 액정이 나가서 잠시 다른 스마트폰을 빌려서 사용하였습니다한국에서 액정이 와야 고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3주 동안 대리점에서 빌려준 스마트폰을 사용하였습니다다행히 한국에서 액정이 왔고 전에 쓰던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빌려 쓰던 스마트폰을 반납하기 전에 여러 가지 저의 정보를 지우게 되었습니다전에 쓰던 스마트폰의 정보가 다 옮겨져 왔기 때문에 지우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그러다 설정에서 초기화라는 항목을 보았습니다초기화를 실행하니 일일이 정보를 지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저에 대한 모든 정보는 깨끗하게 지워졌습니다교회의 역사에서 초기화를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다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예수님의 체험은 지난날의 모든 것들을 지워버렸습니다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채워졌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초기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무엇일까요고백성사입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루가복음 15장은 3가지 비유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되찾은 양되찾은 동전되찾은 아들의 이야기입니다저는 그동안 잃어버린 양잃어버린 동전잃어버린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마치 문을 열기만 하면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그 크신 자비하심으로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셨습니다그것은 죄를 용서하는 권합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릴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뉘우친다면 여러분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하얗게 될 것입니다여러분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하얗게 될 것입니다.”

 

사제는 고백성사를 통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으니 교회의 직무 수행으로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고백성사의 다른 말은 화해의 성사입니다치유의 성사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화해에는 조건이 없습니다치유에도 조건이 없습니다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화해와 치유입니다화해와 치유에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지만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우리가 마음을 여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사제들에게는 기름진 것을 배불리 먹이고내 백성을 내 선물로 가득 채워 주리라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전쟁의 완전한 종식과 평화, 일치와 통일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아 주교회의 산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이신 김주영 시몬 주교님께서 발표하신 메시지에 크게 공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의 실현은 바로 오늘 이 땅에 사는 우리의 몫입니다. 민족과 국가들이 서로 반목하는 세상에서 같은 말을 쓰는 한 형제인 우리 민족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어 하나가 된다면 분열을 극복하는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것입니다. 서로 마음을 모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신 사랑과 용서와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 냅시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분단이 지속됨으로 인해, 남북한 주민들 사이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멀어졌습니다. 언어는 물론이고, 사고방식, 가치체계, 교육제도, 문화, 종교 등등, 삶의 전반적 측면에서 동질감이 줄어들고 이질감이 커졌습니다.

남북간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서로 간에 벌어진 간극을 어떻게든 줄여나가기 위한 노력은 7천만 모든 동포들에게 주어진 지상과제입니다.

서로의 다름과 어색함을 견뎌내기 위한 인내심과 기다림, 너그러움이 필요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큰 마음이 필요합니다.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범국가적 • 민족적 오랜 숙원 사업이니만큼, 손해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화해와 일치에로 나아가는 여정(旅程)에 더 열렬한 기도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런 기회에 남북 분단의 고착화를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줄로 여기고 있는 분들의 대대적인 회심을 기원합니다.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한 민족의 화해와 일치, 평화와 공생으로 가는 큰 물줄기에 박수를 보내지는 못할망정, 더 이상 고추가루를 뿌린다거나 사사건건 트집잡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제들과 남녀 수도자들은 정말이지 오랜 세월 간절히, 한 마음으로 남북간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평화 통일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가련한 우리 민족을 굽어보시고 큰 자비를 베푸시어 꿈에 그리던 전쟁의 완전한 종식과 평화, 더 나아가 감개무량할 화해와 일치 그리고 마침내 통일이 현실화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이영근신부-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근본 모순이라 할 수 있는 민족 분단의 화해와 일치는 화제에 오르기만 하면,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입니다.

서로 적대 논리로 날을 세워 남북 당국을 비난하고 욕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각 공동체나 개인의 극단의 갈등을 드러내기 일쑤입니다.

이는 단순한 남북의 대립과 갈등만의 문제는 아니라, 남과 남, 북과 북의 내부적 대립과 갈등을 포함하여, 국제 역학의 영향을 받는 복잡한 문제라 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모아”(마태 18,19) 기도하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너희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하라.”

(마태 18,20)

 

바로 '이 땅'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친교와 화해의 장소라는 말씀입니다.

먼 훗날이 아니라, 평화로운 새로운 새 땅에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서로 마음을 모으라는 호소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 이 땅 한반도에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적대감과 대립을 몰아내고, 편견과 거짓과 위선을 몰아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용서, 일치와 사랑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특별히 '오늘'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신명 30,2-3)

 

분단 극복과 화해와 일치의 실현에는 그동안의 우리의 불성실을 성찰하는 동시에, 바로 ‘오늘’ 우리의 책무와 투신이 요청됩니다.

사실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한반도 평화를 간절히 염원하며, 지난 2015년 이래로 매일 밤 9시에 주모경을 바쳐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17일부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9일 기도'를 해 왔습니다.

 

첫째 날로부터 시작하여, ‘평화통일을 위한 회심을 위하여’, ‘북한과 미국, 그리고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을 위하여’, ‘한반도의 비핵화와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하여’, ‘경제 제재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남과 북의 복음화를 위하여’, ‘이산가족과 탈북민을 위하여’, ‘한반도의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하여’, ‘평화의 일꾼들을 위하여’ 기도해 왔고, 그리고 마지막 날인 오늘은 ‘한반도에 종전이 선언되고, 평화 체제가 실현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새로운 생활 법칙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

(에페 4,29)

 

사실 우리들 사이의 분쟁의 상당한 것들은 잘못된 말이나, 욕, 비난, 중상모략, 거짓말로 시작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남과 북이 서로를 비방하고, 거짓 뉴스와 유언비어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멈추고, 오히려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 찬양해야 할 일입니다.

축복을 가져다주는 좋은 말, 기쁨과 칭송의 말을 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대립과 반목으로 오랫동안 쌓여온 남북의 적대를 용서로 바꾸어야 할 일입니다.

적이 아니라, 형제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용서와 화해, 사랑과 일치를 이루어 나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처럼, 화해와 일치를 위해 바치는 향기로운 산 제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이는 꼭 남북관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서로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일입니다.

특히 같은 공동체 식구끼리는 더더욱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에페 4,32).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

 

주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나아가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반영억시부-

 

아버지 하느님의 큰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허물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앞서 내 삶의 여정에서 이웃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과 백 사람이 한마음이 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이론적으로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결코, 두 사람이 일치를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치의 전제조건은 화해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 좋은데 이것만은 안돼!’하는 속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 한번 틀어지면 둘이 하나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정성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머리수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입으로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옛 생각에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피하고 싶어집니다. 마음이 불편하다면, 아직 진심으로 품어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비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를 수박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이 중요합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행동하는 사람도 품위가 있어야 하지만 담는 그릇이 커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나를 치켜세운다고 해서 우쭐하지도 않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내지도 않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18,19) ‘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머리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상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당신이 이미 용서하셨기에 용서합니다. 당신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먼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보이는 사람과 서로 하나가 되기가 힘든 데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한마음 되기는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사실 하느님과 하나 되면 이웃과 일치하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가 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안 그렇다고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실제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는 분들은 적습니다.

 

요한복음 8장1절에서 11절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와서는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마음 안에는 ‘나는 의롭다’, ‘나는 잘 살고 있다.’ ‘나는 거룩하다.’ 뽐내고 으스대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를 듣고 금방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추측하건 데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하셨을 것입니다. ‘너도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니냐? 잘 생각해 봐라. 네가 잘난척하지만, 너도 별수 없다.’ 예수님께서 뜸을 들이시자 사람들이 재촉합니다. ‘스승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 좀 하십시오.’ 사람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는 죄 많은 여자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자비와 용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삶의 경륜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의롭다고 자처한 사람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세상에는 밝게 눈떠 있었지만, 하늘에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말씀에 눈이 뜨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하시는 한 말씀에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에다 죄를 더 보태지 않고 떠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눈뜨지 못했다면 돌을 집어 던졌을 것입니다. 죄에 죄를 더했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봅니다. 그것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굉장히 잘난 줄로 알아요. 의로운 줄로, 거룩한 줄로 알아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순간 순간마다 죄에 죄를 더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죄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먼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눈을 떠야 합니다. 타인의 결점을 찾기보다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태복음 7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남이 잘못한 것은 아주 크게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눈뜬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눈뜬 사람은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눈 뜬 사람은 그 허물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내가 저 사람과 똑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잘못과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이 죄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하고 물었습니다. 일곱 번, 많죠. 한 번도 힘든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용서는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잘 산다고 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용서받고 살았느냐? 너 그거 아느냐? 너 그거 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못할 것이 없지않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결코 ‘용서 못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데 이렇게 앙갚음을 하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하느님께 눈뜨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 고백할지언정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눈뜰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눈뜨면 내 힘으로 안 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힘으로, 능력으로 먼저 용서를 청할 수 있고 베풀 수 있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진실을 알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 다 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단순히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지 말고 마음으로 온몸으로 손발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으뜸제자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를 하실 때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떠날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막상 위험에 직면하자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야말로 본이 아니게 얼떨결에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우리가 나는 의롭다, 떳떳하다.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 앞에서 별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입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주님의 으뜸제자로 활동을 할 수 있었겠어요? 바오로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가 과거의 살인죄에 매여 있었다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는 도구로 활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로 하느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자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님으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대상은 우리 가족 안에 있을 수 있고 이웃 안에 공동체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용서를 행하는 사람이야 말로 믿음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기에 앞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베푸는 것부터 시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내가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이웃에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짐하시길 희망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결코 화해를 재촉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섣부른 화해는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 18, 21)

-한상우신부-

어울려
살아야 할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이며
용서이다.

용서는 비방을
멈추는 데서
시작한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화해와 일치이다.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길은
우리가
한가족이라는
공통분모를
우리가
되찾는 일이다.

우리는
적(敵)이 아니라
가족이다.

주고받는
실천으로
가족의 화해는
조금씩
이루어진다.

그만큼
서로간의
신뢰형성이
중요한 가족의
관계이다.

올바른 기도와
바람직한
실천적인 노력이

함께 잘 살 수 있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영광의 참된 길이다.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만나는
상호존중과
이해이다.

우리는
서로 저마다
자기 것만
옳다는
사상적 이념적
편향성을
내려놓는
경청과 변화의
회개가 필요하다.

회개는 지혜와
협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이와같이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역사적
소명이다.

분단의 벽을
허무는
기도의
새 날이다.

기도의 실천은
모순의 역사를
통일의 새역사로
바꾸는 가장 큰
중심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민족의
일치이다.

하느님께서
앞장서시는
화해와 일치의
기도이다.

기도는
일치를 위한
가장 좋은
역사의 방향이다.

말씀 나누기 - 2022년 6월 25일 토요일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 (ofmkorea.org)

-고도미니코 OFM-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