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4일 금요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 성화의 날)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부터 시작하여 점차 퍼지면서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15,3-7)
I tell you, in just the same way
there will be more joy in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than over ninety-nine righteous people
who have no need of repen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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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몸소 당신 양 떼를 먹이시고 그들을 누워 쉬게 하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구원받게 되리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늘에서는 더 기뻐한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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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인간은 부정적 경험을 많이 기억할까요? 아니면 긍정적 경험을 더 많이 기억할까요?
듀크 대학의 브라이언 섹스톤 교수는 이를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부정적 경험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곤한 상태이면 긍정적이고 평범한 일을 인식하는 감각이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나 피곤할 때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잠을 자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면 스트레스와 피곤을 잊게 됩니다. 열정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Three Good Things’라는 프로그램이 나왔습니다. 일종의 행복 기록으로 그날의 멋진 경험과 그때의 감정을 적는 것입니다. 매일 세 가지씩을 기록하면 평소 무심코 지나쳤을 작은 기쁨과 소소한 기쁨을 인식하게 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스트레스와 피곤을 잘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좋은 일 3가지. 적기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좋은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성찰을 힘들어하고, 작은 것에 기뻐하는 습관 자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크고 대단한 곳에서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평범한 일상 안에서 주님을 찾지 못한다면,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놓아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의 우리도 아닌 광야에 놓아두었다는 것은 그냥 방치해놓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잃어버린 어떤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서 방황하고 있을 때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만을 찾으면 주님 안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늘 함께합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기억보다는 긍정적인 기억을 간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와 피곤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제로 지내는 예수 성심 대축일은 주님의 사랑 가득한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사랑받음을 강력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은 자기 역시 다른 이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실천하는 우리의 사랑을 통해, 주님 안에서 함께 커다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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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jH1gl8uVGCE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사제는 예수님의 성심을 본받으면 성화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더 자세히 보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방치합니다. 도대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맹수가 우글거리는 광야에 방치하는 것이 왜 사랑일까요?
우리는 가끔 버릇없는 아이를 감싸는 어머니를 볼 때가 있습니다. 왜 남의 애 기죽이냐고 되레 화를 냅니다. 그것이 사랑일까요?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자신을 무는 개까지도 감싸는 어머니를 나무랍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그 개가 다른 사람을 물게 될 것을 용인하는 범법자나 다름없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정말 누가 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물리면서까지도 잘해주는 주인일까요, 아니면 강 훈련사일까요? 강 훈련사는 개를 물속으로 끌고 갑니다. 물속에 들어가면 일단 살아야 하는 게 우선이 되어서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개에게 입마개도 하고 조금씩 주인에게 의지하고 순종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광야로 끌고 나온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아의 압제에서 구해주고 싶으셨습니다. 당신께, 혹은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하는 백성을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강 훈련사가 물속으로 개를 끌고 들어간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의 척박한 곳으로 끌고 나오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어깨 위에 그대로 있으려 하지 않고 본인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방치하신 것도 이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어깨에서 무슨 일에나 자신을 죽이고 순종할 수 있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성심입니다. 사랑의 목적입니다. 사제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나라 카리스마 대표 배우인 최민수 씨를 길들인 사람이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살다 최민수 씨와 혼인한 강주은 씨입니다. 강주은 씨는 빚이 지금 시세로 30~40억 있는 최민수 씨와 결혼하여 힘겨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소유욕이 지나치게 강했던 최민수 씨에게 최대한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계속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야 했지만 참았습니다. 한국말도 잘하지 못할 때라 만화를 그려가면서 소통해야 했습니다. 사고를 칠 때도 참아내며 그의 편을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결국 강주은 씨는 지금 연매출 600억 상당의 홈쇼핑 사업을 하고 있어 재정적으로 안정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반면 최민수 씨는 월 40만 원의 용돈을 타서 씁니다. 기름값 하면 남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강주은 씨는 최민수 씨가 돈 개념이 없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광야를 선사합니다. 그래도 최민수 씨는 강주은 씨에게 어쩔 수 없이 순종합니다.
사람의 이기심을 없애려면 환경의 결핍을 주어서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임을 자각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해주어서 기를 살려주면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습니다. 구원을 보장받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결핍을 선물하십니다. 당신의 결핍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궁핍과 결핍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물에 빠진 개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장 자기가 사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핍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못된 아이를 감싸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아이가 나에게 앙심을 품더라도 순종을 가르치는 게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어깨에서 꼼짝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 존재로 키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결핍을 주시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기 전에 주님께 의지합시다. 그냥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아멘!” 하겠다고 고백합시다. 그래야 결핍 훈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순종만이 살길입니다.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순종해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성심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a-p3Hu2ufag
-조재형신부-
지난 성령강림 대축일 때입니다. 평화방송에서 성령의 은사를 뽑는 ‘어플’을 만들었습니다. 이름과 세례명을 입력하면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나오는 프로그램입니다. 저의 성령의 은사는 ‘지혜’였고, 성령의 열매는 ‘절제’였습니다. 사제인 저에게 꼭 필요한 은사와 열매였습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 건강과 장수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의 청을 좋게 보셨습니다. 지혜를 주시고 덤으로 건강과 장수를 주셨습니다. 신학생 때 신부님들이 늘 강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기도와 지식도 필요하지만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은 ‘판단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판단을 위해서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신중해야 합니다. 급한 성격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많습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적도 많습니다. ‘절제’ 또한 제게 필요한 열매였습니다.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이고,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성화되어야 합니다. ‘사제 성화의 날’이면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2002년 ‘사제 성화의 날’이었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이 저에게 ‘사목 체험’을 나눠보라고 하였습니다. 사제들 앞에서 체험을 나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배 사제들은 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료 사제들은 저의 허물까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배 사제들에게 모범을 보일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지구장 신부님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본당에서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의 사목 체험은 교구 사목국에도 전해졌고, 사목국장 신부님이 함께 일해 보자고 찾아왔습니다. 저는 교구 사목국의 ‘교육담당 사제’로 3년을 일하였습니다. 주로 하는 일은 구역장/ 반장을 위한 월례연수를 기획하는 것이었습니다. 미리 강사 신부님들을 섭외하면 되었습니다. 다행히 큰 무리 없이 3년간 월례연수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보람 있었던 3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한 성가가 있습니다. ‘예수마음’입니다.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마음 겸손하신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열절케 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같게 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잡아당기사 네 성심에 네 성심에 결합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차지하시와 네 성심에 네 성심에 보존하소서./ 내 마음을 내 마음을 변화케 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바꿔 주소서.” 예수님의 마음은 아낌없이 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분에서 겸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목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난한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권한과 능력에서 겸손하셨습니다. 자연을 다스리고,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시고,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지만 그래서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으셨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잘못한 이를 용서하심에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배반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침을 뱉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뺨을 때리며 모욕을 한 사람들을 용서하셨고, 하느님께도 용서해 주실 것을 청하시면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품어주시는 사랑으로, 끝까지 믿어주시는 사랑으로, 고통과 수난까지 감수하시는 사랑으로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겸손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 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결합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호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겸손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부단히 넘어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어서는 사제!
-양승국신부-
오늘 우리 교우들은 무척 바쁜 날입니다. 사제성화의 날을 맞이하여 저희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주시는 날인 동시에, 우리 인간의 죄악과 방황 때문에 상처입은 예수님의 성심(聖心)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행해진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성장을 위해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조사 결과는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교회의 쇄신과 발전을 위해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사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대답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사제들의 지속적인 회심과 쇄신, 성화 없이 교회의 쇄신과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는 답이 되풀이되어왔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착한 목자로 살아가시는 사제들도 부지기수인데, 그런 사제들은 억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사제도 어쩔 수 없이 근본적인 한계와 결핍을 지닌 한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틈만 나면 대대적인 삶의 변화를 꿈꾸지만, 마음과는 달리 행동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멋진 모습의 착한 목자로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지만, 희망 사항과는 다른 초라한 스스로의 모습에 좌절도 많이 합니다.
생각과 행동이 따로따로인 모순된 삶을 살아가며 가슴을 치고 후회합니다. 한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신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나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신기루 같은 하느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예수성심대축일을 사제성화의 날로 지정하고 사제들을 위한 특별한 기도를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사제들이 인간적 부족함과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넘어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어서서 하느님께로 또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내공을 지니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최우선적 선택의 대상으로 여기고,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느님만으로 행복하고, 하느님께만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은 또 다른 한 가지 지향을 두고 기도를 해주셔야 합니다. 통상 우리가 바치는 대부분의 기도는 우리 인간 측에서 하느님께 청하며,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하기보다 하느님께 위로를 드리는 기도를 바쳐야 마땅합니다. 우리 인간의 부족함, 우리 인간의 죄악, 우리 인간의 배신으로 크게 상처입은 예수님의 성심께 송구한 마음으로 그분의 부서진 마음을 위로해드리는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사랑이 제대로 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상호 통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이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흘러가야 하고, 다시 또 되돌아가야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이겠지요.
한쪽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에 불이 붙고, 밤잠도 제대로 잘 못 이루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조금도 그 사랑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짝사랑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그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우리가 아무리 그분께 대들고 반역해도, 우리가 그렇게 배신을 때려도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향한 당신 사랑의 불꽃을 태우고 계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 성심은 우리의 반역과 배신으로 인해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구세주의 상처 입은 성심에서 우리 교회가 탄생되었고,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고 있습니다. 그 부서진 예수 성심에서 7가지 성사가 흘러나왔으며, 그 성사는 큰 강이 되어 메마른 사막을 비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소원 한 가지를 들어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간절한 바람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이가 당신 성심께로 기꺼이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퍼마시는 것.’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예수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 마음'을 지닐 수가 있을까요?
‘예수 마음’을 가르쳐주기 위해 오늘 복음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저는 이 비유를 들을 때마다 두 글귀가 가슴을 와 두들깁니다.
하나는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주십니까?”(시편 8,5)라는 감격스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노래와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2,9)하시며 지금도 저를 찾으시는 주님의 애끊는 마음이 울려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보면 '예수 마음'은 무엇보다도 우선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한 마리의 양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생명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곧 그가 길을 잃었건 떠났건, 병들었건 약하건, 나를 좋아하건 미워하건, 그의 전부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니, 그가 아프기에 더욱 우선적으로 그에게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본성은 필요한 곳으로 먼저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하느님의 태중에 있는 우리와 ‘분리되지 않는 마음’(르하밈)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에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끝까지 뒤쫓아 다닙니다.
이는 구원의 주체가 당신이심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먼저’ 찾아오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당신의 신실하신 마음과 사랑을 말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수 마음'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이 비유 뒤에 나오는 ‘되찾은 은전의 비유’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도 동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되찾은 후에, 부인은 잃은 은전을 되찾은 후에, 아버지는 잃은 아들을 되찾은 후에,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9.32)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 비유의 정점이 잃은 것을 되찾는 것을 넘어서 ‘이웃과 함께 나누는 기쁨’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쁨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나누지 않고는 못배기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마치 백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아팠기에,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이 마치 양 백 마리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기 때문입니다.
곧 한 마리를 잃은 것이 전부를 잃은 것과 같았고, 한 마리를 찾은 것이 전부를 찾은 것과 같은 까닭입니다.
그토록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십니다.
바로 이 크신 사랑을 만나면 기쁘지 않고는 못 배겨나고, 나누지 않을 수가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과의 만남의 결과요 사랑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쁨’은 사랑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곧 사랑은 가쁨을 품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이 결코 멈출 수 없듯이 기쁨 또한 결코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요한복음 사가는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요한 16,22)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듯이, 또한 그 누구도 우리를 기쁨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테살 5,16)
'예수 마음'은 바로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자신을 건네주는 사랑의 기쁨에로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도 이 기쁨의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고 당신의 기쁨을 나누어 주십니다.
아멘.
(그런데 나는 지금 우리 주님과 더불어, 또 내 형제들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고 있는가?
기쁨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나누고 있는가?
혹 나누기보다 자신을 채우고 있지는 않는 걸까?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기쁘다면 기쁨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기쁘지도 않으면서 기쁨을 나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내가 우리 주님의 사랑을, 이미 먼저 베풀어져 건네 온 그 큰 사랑을 본다면 기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루카 15,6)
주님!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는가」
-반영억신부-
저는 사제수품을 앞두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사제생활의 모토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많은 경우 그분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느끼고 행동하지 못하였습니다. 말씀만 거창하게 선택하고는 실천 없는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사제성화의 날을 맞이하여 기도하며 갈망했던 순수하고 귀한 열정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기를 다시금 청해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한결같이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도 소중하지만 한 마리 잃은 양이 결코 그 비중이 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둔 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야 하는 주님이십니다. 세상은 아흔아홉에 마음이 가있지만 예수님은 잃은 한 마리의 양의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사람은 질보다 양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양보다 질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잃은 양을 찾고야 맙니다. 그리고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15,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잃은 양을 찾은 기쁨과 같습니다. 죄인이었다가 회개하는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선한 많은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 편히 계시지 않으시고, 한 사람의 죄인을 찾아 나서는 분이십니다. 어떤 죄인도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비록 나쁜 길에 들어섰을지라도 그를 두고 슬퍼하시며 안쓰러워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겠습니다.
잃은 양은 바로 사랑을 잊고 사는 나, 주님을 잊고 사는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나를 찾고 계십니다.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회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과의 만남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송영진신부-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4-7).”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목자의 심정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나서 ‘애타게’ 찾아다닌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심정과 같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실감나고,
공감하기가 쉽습니다.)
부모가 ‘잃은 자녀’를 애타게 찾는 것은 자녀의 안위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 부모의 마음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라는 말은,
‘잃은 양’ 하나 때문에 다른 양들을 모두
위험 속에 방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일에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리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그냥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첫 번째로 강조하시는 것은,
하나하나가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아흔아홉과 하나라는 숫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양도, 남아 있는 양도 하나하나 똑같이 중요한데, 남아 있는 양들은
지금 안전한 상태에 있으니 잃은 양을 찾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전체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 사상의
반대쪽에 있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되찾은 양의 비유’를 읽을 때, 또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할 때,
그 ‘잃은 양’이 ‘바로 나’ 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나만 혼자서 뒤처져 있거나 옆길로 빗나가 있다면,
그래도 예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구하려고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잃은 양’을 ‘그들’이나 ‘그’ 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잃은 양이 아니다.”
라는 자만심에 빠져도 안 됩니다.
그런 헛된 자만심은 위선자들의 특징이고, 공통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는 아무도 큰소리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두 번째로 강조하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서 쫓아가는 목자의 모습은,
우리를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그 ‘잃은 양’이 ‘길을 잃은 양’이 아니라
‘스스로 목자를 떠나버린 양’이라면?
그러면 그 양은 결국 ‘끝나버린 양’이 됩니다.
만일에 인간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거부한다면?
스스로 자기 발로 멸망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회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세 번째로 강조하시는 것은 ‘기쁨과 슬픔’입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되찾고 나서 크게 기뻐한다는 것은,
양을 잃으면 크게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늘에서 크게 기뻐한다는 것은,
반대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크게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나는) 지금 하느님과 예수님께 기쁜 존재인가? 슬픈 존재인가?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 ‘예수님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말이 있습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그 당시나 지금이나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자가 계시는데도 그것을 모르거나, 또는 외면하면서,
세속 일만 신경 쓰면서 살다가 지쳐버리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인류를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많은 일을 하신 것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는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것은,
스스로 속죄할 능력이 없는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가엾게 여기는 그 마음은 곧 사랑입니다.
회개는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이고,
‘예수님의 성심(마음) 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성심 안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흐트러진 삶을 원래대로 회복시키려고 애쓰고 있는 지금,
세속 사람들은 ‘일상의 회복’만을 말하고 있지만,
신앙인은 회개를 말해야 하고, 회개를 실천해야 합니다.
만일에 회개 없이 일상으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을 신앙생활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회개란, 죄를 뉘우치는 일을 포함해서,
삶 전체를 주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코로나라는 재난을,
그동안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하는 계기로,
또 앞으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묵상하고 실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 15, 6)
-한상우신부-
마음의 주소를
찾는 시간이다.
예수 성심께
마음의 길을
다시 묻는다.
우리 삶의
중심에는
우리를
살게하시는
예수 성심이
계신다.
예수 성심은
끊임없이
사랑과 용서를
우리들에게
건네시며
베푸신다.
지극한 사랑은
지극한 정성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이시다.
마음은 열어야
마음이다.
우리가 잃어
버린 것은
서로를 헤아리는
진실된 마음이다.
깨어있는 마음은
잃어버린 양을
몸소 찾아 떠나고
위하는 열린
마음이다.
열려있기에
낮아지고
낮아지기에
서로를
아낄 수 있다.
예수 성심을
닮아가는 것이
참된 우리들
신앙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
우리의 본모습은
우리들
참된 마음에 있다.
우리들 마음을
기다리시는
예수 성심이시다.
예수 성심께
지쳐있는
우리 마음을
봉헌한다.
진실한 기도
참된 실천
이 모든 것은
예수 성심의
간절하신
마음이다.
간절하신 마음은
회개로
지극하신 마음은
독단과 편견
합리화를 겸손된
열림으로
거룩하신 마음은
새마음으로
바꾸어주신다.
끊어진 마음의 길
서로의 관계를
이어주시는
예수 성심이
우리를 아름답게
정화시켜 주신다.
예수 성심에서
길을 찾고
마음의 원천이신
예수 성심에서
마음을 회복한다.
날마다
열리고
나누는
마음의
여정이다.
말씀 나누기 - 예수 성심 대축일-사랑을 보고, 배우고, 키우다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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