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2. 6. 22. 06:47

 2022 6 22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마태오 7,15-20)

 

By their fruits 
you will know th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시야 임금은 주님의 집에서 발견된 계약 책의 말씀을 백성에게 읽어 주고, 그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거짓 예언자들은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알아볼 수 있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에서 이런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송정림, ‘참 좋은 당신을 만났습니다’ 중에서).


항해사는 결코 바람의 방향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배의 돛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정원사는 꽃이 피고 지는 일을 마음대로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농부는 결코 자연의 섭리를 좌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은 가능합니다.
사람은 비가 내리게 하거나 멈추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산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이 많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하지 못한다면서 포기와 좌절을 안고 살아야 할까요? 생각해 보면 희망을 품게 하는, 할 수 있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야말로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사람은 반대로 절망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 것 같습니까?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께서는 희망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면 우리도 희망을 만들어가면서 희망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쁜 나무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나쁜 나무가 아닌 좋은 나무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는 나쁜 열매가 아닌, 당연히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학창 시절에 공부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성적을 맞지 못하면 마치 나쁜 학생이 된 것 같았습니다. 공부 못하면 나쁜 학생이 맞습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수능을 망쳤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를 매스컴에서 종종 봅니다.

우리는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주님으로부터 좋은 나무로 태어났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나를 통해 좋은 열매가 계속해서 나오게 된다는 희망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포기와 좌절 속에서 스스로 나쁜 나무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나쁜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 좋은 나무인데도 잘못된 판단으로 나쁜 나무로 믿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만 커다란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제로부터 배우고 오늘을 살아가며 내일을 희망하자(알버트 아인슈타인).
 

 과정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결과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tzHbmSXH7Q 

람이 뒤통수를 맞거나 배신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내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사람을 막 대하는 사람에게 뒤통수 맞는 일은 없습니다. 어차피 안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뒤통수 치는 사람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입니다. 
  
    영화 ‘겟 아웃’(2017)은 뒤통수를 제대로 맞는 영화입니다. 한 예쁜 대학생이 흑인 운동선수를 꾀어서 자기 부모에게 인사시키러 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집안은 현대 의학 기술로 몸이 좋은 사람들을 데려와 자신들의 뇌를 넣어서 영생을 추구하는 집단이었습니다. 
    대부분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이들은 사람을 과정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지금 좋으면 그만이라고 여기게 합니다. 그래서 미래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인지를 생각 못하게 합니다. 사탄과 그 예언자들이 그런 일을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예전부터 과정이 더 중요한지 결과가 더 중요한지, 혹은 지금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좋은지 아니면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좋은지에 대한 논쟁은 끊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그 결론을 내려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굳이 사람을 판단하려거든 열매를 보고 판단하라고 합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
 
     사람을 판단할 때는 과정보다는 결과입니다. 세상은 결과만 보지 말고 과정을 중시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정을 중시하기를 원하는 이들은 내 뒤통수를 치려는 이들입니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 좋을 수밖에 없지만, 과정이 좋다고 항상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과정입니다. 여기서 열심히 산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가 중요합니다. 이미 그 결과를 예상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세상에서 열심히 과정을 살도록 하며, 시간이 없어 결국에는 성당에 한 번도 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떤 스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는 일을 하다가 좋아하는 일로 옮겨가면 삶이 ‘노동’에서 ‘놀이’가 됩니다.”
지금 놀이하면 좋을까요? 목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행복한 게 중요할까요? 하지만 목적이 없으면 지금 행복한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재테크 강사 김관용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아하는 일로 생계유지하려고 하면 좋아하는 일이 재미없어져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JYP 대표 박진영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아하는 게 음악이고, 잘하는 게 회개라면 JYP 회계팀에 들어오세요.” 
  
    과정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결과입니다. 과정은 항상 고통스럽습니다. 그 과정을 이겨내게 만들어 결국 높은 수준에 올리는 것은 열매입니다. 열매가 지금을 참아낼 수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열매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을 즐기려는 사람은 앞으로도 즐길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맙니다. 
  
    얼마 전 노숙인에게 20유로(약 2만6천 원)를 주었던 한 유튜버가 약 3천만 원의 벌금과 함께 징역 15개월을 선고받은 뉴스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돈만 준 것이 아니라 ‘치약 넣은 오레오’ 쿠키도 함께 주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다며 치약 오레오를 먹은 노숙인은 바로 이를 토해냈습니다. 
    유튜버는 노숙자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20유로라는 돈을 기부하는 선행을 했다고 여겼고, 오랜 시간 양치하지 않은 그에게 치약은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15개월 징역과 2천 5백만 원의 벌금과 그가 좋아하는 유튜브를 5년 동안 하지 못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지금 즐기려 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열매를 맺도록 누군가 지도했어야 합니다. 
  
    김연아 선수나 손흥민 선수는 왜 그리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고통스러운 과정을 참아낼 수 있게 만들어준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할 수 있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즐길 수 있습니다. 은퇴하고도 즐길 수 있습니다. 잘하지 못하면 결국 즐기지 못합니다. 
  
    가리옷 유다만큼 좋은 과정을 거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삶도 거기서 끝났습니다. 열매가 중요합니다. 결과가 중요합니다. 
    구약의 요셉은 꿈쟁이었습니다. 그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꿈 해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잘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역경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했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꿈 해몽으로 감옥에서 풀려나고 이집트의 재상이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배신한 형제들을 살려주는 은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면 분명 목적이 있습니다. 그냥 목적이 아니라 완전히 잘 될 무언가를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역경을 이겨내고 무언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읍시다. 그것으로 주님을 영광스럽게 합시다. 과정이 중요하고, 지금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하며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의도를 묻어두지 맙시다. 그러면 나중에 한 탈렌트를 땅에 묻어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 게으른 종처럼 혼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과정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결과입니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즐기던 과정도 더는 즐길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항상 무슨 열매가 맺힐 것인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최고가 될 것을 선택하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무엇이 되게 만드셨다면 분명 최고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z124IOfsOvE

 -조재형신부-

 

오늘은 미주가톨릭평화신문 6월 5일자 기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하나는 김평만 신부님이 연재하는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이고 다른 하나는 이영우 신부님의 고시원 이야기입니다김평만 신부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구약성경 곳곳에서 하느님을 고아와 과부당시 사회적인 약자들의 보호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하느님께서는 고아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과부가 쏟아 놓는 하소연을 들어주신다힘없는 이당신께 몸을 맡기고 당신께서는 고아에게 친히 보호자가 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은 당시 고대사회의 보편적인 신관에서 벗어난 매우 파격적이고 이례적인 현상이었습니다당시 신은 그 사회의 지배층즉 왕과 귀족사제 등 힘 있는 사람들의 대변자로 여겨졌습니다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사회적 약자 보호 정신에서 한 걸을 더 나아가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이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섯 부류의 사회적 약자즉 헐벗은 사람병든 사람굶주린 사람집 없이 떠도는 사람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언급하십니다구약의 정신과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과의 특별한 연대를 추구했던 전통에 따라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중단 없는 활동을 해 왔습니다.

 

구약 성경이나 예수님께서는 왜 이토록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것이 우리 각자가 실천해야 할 그리고 우리 사회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우선적인 사명으로 강조할까요그 이유는 약자들을 돌보는 일이 하느님의 일(Opus Dei)', 즉 하느님께서 최우선적으로 관심을 두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동창 신부 중에 고시원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지내는 신부님이 있습니다신부님은 고시원에서 가난한 이들과 사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빈민사목 원칙 중 하나도 현장에서 사는 겁니다제가 여기 살아야죠공동사제관에서 출퇴근하면 저도 여기 오는 게 일이 되잖아요여기 살아야 제가 이분들을 알 수 있어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살았던 것처럼 동창 신부님도 편안한 곳을 떠나서 힘들고 어려운 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예전에 교정사목을 할 때에도 그렇게 했습니다출소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출소자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나중에는 빛의 사람들이라는 집을 지어서 출소자들이 사회에 적응 할 때까지 함께 살았습니다출소자들을 위한 은행을 만들어서 저렴한 이자로 대출해 주기도 했습니다동창신부님은 이렇게 말을 맺었습니다. “저희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사는 아닙니다같이 살면서 함께 한다는 것이 교회가 함께 있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들에게 작은 희망과 용기를 준다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제가 잊고 있던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교회가 잊고 있던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외롭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고 있었던 것을 이야기합니다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고우리에 관하여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우리를 거슬러 타오르는 주님의 진노가 크오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화려한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외국과 맺은 동맹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면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경청할 수 있다면 그래서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하나 될 수 있다면 교회는 그 행위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그리고 우리가 교회입니다. 

 우리의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신랄하게 지적하신 양의 탈을 쓴 늑대, 양의 옷을 입은 거짓 예언자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교회 역사 안에는 얼마나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속은 사악과 간계로 가득했지만, 얼굴에는 양의 탈을 쓰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에게 건네는 말은 번지르르 그럴싸했지만, 백퍼센트 거짓이었기에 진실이나 실행력은 전무했습니다. 

 

걸치고 있는 옷은 휘황찬란 삐까뻔쩍했지만, 그들의 내면은 부실하고 허황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속 빈 강정이었고 의미 없이 울리는 꽹가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도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여기저기서 활개를 치며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선량한 백성들을 우왕좌왕 갈팡질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시대 사목자들 어떻게 해서든 깨어 있기 위해 눈을 부릅떠야겠습니다. 잠깐 한 눈 팔면, 조금만 느슨해지면, 순식간에 우리 역시 거짓 예언자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양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손가락질받는 반대 표징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매일 하느님의 사람,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 매일 강한 성령과 성모님의 현존과 동반의식 속에 깨어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발버둥쳐야겠습니다 

 

요즘 저는 존경하는 저희 살레시오회 총장 신부님 앙헬 페르난데스 아르티메 신부님의 메시지를 되풀이해서 곱씹고 있습니다.

  

“사제들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탁월한 행정가, 관리자에 앞서 사람들을 동반하고 돌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굳건히 자리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한 가장 좋은 비결은 기도입니다.

  

사제생활의 연륜이 늘어간다고 자동으로 신앙이 깊어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사제들 가운데서도 일 중독에 빠져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 편리하고 안락한 삶에 푹 빠져 살아가는 사제들도 있습니다. 이보다 끔찍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인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 ‘비좁은 길과 널찍한 길’을 대조시키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마태 7,15)

 

이스라엘 공동체의 분란을 일으키는 이들 중에는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거짓 예언자들이 초래할 위험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예언자나 환몽가가 나타나 너희에게 표징이나 기적을 예고하고 그가 말하는 표징이나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 너희는 그 예언자나 환몽가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따르고 그분을 경외해야 한다.”

(신명 13,2-6)

 

사실 예언자들은 하느님 백성들이 세상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했을 때, 그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하느님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회개하여 하느님 앞에 바로 서도록 자극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예보나 윤리 생활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렸고, 진리에 대한 설명이나 지식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선포하였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를 ‘양’과 ‘이리’의 표상으로 대비시키십니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니 겉의 옷차림을 보지 말고, 속마음을 보라 하시면서,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기준을 ‘행실로 맺는 열매’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마태 7,15)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는 ‘양과 이리’,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의 표상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줍니다.

당신이 ‘참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고, 또한 ‘구원의 열매’라는 좋은 열매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서 '참 예언자'로 제시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면,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라는 말씀은 곧 '참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라는 반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저희의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나는 참 예언자인지, 나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혹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기보다 풍성한 잎이나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헛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저는 거짓 예언자이고 싶지는 않지만 거짓 예언자처럼 겉모양을 꾸미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저는 참된 예언자는 아니지만 참된 예언자 행세는 곧잘 합니다.

제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여 살아갑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신의 화려함을 버릴 때 열매는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마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맺는 열매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매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자신이 따 먹으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은 바로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진리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 볼 수 있다.”

(마태 7,17)

 

주님!

잘려 불태워지기 전에 가지를 자를 줄을 알게 하소서!

위선의 껍데기 옷을 벗고 기만의 숨겨둔 살을 도려내게 하소서!

치장하여 꽃을 피우기보다 행실로 열매 맺게 하소서!

그럴싸하게 때깔을 꾸미기보다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당신께 붙어 양분을 얻고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좋은 열매를 보면」

 -반영억신부-

 

사람이나 과일, 채소에 이르기까지 잘 익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햇빛과 비, 그리고 밑거름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보면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큰 사람이었는지는 입술로 하는 말에서가 아니라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도 그 끝을 보면 놀라워할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기다리며 햇빛과 비, 거름을 주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고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멋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없어지면 힘이 듭니다. 따라서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어야겠지만 기왕이면 갈수록 깊어지는 멋을 담아야겠습니다. 겉은 화려하고 속빈강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경륜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무서워합니다. 눈이 무섭다고 합니다. 제가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남의 속을 볼 줄 모릅니다. 다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저를 무섭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뭔가 켕기는 것이 있지 않은지.. 따뜻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외견상으로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겉만 보아서는 그 사람이 사심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선적으로 사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속이 훤히 드러나게 됩니다. 더군다나“사람은 속여도 하늘은 못 속입니다.” 그러므로 눈속임으로 하지 않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우리의 전체 생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이 세 가지 각각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또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할 때 좋은 열매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집니다.’결국 신앙과 사랑으로 무르익은 삶만이 심판의 불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익은 좋은 열매가 되십시오! 혹 시들한 열매가 보이거든 햇빛을 보게 하고 비를 맞을 수 있게 하며 그리고 거름을 주십시오. “열매를 보면 나무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녀를 보면 부모를 짐작하여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송영진신부-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16ㄱ).”

 

구약시대 때에도 거짓 예언자들이 많았고, 사도시대 때에도 많았고,

그리고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적 없는데도 예언자라고 자칭하는 거짓 예언자들은

우리를 속여서 ‘멸망의 문’으로 이끌고 갑니다.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이라는 말씀은,

겉모습만으로는 거짓 예언자라는 것을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라는 말씀은,

“거짓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일만 한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활동의 결과’를 뜻합니다.

진짜 예언자를 따라가면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가게 되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게 되지만,

거짓 예언자를 따라가면 하느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되고,

결국 구원의 길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어떤 예언자 때문에 사람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서 멀어진다면, 그 예언자는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13-15).”

사탄이 인간에게 접근할 때에는 천사의 모습으로 접근합니다.

거짓 예언자나 거짓 사도가 자기 입으로 “나는 가짜다.” 라고

말하는 일은 없습니다.

사이비 종교나 이단 종파는 자기들만이 진짜 종교라고 선전합니다.

그러니 그들의 말만 듣지 말고, 그들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되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 갑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1티모 6,3-5).”

이 말은, 오늘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이단 종파와

사이비 종교의 모습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말입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ㄴ-20).”

 

배반자 유다는 처음에는 좋은 나무였는데, 나쁜 나무로 변했고,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쁜 나무였지만 회개해서 좋은 나무가 되었습니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라는 말씀은,

“끝까지 좋은 나무로 남아 있는 사람은

구원이라는 좋은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의 약속입니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라는 말씀은,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좋은 나무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은 멸망한다.”

라는 경고입니다.

지금 좋은 나무라고, 즉 지금 잘하고 있다고 자만심에 빠져도 안 되고,

반대로 지금 나쁜 나무라고 해도

“나는 틀렸다.” 라고 생각하면서 포기해도 안 됩니다.

누구에게나 좋은 나무로 마무리할 가능성과 나쁜 나무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모두 있습니다.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라는 말씀을,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라는 말씀에 맞추면,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좋은 나무일 수 없고,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나쁜 나무일 수 없다.”입니다.

 

좋은 나무에 관한 말씀의 바로 뒤에 ‘실행’에 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이 말씀들을, 좋은 나무가 되어서 좋은 열매를 맺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되려면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행해야 합니다.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성경 지식과 교리 지식은 쓸모가 없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유혹을 물리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내부에서 생기는 유혹을 물리치는 일입니다.

구원받으려면 외부와 내부의 유혹을 모두 물리쳐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내가’ 구원받기 위한 일입니다.

‘내가’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면, 그 열매가 하나의 씨앗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 20)

-한상우신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좋은 나무는
좋은
삶의 방식인
복음을 따른다.

복음의 열매는
우리 삶처럼
하루아침에
맺어지지 않는다.

하느님과
멀어지면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좋은 사람을
창조하시듯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만들어간다.

나무는 열매를
열매는 나무를
향해 서로에게
가장 좋은 것을
건넨다.

좋은 열매는
쉽게 태어나지
않는다.

좋은 사랑으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어간다.

좋은 나무는
나무의 전부를
열매에게
쏟아붓는다.

좋은 사랑을
배우는 시간이다.

열매는 안다.
나무의
가장 좋은
사랑이라는 것을
열매는 안다.

하느님과
가까워질수록
좋은 사람
좋은 나무
좋은 열매가
되는 것이다.

좋은 사람은
좋은 마음
좋은 실천으로
드러난다.

우리들이
맺은 열매가
우리들 삶이
되는 것이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2주 수요일-너는 나의 예언자, 나는 너의 예언자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6월 27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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