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20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2. 6. 20. 06:01

 2022 6 20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오 7,1-5)

 

For as you judge, 
so will you be judged,
and the measure with which you measure 
will be measured out to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이 몰락한 것은 주님의 율법과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빼내야 이웃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형제님께서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습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기에 너무나 반가웠고 다시 예전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으면서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술이 한두 잔 계속 늘어가면서 어떤 친구가 어렸을 때의 형제님 별명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 별명은 ‘꽈당’이었습니다. 반대표로 계주 달리기 시합에 나갔는데, 너무 긴장해서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 뒤로 친구들은 ‘꽈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꽈당’이라는 별명을 좋아할 리가 없었겠지요. 자신의 굴욕을 기억나게 하는 별명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뒤로 단 한 번도 친구들 앞에서 넘어진 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얻은 별명이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꼬리표가 달린다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쉽게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남에 관한 섣부른 판단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던 것이지요.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악플을 보십시오. 근거도 없는 가짜 뉴스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 가짜 뉴스에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져야 할 죄인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야 할 사람이 손가락질받게 됩니다. 또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이 심판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재판관으로서 하느님만이 지니시는 권위를 침해하면서 남을 단죄하는 행위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심판은 하느님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서 남을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리를 탐내는 커다란 죄가 됩니다. 이런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보려고 하지 말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남의 작은 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주님께서는 “위선자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라는 그리스말에서는 ‘패륜아, 사악한 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거스르는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 과연 하느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입구에서부터 쫓겨나지 않을까요?

주님으로부터 ‘위선자야!!’라는 말을 절대로 듣지 않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남에 관한 판단은 그만두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판단과 심판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면서 ‘왜?’라고 하지만 나는 없는 현실을 꿈꾸면서 ‘왜 안 돼?’라고 말한다(로버트 케네디). 

 남을 심판하기보다 하느님의 길을 지키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8ZDAUTNUlTI

 -조재형신부-

 

오랜만에 감기가 찾아왔습니다지난 3년 동안 코로나 때문에 긴장해서인지 감기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손을 자주 씻었고마스크를 착용했고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가급적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백신을 4번 맞았고코로나에 대한 긴장도 풀려서 인지 손도 자주 씻지 않았고마스크도 거의 착용하지 않았고 모임에 자주 참석했습니다그래서인지 감기가 제 몸으로 들어왔습니다감기의 증상이야 비슷하지만 이번에 찾아온 감기는 콧물이 많이 났습니다콧물을 자주 닦다 보니 코 아래가 물집이 잡혔고작은 상처가 생겼습니다다행히 코로나 테스트에는 음성이 나왔습니다감기는 2주간 저와 친구를 하더니 말도 없이 떠나갔습니다감기가 떠나갔지만 코 밑에 작은 상처를 선물로 주고 갔습니다그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입니다감기는 분명 반갑지 않은 친구입니다그러나 감기가 오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신문 홍보를 갈 때나여행을 갈 때면 델타항공을 자주 이용하는 편입니다대한항공과 제휴를 맺어서 마일리지 적립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회원가입을 하면서 급한 성격 때문에 영문이름을 잘못 기재했습니다그래서 인지 회원으로 항공권 구매를 하면 결재가 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늘 비회원으로 항공권을 구매했고 그래서인지 마일리지 적립을 못했습니다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말 못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후배 신부님이 델타항공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저의 이름을 다시 수정하였습니다그랬더니 회원으로 항공권을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후배 신부님은 지난번 항공권에 대한 것도 마일리지 적립을 해 주었습니다급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인지 잘못된 것을 수정하는 것이 어렵습니다차분하게 살펴보면 분명 길은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이것저것 만져보면 길을 찾을 수 있는데 혹시 잘못 될 것 같아서 쉽게 포기하곤 했습니다의사가 처방전을 줄 때는 먼저 환자의 상태를 살펴보게 됩니다원인을 알면 처방전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아시리아의 침략을 받아서 이스라엘이 망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아시리아는 강대국이었고이스라엘은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침략을 받았습니다아시리아는 자신들의 정책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낯선 땅에서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원인을 생각하였습니다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군사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었습니다아시리아가 강대국이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지도자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근본적인 원인이 있었습니다그것을 오늘 독서는 담담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다른 신들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풍속과 이스라엘 임금들이 만들어 낸 것에 따라 걸어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를 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연줄이 끊어지면 연은 곧 땅으로 떨어지듯이 하느님과 멀어지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시련과 고난을 겪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말씀하십니다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허물을 보라고 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야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저 자신도 많은 들보를 가지고 있습니다작은 돈이지만 정성껏 봉헌했던 과부의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하느님 앞에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던 세리의 겸손도 갖지 못했습니다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오늘 제게 말씀하십니다. ‘가브리엘네 눈의 들보를 먼저 보아라.’

 <“남을 심판하지 말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

(마태 7,1)

 

이는 우선 '있는 그대로 보라'라는 말씀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라는 ‘보는 눈’과 ‘받아들이는 마음’이라는 두 가지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제거하는 방법도 함께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마태 7,5)

 

그렇다면 대체 ‘들보’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우선 자기 눈 안에 있는 ‘들보’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방식, 곧 보는 틀, 보는 관점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곧 심판이 행해지는 데 기준이 되는 ‘준거 틀’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준거 틀’이 복음의 정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 편견, 세속정신 등의 고정관념이라면, 그것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들보를 빼내기만 하면 다일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하느님의 눈과 마음’이 들어서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눈과 마음'이야말로 그것을 빼내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관점, 자신의 눈’을 빼낼 수 있는 길은 바로 우리 안에 심어진 사랑의 빛을 밝히는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추는 빛으로 상대를 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호의와 자비’로 상대를 보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위하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예수님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일입니다.

 

결국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그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야고 2,12-13)

 

그래서 루카복음에서는 병행 구문에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루카 6,37)

결국 심판을 넘어서는 이 용서와 자비야말로 바로 심판을 벗어나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 7,2)

이는 타인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심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가 남에게 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결국 심판은 ‘자기 얼굴에 침 뱉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2,3)

 

하오니,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마태 7,5)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 5)

-김찬선신부-


우리자신을
찌르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의
들보이다.

심판을 멈추고
우리 눈에서
먼저 들보를
빼내어야 할
실천의 때이다.

심판의
들보에 갇히면
삶은 날카롭고
관계는
무의미해진다.

덮어주어야 할 것과
빼내어야 할 것의
분명한 식별이
필요하다.

신앙의 삶은
들보와 함께
갈 수 없다.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들보를 빼내는
것이 삶의
변화이다.

내가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

우리중심으로
살아온 시간이
들보의 시간이다.

욕심으로
오염된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여
주시는 주님이시다.

티와 들보의
무의미한
경쟁을 멈추고
나눔과 배려의
빛으로
나가야한다.

들보가 아니라
십자가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맑고 깨끗한
십자가의
영혼이다.

어리석고 아픈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먼저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깨닫고
들보를 먼저
빼내는 일이다.

이것이 삶을
변화시키는
내적 동기이다.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삶이
복음이다.

아름다운
결단이며
변화의 새로운
삶이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게하는
들보를 빼내는
회개의 날이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2주 월요일-판단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나?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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