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23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세례자 요한은 사제였던 즈카르야와 성모님의 친척인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주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위대한 예언자이다. 그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비윤리적 생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의 간계로 순교하였다. 그는 ‘말씀’이신 주님의 길을 준비한 ‘광야의 소리’였다.
★★★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루가 1,57-66.80 )
He asked for a tablet and wrote,
“John is his name,”
and all were amazed.
Immediately his mouth was opened,
his tongue freed,
and he spoke blessing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주님께서 그를 모태에서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그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다고 말한다(제2독서).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열린 할례식에서 아기 아버지 즈카르야가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 부르겠다고 한다. 그 순간, 즈카르야는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한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버킷 리스트가 있습니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말입니다. 이 버킷 리스트가 있어야 희망을 품고 지금을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읽었던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버킷 리스트는 무엇인가? 버킷 리스트는 내게 사치스러운 말이야. 나는 버킷 리스트가 없어. 이유는 간단하지. 하고 싶다고 하면 바로 실천하니까. 남겨두지 않으니 리스트에 적을 수가 없지. 왜 그렇게 하고 싶은 그걸 지금 당장 하지 않고 종이에만 적고 있나? 먹고 싶은 건 매일 당장 어떻게든 잘 먹고 살면서 말이지.”(김종원, ‘마지막 질문’ 중에서)
버킷 리스트가 있다면 하고 싶은 것을 전혀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희망은 실천을 당장 해야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막연한 희망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막연하게 하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희망이 의미 있을까요? 희망의 구체화를 위해 지금 더 주님의 뜻을 잘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봐야 합니다. 희망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실천해야 희망이 구체화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지냅니다. 그는 희망을 안고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얼마나 아기 갖기를 희망했겠습니까? 그러나 나이가 많아서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즈카르야는 천사로부터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를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희망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은,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 때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요한’이라고 글 쓰는 판에 쓰는 순간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희망을 안고 태어난 세례자 요한도 철저하게 희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위대한 예언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고백하면서 철저하게 희망의 주님만을 바라보며 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희망은 믿음의 실천을 통해서 구체화 됩니다. 막연한 희망이 아닌,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면서 보이는 희망이 될 수 있으며 그 희망 안에서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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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이름을 지어준 분의 이름을 들어 높일 때 성장한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sOcajwCcNmY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하느님은 즈카르야가 이름을 지어주도록 허락하시지 않고 당신이 주신 이름을 받도록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세례자 요한을 태어날 때부터 당신이 쓰시기 위한 계획이 드러납니다.
저는 이름을 아버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사실 놀림을 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저는 제 이름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아버지께서 제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저를 당신과 같게 여기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상대를 나와 동일시하겠다는 뜻입니다.
반려견이 죽었을 때의 고통은 자녀가 죽었을 때의 고통에 비견될 정도로 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반려견에게 이름을 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어주고 불러주던 이름이 없는 동물이 죽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그 동물을 나처럼 사랑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름을 지어주시며 당신처럼 대해주시는 부모의 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노력합니다. 그렇게 부모의 수준처럼 성장하여 부모가 사는 세상에 살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손흥민 선수나 김연아 선수를 봅시다. 그들의 부모는 그들에게 이름을 준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에게 이름을 준 분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피땀을 흘렸고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모든 아이가 그렇습니다.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부모만큼 성장합니다.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는 이는 부모처럼 성장할 수 없고 그래서 사회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부모는 이름만이 아니라 그 이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살과 피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세례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이 즈카르야가 아닌 하느님에게서 와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 인입니다. 세례명을 가진 우리도 이에 감사하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도록” 살아갑니다. 내가 주님께 얼마나 영광을 돌리며 사느냐에 따라 내가 하느님 나라에 얼마나 합당하게 성장하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동물들은 왜 인간처럼 될 수 없을까요? 어느 정도는 그 이름에 맞게 성장하지만, 인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이름을 지어준 대상의 이름을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를 발음하지 않으려고 다른 모음을 붙여두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정도로 발음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절대 부르지 않기를 원하셨을까요? 그러면 뭐 하러 당신 이름을 알려주셨을까요? 우리가 합당하게 부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는 부모의 이름을 불러주는 감동적인 동영상이 여럿 있습니다. 처음 이런 제안을 받았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부모의 이름을 부르며 전화할 때는 다 눈물을 흘립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나를 위해 당신들 이름 없이 그저 엄마와 아빠로 살아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각자의 이름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자녀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 엄마로 살아온 김경희님의 인생은 힘들지 않았나요?”
대부분 부모님은 물론 힘들기도 했지만, 부모로 살 수 있게 해 준 자녀들에게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질문도 있습니다.
“엄마에게 자식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부모들은 한결 같이 대답합니다.
“내 인생의 전부!”
이름을 준다는 말은 내 전부를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시 우리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부모의 이름을 불러줄 때 나도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고 부모처럼 성장합니다.
“부모님의 이름을 불러보니 어떠셨나요?”
자녀들은 대답합니다.
“지금까지 그냥 엄마는 엄마인 게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거 같아요.”
이제 나도 성장했다면 부모님의 이름을 불러줄 수도 있어야겠습니다. 그분들은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당신 이름을 잃고 살아오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대등하게 여겨주신다면 나도 그분 뜻에 따라 성장했음을 그분 이름을 부르며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아, 이 아이가 이만큼 컸구나!’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장하게 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분명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찬양!’이 됩니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로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 됩니다.
저도 신자분들이 “삼용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기분이 나빠서 “앞으로 당신을 신부님이라 부르지 않겠소. 당신을 전삼용 씨라고 부르겠소”라고 하면 그것은 사제로서의 저를 모독하는 행위가 됩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모처럼 성장한 것은 부모에게 영광이 됩니다. 그런 의미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오히려 그분께 찬미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내가 하느님 덕분으로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읍시다. 그 감사와 사랑을 담아 야훼라고 불러봅시다. 그분은 분명 기뻐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VhWiGq6kI4A
-조재형신부-
어릴 때 읽은 ‘시골 쥐와 서울 쥐’라는 이솝우화가 있습니다. 서울 쥐가 시골 쥐의 집으로 놀러갔습니다. 시골 쥐가 내놓은 음식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식어 빠진 감자와 옥수수 몇 알이었습니다. 서울 쥐는 음식을 보며 눈을 찌푸렸습니다. 그리고 시골 쥐를 서울에 초대했습니다. 서울 쥐의 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으려는 순간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서울 쥐는 시골 쥐와 함께 쥐구멍으로 숨었습니다. 사람 눈에 뛰면 죽기 때문입니다. 다시 나와서 음식을 먹으려는데 이번에는 고양이 소리가 들렸습니다. 서울 쥐와 시골 쥐는 다시 쥐구멍으로 숨었습니다. 고양이에게 잡히면 죽기 때문입니다. 시골 쥐는 서울 쥐와 있는 것이 즐겁지 않았습니다. 비록 맛있는 음식이 있지만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골 쥐는 다시 시골로 내려왔습니다. 비록 먹을 것이 부족하지만 아무 두려움과 걱정이 없는 시골이 편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의 초청을 받아서 큰 성당으로 신문 홍보를 갔습니다. 성당의 시설과 사제관은 부러웠습니다. 널찍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성당에 학교와 교육관이 있었고, 주차장도 충분했습니다. 성당의 좌석도 넓었고, 공간도 아름다웠습니다. 사제관은 손님방도 큼지막했습니다. 부러운 마음에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골 쥐가 생각났습니다. 매일 영어미사와 한국어 미사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주일에는 한국어 미사 2번 그리고 영어 미사를 2번 한다고 합니다. 마침 그 때는 보좌신부님이 한국으로 휴가 갔다고 합니다. 영어 모임, 한국어 모임도 있고, 참석해야 할 회의도 많다고 합니다. 교구의 모임도 빠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 제가 하는 일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문 홍보를 다니니 마치 여행을 다니는 것처럼 즐거웠습니다. 신문사 운영에 재정적인 어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지난 3년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과 신문을 만드는 일이 훨씬 마음이 편하였습니다. 신문 홍보를 마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문사로 돌아왔습니다.
예전에 비슷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늘 불평이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가벼운 십자가를 청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평이 많은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있는 동산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마음에 드는 십자가를 고르라고 하였습니다. 불평이 많았던 사람은 신나서 십자가를 고르려고 동산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십자가가 없었습니다. 결국 고르고 골랐던 십자가를 들고 오는데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지고 가던 십자가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갈 수 있는 만큼의 십자가를 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가볍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십자가만 무겁다고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를 힘차게 지고 살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질 수 없는 십자가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겸손함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질 수 있는 십자가와 질 수 없는 십자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신다고 합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역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였고, 달릴 길을 충실히 달린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나는 오셔야 할 그분이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목소리 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겸손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을 지내면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충실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고 합니다. 남의 떡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나에게 주어지는 사명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의 지극한 겸손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자각!
-양승국신부-
대부분이 인간 존재는 수명이 다해 쇠락하고 사그라들고, 땅에 묻히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사람들의 뇌리에서도 소멸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천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그의 생애가 기억되고 칭송받는다는 것,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대부분 성인성녀들의 축일은 천국에 입국하신 날, 다시 말해서 돌아가신 날로 정해 기념하고 경축하는데.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하나 더 추가됩니다. 탄생 대축일. 그만큼 구세사 안에서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의 중요성,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 측면이라고 살 수 있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유다 지방의 명문 사제 가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늦둥이 아들로 태어납니다. 명가에서 태어난 외아들, 우여곡절과 큰 기대 끝에 태어난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그에 대한 교육적 투자가 컸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제대로 공부하였고, 큰 깨우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파악하게 된 그는 더 큰 뜻을 품고, 더 큰 깨달음을 위해 인간 세상을 떠나 깊숙한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복음사가들이 증언하는 것처럼 세상의 시류와는 완전 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다른 거짓 예언자들처럼 감언이설이 아니라 직설적 화법으로, 호의호식이 아니라 메뚜기와 들꿀을 주식으로 삼으며 낙타털옷을 걸치는 극단적 청빈 생활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하는 집중적인 기도로...
호화찬란한 도심의 불빛을 떠나 깊고 어두운 광야, 춥고 배고픈 광야로 들어간 세례자 요한은 거기서 자신을 더욱 연마시키고 내공에 내공을 거듭 쌓아나갑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예언자로서의 사명에 더욱 충실하기 위해, 뿐만 아니라 초롱초롱한 눈, 명료한 의식으로 깨어있다가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신속 정확하게 알아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혀끝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인 생활을 통해서, 온 몸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자 요르단강에서 자신의 모습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죄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명설교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물로 세례를 베풀기 시작합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감동적이고 날카롭던지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권고에 따라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수많은 제자들이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제자단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어떤 몰지각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을 규합해서 정치세력화했으면 하는 꿈까지 꿀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단시일 내 세례자 요한은 자신도 모르게 전국민적으로 선풍적 인기몰이를 하게 되어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란 한 인물의 등장을 계기로 형성된 특별한 신드롬에 놀란 유다 최고 의회는 사람들을 그에게 보내 도대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합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의 대답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습니다. 거침없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보십시오. 세례자 요한의 지극한 겸손을,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자각을.
세례자 요한은 정녕 충실했던 대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아무런 준비 없이 자신의 예언자 직에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보다 합당한 선구자이자 하느님의 종으로 스스로를 준비시키기 위해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극단적 금욕생활과 열렬한 기도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았으며,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기 위해 끝도 없는 고행을 계속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목숨을 건 준비 작업으로 인해, 그가 너무나도 잘 닦아놓은 길 위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안전하게 잘 착륙하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이영근신부-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탄생 이야기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그 경이로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시 139,4)
또한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이사 49,1-2)
~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이사 49,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 존재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사실 그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리아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자, 그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만약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리해 버린다면, 요한의 탄생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결코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요 가치를 부여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의 이름은 요한'
(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게 하소서.
당싱이 주신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존재로 하느님을 가리키는 존재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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