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2. 7. 14. 07:15

 2022 7 14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마태 11,28-30)

 

Come to me, 
all you who labor 
and are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베푸신다고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안식을 주겠다고 하시고, 당신 멍에는 편하고 당신 짐은 가볍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1960~70년대 스포츠화 시장의 독보적인 회사는 ‘아디다스’였습니다. 워낙 독보적이어서 다른 브랜드는 감히 경쟁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아디다스가 독점하고 있는 시장에서 몇몇 젊은이가 운동화 회사를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자본도 부족하고 경험도 없기에, 주위에서는 부정적 평가가 가득했습니다. 창업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폐업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모여서 판도를 바꿀 전략을 모색했습니다. 여러 방안이 제시되었지만, 그 어떤 것도 판도를 바꾸기에는 부족한 방안이었습니다. 한참을 회의하다가 이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떠들든 간에 상관하지 말자고. 그냥 하자!”

“그냥 하자!”는 말에 젊은이들은 힘을 얻었고, 이를 회사의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Just Do It.”

맞습니다. ‘나이키’ 회사입니다. 나이키는 창업 후 10년도 채 되지 않아 아디다스를 앞질러 전 세계 최대 스포츠용품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찾는 것보다, 그냥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보다, 그냥 해야 희망도 보입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지루해서…. 등의 이유를 찾다 보면 주님의 일은 절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일이 너무나 커다랗고 무거운 짐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는 주님의 큰 은총을 받을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따라서 그냥 해야 합니다. “Just Do It.”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는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하여 마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를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 ‘멍에’라는 표현을 ‘하느님의 법’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은 하느님의 법이 무겁다거나 사람을 짓누른다고 여긴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기 위한 세부 조항이 613개나 있었음에도 이를 무겁고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고, 일상 안에서 지키기 어려워서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절대로 무거운 짐이 아닌, 진정으로 편하고 가벼운 짐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믿음을 간직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인생의 짐을 흔쾌히 지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멍에를 매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이 세상 안에서 어려워 보일 수도 있지만,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가져오며 더 나아가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을 그냥 해야 합니다. “Just Do It.”
사람의 가치를 직접 드러내는 것은 재산도 지위도 아니고 그의 인격이다(드니 아미엘)

 사람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심장으로 산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eDM2HX9WQY 

 ‘금쪽같은 내새끼 104회에서 아빠 눈치를 너무나도 많이 보는 초2 금쪽이가 나왔습니다. 금쪽이는 사고뭉치입니다. 그래서 아빠에게 맨날 따끔한 훈육을 받습니다. 아이도 자기가 왜 그러는지 모릅니다. 길을 가다 쓰레기통을 짓밟고 화단의 꽃들을 뽑아 엉망으로 만들어놓습니다. 그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면 그게 다 문제 행동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는 게 너무 버겁습니다. 

  

    문제는 아빠에게 있었습니다. 아빠는 13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그전에도 아빠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책을 보고 자신은 좋은 아빠가 되려고 합니다. 훈육에 너무 철저합니다. 하지만 아빠는 아이에게 줄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 아버지에게 마음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빠가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닌 잔소리가 됩니다. 

  

    아이는 아빠의 훈육 때문에 아빠가 무섭습니다. 무서운 대상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를 사회에 적응시키려면 따듯한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타인의 아픔을 읽고 대인관계를 잘해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 금쪽이는 인형 외에는 친구가 없습니다. 이웃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아빠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만 줄 수 있습니다. 가지려면 받아야 합니다. 

    아이는 아빠의 따듯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빠가 먼저 따듯한 마음을 가진 이를 사랑해야 하고 자녀가 자신을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들이 아빠 심장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한 마을에 이웃한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넓은 초원에 많은 염소를 키우고 있었고 그 옆집에는 사냥꾼이 살았는데 아주 사나운 개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 사냥개는 종종 집 울타리를 넘어 염소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본 염소 주인은 사냥꾼에게 개들을 우리에 가둬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지만, 사냥꾼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오히려 속으로 화를 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우리 집 마당에서 개를 키우는데 무슨 상관이야?’ 

 

    며칠 후 사냥꾼의 개는 또 농장의 울타리를 뛰었고, 염소 몇 마리를 물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염소 주인은 더는 참지 못하고 마을의 치안 판사에게 달려갔습니다. 염소 주인의 사연을 들은 판사는 “사냥꾼을 처벌할 수도 있고, 또 사냥꾼에게 개를 가두도록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판사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친구를 잃고 적을 한 명 얻게 될 겁니다. 적과 이웃이 되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친구와 이웃이 되고 싶으신가요?”

염소 주인은 “당연히 친구와 이웃이 되고 싶죠”라고 답했습니다.

판사는 “잘됐군요. 한 가지 방법을 알려드릴 테니 그렇게 해보시죠. 그럼 당신의 염소도 안전하고 좋은 이웃도 얻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제안했습니다.

  

    판사에게 방법을 전해 들은 염소 주인은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웃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장 사랑스러운 새끼 염소 세 마리를 골라 이웃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웃의 어린 세 아들에게 염소를 선물했습니다. 사냥꾼의 세 아들은 염소를 보자마자 푹 빠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매일 염소들과 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들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사냥꾼의 마음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마당의 개가 염소를 물어서 해치지 않을까 걱정이 된 사냥꾼은 개를 큰 우리에 가뒀습니다. 염소 주인도 그제야 안심했습니다. 사냥꾼은 염소 주인의 친절함에 보답하려고 사냥한 것들을 그와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염소 주인은 사냥꾼에게 염소 우유와 치즈를 보답으로 주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가장 좋은 이웃이자 친구로 지냈습니다. 

 

    상대가 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닮게 하고 싶거든 나를 사랑하게 만드십시오. 나를 사랑하게 되면 나의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사랑은 서로의 심장을 교환하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 마음으로 당신과 세상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그분께 드리고 그분 마음을 받읍시다. 그러려면 오늘도 조금 더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당신 심장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내어주십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6lNRSBBWuWs

 -조재형신부-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제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습니다인류 앞에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하나는 단일행성종으로 남아 언제가 다가올 멸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다른 하나는 다중행성종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것입니다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탐험과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이제 우리의 시야를 지구라는 좁은 땅에서 우주라는 넓은 공간으로 넓혀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그리고 새로운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아브라함에게 땅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자손들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아브라함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기존의 질서와 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낯설고 거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습니다.” 어부는 그물을 손질하여 고기를 잡은 것이 직업입니다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면 됩니다조상들이 그렇게 살아왔고후손들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어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길입니다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길입니다단일행성종에서 다중행성종으로 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시간과 공간의 에 묶여서 살아가는 운명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멋진 세상을 이야기하십니다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이야기하셨습니다하느님나라는 우주선을 타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하느님나라는 능력과 업적으로 가는 곳도 아닙니다하느님나라는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가는 곳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사람들이 곤경 중에 당신을 찾고당신의 징벌이 내렸을 때 그들은 기도를 쏟아 놓았습니다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주님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주님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를 떠났을 때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강대한 나라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유배를 떠나는 유대인들은 절망과 허탈감이 가득했습니다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하느님께서 징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언젠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고흩어졌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행복하게 살날이 올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 속담에 밑 빠진 독에 물 붇기라는 말이 있습니다우리가 사용하는 시간도 그렇습니다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루 24시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어떤 사람은 기도하고가족들과 대화를 하고책을 읽고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이웃을 위해 봉사하고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피정을 하면서 시간을 사용합니다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본인만을 위해서욕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누군가를 시기하고 험담하면서음주와 도박을 하면서 시간을 사용합니다처음은 별로 표시가 나지 않겠지만 한쪽은 안전한 곳간에 재물을 쌓은 사람과 같고 다른 한 쪽은 깨진 독에 물을 부은 것과 같을 것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안전한 곳간을 말해 주고 계십니다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고난과 고통이 찾아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안전한 곳을 말씀해 주십니다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재물은 함께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친구들은 빈소에 와서 울어 주기는 할 것입니다가족들은 장지에 와서 우리를 묻어 줄 것입니다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끝까지 함께 하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뿐이십니다그러기에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내 짐은 가볍다.” 

 시원한 물 한 잔 하고 가세요!

 -양승국신부-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자주 드는 생각 하나가 있습니다. 인간 존재 하나하나가 마치 어여쁜 꽃 한 송이 같다는 생각입니다. 각자의 인생이 한 송이 꽃처럼 예쁘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열흘 붉은 꽃 없다고, 활짝 피어오르는가 하면, 순식간에 시들고 말라버리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네 인생, 긴 것 같지만 찰나같이 짧습니다. 솜털 같은 유소년기, 어여쁜 청소년기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장년기로 넘어갑니다. 눈 깜짝할 사이 어느새 희끗희끗한 노년기에 접어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순풍에 돛단 듯이 인생이 술술 풀려나갈 때도 있습니다. 만개한 한 송이 꽃처럼 절정에 도달할 때도 있습니다. 만사형통하고 승승장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잠시입니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 이런저런 다양한 병고 앞에 노출되고, 결코 원치 않는 심연의 바닥체험도 하게 됩니다. 깊은 상처에 홀로 돌아서서 눈물짓곤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안쓰럽고, 가련하고, 측은한 존재가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오늘 주님께서는 참으로 큰 위로와 격려의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1장 28~29절)

  

고생 많이 하기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특별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생들을 가만히 분석해보니 하지 않아도 될 고생들, 결국 ‘사서 고생’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신도 모르게 그 지옥 같은 ‘쌩고생’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다들 너나 할 것 없이 죽을 고생들입니다. 어디 가서 마땅히 하소연할 곳도 찾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 시대 우리 교회에 주어지는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어야겠습니다.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말 못할 고초에 마음 깊이 공감하며 맞장구쳐줘야겠습니다.

  

그들이 소리 없이 흘리고 있는 서러운 눈물을 조용히 닦아줘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문턱을 완전히 낮춰야겠습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다양한 모습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은 세상을 향해 활짝 두 팔 벌리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모든 인간이 다 존귀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생명 붙어있는 모든 인간이 다 하느님의 모상이자 거룩한 창조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앞에는 그 어떤 차별도 없었습니다.

  

혹독한 더위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물 한 잔 하고 가세요, 요기라도 하고 가세요, 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포근하게 그들을 감싸 안고 격려의 말이라도 한마디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물이자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변장하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또 다른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이영근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마태 11,28)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나그네가 바랑을 지고 다니듯, 바랑이 없는 거지도 끼니를 챙겨야 하는 ‘짐’을 져야 하듯, 오늘도 우리는 삶을 ‘짐’으로 지고 살아갑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있고, 수도자로서 스스로 짊어진 ‘짐’도 있습니다.

부모로서 져야 하는 ‘짐’이 있고, 자녀로서 져야 하는 ‘짐’이 있고, 가족으로서 함께 져야 하는 ‘짐’이 있습니다.

질병과 육신, 상처와 나약함, 분노와 원망을 ‘짐’으로 지고 가기도 합니다.

 

형제를 ‘짐’으로 지고 가고, 세상을 ‘짐’ 지고 가며, 자기 자신을 ‘짐’으로 지고 갑니다.

자신만이 짊어져야 하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짐’이 있고, 부당하게 떠맡겨지는 ‘짐’도 있고, 피하고 싶은 ‘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짐’을 다른 이에게 떠맡기기도 하고, 다른 이의 ‘짐’을 떠맡기도 하며, 함께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탄생과 더불어 생명을 ‘짐’으로 짊어지고 살아가고, 살면서는 죽음을 ‘짐’으로 짊어지고 죽어갑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그런데 나의 몸에서, 나의 짐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고 있는가?

 

사실 예수님께서도 ‘짐’을 지고 가셨습니다.

세상을 짊어지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아니, 그 ‘짐’을 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로 그 ‘짐’을 지고서야 가실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결코 그 ‘짐’을 지지 않고는 가야 할 그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요, 십자가 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 ‘짐’은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길을 갈 수 있도록 를 도와주고 북돋아줍니다.

사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짐’이 아니라 짐을 지지 않으려는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오히려 ‘짐’으로 하여 우리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짐’이 우리를 짊어지고 가는 까닭입니다.

정녕 ‘짐’을 지고서야 갈 수 있는 길을 가는 까닭입니다.

‘짐’이 없이는 가지를 못하는 길을 가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짐’은 우리를 북돋아주고 도와주는 은총입니다.

그 ‘짐’은 저를 구원으로 이끄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멍에'에 짐을 올려놓고 그리스도와 함께 짐을 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갑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돕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십니다.

 

그리스도의 멍에에 짐을 올려놓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몸소 우리의 ‘짐’마저 짊어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짊어진 짐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십자가를 사랑으로 지고서 제가 갈 길을 사랑으로 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15주 목요일-방향도 바꾸고 방식도 바꿔라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