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Margaret K 2022. 6. 11. 06:32

2022 6 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바르나바 성인은 키프로스 섬의 레위 지파 출신으로,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본이름은 요셉이며(사도 4,36 참조) 마르코 성인의 사촌(콜로 4,10 참조)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칭송받던 바르나바 사도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하여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60년 무렵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서 순교하였다.

☆☆☆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릴 만하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마태오 10,7-13)

 

 As you enter a house, wish it peace.

If the house is worthy, let your peace come upon it;

if not, let your peace return to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보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self-esteem’이라는 영어를 쓰는 자존감은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마음을 가지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을 스스로 가잘 수 있을까요? 옆에 있는 사람이 “너는 참 못났어. 왜 그렇게 사니? 장차 뭐가 되려고 그러니?” 등의 말을 계속하는데도 스스로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받아야 괜찮은 사람이라는 감정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주는 사람이 없다면 자존감 고취는 불가능한 일일까요? 어렵기는 하지만 노력에 대한 성취가 모여지면서 스스로 괜찮은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커다란 성공만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성취를 이뤄나가면서 또 삶의 자그마한 부분에서 의미를 찾아가면서 자신은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야 지금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명확합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아 보이는 사도들의 모습입니다.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특별히 의지가 강해서 유혹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라고 하십니다.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것을 챙겨주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돈도 지니지 말고,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파견에 대해 “저는 못 합니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파견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사랑만을 바라보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성공적으로 복음 선포를 마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 자리는 아니었지만, 주님의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자존감을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이유를 계속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 사랑에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마거릿 대처).

 -조재형신부-

 

지금은 모두 은퇴하였지만 피켜 스케이팅에서 자웅을 가리던 선수가 있었습니다일본의 아사다 마오와 한국의 김연아 선수였습니다주니어 시절에는 아사다 마오 선수가 앞섰으나 성인 무대에서는 김연아 선수가 앞섰습니다동계 올림픽은 물론 각종 세계 대회에서 아사다 마오는 김연아 선수의 그늘에 가려졌습니다그러나 아사다 마오도 세계적인 기량을 갖춘 뛰어난 선수였습니다현 시대를 인터넷으로 묶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입니다빌 게이츠는 마이크로 소프트라는 프로그램으로 우리들이 쉽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스티브 잡스는 스마트폰이라는 혁신으로 컴퓨터를 전화기 속에 집어넣었습니다모바일을 통한 다양한 어플리케이션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습니다빌게이츠의 우직함과 나눔은 우리 시대의 영웅입니다스티브 잡스의 혁신과 창의성 또한 우리 시대의 영웅입니다.

 

한국 가톨릭에는 3분의 추기경이 있었습니다두 분은 고인이 되셨고지금은 한 분이 계십니다저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에게 사제서품을 받았고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이 있을 때 교구 사목국에서 3년 동안 일하였습니다지금은 은퇴하신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이 있을 때 교구 성소국에서 5년 동안 일하였습니다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교회는 물론 한국사회에서도 존경을 받았습니다탄생 100주년을 맞으면서 복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저도 기억합니다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낮고 중후한 저음의 목소리입니다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깊이와 품위가 있는 말씀이었습니다선종 1주기를 맞이하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서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정확한 기억력을 보여주었습니다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았던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은 매일 성직자와 신학생을 위해서구역장과 반장을 위해서북한 교회를 위해서교회를 위해서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은 늘 경청하는 분이었습니다교구청 사제들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겨 주었습니다무지개의 색깔이 7가지이듯이 세분 추기경님의 영성도 다양하였습니다.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성령과 은총으로 가득한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아사다 마오와 김연아 선수처럼 처음에는 바르나바의 복음 선포가 더 드러났습니다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를 부르셨고 교회의 역사에서 아는 것처럼 바오로 사도는 바르나바 사도를 뛰어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바르나바 사도가 감성적이었다면 바오로 사도는 이성적이었습니다바르나바 사도는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고오늘 독서에서 읽었던 것처럼 안티오키아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바르나바 사도의 공이 결코 작지 않다고 하겠습니다바르나바 사도가 간 길에 바오로 사도는 신학과 교리의 길을 놓았습니다바르나바 사도가 간 길에 바오로 사도는 서간을 통해서 위로와 격려를 공동체에게 주었습니다세상의 기준에는 우열의 기준이 있겠지만 하느님의 기준에서 보면 사도들 모두 하느님 정원의 예쁜 꽃들입니다모두 무지개의 색깔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각자의 영성으로 드러냈습니다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업적과 능력보다는 겸손과 희생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마귀들을 쫓아내어라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신앙생활은 물리적인 시간을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강물을 거꾸로 흘러가는 연어처럼 의미의 시간가치의 시간약속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입니다.

 숱한 난관과 시련 가운데서도 바르나바 사도의 태도는 일관되게 긍정적이었고 낙관적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이어갈 직제자들인 사도들을 선택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독특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선택 기준과는 사뭇 다릅니다. 누구를 뽑아야 하나, 우리는 즉시 머릿속에 답이 있습니다. 스펙이 좋은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 배경이 좋은 사람, 친화력 갑인 사람...

 

그러나 예수님의 선택 기준은 달랐습니다. 당시로는 무장독립투사였던 열혈당원을 제자단에 가입시켰는가 하면 친일파이자 배신자, 매국노인 세리도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진중하고 헌신적인 사람을 사도로 뽑으셨는가 하면, 좌충우돌에 모난 돌 같은 사람도 사도로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최일선에 섰던 박해자 바오로를 사도로 선택하는가 하면,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모범생 중의 모범생 바르나바를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르나바 사도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행전 11장 24절)

사도행전 1장 24절을 통해 우리는 배반자 유다의 빈자리를 대신할 사도 한명을 뽑는 과정에서 최종 결선까지 올라갔다가 탈락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르나바는 사도들의 제비뽑기에서 탈락해 열두 사도단에 들지는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12사도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성심성의껏 그리스도교 전파에 투신합니다. 그 결과 12사도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당시 사람들로부터 바오로와 함께 사도라는 칭호를 부여받습니다.

 

바르나바는 바오로와 함께 열두 사도들에게 소개되었고 그들의 동역자가 됩니다. 특별히 바르나바 사도는 안티오키아 지방 복음화에 1년 이상 헌신하였고,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습니다.

 

특별히 바르나바는 회심 초기 바오로 사도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을 때 그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 박해에 워낙 앞장섰던 바오로 사도였기에 아무리 그가 크게 회심을 했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그런 순간 바르나바는 정성껏 그를 보필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집회에 그를 모시고 가서 소개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는 아주 끈끈한 우정관계가 형성되어 바오로 사도의 첫 번째 전도여행에도 동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전도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 사촌동생 마르코를 선교팀에 포함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바오로 사도와 견해를 달리하게 되어 결국 바오로 사도와 갈라서게 되어 마르코 복음사가와 키프로스로 돌아오게 되지요.

교회 전통에 따르면 바르나바 사도는 로마, 밀라노 등지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기원후 63년경 키프로스섬 살라미나에서 유다인들의 돌에 맞아 죽음을 통해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바르나바는 다른 무엇에 앞서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초세기 교회, 복음 선포 과정에서 직면한 숱한 난관과 시련 가운데서도 그의 태도는 일관되게 긍정적이었고 낙관적이었습니다. 복음 선포 과정에서 겪는 노골적인 적개심, 그리고, 추방 앞에서도 항상 당당했고 기뻐했습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그의 삶 한 가운데 늘 현존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와 삶, 지칠 줄 모르는 복음 선포 열정에 큰 감동을 받은 수많은 이교도들이 주님께로 돌아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회심초기 유다인들로부터 심한 배척을 당하던 바오로 사도를 끝까지 지지해주었으며 그의 복음 선포 사업에 성심성의껏 협조함을 통해 초기 교회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마태 10,7)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았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지상에서의 일시적 약속에 대한 것들을 선포했을 뿐이었지만, 제자들에게는 바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이들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지상의 약속에 대한 직무를 받았을 때마저 망설이고 꺼려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나 박해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오히려 지극한 열정으로 그 직무를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바르나바 사도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그러할 권능이 함께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나라가 주어졌고, 하늘나라를 선포할 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받아서 가진 것을 주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만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아무 거나 주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만든 그 어떤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만약 실제로 받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포요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포해야 할 나라는 우리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마태 10,7)

 

주님!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곳으로 가게 하소서!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게 하소서!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게 하소서!

해야 할 바를 그만두지 않고, 가야 할 길을 멈추지 않으며, 지켜야 할 바를 끝까지 지키게 하소서!

내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반영억신부-

 

‘숲속의 땅’이라 불리는 중앙아메리카의 과테말라는 인구 1천3백만의 소도시입니다. 그냥 보기에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산지대로 살기가 좋은 곳인데 중남미 국가 중 가장 치안이 불안한 국가입니다. 일일 평균 약 20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출산에도 불구하고 인구증가는 없다고 합니다. 문맹율이 80%가 넘는 가난의 고통이 너무도 큰 나라입니다.

 

이곳에 선교사제로 파견되어 있는 홍 가브리엘신부는 사제생활비 1천불이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되어 버림받은 어린이 10명을 데리고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커졌습니다. 150명이 숙식할 수 있는 고아원 ‘천사의 집’과 250명의 배움을 감당할 수 있는 ‘미리내 초등학교’를 건립하고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이제는 중학교도 개설하였습니다. 신부는 미국 뉴저지에 피정을 겸한 후원회원을 모집하러 나섰는데 공항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검진결과 “영양실조”였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려면 그들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먼저 쓰러지면 그들은 어쩌란 말인지요? 오래 전 그와 피정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또 하나의 꿈을 지니고 있었고 지금의 시설에 올 수 없는 그야말로 오지에 버려진 어린이들을 위해 살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항공요금이 비싸서 고국인 한국에 3년 만에 나온 사람이 돈도 없이 또 다른 계획을 세우는 것을 보고 저는 놀랐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한 번도 굶어 본 적이 없고, 돈 걱정을 한 적도 없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을 주님께서 채워 주셨고 앞으로도 채워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앞으로도 그 믿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며 살 것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성실한 일꾼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않았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않은 채 주님을 차지한 홍 신부는 ‘한 눈 팔지 않고’ 가야할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열성으로 그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는 말씀에 따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몸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내어놓고 있습니다. 사실 많이 움켜쥐고 많이 지니고 있을수록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에 기대게 됩니다. 그러나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확을 얻게 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관리자로서 관리하는 것일 뿐인데 왜 욕심을 부리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를 몸으로 받아들이며 희생의 삶을 사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사도의 열성으로 선교에 나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면서...... 하느님을 차지하는 기쁨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한상우신부-

 

 

생명을 대하는
태도 변화가
생명을 바꾸어
놓는다.

거저 받은
가장 좋은
생명이다.

가장 좋은
생명은
가장
가치있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생명에 대한
반성이다.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다시 만나는
복음의 나눔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행동이며
올바른 성장이다.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자체에
함께하시는
실천의
주님이시다.

욕망의 감소가
나눔의 가치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행위의
참된 시작이다.

참된 행위는
참된 평화를
지향한다.

평화는 그냥
오지 않는다.

평화를 나누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가장 좋은
은총이다.

삶다운 삶
참다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참다운 삶은
애착과 집착이
아닌

지극한 나눔과
기도와 정성이다.

아픔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다.

실천의 참된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님이시다.

거저 주시는
사랑과 용서를
대면하는
반가운 생명의
시간이다.

생명이란
변명이 아닌
변화가 필요한
복음의
행위이다.

 

말씀 나누기 - 성 바르나바 사도 축일-인성적으로나 영성적으로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6월 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