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3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안토니오 성인은 119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거쳐 성 십자가 수도회에서 생활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모로코에서 최초로 순교한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사들의 유해가 포르투갈에 도착했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아,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안고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로 옮겼다. 선교사로 모로코에 파견되었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탁월한 설교로 파도바의 많은 이를 주님께 이끌었다. 그러나 1231년 열병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다. 안토니오 성인은 이례적으로 선종한 이듬해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하여 성인의 반열에 들었다.
☆☆☆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마태오 5,38-42)
Offer no resistance to one who is evil.
When someone strikes you on your right cheek,
turn the other one to him as well.
If anyone wants to go to law with you over your tunic,
hand him your cloak as wel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합 임금은 아내 이제벨의 간계로 이즈르엘 사람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밭을 차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달라는 자에게 주며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과거에는 작은 역할만 맡고, 대부분 사람이 날 싫어해 고통스러웠다. 관객들이 야유하며 ‘이혼녀는 텔레비전에 나오면 안 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굉장히 좋아한다. 이상하지만 인간은 원래 그렇다.”
이혼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지금 역시 없는 것이 아니지만, 과거에는 정말로 대단했었지요. 더군다나 공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에 대한 공격은 더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윤여정 어록’이라는 글이 회자할 정도로 사람들의 사랑이 아주 뜨겁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이를 틀렸다고,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할 수 없다면서 못 살겠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려니’하면서 나를 변화시키면 그만입니다.
나를 좋아했다가도 금세 싫어하기도 한다는 것, 반대로 싫어했다가도 금세 좋아하는 것이 인간 아닐까요? 따라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그러려니…. 싫어하는 것도 그러려니…. 어렵지만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러려니….’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구약성경을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 상대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라는 말로 대신하십니다. 오히려 더 주라고 하시지요.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오른손으로 오른뺨을 치기 위해서는 손등으로 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 근동지역에서는 이렇게 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뺨을 치는 것이 아주 모욕적인 행위였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대로 한다면, 나도 오른뺨을 손등으로 때려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는 것입니다.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속옷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속옷을 입지 않은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겉옷입니다. 밤에 이불로도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겉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또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주라고 하십니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똑같이 반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판단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사랑 실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에 대해 ‘그러려니’하며 받아들이고, 어떻게 사랑 실천을 통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어떨까요? 더 멋있는 삶 같지 않습니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인생을 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기적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모든 순간이 기적이라며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알버트 아인슈타인).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aSZ5Ezqcmt0
-조재형신부-
유튜브를 통해서 ‘미국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정학적으로 축복받은 땅이라고 합니다. 영토를 넓히는데 전쟁을 하지 않고 넓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독립전쟁 후 영국은 배상금으로 당시 미국 13개주의 영토만큼이나 큰 땅을 주었습니다. 프랑스는 자국의 영토를 미국에게 팔았습니다. 처음 시작했던 미국의 영토는 이내 4배로 커졌습니다. 멕시코와 거래를 통해서 많은 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텍사스,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캘리포니아를 얻었습니다. 이로써 동부에서 시작한 미국은 서부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동부에는 대서양, 서부에는 태평양을 바다로 둔 나라가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알라스카를 미국에게 팔았습니다. 하와이는 미국의 한 주가 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역사를 보면 짧은 시간에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 큰 전쟁도 없었습니다. 대서양과 태평양은 미국을 보호하는 안전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캐나다는 미국과 혈맹관계에 있고, 멕시코는 미국 경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 때문에 미국의 안보에 위험을 주지 않습니다.
축복받은 미국에도 반지성주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상식과 이성에 어긋나는 행위를 반지성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작은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사냥입니다. 평온한 마을에 아이둘이 아팠습니다. 의사는 마귀에 들린 것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목사님을 중심으로 아이들을 저주한 사람들을 찾아내면서 평온한 마을은 광란의 마을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이 마귀로 지목을 받으면 재판을 받아야 했고, 죽어야 했습니다. 흑인과 유색인종을 아무런 이유 없이 차별하고, 폭력을 가하고 죽였던 ‘KKK'단이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할 수 없는 행위를 벌였습니다. 선량한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던 메카시의 열풍도 있었습니다. 반지성주의는 코로나 팬데믹에도 나타났습니다. 코로나 초기에 미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의학과 과학의 상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였고, 백신접종을 거부하였습니다. 첨단 과학을 선도하는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축복받은 땅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축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고통 받고 있을 때는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원하면 하느님께서는 왕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돌아 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 가문을 통해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사명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말씀과 표징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 진리에 목마른 이들이 예수님의 곁으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발하셨고,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병자를 고쳐주도록, 마귀를 쫓아내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축복받은 이스라엘에도 반지성주의의 역사가 있습니다. 야곱은 부당한 방법으로 형인 에사오의 장자 상속권을 가로챘습니다. 다윗은 부당한 방법으로 충실한 부하의 아내를 가로챘습니다. 나탄 예언자는 다윗의 부당함을 지적하였고, 다윗은 회개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회개한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부당한 방법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과 에제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합도 회개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회개한 아합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반지성주의의 그물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에도 깊게 드리워졌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고, 도망갔습니다.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고발하였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아무런 죄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재판하였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던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간구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땅의 축복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반지성주의의는 교만과 오만한 마음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납니다. 반지성주의가 자라나는 곳은 축복받은 땅마저 광란의 도가니로 만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감사와 겸손에서 드러납니다. 감사와 겸손이 있다면 사막에서도 꽃이 피기마련입니다. 감사와 겸손이 있다면 이 땅이 바로 천국이 됩니다. “당신은 나쁜 짓 하는 자 모두 미워하시고, 거짓을 말하는 자를 없애시나이다. 피에 주린 자와 사기 치는 자를, 주님은 역겨워하시나이다.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주님께서는 때로 새롭게 시작하도록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부르십니다!
-양승국신부-
요즘 들어 깜박깜박하는 일이 무척 잦아졌습니다. 더불어 이것저것 잃어버리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나름 귀중한 자료들이 담긴 유에스비도 어디 뒀는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자동차 열쇠며 체크카드도 분명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데, 행방이 묘연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성인이 한 분 계시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이십니다.
잃어버린 물건이 생겼을 때, 안토니오 성인에게 전구를 청하는 습관의 유래는 볼로냐에서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안토니오가 젊은 수도자들의 선생 역할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시편집이 한 권 있었는데, 그 책 안에는 나름 소중히 여기던 원고들과 메모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안토니오는 성당의 자기 자기에 항상 놓여있던 시편집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심이 컸던 그는 빨리 그 책을 찾게 해달라는 지향을 두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범인은 수련자였습니다. 그 시편집이 너무 탐이 났던 그는 그 책을 챙겨서 수도회 밖으로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안토니오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던지, 그 수련자는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수도원으로 돌아와 그 시편집을 안토니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시편집은 오늘날 볼로냐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답니다.
1195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태어난 안토니오는 원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해서 대성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성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24세 되던 1219년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그런데 서품된 지 1년이 지난 1220년 안토니오 생애를 크게 뒤흔드는 대사건이 일어납니다. 포르투갈 왕은 모로코에서 선교활동 중에 순교한 다섯 명의 프란치스코회 수사 유해를 포르투갈로 모셔왔습니다. 그런데 하필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토니오가 생활하고 있던 수도원 성당에 안치된 것입니다.
안토니오는 틈만 나면 순교자들의 유해 앞으로 다가가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안토니오는 깊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토니오야! 지금 잘 갖춰진 수도원에서 기도에 전념하며 지내는 것도 좋지만 아프리카에서 순교한 수사들처럼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도 중요하단다.”
안토니오는 용기 있게 수도원 원장에게 자신의 뜻을 알렸습니다. 그를 보물처럼 아끼던 원장과 다른 형제들은 가슴 아팠지만 그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를 놓아줍니다. 정들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사들과 작별 인사를 할 때 한 연로한 수사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페르디난도! 그럼 부디 성인이 되십시오!”
주체할 수 없는 안토니오의 순교 열정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자신의 영성의 고향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는 송구스런 일이었지만 프란치스코회로 적을 옮기게 되지요. 그리고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받고 곧바로 북아프리카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원래 그의 이름은 페르디난도였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누군가를 더 크게 쓰시기 위해, 더 충만하게 살도록, 더 큰 물로, 더 위험한 곳, 더 필요한 곳으로 초대하십니다. 안토니오 역시 순교자들의 불같은 신앙과 당대 큰 영성의 흐름이었던 프란치스코 영성에 깊이 매료되어 말을 갈아타게 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은둔과 기도 속에 살던 안토니오가 어느 날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를리로 갔는데, 우연찮게 서품식 미사 강론을 안토니오가 맡게 되었습니다. 강론을 시작하자 청중들은 갑자기 귀가 솔깃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토니오가 누군지도 잘 몰랐기에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의 강론은 깊이가 있을뿐더러 열정과 논리를 겸비했었습니다. 호소력까지 대단해서 그의 강론은 사람들을 완전히 매료시켰습니다.
그의 탁월한 능력을 파악한 장상들은 안토니오를 이태리 북쪽 지방과 프랑스 전역의 순회 설교가로 파견합니다. 특별히 안토니오는 당시 신자들을 현혹시키던 카타리 이단에 맞서 교권을 수호하는데 전력을 기울입니다.
그의 명성은 자자해져서 가는 곳 마다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의 설교로 이단과 오류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지닌 영성의 깊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안토니오 사제의 고해소 앞으로 길게 줄을 섰습니다.
안토니오의 신앙과 교회관이 얼마나 확고했으면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이단자들을 부수는 쇠망치’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강론대에서 선포하는 말씀이 얼마나 힘이 있고 아름다웠으면 사람들은 ‘전무후무한 설교가’라고 칭했습니다.
안토니오가 파도바에 가서 자리 잡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이 도시는 안토니오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특히 안토니오의 1231년 사순절 강론은 사람들을 크게 매료시킵니다. 때로 한없이 감미로웠지만 때로 쌍날칼처럼 날카로웠던 그의 강론은 고리대금업자들을 강하게 공격했고 가난한 백성들을 따뜻이 감싸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 안에서도 당신의 특별한 계획을 지니고 계십니다. 때로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도록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안토니오에게 하신 것처럼 더욱 완전히 당신을 따르도록 새로운 가치와 인생관을 선물로 주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복수동태법의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마태 5,39)
이는 ‘악인에게 무관심 하라’, ‘악인을 피하라’, ‘악인에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곧 악에 대한 무저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요, 자기 기만이요, 비겁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맞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맞서지 말라’기보다 ‘맞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말라’,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악과 맞대응 하다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런다고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악을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는 일, 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맞서 대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진정으로 맞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악을 도피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사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불로 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불이 아니라 물로 꺼야 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는’(마태 5,39) 것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길이 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이기게 되는 길입니다.
사랑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악이나 악인에게 맞서기보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비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마태 5,40-42)
<오늘의 말 · 샘 기도>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마태 5,39)
주님!
맞서지 않게 하소서!
대적하거나 앙갚음하지 않게 하소서.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뺌을 돌려 대게 하소서.
당신께서 처벌할 권한이 아니라 사랑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인 까닭입니다.
아멘.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 39)
-한상우신부-
맞서는 것이
아니라
맡겨드리는
믿음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신앙이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주체도
제자리로
돌려놓으시는
주체도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
올바른 믿음의
진정한
실천이다.
악인에게
맞서거나
악인에게
반응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주님과 함께
이 길을
복음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평화는
바라는사람에게
기꺼이 바라는 것을
내어주는 참된
실천이다.
참된 실천이
죽으면
늘 소란스럽고
혼란스럽다.
낮아지는
실천이
필요하다.
더 낮아져야
고요할 수 있다.
부여잡는 것이
아닌 내려와
하느님께
돌아서는
우리들의
회개이다.
회개는
그 누구도 아닌
하느님과의
만남이다.
천 번을 싸워
천 번을 지는
어리석은
반복이다.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하나되는
기쁨이며
고요이다.
악인에게
반응하면
제일 먼저
무너지는
우리들의
호흡이다.
반응하지 않으면
지나가고
맞서지 않으면
영향력을
더 이상
끼칠 수가
없다.
하느님께
열리는
선(善)한
삶의 기쁨이다.
악에서
구하시고
악에서
빠져 나오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악인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이 순간들을
맡겨드리는
봉헌이다.
봉헌이
변화이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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