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10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2. 6. 10. 06:25

2022년 6월 10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마태오 5,27-32)

 

 If your right eye causes you to sin, 
tear it out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of your members
than to have your whole body thrown into Gehenna

 윌리엄 브레이크, '간음한 여인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그의 뒤를 이을 예언자로 엘리사를 세우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는 자매님으로부터 남편과 부부 싸움을 심하게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왜 싸우셨는데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별것도 아닌 것으로 다투었다면서, 왜 이런 것으로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사건의 원인은 커피였습니다. 식사 후에 “커피 타드릴까요?”라고 물으니 “좋지~~ 고마워.”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하게 탈까요? 연하게 탈까요?”라고 묻고, 설탕을 몇 스푼 넣을지도 물었답니다. 그러자 남편이 함께 산 지가 몇 년인데 자기 취향도 모르냐고 버럭 화를 내더라는 것입니다. 자매님은 너무 억울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타 주려고 물은 건데 이게 화낼 일에요?”라고 따졌답니다.

결혼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30년 넘게 같이 살았어도 싸운다고 하더군요. 누군가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결혼은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진짜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서로 통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닐까요? 서로 통하지 않기에 계속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하기 위해, 진짜로 통하기 위한 과정에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는 이혼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맞나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이미 간음한 것이라 말씀하시고, 아내를 버리는 자도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라고 하시지요.

우연히 인터넷에서 실험 카메라 영상 하나를 본 적이 있습니다. 몸매가 좋은 여성이 몸에 꽉 끼는 옷을 입고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쳐다볼 것인지를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몇 명이나 쳐다보았을까요? 남녀노소 상관없이 거의 모든 사람이 바라보았습니다. 만약 이를 보고 음욕을 품게 되었다면 모두 눈을 뽑아버려야 할까요?

눈이나 손은 마음이 결정한 것을 실행에 옮기는 기관입니다. 그래서 지체를 빼거나 잘라 버리라는 말은 곧 그러한 마음을 빼버리고 잘라 버리라는 의미였습니다.

잘못된 마음을 모두 빼고 잘라 버리면서, 오로지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을 위해 사랑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사랑할 수 없다고 단정을 지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좋고 나쁜 것은 따로 없다. 오직 우리의 생각에 달렸다(셰익스피어).
 

 인간은 죄의 쾌락을 위해 기꺼이 지옥을 선택하는 존재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BrX-67TuiLk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음란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눈으로 죄를 짓지 말고 차라리 눈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실까요? 진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혼자 힘으로는 죄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륜을 다룬 영화 ‘언페이스풀’(2002)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뉴욕 맨하탄의 어느 고급 저택에 결혼 10년 차 부부인 에드워드와 코니는 8살 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행복을 누리고 있는 그들에겐 권태기나 불신은 없어 보입니다. 

    어느 날 코니가 시내로 쇼핑을 나갔다가 낯선 남자와 부딪혀 다치게 됩니다. 친절한 프랑스 남자는 바로 자기 집 앞에서 그녀를 치료하고 보내면서 책 한 권을 선물하게 됩니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이야기하자 가장 싼 와인이라도 보내줄 걸 그랬다며 아내를 놀립니다. 

  

    코니가 그가 준 책을 보다가 그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종이를 발견하게 되고, 거리를 걷다 그의 생각이 나서 고민 끝에 전화합니다. 그날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는 그녀에게 집에 잠깐 들러 커피라도 먹고 가라고 합니다. 

    그의 집에 잔뜩 긴장한 채 들어온 코니는 그의 화려한 언변에 끌려 들어가고 자연스러운 그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괜한 죄책감에서였던지 남편에게 들러 선물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고 다시 그를 찾습니다. 자연스럽고 대담한 손길로 폴의 관심에 응대합니다. 그러다 죄책감에서인지 집을 나오지만 놓고 온 코트를 가지러 다시 들어갔다가 자기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합니다. 코니는 돌아오는 기차에서 죄책감을 이기는 이상야릇한 일탈의 쾌감을 느낍니다. 

  

    에드워드는 자기 동료를 통해 코니가 거짓말한 사실을 알게 되지만 ‘설마 아내 코니가?’라는 생각에서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남편의 어설픈 눈치도 알지 못한 채 점점 폴과의 관계에 빠져들게 된 코니는 그 행동 수위에 대담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고 에드워드의 부하직원에게 들키게 됩니다. 

    에드워드도 자신을 대하는 코니의 모습과 거짓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점점 더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대화 도중 외도가 가져오는 파경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에 걸렸던지 코니는 폴에게 헤어지자고 합니다. 하지만 몸은 계속 폴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쾌락의 맛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에드워드가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부하직원과 언쟁 끝에 싸우게 되자 그에게 가족 간수나 잘하라는 막말을 듣게 되고 흥신소에 아내의 추적을 맡기고 시카고로 1박 2일 출장을 갑니다. 코니는 또 나쁜 아내 나쁜 엄마가 됩니다. 코니는 아들 픽업까지 놓칩니다. 아들에게까지 사랑을 주지 못하게 된 자신을 보며 코니는 정말 이 관계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며 폴을 찾았는데, 폴은 다른 여자와 즐기고 있었습니다. 질투에 눈이 먼 코니는 여자를 폭행하고 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점점 더 나락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사진으로 아내의 불륜을 확인한 에드워드는 폴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를 하나의 노리갯감으로 여기는 폴에 분노가 치밉니다. 그리고 자신이 코니에게 선물한 커다란 유리구슬이 폴의 집에 있는 것을 보고는 우발적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칩니다. 폴은 사망합니다. 

     

    에드워드는 자수하려 합니다. 그러나 폴이 죽은 지 모르고 그에게 헤어지자는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는 가정을 위해 그의 시신을 처리하고 아내와 함께 아들 학예회에 갑니다. 

    그런데 경찰이 들이닥칩니다. 폴의 살인이 일어난 집에서 코니의 전화번호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코니는 폴이 죽었다는 소식에 적잖게 놀랍니다. 그리고 세탁소에 맡기러 간 에드워드의 옷에서 자기 불륜 사진을 보고는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둘은 아이를 위해서라도 함께 계속 살아야 할지, 아니면 자수해야 할지를 두고 경찰서 앞에서 고민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욕 자체가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욕구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

  

    일단 욕구가 커지면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그 욕구보다 더 만족시킬 행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배고 고프면 다른 행복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음욕이 증가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 욕구를 증가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생각’입니다. 뱀은 하와와 대화를 통해 하와의 욕구를 증가시켰습니다. 뱀이 하와와 대화하는 것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생각하면 욕망이 더 커집니다. 그래서 결코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눈을 빼고 손을 자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를 미워한다는 것은 너무 힘이 듭니다. 쾌락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죄에 떨어집니다. 사실 인간은 지옥에 갈지 알면서도 죄의 쾌락을 선택하는 약한 존재입니다.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2000)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대학생 때 사랑했던 여자를 잃었는데, 교사가 되어 그 여자가 환생한 남자를 만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동성애는 이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은 다음 생에서는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이기를 바라며 줄을 매지 않고 번지 점프대에서 함께 뛰어내립니다. 

     

    환생이 100% 확실하다면 모를까, 그리스도교 교리 안에서는 자살은 지옥에 갈 확률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도 이런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인간은 즐거움을 위해 지옥에 가는 것까지 감수할 미련하고 약한 존재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려면 내가 번지 점프를 하기 전에 아파할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님과 형제들, 친척과 친구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만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어떤 가정의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음란한 동영상과 행위에 빠져있었습니다. 이 죄를 끊고 싶었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이 죄를 끊게 해 달라고 청했는데도 매번 그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이 죄를 지으면 고통스러운 벌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날도 지방으로 출장을 가서 모텔에서 틀어주는 음란한 영상을 보고 죄를 지었습니다. 다음날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위독했습니다. 의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물론 건강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럴 수 있다고 여겼지만, 왠지 찜찜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출장을 갔습니다. 또 죄를 지었습니다. 그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가 교통사고로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나의 죄와 내 주위 사람들의 고통이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가족을 위해 죄를 이겨냈습니다. 그랬더니 아팠던 어머니가 의식을 찾고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분이 그 죄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내도 사랑하지 않고 자녀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자신을 끝까지 사랑해 준 대상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나를 죄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영화 ‘침묵’은 스승이 일본에서 선교하다가 종교를 저버리고 일본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자 신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로드리고 신부도 결국엔 고문에 이기지 못하고 침묵하시는 후미에라 불리는 예수님의 그림을 발로 밟아야 했습니다. 

주저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후미에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나를 밟을 때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주여, 저는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원망했습니다.”

    “나는 침묵한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다.”

  

    로드리고가 예수상을 밟는 순간 새벽닭이 웁니다. 그 옛날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때 베드로의 괴로움을 예수께서 이해하시고 용서하시며 함께 괴로워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아파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나를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유일하게 나를 가장 완전히 사랑하신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진정 죄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조용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철저하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9YWTRGsYe8A

-조재형신부-

 

바둑 용어 중에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바둑은 집이 많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입니다처음부터 전투를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포석이라는 말이 있는데 먼저 유리한 곳을 차지하는 것입니다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이 포석에서 많은 집을 확보합니다같은 한 점이지만 포석에 따라서 20집이 되기도 하고, 30집이 되기도 합니다포석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됩니다전체형세에서 집이 부족한 사람이 먼저 전투를 시작하기 마련입니다집이 부족하면 바둑에서 지기 때문입니다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이때 작은 집을 포기하고 더 큰 곳을 차지하게 됩니다집이 부족한 사람은 눈앞에 있는 작은 집을 차지하지만 결국 바둑은 지게 됩니다더 큰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바로 이런 경우 바둑에서는 소탐대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벌써 18년 전의 일입니다저는 당시 교구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저의 강의는 4시부터이지만 1시에 가서 미리 봉사자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저의 강의 주제는 마리아의 신앙이었고제 앞의 신부님의 강의 주제는 성화를 통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모임을 마친 후 저는 잠시 밖으로 나왔습니다그런데 성당 앞에 불가마 사우나가 있었습니다. 2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기에 저는 사우나에서 피곤을 풀기로 했습니다그날은 헌법재판소에서 행정수도를 옮기는 것에 대한 판결이 있었습니다헌법재판소는 관습헌법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행정수도 옮기는 것을 부결하였습니다관습적으로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라는 논리였습니다그런데 뜻밖에 사우나에서 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저는 너무 놀랐습니다제가 사우나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고사우나에서 저의 이름을 부른 적도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2시에 강의를 하기로 한 신부님이 길이 막혀서 늦는다고 했답니다봉사자는 제가 이미 와 있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답니다신부님은 고맙다고 하면서 그럼 강의 시간을 바꾸어 달라고 했답니다그때부터 봉사자는 저를 찾아 다녔습니다. 5월 성모성월이라서 제가 성모동산에 있을 줄 알았다고 합니다그런데 저는 거기에 없었습니다사제이기에 성당에서 조배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그런데 저는 거기에 없었습니다사제관에서 본당 신부님과 대화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그런데 저는 거기에 없었습니다마음이 급해진 봉사자는 성당 밖에 있는 불가마 사우나를 보았고혹시 해서 저를 찾는 방송을 부탁했다고 합니다저는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습니다전후사정 이야기를 듣고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저의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생각해보면 조금 부끄러웠습니다저는 봉사자가 생각한 곳에 없었기 때문입니다제 몸이 조금 편하자고 따뜻한 사우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지금 생각하니 저도 소탐대실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소탐대실이 있습니다가정에서 기도하고아이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그러나 성공명예권력이라는 것을 탐하면서 소중한 신앙교육을 소홀히 하였습니다아이들이 성당에 가지 않아도 내버려 두었습니다대학교에 가면 성당에 나갈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가정에서 기도하지 않아도 내버려 두었습니다대학교에 가면 기도할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신앙은 매일매일 삶 속에서 드러내는 실천이며 행동입니다신앙의 선조들이 박해를 받으면서도 목숨을 바치면서도 지켜온 신앙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모든 것이 자유로운 시대에 어쩌면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못할 것 같습니다이 또한 소탐대실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외적으로 드러나는 성전을 신축하고병원을 세우고피정의 집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입니다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공감입니다십자가의 희생만이 우리를 부활에로 이끈다는 믿음입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 손이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여섯 개의 대당명제 중 둘째와 셋째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간음과 이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눈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혼이 불륜을 불러오는 뿌리라고 말하면서, 간음과 불륜의 뿌리를 잘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야고보는 서간에서 말합니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야고 1,15)

그러기에 응징 받아야 할 대상은 육신의 지체 자체가 아니라, 의지와 의지를 부추기는 자발적인 욕구입니다.

그러니 죄의 뿌리를 뽑는 데는 옛 율법의 계명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고, 죄를 짓게 하는 내면의 지체를 잘라내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 또 네 오른 손이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마태 5,29)

 

이를 문자적으로 알아들으면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자칫하다가 우리 몸이 하나도 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이는 자신의 지체를 잘라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를 뿌리에서부터 잘라내라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죄를 불러오는 마음의 눈과 손을 잘라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곧 내면의 눈을 뽑아내고, 손을 잘라내는 일입니다.

 

눈은 죄를 불러오는 통로요, 손을 죄를 행하는 도구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다.”

(마태 6,22)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 5,8)

 

그러니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자신의 몸을 단련하어 복종”(1코린 9,27)시켜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나쁜 욕망들을 죽이는 것’(콜로 3,5)입니다.

그리고 그 그 길은 나쁜 욕망들을 “그리스도의 바위로 치는 것”(1코린 10,4)입니다.

 

곧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쁜 욕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빛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빛으로 밝아질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마음의 전향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쁜 생각을 바라보면서 나쁜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바라볼 때 어둠은 물러가게 됩니다.

어둠이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빛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둠을 들여다보면서 어둠속에서 빛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을 비추어주고 있는 빛을 바라보면서 빛으로 나아가는 투쟁의 길입니다.

그러니 영적 투쟁은 어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바라보면서 빛의 조명으로 일치의 길을 갑니다(위 디오니시우스는 조명과 정화와 일치의 영성원리로 말한다.)

 

오늘도 우리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를 바라보며, 그분으로부터 부터 영적 음료를 마시며, ‘의로움의 길’을 갑니다.

그렇습니다.

빛이신 주님의 인도와 자비로 이 길을 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은 것이 낫다.”

(마태 5,29)

주님!

겉으로 가려진 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제 마음속을 들여다봅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듯”(마태 6,22), 마음의 눈이 맑게 하소서!

마음속 떠도는 그릇된 생각들을 잘라버리고, 마음속 깊게 새겨진 사랑의 법을 보게 하소서!

제 마음 항상 당신을 향하게 하시고, 제 행실이 당신의 빛을 받아 밝게 빛나게 하소서!

아멘.

「끝까지 사랑하라」

 -반영억신부-

 

‘여자는 결혼할 때까지만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남자는 전혀 걱정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 걱정이 생긴다.’는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자기가 베푼 만큼 상대가 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깁니다. 상대를 통해서 덕을 보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닐진대 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결국 사랑한다고 혼인을 하고서도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엮어진 혼인계약을 일생 지키는 것이 쉽지않은 시대입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동상이몽이 더 많게 느껴집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의 관심을 서로 다른 곳에 두면서 화목하고 행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하지 말라’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에서 벗어나기를 강조하시며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네 오른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버려라”하고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은 덜 사랑하고, 덜 사랑해도 될 것을 더 사랑한다면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에게 마음을 두어야지 다른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기대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속이 지옥이면 멀쩡하게 잘 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죄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이혼은 갑자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또 참다가 더는 안 되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빌미를 줄 수 있는 마음 단속을 미리 잘해야 합니다. 원인제공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동상이몽’이라는 말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이혼의 전조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이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이혼을 금지하는 것은 결국 가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지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통해 후손을 이어가야 합니다. 사실 후손의 번성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쉽게 이혼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가정이 불행해지고 자녀 또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제발, 이혼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의 신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뢰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자주 해야 합니다. ‘굳이 말을 해야 알아듣느냐?’하는 분도 있지만‘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힘내라, 수고했다’는 등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읽힙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고와 땀 없이 좋은 열매를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원하는 만큼 서로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만남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주고 좋은 점을 키워가며 닮아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지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기대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서두르지 말 것이며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또한 부모도 삶의 경륜 안에서 얻어진 가르침을 자녀에게 잘 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배우자를 선택하면서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성격이나, 경제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인가? 허물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워줄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봤으면 합니다. 준비가 소홀하면 그만큼 힘겨워합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희생을 감당하는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면 좋겠습니다. 서로에게 덕을 보려고 하지 말고 서로에게 복이 되어주기 바랍니다. 기쁨과 희망이 되어주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미 마음으로』

 -송영진신부-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이 말씀은, ‘생각으로 짓는 죄’도 ‘행동으로 짓는 죄’와 같다는 가르침입니다.

저녁기도에 들어 있는 ‘반성기도’를 보면, 다섯 가지 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생각으로 지은 죄, 말로 지은 죄, 행위로 지은 죄,

의무를 소홀히 한 죄, 버릇이 된 죄.

위선자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말로 지은 죄’와 ‘행위로 지은 죄’만 없으면,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생각으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히 한 죄’는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고,

표시나지도 않기 때문에 죄가 없는 척, 죄를 안 지은 척 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의 21절-22절에서

정신적인 살인도 살인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는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간음죄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가르침은 뒤의 15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마태 15,19-20).”

죄가 되는 말과 행동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말과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면

마음을 다스리고 억제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반성기도에 ‘버릇이 된 죄’가 언급되어 있는 것은,

‘작은 죄’라도 습관적으로 반복하면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즉 대죄가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 5,29-30).”

 

이 말씀은, 죄를 피하는 일은 대충 해서는 안 되고,

철저하고 단호하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라는 말씀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다 하면서 살다가 지옥에 가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을 참고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지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실제로 눈과 손을 잘라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눈’과 ‘손’ 자체에는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라 버려야 할 것은 눈과 손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입니다.

만일에 마음과 생각을 잘라 버리지 않고(억제하지 않고),

죄를 지은 다음에 눈과 손을 잘라 버린다면, 그것은 ‘책임 전가’일 뿐입니다.

눈과 손이 나를 죄짓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내가’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표현이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철저하고 단호하게 죄를 피하여라.” 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눈과 손이라는 표현만 보고서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사탄의 말을 들은 아담과 하와의 ‘귀’를 탓하지 않으셨고,

선악과를 쳐다본 아담과 하와의 ‘눈’을 탓하지 않으셨고, 선악과를 따서

먹은 아담과 하와의 ‘손’과 ‘입’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귀와 눈과 손과 입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 자신의 마음과 의지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잘라 버릴 수 있는가?

내 안에서 생겨나는 나쁜 욕망들을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는가?

다른 종교에서는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교회에서는 그 방법으로 ‘기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마음을 잘라 버리는(억제하고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이 말씀은 원래 마귀를 쫓아내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지만,

나쁜 욕망을 억제하는 방법에도 적용됩니다.

물론 사탄이(마귀가) 나쁜 욕망을 심어 놓는 것도 아니고,

나쁜 욕망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을 사탄 탓이라고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쁜 욕망’과 ‘선한 의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때,

사탄은 ‘나쁜 욕망’을 선택하라고 우리를 부추기는 존재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생긴 ‘나쁜 욕망’과 ‘사탄의 유혹’이 합해지면

큰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도’는 그 나쁜 욕망과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하고 유일한 무기가 됩니다.

나쁜 욕망과 사탄의 유혹에 굴복해서 죄를 짓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욕망보다 의지가 약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사탄의 유혹이 너무 강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기도하지 않아서(주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아서) 무방비 상태가 되고,

그래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공동체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 초기에 수도생활을 하기를 원한 사람들은

광야 같은 곳에서 ‘혼자서’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혼자서’ 수도생활을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수도자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고, 수도회가 생겼습니다.

같은 지향과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서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라는 예수님 말씀은,

바로 그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실 수도생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도, 혼자 고립되어서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또 공동체와 함께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마태 5, 29)

한상우신부-

모여 살기에
마음의 질서가
필요하다.

올바른 실천의
시작은 언제나
우리들
결심에서
시작된다.

하느님을
벗어나면
욕망을 채우려는
우리들
본능만 남는다.

본능으로는
아무 것도
만날 수 없다.

하느님을
만나는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야 한다.

하느님 없이는
사람의 삶은
아름다울 수
없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신앙은
더 좋은 것을 위해
빼어 버리고
잘라 버리는
회개의 참된
여정이다.

참된 사랑
참된 관계는
결코 욕망에
갇혀있지 않다.

갇혀있지 않기에
더 깊어질 수
있는 봉헌이다.

봉헌의 삶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비워야
충실할 수 있는
사랑의 관계이다.

그래서 마음은
하느님을
가장 필요로
한다.

하느님을 품고
바라보는 세상
참 아름답다.

보시니
참 좋은 관계가
사람이
걸어가야 할
사람의 길이며
사람의 마음이다.

병든 마음을
되살리시는
마음의 의사
주님이시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0주 금요일-엘리야의 두려움과 하느님 체험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6월 12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