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7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2. 6. 7. 06:23

2022 6 7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오 5,13-16)

 

 Your light must shine before others,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glorify your heavenly Fa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사렙타의 과부에게 보내시어,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남긴 사람으로 그 수가 어마어마합니다. 1,093개의 미국 특허가 그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남긴 발명품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밤을 환하게 했던 전구의 발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발명품을 남겼고, 인류에 지대한 발전을 이루게 했던 그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그가 엄청난 돈을 벌었을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특허료만 해도 상당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그가 연구소를 차리고 또 회사도 운영했지만, 늘 빚에 쪼들리며 살았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발명과 연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궁핍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채워 있어야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부족함이 있어야 이를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자기 변화를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느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 부족함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변화의 방향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소금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음식의 맛을 내는 것뿐 아니라, 음식을 오헤 보존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소금이기에 소금으로 계약을 맺곤 했습니다(민수 18,19; 2역대 13,5). 어떤 약속이나 계약의 항구한 가치를 의미할 때 맺는 계약 방법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신앙인은 세상과 하느님께서 맺은 계약안에서 보존되고, 또 그 세상의 ‘맛’을 더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빛 역시 중요한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세상 창조 때, 빛이 처음으로 창조되었으며,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었던 것도 불기둥이었습니다.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엄청난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존재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존재인 줄 모르고 삽니다. 약간의 고통과 시련에 쉽게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포기하면서 “나는 안 돼. 능력이 없어.” 등의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는 소중한 존재로 우리를 만드신 주님을 떠올리면서, 어떤 일이 있어서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걸 걱정하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을 알아주지 않는 걸 걱정해야 한다(공자). 

 빛과 소금이 되려 하지 않을 때 무엇이 되는지 안다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puFiw6PYleI

병원비와 교육비, 해외 유학 경비까지 공짜인데 국가에 내야 하는 세금도 없으며 결혼하는 부부들에게는 집을 무료로 제공해주고 매년 생활비까지 1억 원씩 나눠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런 나라에 살면 정말 행복할까요? 

    과거 갑작스럽게 부자가 되면서 이와 같은 혜택을 국민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결국 지금은 파산하여 호주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가는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나우루 공화국’입니다.  

 

    서울의 용산구 정도의 크기인 호주 근처의 작은 섬나라 나우루 공화국엔 만 명 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1798년 유럽인들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이 섬나라는 다른 섬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유럽인들이 이 섬나라를 발견하여 무기와 술을 제공하자 이들은 서로 작은 땅을 차지하고자 싸웠고 인구가 3만 명에서 1/3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나우루 공화국이 갑자기 잘살게 된 것은 바로 새 똥 덕분이었습니다. 앨버트로스라는 새 똥이 쌓여서 만들어진 인광석이라는 물질이 나우루섬 전체를 뒤덮고 있었는데, 인광석은 질 좋은 화학비료의 원료가 되는 물질이어서 1970년부터 인광석을 수출하여 큰돈을 벌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80년부터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당시 잘 나가던 일본이 만 달러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나우루 국민이 얼마나 사치스럽게 살았냐면, 일반인들이 개인 전용기를 타고 피지나 하와이, 싱가포르로 매일 같이 쇼핑과 외식을 하러 갔고 심지어 도로도 별로 없는데 고급 차를 타다 기름이 떨어지면 그냥 차를 버리고 새 차를 사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좁은 섬에 여객기만 9대에 주유소는 29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 안 되는 거리도 차를 타고 다녔으며 마트에서 쇼핑하기도 귀찮아서 차를 몰고 마트 앞에 가서 전화하면 종업원이 물건을 들고나와 차에 실어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나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나우루에서 일하는 공무원까지 모두 외국인이었다고 합니다. 천국이 따로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몰락은 금방 찾아왔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인광석 광산의 채굴량이 감소하였고 머지않아 인광석이 바닥날 참이었습니다. 정부는 바닷가에 항구를 만들어 국민이 일하게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나우루 국민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우루 국민은 그때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한 채 바닷가에서 해수욕이나 즐기고 있었습니다. 일할 사람도 없고 농사지을 땅도 인광석 채굴로 사라졌습니다. 물론 장년층이 아니면 농사짓는 법도 고기 잡는 법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나우루에서는 수입산 가공식품만 먹는다고 합니다. 

  

    정부는 부랴부랴 인광석 채굴량을 줄이고 여러 사업도 시도해 보았지만, 이미 늘어날 대로 늘어난 국민의 소비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나우루 정부도 부정부패가 워낙 심해서 정부 예산을 개인들이 수시로 횡령하였으며 마구잡이로 투자해 줄줄이 말아먹었습니다. 경제부 장관도 자신은 경제에 대한 어떤 교육도 받은 적이 없다고 당당히 말할 정도였습니다. 

해외 부동산을 사들여 임대업을 하고 스위스처럼 은행을 만들어 검은돈을 은닉하는 조세회피처 사업도 했지만, 9·11 테러 이후 나우루는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되어 그나마 들어오던 돈도 막히게 되었습니다. 이제 호주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빛은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고 소금은 자신을 녹여 세상에 맛을 줍니다.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은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왜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짐승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 지방에서 ‘군대’라는 마귀 들린 이를 치유한 적이 있으십니다. 그 마귀들은 자신들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허락하십니다. 

    돼지 떼는 스스로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유의지로 세상을 밝히고 세상에 맛을 주는 일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이끄는 삶이 바로 이런 삶입니다. 남이 주는 것으로 배를 채우려는 삶입니다. 나우루 공화국 사람들은 천국을 돼지 떼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망했습니다.  

 

    돼지 떼는 자신들이 공동체를 위해 어떤 희생도 하지 않기에 공동체 의식도 없습니다. 군대지만 떼거지지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공동체도 유지되려면 각자가 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가정도 가정의 유지를 위해 각자가 얼마나 많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합니까?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닙니다. 공동체를 위해 서로가 빛과 소금이 되려고 하면서 짐승에서 벗어난 공동체입니다. 세상의 재화를 소비하는 사람이 아닌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천국의 삶입니다. 

  

    2022년 5월 10일 미국 플로리다 주 롤린스 칼리지 졸업식장에는 4.0 만점에 4.0 졸업 평점을 받은 미국 여대생의 졸업 연설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5분 30초 동안 침묵을 지켰고 한마디 없이 그녀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졸업생들은 모두 일어나 손뼉을 쳤습니다. 무슨 사연일까요?

  

    이 여학생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봉커’입니다. 그녀는 언어능력을 상실한 자폐인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아주 호기심 많고 마음 따뜻한 아이였습니다. 말도 재잘재잘하며 활력이 넘쳤습니다. 적어도 15개월 무렵까지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불과 일주일만에 모든 게 변해버렸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못 알아듣고, 입을 다물고 바닥에 머리를 찧곤 했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못 알아듣고, 입을 다물고 바닥에 머리를 찧었습니다. 부모로서는 보기 무서웠고 그녀를 잃은 것 같았습니다. 

여섯 살까지 아이가 뭘 느끼는지 뭘 원하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이는 분노가 끓어오를 때 자기 손으로 자기 얼굴을 때렸습니다. 부모로서 이런 아이를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보다 큰 고통이 없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엄마는 자폐아의 의사 표현을 도와준다는 사람을 만나 엘리자베스에게 타이핑 교육을 해보았습니다. 한 달에 일주일씩 다섯 달을 배우고 그녀가 처음 표현한 단어는 ‘AGONY’(괴롭다)였습니다. 여섯 살 아이는 자폐로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의 마음은 찢어졌습니다. 그녀는 자폐 때문에 무엇이 가장 괴로운지 표현하라는 말에 “NOT TALKING”(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부모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학업을 정상적으로 이어 나간 그녀는 대학에서 4.0 만점을 받아 연설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한 글자씩 쳐서 음성변환을 한 그녀의 연설을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자폐증 증상으로 말을 하지 못합니다. 또 신경운동의 문제로 혼자서는 양말을 신지도, 셔츠 단추를 잠그지도 못하죠. 자는 자폐인이지만, 운 좋게도 글씨를 통해 의사 전달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덕분에 침묵의 감옥에서 벗어나 저의 영웅 헬렌 켈러 같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과 마찬가지로 저도 꿈이 있죠. 그것은 모두를 위한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전 세계 언어 장애 자폐인이 3,100만 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침묵의 감옥에 갇혀 있죠. 저는 그들이 침묵의 고통에서 벗어나 스스로 길을 개척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목소리를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2차 대전 때 나치 암호를 해독했던 알란 튜링을 인용하며 연설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을 해내는 사람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됩시다. 빛이 됩시다. ‘빛이 있으라!’ 감사합니다.” 

 

[출처: ‘4.0 만점에 4.0! 완벽한 졸업 평점을 받은 미국 여대생의 놀라운 비밀’, 유츄브 채널, ‘마따 TV’] 

 

    디팩 초프라는 자녀들에게 “먹고 사는 거는 아버지가 다 책임질 테니까 너희는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말합니다. 

    “저는 돈 버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아닌 어떻게 하면 인류의 미래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을 소진하는 사람이 아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는 마음에서 우리는 천국의 백성 자격이 있음을 증명받습니다.

 교회의 빛과 소금이신 성모 마리아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S_hM1ZITIt4

 -조재형신부-

 

필라델피아 랭커스터에 있는 극장에서 성극 다윗’ 공연을 보았습니다이야기는 들었지만 처음 가보았습니다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무대도 크고 화려했습니다인터넷 검색을 하면 그동안 공연했던 작품들도 알 수 있습니다뉴욕에서는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혼자 가기에는 부담이 되지만 단체로 가면 운전에 대한 부담도 없이 공연을 볼 수 있습니다그래서인지 많은 버스들이 공연장에 있었습니다일하는 직원들도 버스가 주차할 수 있도록 안내하였고버스 안에서 공연 티켓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다윗은 성경에 있는 다윗의 이야기를 멋지고 아름답게 연출하였습니다목동이었던 다윗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는 이야기골리앗과 싸움에서 이긴 이야기사울의 시기와 질투로 도망 다니는 이야기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야기이스라엘 왕국을 통일시키는 이야기바세바를 취하고 바세바의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야기다윗이 회개하는 이야기목자이신 주님께 의탁하며 하느님께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소감발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내년에는 모세를 공연한다고 하는데 내년에도 오고 싶다는 말이 있었습니다다윗이 돌팔매를 던져서 골리앗을 물리치는 장면을 보면서 돌이 마치 묵주 알 같았다고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우리가 매일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면 어떤 악의 세력도 물리칠 수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사울과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그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다윗은 욕심 때문에 바세바를 취하였고바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게 하였습니다사울과 다윗은 똑같이 죄를 지었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사울은 비참하게 죽었고다윗은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사울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고다윗은 회개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다윗 공연의 주인공은 물론 다윗입니다그러나 진정한 주인공은 하느님입니다공연 중에 시편 23장과 51장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하십니다비록 지옥의 길을 간다할지라도 주님 함께 계시니 두렵지 않습니다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아쉬울 것 없습니다나는 죄 중에 태어났고죄를 지었지만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나를 용서해 주심을 믿습니다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용서 받을 자가 없습니다오히려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으니 더더욱 주님을 섬길 뿐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사렙타에 사는 과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오랫동안 가뭄이 있었습니다이제 마지막 남은 밀과 기름으로 생활해야 했습니다그런데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요청을 합니다마지막 남은 밀과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 먼저 엘리야를 위해서 주고남은 음식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과부는 마지막 음식을 먼저 남에게 주고 남은 음식을 아들과 함께 먹었습니다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엘리야는 사렙타 과부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주었고비가 내릴 때까지 과부의 집에는 밀과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주었습니다현실의 삶에서 우리는 편안하고 쉬운 것을 택하려고 합니다많은 것들 중에서 조금 나누는 것도 아까워하는 세상입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Winner takes all)’는 말이 당연시 되는 사회입니다그러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더 행복하다.(To give is happy than to receive.)'라고 이야기 합니다오늘의 제1독서는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십시오.” 빛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빛은 어둠을 밝히기 마련입니다빛은 그래서 밝고 깨끗해야 합니다빛은 어두운 곳에 있는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생기를 넣어 줍니다소금은 녹아야 합니다녹아서 다른 것들과 하나가 됩니다비록 본 모습은 없어지지만 다른 것들이 맛을 낼 수 있도록 해 줍니다신앙인은 이렇게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이것 역시 드러내주고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세상을 밝고 환하게 비추고세상에 참된 맛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조용히, 묵묵히, 뒷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양승국신부-

 

틈만 나면 매운탕을 끓이고 생선을 굽다 보니, 간 맞추는 데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생겼습니다. 요리하는 데 있어서 간을 잘 맞춘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실감합니다.

  

음식의 간을 맞추는 데는 아무래도 소금의 역할이 막중합니다. 만일 소금이 없다면? 식문화가 얼마나 단조롭고 심심하겠습니까? 아무리 다양하고 맛갈진 갖은양념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가장 기본이 되는 소금이 딱 받쳐주지 않으면, 그 요리는 밋밋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소금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도록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오 복음 5장 13절)

  

비록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음식 안으로 스며들어 음식을 음식답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 소금이 지닌 염분으로 인해 음식이 부패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소중한 존재...

  

세상 의미 없고 쓸데없는 것 중 하나가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입니다. 장소만 차지할 뿐, 그 어디에서 쓸모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살 수 있겠느냐?”는 말씀은 어떤 면에서 아주 강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온유하지 않고 옳은 일에 목 마르지도 않는다면, 자비와는 거리가 멀고, 의로운 일과는 담을 쌓고 살아간다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괴롭히기만 한다면, 그는 두말할 것 없이 ‘짠맛을 잃은 소금’과도 같은 존재로 전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에 불충실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오 복음 5장 13절)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소명은 참으로 고상하고 숭고한 소명이지만, 우리가 부여받은 소명에 불충실하거나 게으르게 될 때, 언젠가 하느님 대전으로 나아가게 될 때 참으로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소금의 가치나 위력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야, 자신이 완전히 녹야 내려야 제대로 발휘됩니다.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에,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실제로 이 세상에 충만히 현존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입니다.

  

조용히, 묵묵히, 뒷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그렇게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이며 세상의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반영억신부-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이미 소금이 아닙니다. 빛이 빛을 내어 밝게 비추지 못한다면 이미 빛이 아닙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성을 찾아 자기 몫을 해야 합니다. 모두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때 빛과 소금이 됩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영광을 감사하며 그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비추는 빛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 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미 소금이요, 빛이라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맛을 내고, 비추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을 내지 못하고 빛을 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 사람은 참으로 한심한 사람입니다. 내가 소금이고 빛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음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러니 가끔은 스스로 ‘정신차려 이 사람아!’ 하고 꾸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소금의 중요한 역할은 부패를 막는 것과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부정부패를 막는 것과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빛나게 됩니다. 그리고 착한 행실은 곧 생활화된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착한 행실은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칭찬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제자들의 소명이나 오늘 우리의 소명은 결국 빛나는 삶의 행실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삶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모범으로 표양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그저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선을 행하되 자신의 공로에 대한 생각이나 칭찬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진실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포장하여 들어내려고 애를 쓰지만 믿는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하여 그 믿음의 진실성을 확인받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에 관하여 탐구하지 말고, 선행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으십시오”(성 골롬바노). 그리고 “이 세상의 선한 행위는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며 하느님께로 귀결”(십자가의 성요한) 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 맛을 잃지 않고 빛을 가리지 않는 가운데 행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위해 헌신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언제나 교회를 증명해준다. 비참함에 짓눌린 사람들은 ‘교회의 우선적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 교회는 초기부터 많은 지체의 과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을 구제하고, 보호하고, 해방 시키려고 노력해 왔다"(가톨릭 교리서 2448항). "교회는 언제나 잘못과 실수를 범해 왔지만, 가난한 이들과 자비의 활동을 할 때에는 언제나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랐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배려로 그리스도의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송영진신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즉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 일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제 맛을 잃은 소금’은,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요한 15,2)”와 같습니다.

즉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을 표현만 보면,

한 번 제 맛을 잃은 소금이 되면 그것으로 끝나버린다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마태 12,20).

제 맛을 잃은 소금이 되었더라도 회개하면 원상 복구될 수 있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으니” 라는 말씀은,

끝끝내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쓸모가 없다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에도,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도,

자기 자신의 구원에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라는 말씀은,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6).”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쓸모 있는 소금’이 될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신앙인답게 살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고,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우선 먼저 나 자신부터 복음화 되어 있어야,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 일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

즉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신앙인이 되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피난처’를 뜻합니다.

참된 ‘피난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세상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감추어질 수 없다.”는 “감추지 마라.”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적극적으로 증언하지 않는 것은,

또 세상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피난처를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

<일부러 감추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이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신앙을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을 감추는 것은, 신앙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신 빛을 감추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을 인도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빛을 감추어서 그 빛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등불이 아닙니다.

제 구실을 하지 않는 등불은 ‘제 맛을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비추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복음 선포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복음을 전해 듣고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주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아서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기회 자체가 없었다면,

주님께서는 신앙인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라는 말씀에서 ‘앞’이라는 말은,

빛을 비추는 일의 첫 번째 목적은 ‘길 안내’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주고, 앞장서서 그 길을

걸어가면서 인도해 주는 것, 신앙인들은 바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라는 말씀은,

신앙을 ‘삶’으로 증언하고, ‘삶’으로 모범을 보이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그것도 포함해서, ‘신앙인다운 삶 전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라는 명령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하느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두 말씀은,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려면

우리가(내가) 먼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잘 걸어가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는 일과 ‘세상의 빛’이 되는 일은 모두

나 자신부터 ‘충실한 신앙인’이 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그 일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

즉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0주 화요일-빛은 아니어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6월 9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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