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5일 성령 강림 대축일

Margaret K 2022. 6. 5. 06:08

2022 6 5일 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요한 20,19-23)

 

“Receive the Holy Spirit.
Whose sins you forgive are forgiven them,
and whose sins you retain are retain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오순절에 사도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한다(제2독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습니다. 전국대회에서도 늘 좋은 성적을 거뒀기에 자주 응원하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응원을 열심히 하면 멋진 플레이도 많이 나오고, 또 승리할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분명히 실력이 더 중요할 텐데, 응원으로 더 좋은 성적이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반의 야구부원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응원하면 정말로 힘이 나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편의 응원이 더 크고, 야유가 쏟아지면 괜히 화가 많이 나고 실수도 잦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홈그라운드의 잇점’은 분명히 있다고 말했습니다.

내 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 편이 없고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고 있다고만 생각되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많아지면서 제대로 생활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응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응원이 꼭 경기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친구들과의 관계 안에서, 신앙 공동체 안에서…. 등등. 응원할 곳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말은 어떤 말인가요? 혹시 응원이 아닌 야유의 성격이 더 짙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도 우리를 계속해서 응원하십니다. 실력 발휘를 잘 할 수 있도록,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면서 지켜주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지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위치가 나옵니다. 바로 가운데에 서십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 가운데 서신다는 것입니다. 계속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멈추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천지창조 때의 인간 창조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영을 불어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지요. 예수님과 깊은 일치 속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힘을 성령께서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응원하는 주님의 활동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구원되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이 여기에 담겨 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 담긴 이 응원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 우리는 결코 주님과 정반대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응원에 힘을 얻어,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의 죄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 응원의 힘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응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주문을 걸고 사랑을 앞세우면 일도 사람 관계도 나아지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이병률).

 저절로 되지 않으면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sWkBxF_-xaY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전도연은 아들이 유괴되어 잃고 신앙을 가지고 용서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교도소로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았다며 편안해하는 그를 보면서 분노를 삭이지 못합니다. 교회도 나가지 않고 교회에 돌을 던지고 자해까지 시도합니다. 

  

    이 영화는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면서도 과연 진정한 용서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왜 전도연은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진정한 용서가 되지 않았을까요? 성령을 받지 않고 자기 힘으로 용서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힘이 들면 언젠가는 포기하게 됩니다. 

전도연이 진정 기도하여 성령의 힘으로 용서하였다면 상대가 용서받았다고 해도 분노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은 이렇게 힘든데 가해자가 힘들지 않다고 말하니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 가운데 특별히 ‘용서’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이는 분명 교회에 성령의 힘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내려주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용서에서도 성령의 힘이 작용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내가 하는 용서와 성령의 힘으로 하는 용서의 차이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하는 용서와 내가 하는 용서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성령은 불가능한 일까지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한 용서를 하려는 이에게 도움을 주십니다.  

 

    트레이 랠포드가 선고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는 2015년에 피자 배달하던 22살 청년 살라후딘 지트무드를 무참히 살해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재판정에서 학교 교장이자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인 희생자 아버지 솜밧 지트무드가 아들을 죽인 살인자에게 증언합니다. 

    “트레이 알렉산더 랠포드, 나는 당신이 가엾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어서요. 내가 도와주고 싶습니다. 선량한 시민으로 자라도록 아들을 도운 것처럼요. 살라후딘이 여기 있었다면, 살아 있었다면, 당신을 용서했을 겁니다. 그게 아들의 방식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화가 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 아들을 해쳤다고 해서요. 나는 악마에게 화가 납니다. 악마를 탓합니다. 당신을 잘못 이끌어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인도했으니까요. 당신 탓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전혀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걸 꼭 알아주세요.”

  

    트레이는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것입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말을 이어갑니다. 

    “아들과 아내를 대신해 당신을 용서합니다. ”

한 인터뷰에서 지트무드는 아직도 아들이 죽은 악몽을 계속 꾼다면 힘들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가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믿음 때문임을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화가 나지 않지만, 저 자신을 탓합니다. 보호해주지 못해서요. 목이 완전히 잘려 나갔어요. 끝없이 슬퍼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죽인 그 남자를 여전히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인생에 우연이란 없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죠. ‘아들은 22세에 죽는 걸로 적혀 있구나.’ 알라신이 아들에게 멋진 22년 인생을 내려줘서 감사하다고 느꼈습니다.”

  

    믿음엔 이미 성령의 힘이 작용합니다. 저는 타 종교 안에서도 성령 강림이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위험한 말이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솜밧 지트무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또 무너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자기 아들을 저렇게 무참히 살해한 살인자를 용서하였다면 그것은 성령의 힘입니다. 그가 믿는 종교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또 다른 신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해주시는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안아줍니다. 눈물을 닦으라고 수건도 줍니다. 성령으로 하는 용서의 특징은 나의 용서가 힘들지 않기에 상대와 함께 있는 것도 힘들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자기 아들을 죽인 이를 용서한 것은 분명 내 힘으로 한 용서입니다. 비록 그리스도를 믿어도 성령의 힘으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며 사는 게 싫으니 어쩔 수 없이 하는 용서입니다. 이 용서에는 힘이 없습니다. 상대를 보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한 용서는 상대와 함께 머물고 싶습니다. 원수를 보는 것이 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퍼 바자는 술을 마시다 총기가 오발로 발사되어 절친 도널드 로렌트를 사망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죄를 뉘우치며 도널드의 가족이 원하면 평생을 감옥에서 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도널드의 부모는 오히려 그의 가석방을 추진하고 그가 나왔을 때를 대비하여 숙소와 일자리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용서하면 상대를 보는 것이 매우 괴롭습니다. 하지만 도널드의 부모는 자기 아들을 죽인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오히려 그렇게 용서할 수 있게 만든 힘이 자신들 안에 있음을 되새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정원 씨의 용서도 성령으로 한 용서입니다. 고정원 씨는 유영철을 만나려 했고 유영철을 통해 성령의 힘을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영철을 자기 양자로 삼았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은인으로 여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용서로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나를 위한 내 힘으로 하는 용서여야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위한 주님 힘을 통한 용서여야겠습니까? 성령 강림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용서를 통해 성령을 체험하라고. 

    마리아 고레티는 자신을 찌른 사람과 천국에서 함께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성령의 은총을 받게 한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 때문에 그를 용서하는 게 힘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힘들면 안 됩니다. 성령의 힘으로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다만 성령을 받으려는 노력은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기도’입니다. 제가 보좌 신부 때 한 자매는 일주일 동안 한 시간씩 성당에 앉아 있는 노력을 했는데 바람 나서 나간 남편이 용서되었고, 다른 자매는 일 년 동안 그렇게 했더니 남편이 미워 보이지 않고 불쌍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들어오면 이전처럼 남편을 잘 대해줍니다. 아직도 바람을 피우고 있지만 그를 보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힘으로 하는 용서입니다. 

  

    내가 용서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힘들지 않을 때까지 성당에 앉아 있으십시오. 주님께서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 무슨 일을 합니까? 다만 나무에 붙어있는 노력만 할 뿐입니다. 그러면 성령강림이 일어납니다. 성령강림이 일어나면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는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맺힙니다. 성령께서는 하려고는 하되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아는 이에게 오십니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믿는 이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소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E_7X9o9k_nI

 -조재형신부-

 

뉴욕에서 뉴저지로 넘어가는 길은 막히기로 유명합니다다리는 적은데 넘어가는 차량이 많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뉴욕에서 뉴저지로 넘어가는 길에 다리가 100개 정도 있으면 아무런 막힘없이 뉴욕에서 뉴저지로 넘어갈 수 있고뉴저지에서 뉴욕으로 넘어올 수 있습니다그렇게 된다면 뉴욕과 뉴저지의 만남은 지금보다 훨씬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와 앞으로 사용하게 될 양자컴퓨터는 부품이나 기능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다만 연산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합니다기존의 컴퓨터는 1과 0으로 연산하지만 양자컴퓨터는 1과 그리고 1일수도 있고 0일수도 있는 방식으로 연산한다고 합니다기존의 컴퓨터가 왕복2차선이라면 양자컴퓨터는 왕복 50차선이 넘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합니다그렇게 되면 기존의 컴퓨터로는 계산하기 힘든 것들도 아주 쉽게 계산해 낼 수 있다고 합니다양자 컴퓨터가 일상의 생활에 등장한다면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700만 년 전의 인간의 뇌와 2022년 인간의 뇌는 그 기능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뇌는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이 조화를 이루도록 합니다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을 운동기관이 받아들이도록 합니다그런 측면에서 인간의 뇌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다른 동물들은 바로 그런 진화의 방식으로 몇 억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연에 적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양자컴퓨터가 새로운 방식으로 연산하는 것처럼 인간은 연결을 통해서 더 풍요로운 삶을 구축했다고 합니다그 첫 번째 연결은 언어와 문자였습니다언어와 문자는 신화와 전통을 부족과 부족을 넘어 하나로 만들어 줄 수 있었습니다언어와 문자는 혁신과 역사를 후손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언어와 문자는 왕복 2차선이던 인간의 역사를 왕복 4차선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언어와 문자는 사상문학예술건축종교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인간의 역사에 언어와 문자가 등장하는 것은 농사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고 합니다.

 

10,000년 동안 언와와 문자의 세계에 의지하던 인간의 역사는 변화의 폭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그런데 인간의 역사에 언어와 문자에 버금가는 새로운 혁신이 생겼습니다. 1980년도에 시작되었습니다그것은 개인 컴퓨터의 등장과 개인 컴퓨터를 연결해 주는 인터넷의 등장입니다이제 왕복4차선이던 인간의 관계는 왕복 10차선이 넘는 길이 생겼습니다예전에는 생소했던 것들이 지금은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우리는 집에서 인터넷 쇼핑을 하고 있습니다집에서 결재를 하고 있습니다현장에 가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뉴스를 검색할 수 있습니다. 30년 후에 우리는 또 다른 혁신의 시대를 보게 되었습니다스마트 폰의 등장입니다전에는 집에서 하던 검색과 쇼핑을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움직이면서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바로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하는 모바일의 등장입니다우리는 장소와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서 이웃과 연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인간의 관계는 왕복 10차선에서 왕복 20차선이 넘게 발전하였습니다정신을 차리기 힘든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합니다. ‘메타버스의 세상입니다이제 인간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넘어서 가상현실의 세상을 눈으로 체험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파르티아 사람메디아 사람엘람 사람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문자와 언어가 인류의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개인컴퓨터와 인터넷이 인류를 검색의 시대로 만들었습니다스마트폰이 모바일의 시대를 만들었습니다그리고 이제 우리는 메타버스의 시대를 시작하려합니다. 2000년 전 교회는 성령의 강림으로 신앙의 인터넷 시대를 체험했습니다신앙의 모바일 시대를 체험했습니다성령의 강림으로 교회는 신앙의 메타버스를 체험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해 줍니다성령은 절망은 희망으로분노는 용서로두려움은 담대함으로오해는 이해로욕망은 겸손으로 이끌어 줍니다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오소서 성령님주님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가난한 이 아버지오소서 은총주님오소서 마음의 빛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저희생기 돋우소서.”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과연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당신의 협조자이자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거듭 약속하시는데, 그 이유는 명료합니다. 자녀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요? 아직도 어리고 연약한 자녀들에 대한 근심 걱정, 노심초사의 결과, 자신을 대신할 성령을 우리의 보호자로 지명하고 파견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시기까지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① 폭풍 속에서도 평화로이 살아가도록: 예수님께서는 산더미처럼 높은 파도와 폭풍우가 몰아치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겁에 질린 제자들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그 한 가운데에서도, 뱃고물을 배게 삼아 태평스럽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당신 내면 깊숙이 성령께서 자리잡고 계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우리 역시 성령과 함께라면 높은 시련의 파도와 고통의 풍랑 그 한가운데서도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②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공동체를 위한 공동선을 실천하도록: 주님의 성령께서는 우리 인간 각자에게 다양한 은사를 선물로 주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1코린토 12장 8~10절)

 

 성령의 은사는 그뿐이 아닙니다. 어떤 이에게는 고통을 잘 이겨내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따뜻이 위로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실패 속에서도 희망할 수 있는 은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렇듯이 성령을 통하여 다양한 은총의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유는 다른 무엇에 앞서 공동선을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아무리 특별하고 대단한 은사가 주어졌다 할지라도 결코 우쭐거려서는 안되겠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주신 선물에 깊이 감사드리며, 그 성령의 선물을 이웃과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내어놓아야 하겠습니다.

  

③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식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도록: 때로 우리 인간 공동체는 연구대상입니다. 나치즘처럼 집단 전체가 함께 광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름 배웠다는 집단들 역시 그릇된 판단으로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지혜로움이요 식별력입니다. 무엇이 더 본질적인 것인지,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무엇이 진정 인간다운 것인지? 항상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결정할 수 있는 식별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식별력은 위로부터 오는 지혜,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또다시 맞이한 성령강림대축일,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과연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 은사가 아직 제대로 발굴되지 않고 발휘되지 않았다면, 늦게라도 그 작업을 시작해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성령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마음의 평화와 천상 지혜와 식별력으로 무장하여 힘들어하는 이웃들에게 우리 존재 자체로 선물이요 은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 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성령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기도 합니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립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 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불로 표상 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 하였습니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람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또한 물처럼 샘솟기도 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비둘기처럼 다가옵니다. 평화와 온유함으로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체조배를 하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손길이 더 강하게 역사하시니 만큼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힘과 능력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영’이 특별히 뽑힌 이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람들, 모세, 판관들, 전사들, 시인들, 왕이나 예언자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함으로서 야훼의 영의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3장1절에 보면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 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만 특별히 임했던 성령이 장차 누구든지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은 먼저 예수님의 일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였고(마태1,28-30) 예수님께서 훗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가서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고 예수님의 공적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루가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루카4,14-15)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첫 설교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며…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14,17-19).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었고(마태12,28)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루카5,17) 또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이하)하시며 새로 나기 위해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과 함께한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승천을 통한 작별을 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파라끌리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27).

이 말씀은 당신이 얼마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이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 그래서 그리 하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바로 오늘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말씀과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복음의 선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복음의 증거자로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게 하였습니다.(사도2,1-11)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인하여 베드로와 바오로도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도행전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절름발이를 낫게 하였고, 죽은 이를 살려내고 악령을 몰아냈으며 열정적으로 설교하게 하였고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하여 가진 것 모두를 공동 소유로 내놓고 나눔의 생활을 하였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공동체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3,28).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손길이 더욱 더 요청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내 선입견과 욕심, 세상 걱정 때문에 그분의 숨결을 내가 놓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가오시지만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까닭으로 역사하시지 못하십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이미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활발히 역사하시도록 그 장을 만들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함을 회복하십시오. 복음의 증인이 되십시오! 성령께서는 당신 은총의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고 모든 부분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생각하도록 제 안에서 숨 쉬게 하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행하도록 제 마음을 움직이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보호하도록 저를 강하게 해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결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저를 보호 하소서.
사랑합니다.

성령칠은 카드를 뽑겠습니다. 간략하게 그 은사를 설명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는 참으로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서11장1절 에서 3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개인 성화를 위해 베푸시는 은혜를 말씀 드 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이밖에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합니다.

1). 슬기 (지혜) : 하느님과 하느님께 관한 것들을 올바로 판단하고, 맛들이고, 실천하도록 돕는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며, 하느님의 눈, 하느님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아무리 큰 꿈과 희망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2). 통달 (깨달음, 이해) : 하느님 계시진리를 깊이 통찰하여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은혜입니다. 성경의 의미, 전례의 의미등 숨은 뜻을 알게 됩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감동을 얻게 되고 기쁨을 차지하게 됩니다.

3). 의견 (일깨움) : 마땅히 해야 할 것,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자기 분수를 알며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것입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자녀는 자녀로서의 역할이 있고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고유역할이 있습니다. 자기역할에 충실하게 하는 은사입니다.

4). 지식 (앎) : 영원한 생명, 피조물에 대해서 올바로 판단하는 습성입니다. 믿어야 할 진리, 믿지 말아야 할 거짓에 대해서 확실히 분별하는 은사입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연장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분명히 피조물입니다. 하느님의 섭리, 주관하심을 알고 그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는 것이 병’일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5). 굳셈 (용기) :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 위험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신뢰를 지니고 덕을 실천하도록 성령께서 영혼에게 주시는 힘입니다. “끝까지 참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했으니 흔들림이 없는 믿음으로 가야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지키셔서 복되십니다. ‘초장에 초싹, 파장에 파싹’이라고 하나요? 한번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6). 공경 (받듦, 섬김, 효경) :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자녀다운 사랑과 모든 인간 안에 보편적 사랑의 정을 담아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선언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삽니까? 데리고 삽니까?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7). 두려워함 (경외) :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죄를 피하는 은혜입니다. 무서움과는 다릅니다. 벌 받을 것에 대한 무서움이 아니라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감각적인 절제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성령 강림』

 -송영진신부-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사도 2,4-8)”

 

1)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는, 제자들은 유대인들이(박해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습니다(요한 20,19).

그랬던 그들이 성령을 받은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담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박해자들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 다 위대하고 용감한 선교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그대로 실행된 일입니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6ㄱ.27).”

제자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내린 일의 첫 번째 목적은 ‘복음 선포’입니다.

그리고 ‘복음 선포’의 목적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가 내린 일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입니다.

 

2)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서 모두 위대하고 용감한 선교사가 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용기를 내서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성령께서 도와주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받는 일은, 사람이 로봇처럼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용기를 낸 일, 사람들 앞에 선 일, 복음을 선포한 일은

제자들이 능동적으로 한 일입니다.)

그들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서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성령을 받지 못하고, 믿음이 있어도 아무것도 안 하면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3)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다음 약속이 이루어진 일입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5).”

이 말씀에서 ‘언변’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인간적인 말재주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증언할 때 그 증언에 힘을 실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표징이 나타날 수도 있고(마르 16,20),

증언의 설득력을 높이는 어떤 힘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지혜’를 주시겠다는 말씀은,

더 깊은 믿음과 깨달음을 얻도록 인도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인간적인 말재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또 ‘삶으로’ 하는 일입니다.

 

4)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표현으로는, ‘배운 적 없는’(또는 ‘사용한 적 없는’) 외국어로

복음을 선포했다는 뜻인데, 당시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사도들에게 내렸지만,

‘말씀의 은혜’는 복음 선포를 들은 사람들에게 내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에게 내린 ‘성령의 은사’는 그들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은혜가

내린다고 해도, 그 은혜는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받게 됩니다.

성령 강림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사도들의 복음 선포와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들었지만,

놀라기만 하면서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고,

그날 세례를 받은 삼천 명만 그 은혜를 받아들였습니다(사도 2,4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1-2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첫 선물은(은총은) ‘평화’입니다.

그런데 무슨 물건을 주고받듯이 평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는 평화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지시는 ‘복음 선포’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지시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마지막 지시도

복음 선포입니다(마르 16,15).>

여기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이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의 목적은 사람들의 구원”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두 번째 선물은 ‘성령’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았고,

오순절 때에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받는다고)

선포하라는 지시입니다(루카 24,47).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신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한 채로(구원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구원과 용서를(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복음 선포를 하지 않아서, 복음을 모르는 채로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교회와 신앙인들의 잘못이고,

주님께서는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

-한상우신부-


우리자신을
사랑하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을
받아들임으로
새로워지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의
일상성 안으로
기쁘게
들어오시는
성령이시다.

새로운 탄생
새로운 시작을
불러 일으키시는
사랑의
성령이시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
부활의 궁극적
의미는

가장 좋으신
성령의
현존이다.

우리 삶의
모든 여정에
함께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신앙 공동체의
가장 본질적인
뿌리이시다.

공동체를
건설하고
공동체를
성장시키신다.

성령은
다양한 은사로
신앙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신다.

하느님
자녀들에게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은사이다.

성령의 은사는
봉사의 삶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새롭게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뜻이다.

가장 좋으신
성령이시여,

모든 억압과
모든 죽음
단절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말씀 나누기 - 성령 강림 대축일-한 자리에 모여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6월 9일 성령 강림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