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3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2. 6. 3. 06:13

 2022년 6월 3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 성인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당하던 그와 동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살해되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이들을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나를사랑하느냐?”

베드로가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줄을 주님께서아십니다.” 하고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21,15-19)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Simon Peter answered him,

"Yes, Lord, you know that I love you." 
He said to him, "Tend my shee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페스투스 총독은 아그리파스 임금에게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며, 바오로가 임금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다고 이야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을 물으신 다음 당신 양들을 돌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많은 이가 인생의 가치를 행복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하면 가치 있는 삶으로 생각하고, 행복을 위해 지금의 삶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꼭 가진 것을 늘려야 행복할까요?


가진 것을 늘릴수록 필요한 것이 또 원하는 것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먹고 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먹고 살 정도가 되면 ‘조금만 더’를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원하는 것을 줄이는 것이 행복이다.”

가진 것을 늘리는 삶이 아닌, 원하는 것을 줄이는 삶을 사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원하는 것을 줄이는 삶은 남과 비교하지 않게 하고, 적은 것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합니다. 즉, 타인의 반응을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며, 지금 보이고 느끼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행복하길 원한다고 말하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위해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원하는 삶을 줄이는 가난과 겸손, 그리고 조건 없이 나눠주는 사랑을 당신의 모범으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라고 물어보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과 죽음을 말해주었을 때,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라고 장담했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이 더 뛰어남을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의 사랑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

전에는 남과 비교해서 더 뛰어남을 보이려고 했고, 또 자기 사랑이 어떠한지를 인간의 말로 표현하려고 했지만 이제 그러지 않습니다. 남과의 비교가 옳지 않다는 것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주님 따르는 것에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세상의 것을 내려놓는 삶이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보잘것없는 삶처럼 보이지만, 주님께서 직접 높여주시기에 가장 귀한 삶이 됩니다.

세상의 원하는 것들을 줄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대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행복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시도한 일이 실패해도 경험은 남아 다른 일을 할 때 도움이 된다. 무언가를 해 보려면, 씨앗이 껍질을 뚫고 나오듯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우종영).

 오늘 못 사는 건 죄가 아니다. 내일도 그러면 죄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qaysxr-dLwk

 데일 카네기는 『인간관계론』에서 악당 대부분은 자신들을 악당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악당이 악당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정당할까요? 

    

    1931년 5월 7일, 뉴욕 한복판에서 150명의 경찰관과 한 명의 범죄자 간의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그 살인자는 ‘쌍권총 크롤리’라 불리던 남자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 한 명이 순직합니다. 크롤리는 한적한 길에서 애인과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을 때 경찰이 다가와 운전면허증을 요구하자 총을 꺼내어 경찰을 마구 쐈습니다. 그리고 경찰의 총을 빼내 이미 죽은 경찰을 향해 또 한 발을 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중에 그는 이런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관계자분께…. 내 옷 안에는 피곤하고 지친 심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심장은 따듯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자 하는 심장입니다.”

 

     그가 싱싱 교도소에서 사형당할 때의 나이는 고작 19세였습니다. 그는 사형을 집행하는 이들에게 “이 망할 놈들!”이라고 욕을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죽인 대가가 이런 거군”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겐 모든 살인이 정당방위였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지키려 했던 대가가 이런 거군”이라고 말했습니다. 

  

    데일 카네기는 뉴욕의 악명 높은 싱싱 교도소의 소장인 로즈와 몇 차례 서신을 교환한 적이 있습니다. 서신에서 그가 본 흉악범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싱싱에 있는 범죄자 중 자신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라 생각하죠. 이들은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합니다. 왜 금고를 털 수밖에 없었는지, 왜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오류투성이이고, 때론 합리적인 나름의 논리를 동원해서 자신들의 반사회적 행동에 대해 설명하고,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그 행위의 정당성을 이해시키려 합니다. 결론은 그들이 감옥에 갇히지 않았어야 했다는 주장으로 귀결됩니다.”

  

    왜 흉악범들까지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일까요? 나아지려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합리화입니다. 나아지려면 항상 지금의 나의 처지에 ‘근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잘살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베드로는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또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또 물으시고 베드로는 또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또 물으십니다. 그래서 그에게 어떠한 한 감정을 끌어내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요한 21,17)

  

    여기서 “슬퍼하며”라고 번역된 ‘뤼페오’란 단어는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마태 19,22)에서 쓰였듯이, 어떠한 기준이 미치지 못할 때의 슬퍼함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자신있어함이 아닌 당신이 원하시는 사랑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슬픈 감정을 가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그런데 뭐!’, ‘난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아!’라는 마음을 가지면 발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언가 항상 부족하여 매일 나아지려는 삶을 살도록 종용하십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서 어쩔 수 없이 나쁜 사람이 된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어쩌겠습니까? 개 우리에서 자란 옥사나 말라야가 개처럼 산다고 해서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발전할 수 있는데 그 자리에만 머물려는 마음이 죄인 것입니다. 그러려면 “당신도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나보다 못하면 못 했지 더 낫지는 않을걸요?”라며 자기 합리화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어도, 감옥에 갇혔어도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된 이들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발전하려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지금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목적지를 정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책을 읽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닮고 싶은 모델을 정해 나아가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 쥬라기 월드 등의 주인공인 ‘크리스 프랫’은 본래 스트리퍼였고 딱 먹을 만큼만 일하는 한량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숙자였습니다. 식당에서 잠깐 아르바이트했는데 그 이유는 손님들이 남긴 음식을 먹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에 만족하지 않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에 코만도의 여주인공으로 나왔던 레돈총이 혹시 연기를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크리스는 연기를 해 본 적이 없지만 그런 건 아주 잘할 줄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 자신감에 레돈총은 전화번호를 물어보았고 노숙 생활하던 그는 전화가 없어 친구 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물론 처음 출연한 영화는 질도 좋지 않았고 연기도 별로라 개봉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사진작가가 우연히 그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해서 그는 찍었고 당시 유명했던 히스 레저를 닮은 그는 드라마에 캐스팅되면서 천부적인 그의 재치로 점점 주연급 배우로 성장합니다. 나체로 여자들 앞에 나서는 장면에서 그는 팬티를 입고 등장해야 했는데 실제 나체로 등장해 배우들의 실제 반응을 끌어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몸 관리에 실패하여 체중이 끊임없이 불었습니다. 어디서도 그를 캐스팅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단역에 출연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먹고 살 수는 있었지만, 그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옥 훈련을 합니다. 그후 그는 결혼도 하고 영화에서도 흥행 가도를 달립니다. 

  

    그는 자꾸 스필버그 감독이 자신에게 쥬라기 공원 4의 주인공이 되어 달라고 해서 짜증 난다는 동영상을 장난삼아 SNS에 올렸습니다. 그는 멈추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바람이 이루어졌습니다. 쥬라기 월드의 주연을 꿰차며 공룡 하면 떠오르는 대표 배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자기 아들을 생각하며 그는 소아병동에 들러 아픈 아이들을 많이 위로해주고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사위가 됩니다. 

  

    어떤 임금에게 멋진 매 한 쌍이 선물로 들어왔습니다. 하나의 매는 잘 날았지만 다른 매는 나뭇가지에 앉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나중에 그 매를 날게 하는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도 그 새를 날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농부가 왔다 가더니 그 새가 날게 된 것입니다. 임금이 어떻게 그렇게 하였느냐고 묻자 농부가 대답하였습니다. 

    “가지를 잘랐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여기서 만족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나의 자리에 있는 것을 근심하십시오. 안주하려는 마음, 이 자리가 꽃자리라는 말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서 베드로에게 근심하게 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리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J6ByiI-G-cY

 -조재형신부-

 

북미주 사제 협의회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은퇴를 앞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밭을 일구길 좋아하고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신부님은 은퇴 사제들의 숙소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그렇다고 은퇴 후 머물 수 있는 집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는데 신부님의 형편에 딱 맞는 집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넓은 마당이 있고방이 4개가 있는 집이 삼만 불에 나왔다고 합니다평생 그곳에서 살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자식들이 집을 내놓았다고 합니다신부님은 집을 계약했고할아버지가 사용하던 살림살이와 도구들을 이천오백 불에 인수하였습니다믿을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모임에 참석했던 신부님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선물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먼 타국에서 사목하면서 고생하셨으니노후를 보낼 수 있는 안식처를 마련해 주셨다고 축하해 주었습니다.

 

저도 하느님께 생일선물을 받았습니다지난 5월 15일은 저의 생일이었습니다부르클린 미사를 마치고 동료 사제들과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그런데 웨체스터에 있는 신부님이 전화를 하였습니다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아서 미사를 못한다고 합니다저에게 미사를 해 줄 수 있는지 부탁하였습니다저는 기꺼이 간다고 하였습니다미사 후에 연도가 있어서 연도를 함께 하고 돌아왔습니다그 주간에 부르클린 교우 2분이 선종하였습니다화요일에 연도를 하였고목요일 아침에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목요일 저녁에 연도를 하였고금요일 아침에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하느님께서 생일 선물로 웨체스터 공동체에서 미사 할 수 있게 하셨고, 2번의 장례미사와 연도를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길가에 핀 꽃도 예쁘게 보였습니다햇빛을 가려주는 구름도 고맙게 느껴졌습니다늘 막히던 길도 뻥 뚫려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은퇴를 앞둔 사제에게 머물 수 있는 집이 마련된 것도 분명 하느님의 선물입니다저와 같이 아직 현직에서 사목하는 사제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선교여행을 떠났던 바오로 사도는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정신 나간 사람처럼 하는 말입니다만나는 더욱 그렇습니다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였습니다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시련과 고통을 하느님의 선물로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3번이나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양을 잘 돌보아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지켜야 합니다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을 대할 때 나는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짐을 주는가?’라는 생각은 영적인 삶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셨으니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생각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정체되어 있지 않고 성장하는 사랑이야말로 참된 사랑입니다!

 -양승국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만나셨을 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시는 장면 역시 그분의 고품격 유머감각, 그리고 예리한 심리요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안 그래도 부활하신 그분 앞에 좌불안석이었던 베드로였습니다. 수난 직전 베드로는 얼마나 자주 공개적으로 다짐했는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나간다 할지라도 저만은 결코 스승님을 떠나가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세 번씩이나 그분을 모른다고 외쳤습니다. 사실 수제자의 ‘세 번 배반 사건’은 충격적인 사건이기도 하지만, 저를 포함한 우리 인간 각자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우리 인간 군상(群像)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우리 각자 안에도 베드로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참담하고 수치스러워 깊이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던 베드로 사도에게 이윽고 예수님께서 말문을 여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그 말씀에 베드로는‘이제야 용서를 받는구나, 이제야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구나.’ 하는 마음에 큰 목소리로 외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나 웬걸,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분께서는 또 한 번, 또 다시 한 번, 거듭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스승님께서 누굴 놀리시나? 아직도 분이 안 풀리셨나?’ 하는 마음과 함께 베드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슬픈 감정이 솟아올랐습니다.

  

고단수셨던 예수님의 특별 제자 교육방식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수제자 직분을 수여했지만 베드로가 못내 못미더웠던 그분이셨습니다. 럭비공 같아서 언제 어디로 튈 줄 모르는 베드로였습니다. 뜨겁게 타올랐다가도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다혈질 베드로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그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한번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질문을 거듭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그분의 진의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지만 마음속으로 굳은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스승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수제자 배반 사건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수치스런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수제자 사이에서 꼭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그분이었다면, 부활하자 마자 제일 먼저, 베드로를 비롯해 초스피드로 출행랑을 친 제자들을 집합시켰을 것입니다. 일렬로 쭉 세워놓고 한 시간에 걸친 정신교육을 실시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오랜 세월 교육을 시켰건만, 너희들이 나를 배신해?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특히 너 수제자 베드로! 한 두번도 아니고 세번씩이나 나를 배신해? 정말 실망이다!”

  

그러나 정작 부활하신 그분께서는 수제자 배반 사건에 대해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으십니다. 예전처럼 똑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대하셨습니다. 손과 발의 못자국을 보여주시며 당신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당신 부활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이 참으로 고단수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라 참으로 지혜로운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 앞에서 수제자의 위신을 깎아내리지 않으셨습니다. 호통을 친다거나 분위기 어색하게 연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효과 만점의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세번 배신한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세번에 걸쳐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 어떤 방식보다 훨씬 강도 높은 교육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야단 한번 안치시고, 언성 한번 높이지 않으시고, 아주 효과적으로 제자단을 대상으로 제대로 된 참교육을 실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둘 사이에 오고갔던 불같던 사랑은 배신, 낙담, 후회, 눈물을 거쳐 다시금 깨달음, 용기, 희망, 진정한 사랑의 단계를 밟으며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사랑은 멈춰있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은 역동적입니다. 정지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는 사랑, 정체되어 있지 않고 성장하는 사랑이야말로 참된 사랑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5.16.17)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과 사랑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당신이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16.17)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그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충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폴란드 소설가 센키비치의 소설 <쿼바디스>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지하교회에 숨어있던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중, 갑자가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오자 그는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빛이신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7)

주님!

당신께서는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시고 나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 때문에 물으십니다.

그리고 다시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은 제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십니다.

하오니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반영억신부-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렇지만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약한 의지로 다짐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선을 알면서도 오히려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말이 있듯이 크게 놀라면 매사에 겁을 내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 받고 여기에서 일어서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기 전의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한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듣고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라고 하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옛 상처에서 벗어나 주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약한지를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상처입고 좌절한 마음이 회복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깨어진 관계를 완벽한 관계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셨고 베드로 또한 그분의 용서를 알고 믿었기에 배반을 하고도 제자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그들 사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예수님처럼 파견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제가 당신께 잘못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이제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하고 주님께 의탁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세 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당신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베드로 뿐 아니라 그를 알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관계를 지속시켜가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결국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용서를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간에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용서는 배신을 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품이 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21,1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혹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날 고해성사 때 신부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신부가 되신지 얼마나 되셨지요?” 저는 ‘아직도 이 모양으로 사느냐?’ 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고해 신부님께서 “신부님, 기도하시면서 열심히 잘사세요!” 하시며 격려하시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를 다시금 다짐합니다. 지켜지지 못할 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을 담아......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송영진신부-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이나 물으신

일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만

세 번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한 18,17.25.27),

공관복음에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26,72; 마르 14,71; 루카 22,57).

그리고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자기의 말이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겠다는 맹세까지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26,74; 마르 14,71).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 라는 말은, “나는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부정하는 말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모두 부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만큼이나 ‘큰 죄’입니다.

더욱이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한 일은,

‘하느님을 모독한 죄’(신성모독죄)와 거짓 맹세를 한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3).”

이 말씀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기의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인데, 베드로 사도가 바로 그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회개하고(통회하고) 예수님에게로 돌아서면,

구원받을 자격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큰 죄’를 지었지만 곧바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고,

회개했습니다(마태 26,75; 마르 14,72; 루카 22,62).

베드로 사도가 회개하면서 슬피 운 일을,

우리는 일반적인 회개보다 더 깊은 ‘통회’로 해석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런 죄를 지은 것은, 돌아가는 상황 때문에 겁에 질려서,

마음과는 달리 엉겁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버린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거부한 것도 아닙니다.

바로 그 점에서 유다의 배반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큰 죄입니다.

 

아마도 베드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의 통회를 생각하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 5단계로 표현하면, 성찰, 통회, 정개, 고백까지는 이미 이루어졌고,

보속만 남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세 번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말씀은, 베드로 사도에게 보속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돌보아라.”를 “나는 너를 이미

용서했고, 너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다. 그러니 너는 내 양들을 돌봄으로써

보속을 하여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말한 것은,

그의 겸손과 부끄러움과 회개를 나타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했었습니다(요한 13,37).

아마도 그는 자기가 그렇게 장담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부끄러워하면서 자기를 많이 낮춘 모습으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겸손하게 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는 말씀은, 보속을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을(마태 16,18-19)

다시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취소하신 적이 없습니다.)

회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은총’을 받는 방법이고,

보속은 회개를 ‘삶’으로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일이 베드로 사도가 실행해야 할 보속이었다면,

베드로 사도는 순교할 때까지 평생 보속을 실행한 셈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속’은 ‘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한 후에 실행하는 보속은 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과 용서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바로 그런 마음으로 보속을 실행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한다는 마음으로,

동시에 예수님께서 맡겨 주신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보았을 것입니다.

만일에 사랑 없이 의무감으로 보속을 실행한다면,

그것은 그냥 ‘벌’이 될 뿐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보속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가 될 뿐입니다.

제대로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받은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게 됩니다.

기쁨과 감사가 없으니 보속이 귀찮고 괴로운 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사도들을 위대한 성인들로 존경합니다.

그분들도 우리처럼 사는 동안 죄도 짓고 실수도 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에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준 분들이고,

회개와 보속을 통해서 완전함에 도달한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에 대해서, 우리 교회는

“수제자인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라고 비난하지 않고,

“베드로 사도 같은 위대한 사도도 그런 일을 겪었다.” 라고 말하면서

중요한 교훈으로 삼고 있습니다.

성인들은 처음부터 완벽했던 분들이 아니라,

평생 꾸준히 노력해서 완전함에 도달한 분들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사랑

 -김찬선신부-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가 매우 사랑이 가고 본을 받고 싶습니다.

깊어진 그의 내면을 볼 수 있어서입니다.

 

매우 조심스럽고 겸손하면서도 진실합니다.

이전의 즉흥적이고 자신만만한 면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전의 베드로는 다분히 즉흥적이고 자신만만한 면이 있었습니다.

수난의 때에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고

주님을 잡으러 오자 칼을 빼서 병사의 귀를 베기도 했잖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객기였습니다.

사랑이 아니었다거나 사랑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너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지금은

그때보다는 거짓 열정이라는 거품이 빠진 진실한 사랑일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 정도를 아는 그는 이제 사랑한다고 자기 입으로는 할 수 없고

자신을 속속들이 아시는 분이시니 주님께서 다 아시고 잘 아시지 않냐고 답합니다.

 

사실 주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그러니 주님 앞에서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고,

특히 주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의 사랑에 대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아시는 주님 앞에서 겸손하다면

그리고 나의 사랑 정도를 아는 겸손이 있다면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부족하여도 사랑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고 그래서 사랑하냐고 물으시는 것은

현재 우리 사랑의 양이 아니라 의지를 물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고백 성사를 볼 때마다 다시 사랑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하고

다른 분에게 고백 성사를 줄 때도 다시 사랑을 시작하라는 보속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많고 큰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이고,

과거 완료적인 사랑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사랑'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5월 21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