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Margaret K 2022. 5. 31. 06:17

2022 5 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해마다 5월 31일에 지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루카 1,39-56 참조)을 기념하는 날이다. 5월 31일을 축일로 정한 것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기념하기 위해서다. 성모 마리아께서 천사의 메시지를 따라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이러한 이웃 사랑은 위대한 두 인물이 만나는 자리가 된다. 

☆☆☆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루가 1,39-56)

 

Blessed are you who believed
that what was spoken to you by the Lord
would be fulfill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게, 주님께서 한가운데에 계시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다(제1독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인사하고, 마리아는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난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겨울을 보내고 날씨가 따뜻한 봄이 찾아오면서 겨울옷들을 정리했습니다. 세탁소에 맡길 옷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이때 제가 했던 행동이 있습니다. 혹시 주머니에 물건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주머니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빈 주머니였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옷에서 손에 잡히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돈이었습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5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이었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공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공돈을 어떻게 써야 더 행복할까요?

많은 이가 자신을 위해 쓸 때 더 행복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을 위해 쓸 때 행복감이 더 오래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남을 위한 마음이 그 사람과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 인간은 도저히 혼자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누군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때 비로소 행복하게 됩니다.

행복을 원한다면 다른 이와의 연결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른 이와 단절되는 혼자만의 삶보다 다른 사람과의 연결 안에서 커다란 행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동정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그런데 문득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왜 방문했을까?’라는 의문점을 갖게 됩니다. 그냥 막연하게 친척 언니를 찾아가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교회에서는 이날을 특별히 기념할까요?

동정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 협력하고 연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협력으로써 상대방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라는 것이지요.

앞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모님도 엘리사벳 성녀와의 연결을 통해 큰 행복을 느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모의 노래’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게 어떤 말을 하는 사람에게 ‘상관하지 마!’라는 식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이를 죄짓게 하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함께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서로 연결된 모습을 보여주신 것처럼, 지금 우리가 연결해야 할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 연결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과정보다 큰 성취를 원하지. 하지만 변화는 작은 일의 성취가 모여서 이루어지는거야(영화 ‘비포선셋’ 중에서).

 복은 알아보면 오고 알아보는 이에게 간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JtRnnTwWXdE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당신이 가야 할 곳을 택하실 때 성모님은 당신을 바로 알아볼 엘리사벳을 택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어떠한 설명도 없이 그분이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당시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알아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지구상에 엘리사벳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바로 엘리사벳에게 달려가셨습니다. 심지어 의인 요셉도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음을 알아볼 눈이 없었습니다. 성모님은 요셉 성인보다 엘리사벳을 택하셨습니다. 

  

    저는 이 법칙을 “볼 줄 알면 온다”라는 법칙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왜 하느님은 아드님을 성모님 태중에 주셨을까요? 볼 줄 아는 유일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았을까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보지만 실제로 그 안의 하느님을 봅니다. 그러니까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나 명예, 돈에까지 해당하는 법칙이라 믿습니다.  

 

    어쩌면 성모님이 사람을 가려서 만나는 것 아니냐고 비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품은 이들은 사람을 가려서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를 보물로 만들어주신 분을 위함입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가간다는 말은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성체’를 두고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품은 우리 각자도 거룩한 성체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우리 안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2006년 필리핀에서 한 어부가 낚시를 하다 왠지 묵직한 대왕조개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열어보니 씹다 만 껌 같은 허여멀겋게 보이는 무언가가 들어있었습니다. 어부는 거참 희한한 게 다 있다며 그것을 침대 밑에 넣어두고 10년 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우연히 그것의 가치를 알게 된 어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세계에서 제일 큰 진주로 최소 ‘1,000억’원을 호가하는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조개가 그만한 진주를 만들려면 몇 년을 살아야 하는지조차 측정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어부는 1,000억 원을 침대 밑에 두고 10년을 살았던 것입니다.  

 

    어부라면 진주를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값이 많이 나가는 진주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와도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을 선물하는 것은 진주에 대한 모독입니다. 주님은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 어떤 것을 선물하지는 않으십니다.  

 

    사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그냥 ‘열혈사제’에 나오는 정도일 것입니다. 드라마 열혈사제를 보고 신앙을 갖겠다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있어도 이상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사제는 그냥 한 종교의 옷을 입은 평범한 사람이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격입니다. 

그렇지만 신자들에게는 사제가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생명의 빵을 주고 죄를 용서해 주는 존재입니다.  

 

    사제는 한정된 시간에 신자들과 함께 머무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가야 할까요? 당연히 사제의 존재를 알아주는 이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제를 사제로 세워준 것에 대한 예의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방문함으로써 하느님을 품은 사람은 그 하느님을 알아볼 이들에게 우선 다가가야 함을 알려주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야 하는 수준의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든 자신 안의 하느님을 믿게 할 성덕에 오른 사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이슬람 왕인 술탄을 찾아가 선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술탄은 십자군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적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행동은 무모한 행동이었을까요? 술탄은 성 프란치스코에게만 이슬람 땅에서 선교를 허락하였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성지들에 가톨릭 성당이 세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때 그곳에 자기 형제들을 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219년 프란치스코는 선교하기 위해 일루미나토 형제와 함께 5차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까지 가게 됩니다. 이 당시 십자군은 다미에타의 나일강이 범람하며 홍수가 나고 역병이 돌면서 그리고 양쪽 지휘자의 능력 부족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서른일곱의 프란치스코는 십자군 교황 대리 펠라조의 특사로 서른아홉의 이슬람 술탄 알 카밀을 만나 평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술탄과 그 백성들이 개종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말과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불을 피워 이슬람의 제사장과 함께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불에 타 죽으면 자신의 죄로 벌어지는 일이고 자신이 살아있으면 모든 이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힘이니 개종의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슬람의 제사장들은 두려운 얼굴을 하며 불을 등진 채 도망을 쳐버렸고 술탄 알 가밀은 손을 뻗어 프란치스코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죽든 살든 자기에게 유리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술탄 알 카밀은 프란치스코의 용기에 보물을 주려 하였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갈망하고 청빈 서약을 한 프란치스코는 먼지인 양 재물을 무시하였고, 그것을 본 알 카밀은 프란치스코에게 더 큰 존경심을 가지게 됩니다. 비록 알 카밀이 개종은 하지 않았지만, 프란치스코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서 생활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프란치스칸은 지금도 예루살렘 성지를 지키며 하느님의 평화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인의 경지에 오르면 누구도 만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이에게 프란치스코를 보내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군이 프란치스코를 몰라봤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당신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능력을 알았기에 사마리아로 들어가면 당신의 파견이 허사가 될 것임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것을 그것을 알아보는 이에게만 보내십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누구라도 주님을 믿게 할 자신이 없다면 그나마 자신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믿어주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파견하신 것이고, 아드님은 교회를 파견하셨고, 교회는 바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서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야 합니다. 그렇게 알려질 때 분명 호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가가면 됩니다. 

  

    우선 ‘성호경’으로 시험해 봅시다. 저희 동기 신부 아버님께서는 가스 폭발 사고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룻밤 사이에 몸이 깨끗해지는 기적을 겪었습니다. 그 이후로 항상 성호경을 긋고 다니십니다.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아버님은 성호경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도 회개시키셨다고 합니다. 그중에 목사님도 네 분이나 있다고 합니다.     

 

    성호경은 내 안에 주님이 계심을 내가 먼저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호경에 반응하는 사람에게 다가갑시다. 이것은 가려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주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에게 주는 것뿐입니다.

 성모찬성의 메시지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bjFTXTQ_uK8

 -조재형신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세기의 만남을 찾아보았습니다냉전의 시기에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만남이 주로 있었습니다. 1961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소련의 후르시초프의 서기장의 비공식 만남이 있었습니다이 만남을 통해서 쿠바의 핵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중국의 마오쩌뚱 주석의 만남이 있었습니다이 만남 이후로 중국은 개혁과 개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1985년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만남이 있었습니다이 만남을 통해서 동유럽은 민주화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2018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만남이 있었습니다이 만남으로 한반도의 핵전쟁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세기의 만남은 분쟁과 갈등이 화해와 평화로 가는 만남이었습니다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절망이 희망으로 변할 수 있다면두려움이 담대함으로 변할 수 있다면폭력이 평화로 변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세기의 만남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위해서 미리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구세주의 어머니께서 방문하신 것입니다좋은 기운이 함께 만나니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옵니다엘리사벳의 고백은 우리가 늘 바치는 성모송의 기원이 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주님께서 함께하시니 태중에 아들 또한 기뻐 뛰노나이다.’ 엘리사벳의 환영을 받은 성모님은 참된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는 분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시고가난한 이를 배불리시는 분께서 나를 복되다 하시나이다.’ 내가 만나는 이웃의 장점을 찾아 낼 수 있다면내가 만나는 이웃의 좋은 점을 칭찬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우리의 만남은 축복이 될 것입니다만남을 통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면깨달은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희망의 불씨가 될 것입니다.

 

행복이란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드러나고내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고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오늘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그래서 행복한 것입니다행복해지고 싶으신가요그럼 욕망의 불꽃에서 멀어지십시오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그러면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엘리사벳은 성모님께 축복의 인사를 드렸고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 것처럼 우리들의 만남이 이렇게 축복과 은총으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5월 마지막 날입니다나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충실하게 지내면 좋겠습니다나를 통해서 지친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절망 중인 이웃들이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기뻐하소서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구원의 성채인 가톨릭교회 안으로 들어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양승국신부-

 

피정 센터에 와서 낯선 사람들에 대한 환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온몸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족처럼, 절친처럼 여기며, 기쁘게 환대하다보니, 참으로 은혜로운 체험을 많이 하고 삽니다.

  

첫 만남 때 인사부터 잘해야겠지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누추하고 불편하시더라도 머무시는 동안 주님 은총 안에 편안한 시간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빈말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첫 단추를 잘 꿰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 만남, 첫인사가 잘 되면 그 뒤로는 매사가 술술 일사천리입니다.

  

그 간단한 환영의 인사에 세파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이 순식간에 눈녹듯이 녹아내린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아름다운 환대의 영성을 좀 더 생활화한다면, 이 심각한 위기 상황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들이 우리 가톨릭교회를 찾아올 때, 기존의 구성원들은 어떤 자세를 보이는지요? 진심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환영하고 환대하고 있는지요? 그들이 우리 성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극진한 환대를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가요?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의 마음속은 그야말로 복잡하고 심란했을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미래에 대한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큰 그림을 그려주셨지만, 마리아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는 순간 즉시 다가오는 도전들과 근심 걱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서른 마흔도 아니고 10대 초반의 소녀 나자렛의 마리아는 마치 안갯속 길을 걷는 듯한 막막함으로 인해 힘겨웠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마음을 한 아름 안고 마리아는 사촌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아인카림을 찾아갑니다. 마리아의 머릿속은 정말이지 복잡했을 것입니다.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혼전 잉태 사건을 엘리사벳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마음에 걱정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 마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모든 걱정은 한낱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버선발로 튀어나온 엘리사벳을 그야말로 온몸과 마음으로 마리아를 환대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사촌 언니 엘리사벳의 극진한 환대에 불안·초조했던 마리아의 마음은 태평양 바다보다 더 편안해졌습니다. 이 엄청난 하느님의 초대 앞에서 대체 누구한테 가서 자문과 조언을 구해야 하나 전전긍긍하고 있던 마리아였는데, 엘리사벳은 그 초대가 진정으로 참되다는 것을 진정성 있는 환대로 확증해준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 삶의 다양한 순간 우리를 극진히 환대해주십니다. 내 품 안으로 잘 들어왔다고. 내 성찬의 전례 안으로 잘 들어왔다고. 영원한 안식처요 구원의 성채인 가톨릭교회 안으로 잘 들어왔다고. 

 

오늘 하루 우리 역시 주변 동료 인간들을 진심으로, 그리고 극진히 환영하는 환대의 영성을 생활화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환대란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친절, 작은 서비스, 작은 환영과 격려의 말이 환대의 영성의 핵심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영근신부-

 

오월, 성모성월을 마감하면서, 우리는 '복된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아름다운 만남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첫째 만남은 두 여인의 만남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한 여인들입니다.

한 여인은 동정인 채 아기를 가진 처녀이고, 다른 한 여인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나이가 많은 돌계집인데도 아기를 가진 여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두 여인들에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만남에서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생긴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이 기쁨과 찬송이 되어 터져 나옵니다.

먼저 그것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치는' 엘리사벳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루카 1,44)

 

그리고 마리아는 스스로 가난하고 비천한 종임을 고백합니다.

곧 작고 낮은 자 안에 벌어진 하느님의 자비를 찬송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겸손한 만남입니다.

동시에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믿음을 찬송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루카 1,45)

 

오늘 우리가 성모님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면 우리 안에서도 놀라운 탄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를 낳으신 분을 내가 다시 낳는 것입니다.”

 

둘째 만남은 더욱 더 의미심장한 만남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과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만남입니다.

사실 요한이 6개월 형이지만, 아우 예수님께 먼저 태중에서 기뻐 용약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랐듯이, 요한도 태중에서 하느님인 예수님의 방문에 몸 둘 바를 몰라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벌어진 아기 예수님의 이 신비로운 방문은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 세상을 방문하신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친교요 소통입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서로의 임신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서로 소통하고 친교를 나눕니다.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신비로운 소통과 친교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 두 여인은 무명의 시골 아낙이었습니다.

궁중의 여인도, 부잣집 마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분과 지위에서 보통 여인이었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위대한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어머니가 된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수록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요,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교제하는 깊은 친교가 필요합니다.

또 서로 믿음 안에서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 능력 있는 부모, 더 이익을 주는 동료, 더 똑똑하고 재주 많은 후배가 아니라 ‘더 믿어주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십니다. ~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조욱현신부-

 

오늘 축일은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주님의 잉태 소식을 들은 마리아가 예루살렘 남쪽 유다 지방에 사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엘리사벳은 노년에 이르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나이에도 아이를 가진지가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말씀을 천사에게서 듣고 “길을 떠나, 서둘러”(39절) 엘리사벳의 집으로 바삐 가시는 모습이다. 친척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39절) 가는 모습을 우리는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한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주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서 비롯되었다고 많은 영성가는 말하고 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잉태 소식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거기에 그냥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그 사실이, 그것도 걸음을 서둘러 이웃에게로 향했다는 사실이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이 모습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모범을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는 이렇게 신앙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 마리아를 통하여 배워야 하며,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즉 신앙을 갖고 사는 우리는 이제 마리아와 같이 즉시 이웃에게로 걸음을 서둘러야 한다. 이때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이웃에게 낳아주는 또 하나의 마리아가 되는 것이다. 즉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완숙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성장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어야 한다. 즉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자신의 태도가 사랑(1요한 4,7), 즉 형제들을 향한 사랑으로(참조: 3,1) 특징지어져야 하며, 자신의 인격을 걸고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복되신 마리아는 주님을 찬미하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 역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 때,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언제나 감사드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56절) 마리아의 봉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의 봉사였다. 엘리사벳의 산후조리까지 도와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사랑을 많이 가진 자일 것이다. 참으로 높은 사람은 자신을 작게 보고 모든 귀한 영예를 허무와 같은 것으로 보는 자일 것이다. 마리아의 방문이 이 같은 느낌이 들게 해 준다. 만왕의 왕이신 분을 가지신 분이 엘리사벳을 찾아가 봉사하다니! 놀라운 겸손과 사랑의 신비를 보는 것 같다. 마리아를 닮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말씀 나누기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만나야 할 사람과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