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2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2. 6. 2. 06:05

 2022년 6 2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0-26)

"I pray not only for these,
but also for those

who will believe in me through their word,
so that they may all be on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님께서는 바오로에게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들이 “사람은 안 변한다”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을 직접 듣게 된다면 기분이 좋을까요? 부정적인 특질에 대해 체념하는 듯한 표현으로 주로 쓰기에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 참 한결같다.”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앞의 “사람은 안 변한다”라는 말과 다른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의 주인공이 자신일 때는 기분이 좋아지게 됩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하는 긍정적인 특질을 바라보며 쓰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뜻이지만 좋아하는 말이 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싫어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내 생각과 달리 상대방이 다른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상대방 말을 오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말과 행동입니다. 그래서 더 조심히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아무리 조심해도 오해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믿는 상대에 대해서 우리는 관대해집니다. 믿음이 깨졌을 때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 믿음이 굳게 세워져 있을 때는 무조건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 믿음의 관계를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 믿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의 내용에는 믿고 있는 제자뿐이 아니라, 장차 모든 시대의 모든 장소에서 믿는 이들의 공동체 곧 교회를 이룰 사람들까지 기억하고 계십니다.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될 수 있기를 청합니다. 믿음의 관계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과 믿는 이들 모두가 굳은 믿음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면, 세상의 어떤 어려움에서도 희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제1독서를 보면, 바오로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런 사명을 전달해주시지요.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사도 23,11)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의 관계를 형성한 사람은 끊임없이 “용기를 내어라.”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말씀에 희망을 만들어가면서 힘차게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믿음의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 먼저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좋은 관계에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불평불만만 던지지 말고, 먼저 믿어보십시오.
석수가 101번째 망치질로 바위를 깨뜨렸다면, 이는 101번째 망치질이 아니라 지금까지 두드린 100번의 망치질의 결실이다(제이콥 리스). 

 일치의 기술: 영광을 보여줘라!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IhuIPO0699s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제 당신 제자들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된 이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 기도 목적은 오로지 그들의 ‘일치’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서는 ‘이름과 진리’를 말씀하신 것과는 달리 신자들을 위해서는 ‘영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2)

  

    우리가 이 영광의 뜻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마지막 구절을 통해 보면 영광은 곧 ‘이름’,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6)

    예수님께서 신자들을 일치시키는 방법은 당신께서 받으신 사랑의 영광, 곧 성령을 신자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분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을까요? 어머니에게 순종해도 잘 될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돈 벌어오는 분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옛날 정형화된 가정의 예입니다). 어쩌면 어머니에게 하는 그 순종이 아버지를 배신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순종하는 것에 머뭇거립니다. 이렇게 되면 형제간에 분쟁이 일어납니다. 이런 가정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게 됩니다. 

  

    자녀들을 일치시키려면 어머니는 자신을 따르는 것이 아버지를 따르는 것임을 인식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든 남편에게서 필요한 것을 얻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에게 보는 영광입니다. 영광은 아버지에게서 오지만 어머니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영광을 보면 아이는 편안하게 어머니에게 순종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싸우지 않고 일치합니다. 

 

    직장으로 보면 이 영광은 리더가 가진 ‘법인카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인카드는 회사에서 팀원들의 일치를 위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준 영광입니다. 리더가 법인카드로 가끔 회식해 주거나 팀에게 필요한 것을 산다면, 팀원들은 그 리더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회사에 순종하는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팀의 결속력은 강해집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도 인민군 장교가 동막골의 촌장에게 리더의 역할을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군대도 아닌데 동네 주민들이 촌장의 말에 순종하여 단합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선! 뭘 잘~ 믹이야지!(먹여야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은 본래 하늘이 주는 것이란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리더는 팀원들의 먹고사는 것을 책임져 줄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켈커타의 사랑의 선교회 모원에 사는 300여명의 수련 수녀들이 음식이 없어 모두 굶게 생긴 일이 있었습니다. 주방 담당 수녀는 마더 데레사에게 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하면 마더 데레사가 몇몇의 후원자들에게 전화를 해서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 중이었으며 그 어린 수녀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매가 이번 주 주방 담당인가요? 그렇다면 경당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먹을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세요. 그 문제는 해결됐군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그렇게 십 분 후 현관 초인종이 울렸고, 처음 보는 어떤 남자가 서류철을 들고 마더 데레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을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데레사 수녀님, 공립학교 교사들이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수업이 취소되어서 7,000개의 점심 도시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도시락을 처리하게 도와주시겠습니까?”

  

    마더 데레사는 하느님께서 주신 법인카드가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필요한 때면 언제든 쓸 수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이 영광이 형제 자매들을 일치시켰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께 순종하면 그것이 동시에 아버지께도 순종하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자녀들은 계속 어머니 머리 위를 바라보며 아버지의 영광을 찾습니다. 자녀들이 엄마의 머리 위에 아빠가 준 ‘영광의 관’을 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박효진 장로의 유튜브에서 선배 장로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이야기를 들은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연세가 많아서 돌아가시면서, “이제 천사가 왔으니 내가 갈 때가 되었나보다. 나가서 좀 봐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뭔가 보이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빨리 나가서 보라니까 뭘 그리들 꾸물대냐?”라고 했다고 합니다. 

  

    형제들은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집은 초가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초가집 지붕 위로 둥그렇게 불과 같은 형체들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지붕이 불에 타는 것 같았습니다. 불붙은 떨기나무처럼 불은 있지만 집은 태우고 있지 않았습니다. 가족 모두 이 광경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들어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고 아버지는 이내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와서 보니 지붕 위에 있었던 천사들은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받은 아버지의 자녀들은 서로 싸울까요, 아니면 사이좋게 지낼까요? 부모의 뜻은 언제나 형제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것이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절대 형제간에 싸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자녀들은 어머니에게서 아버지의 영광을 보고, 어떤 자녀들은 보지 못합니다. 그 영광을 보지 못할 때는 어머니의 말에 권위가 없어서 자녀들이 말을 안 듣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일치시키기 위해 먼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 영광은 바로 십자가의 순종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또한 내가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해서만 자녀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십자가로 아버지께 순종하여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 곧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이 영광이 있는 한 교회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광을 포기하면 분열합니다. 가톨릭이 아닌 다른 종파의 그리스도교가 분열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영광을 교회에 주시고 그 교회를 통해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계속 드러내는 교회여야 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중략)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0.22) 

 주님,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Wg8qoIu_yw

 -조재형신부-

 

엠이 모임에서 백년회로한 부부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60년을 부부로 함께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 3가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경청인내사랑의 표현을 이야기하였습니다나눔 중에 지금 우리부부에게 중요한 3가지를 이야기해 보았습니다나이가 들면서 부부생활에 중요한 것으로 건강을 이야기하였습니다몸이 아프면 부부생활에도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이야기하였습니다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도 신앙의 힘으로는 풀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뢰를 이야기하였습니다믿음은 부부생활을 지탱하는 견고한 성과 같습니다신뢰가 무너지면 함께 있지만 독신으로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부부생활에 중요한 3가지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입니다선배들이 사제생활을 위해서 언제든 꼭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선배들은 그것을 ‘3S'라고 하였습니다라틴말인데 모두 S로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Sapientia, Sanctitas, Sanitas'라고 하였습니다사제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옳고 그름을 실천할 수 있는 건강옳고 그름의 원천이 되는 성덕입니다말씀을 선포하는 성직자나 수도자에게 필요한 덕목도 3가지를 배웠습니다청빈정결순명입니다주님께로 나아가는 덕목도 3가지를 배웠습니다믿음희망사랑입니다. 31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겸손입니다친밀함입니다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제자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십니다지동설이 틀린 주장이었던 것처럼 나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 됨이 아닙니다원의 중심에서 원의 둘레는 모두 같은 거리에 있듯이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그럴 때 서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게 됩니다서로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게 됩니다학연지연혈연사상이념종교라는 틀로 차별하지 않게 됩니다바리사이파는 자신들이 지키는 율법을 중심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였습니다이방인들죄인들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그들을 단죄하였습니다사두가이파는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중심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였습니다가난한 이들로마라는 힘에 저항하는 이들죽은 이들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이들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그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유럽의 심리학에는 3명의 학자가 있었습니다우리가 잘 아는 프로이트와 아들러프랭클입니다프로이트는 쾌락이 행복의 기준이라고 했습니다많은 사람이 금욕과 극기에 억눌려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그의 이론은 유럽의 정신의학계에 영향을 주었고공헌하였습니다아들러는 쾌락과 더불어 권력에의 욕구를 행복의 기준이라고 하였습니다사람들은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만족을 얻기 때문입니다프랭클은 쾌락권력에의 욕구’ 이외에 다른 한 가지를 생각하였습니다그것은 의미의 추구입니다사람은 어떠한 절박한 상황에서도 의미를 찾게 되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고죽음도 그 의미를 덮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그가 수립한 로고테라피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고용기를 주었습니다쾌락과 권력에 대한 의지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의미와 가치를 중심으로 하나가 됨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인간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율법과 기득권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이들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어딜 가든 환영받지 못하는 아들딸들아, 다 나에게로 오너라!

 -양승국신부-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께서 남기신 고별사 한 대목을 묵상하면서 그분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애틋한 마음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복음 17장 21절) 

 

아버지와 온전히 일치하고 계시고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냥 그대로 계시면 세상 편하실 것입니다. 스트레스받을 일 하나도 없고, 온전한 평화 속에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 그 사이에 부족하고 불완전하며 사고뭉치뿐인 우리 인간을 초대하십니다. 우리를 당신과 아버지 사이에 끼워주십니다. 그로 인해 시끌벅적, 좌충우돌,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사서 고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그런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나와 잘 맞는 사람, 편안한 사람, 문제없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평화롭고 우아하게 지내고 싶어합니다. 뾰족뾰족 모가 난 사람, 까칠한 사람, 사연 많고 상처뿐인 사람은 가급적 끼워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르십니다. 그분은 어떻게 하면 한걸음 뒤처진 사람, 길 잃고 방황하는 사람, 그 어디에도 어울리지도 끼지도 못하는 이방인들을 당신 사랑의 공동체 안으로 초대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고 울고 지내는 사람, 따돌림당하고 외면당하는 작은 사람들에게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말씀하십니다.

 

“어딜 가든 환영받지 못하는 아들딸들아,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겠다.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안식과 평화를 주겠다.” 

 

언제나 뜨거운 마음으로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는 예수 성심 성월입니다.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 극진한 사랑,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분 사랑의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예수 성심 기도를 열심히 바쳐야겠습니다.

  

“예수 성심 기도는 보통의 기도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보통의 기도는 청원이 주된 내용을 이루며 그 효과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옵니다. 이때 예수님은 온갖 선의 창조주이며 분배자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예수 성심 기도는 예수님의 상처받은 마음에 공감하고 위로해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상처받고 고통을 당하시기에 우리의 공감과 위로와 동반을 필요로 하는 분이 됩니다. 기도의 효과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보통의 기도는 전능하신 분에게 내리사랑을 청하는 것인데, 예수 성심 기도는 우리의 사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정제천 신부의 내 영혼의 불씨, 생활성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최후만찬 후에 아버지께 드린 '대사제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으로, 믿는 이들과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1)

 

이는 당시의 믿는 이들이 '하나'되어 있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음을 반증해줍니다.

그렇다면 '하나'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어울려 친하게 지내라는 것을 말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성격 좋고 타인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하나'를 이루기에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1)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하나'란 '우리' 곧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아들 됨’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가 부자 관계로 '하나'를 이루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2베드 1,4)하게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그것은 ‘하나 됨’이란 곧 ‘사랑 안’에서의 이루는 ‘믿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하나'를 이룬 이에게서는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면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그분 안에서 함께 세워져서 영 안에서 하느님의 거처가 됩니다.”(에페 2,22)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곧 우리도 당신 ‘안에서’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광을 받게 됩니다.’(요한 17,22 참조)

그리하여 세상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고(요한 17,21),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7,23)

 

이처럼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 ‘대사제 기도’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바람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그들이)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 17,24)

 

사실 당신께서는 마태오복음에서 “나와 함께 있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태 12,30)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므로 누구나 당신이 계신 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당신 ‘사랑 안’에, 당신의 진리 안에 ‘함께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곧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행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면 당신의 ‘현존 안’에 머물게 되고 ‘우리도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을 보게 될 것’(요한 17,24 참조)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과 ‘하나’를 이룰 뿐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그분이 ‘있는 곳’에 있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일치하여 있으면 우리도 주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1)

주님!

당신과 함께 하나가 되게 하소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똑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길 바라오니, 제 자신을 건네주게 하소서.

당신을 받아들여 하나 되길 바라오니, 제 안에 당신을 실현하소서.

아멘.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라」

 -반영억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많은 기도를 받고 또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기도하는 것은 방법이 다를 뿐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 상관없이 삶 안에 젖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생각해 보면 ‘무엇을 해 달라’는 기도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하느님의 은혜로움에, 그분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막상 기도를 시작하면 나의 바람만을 쏟아놓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기도하기 위해서 먼저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침묵 없이는 제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버지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는 것도 자녀의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증언하는 말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26). 하고 말씀하셨듯이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바로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고 예수님께서도 그들 안에 머물러 사시게 됩니다. 결국 제자들을 통하여 믿게 된 이들, 바로 우리도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믿는 이들은 사랑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 세상에 하느님을 드러내 줍니다. 교회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17,24). 하고 간절히 기도한 것은 바로 당신이 누리는 영광을 믿는 이들에게도 전해주고자 하는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의 관계를 확고히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믿는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정성어린 기도를 봉헌하되 이기적인 기도를 벗어나 사랑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기도는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요한 비안네는 말합니다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실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분께 마음을 열며 거룩하신 하느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한없이 기뻐하는 것, 이것이 가장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여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오리게네스). 이고,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더 많이 사랑하여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그 사랑의 일치를 이웃과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송영진신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0-21).”

 

이 기도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면서 바치신 기도입니다.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은

사도들과 신자들의 선교활동 덕분에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 말에는 ‘앞으로’ 신앙을 갖게 될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사실 지금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전부 다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도는 ‘믿는 사람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씀과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씀은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구원을 받아서

하느님,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가 되다.’ 라는 말은, 단순히 ‘일치’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구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요청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인간들끼리만 하나가 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구원’을 뜻합니다.

창세기에 있는 바벨탑 이야기를 보면, 바벨탑을 쌓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하느님과 상관없이 자기들끼리만 뭉치려고 했습니다(창세 11,4).

그들의 단합은 그 자체로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느님을 거스르는 단합을 볼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라는 말씀은,

‘구원’이란 삼위일체의 일치에 참여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은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십니다.

바로 그 사랑과 일치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를

표현만 보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구세주’ 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는 말씀인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면서

바치신 기도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어서 구원받게 해 주십시오.”로 해석됩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2-24).”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기를,

그래서 그 사랑 안에서 함께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 5,45)” 사랑입니다.

즉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은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신 일,

또 그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하신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아서 못 받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를 짝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이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부르심에(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사랑에 응답해서

저와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입니다.

여기서 ‘영광을 보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뜻이고,

이 말은 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일치에 참여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5-26).”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관계, 일치’를 뜻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이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 떨어져서 살고 있지만”이라는 뜻이고,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는,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에게서 떨어져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준다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사랑을

알려 준다는 뜻이고, 이 말도 예수님만이 구세주라는 것을 뜻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사람들 안에 있게 하려고 한다는 말씀과 예수님도 사람들

안에 있게 하려고 한다는 말씀은,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구원받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심정을,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구원을 간절하게 바라신다.”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마치 자기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것처럼, 또는 구원이 확정된 것처럼,

자기 자신은 빼놓고서 남의 구원 문제만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일은 ‘나 자신의 구원’입니다.

‘나부터’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야만 남의 구원을 위해서도 일할 수 있습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7주 목요일-잘못된 사랑법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5월 20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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