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4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2. 6. 4. 06:13

 2022년 6월 4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1,20-25)

 

 

Jesus said to him,

“What if I want him to remain until I come?
What concern is it of yours? 
You follow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는 로마의 자기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찾아 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인다(제1독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며 그의 증언은 참되다고 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예전에 전문적으로 산악자전거를 타시는 형제님을 쫓아서 몇 번 산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자전거로 산에 오르는 것은 다리의 힘만 좋으면 그럭저럭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기술이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겁이 많이 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산에서 내려오다가 크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형제님을 쫓아 내려가는데 앞에 툭 튀어나온 돌멩이가 보이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급하게 잡았다가 미끄러져 넘어졌습니다. 그때 형제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신부님, 돌멩이나 나무뿌리 같은 장애물을 보고 겁을 내면 반드시 넘어집니다. 그냥 과감하게 확 지나가면 됩니다. 이게 가장 안전하게 자전거를 타는 방법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앞에 장애물이 놓이면 겁을 내고 맙니다. 주저하게 되고 그래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확 지나가면 그만이었습니다. 어떤 장애물도 나를 넘어지게 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용기입니다. 미국 작가 앤지 토마스는 이렇게 말했지요.

“용기란 무섭지 않은 게 아니라 무섭지만 계속 나아가는 것이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어떻게 될지를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형제들 사이에서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체험했던 제자들이기에, 이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죽음의 위협도 함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서의 참 기쁨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불안하기만 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주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남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자기 사명에만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에 신경 쓰면서 두려움 안에 있을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과감하게 확 지나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게 자전거를 타는 방법인 것처럼, 주님만을 굳게 믿고 자기 사명에만 충실한 것이 가장 안전하게 주님을 따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방법에 충실했던 바오로가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사도 28,31 참조).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사소함 속으로 더 깊이,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 곧 행복이다(최인철). 

 성령강림과 사도들의 어머니 마리아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YmrhxV7t034

 -조재형신부-

 

정약용 선생님은 조선 후기의 학자입니다정조의 사랑을 받았고행정가로도 촉망받던 인재였습니다그러나 정약용에게는 생각지 않았던 시련이 다가왔습니다새로운 학문으로 받아들였던 서학천주교가 몇 가지 이유로 박해를 받았습니다정약용이 속해있던 남인세력을 탄압하는 수단이었습니다천주교의 교리가 유교를 근본으로 하는 조선의 문화와 전통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형 정약종은 순교하였고정약용 또한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정약용에게 18년의 유배생활은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가족과 헤어져야 했고벼슬길에서 멀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정약용은 18년 유배생활을 좌절과 고통의 시간으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학문을 연구하였고후대에 길이 남을 역작을 저술하였습니다정약용에게 18년의 유배시절은 학문을 연구하는 시간이었고새로운 사상을 다듬는 시간이었고지난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었습니다정약용에게 유배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변곡점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유대인으로 성공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바오로 사도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고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동료였던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았고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유대인들이 로마의 법정에 바오로 사도를 고소하였기 때문입니다유대인이면서 로마의 시민이었던 바오로 사도는 항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감옥에 있었던 바오로 사도는 로마로 가서 재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바오로 사도에게 감옥은 고독과 단절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고통과 절망의 시간도 아니었습니다바오로 사도는 감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초대교회 신학의 토대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감옥은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학교였습니다감옥은 예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성전이었습니다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있으면서 여러 공동체에 편지를 보냈습니다몸은 비록 감옥에 있었지만 복음 선포에 대한 열정까지 감옥에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감옥은 바오로 사도에게 교리와 신학을 정립하는 새로운 변곡점이었습니다.

 

저의 삶에도 몇 번의 변곡점이 있었습니다저의 게으름과 나태함 때문에 보직에서 해임된 적도 있었습니다건강관리를 소홀히 해서 중환자실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과도한 음주습관으로 해외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기도 했습니다절망하기도 했고부끄럽기도 했고억울하기도 했습니다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늘 제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2018년 교구청 근무를 마치면서 주교님과 면담하였습니다본당사목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인사적체로 인해 오랜 시간 보조신부로 있어야 하는 후배사제들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인사이동을 하시는 주교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은 선택이었습니다주교님께서는 저의 선택을 존중해 주셨고저는 2019년 8월에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으로 오게 되었습니다낯선 곳에서 지내야 하는 걱정도 있었습니다언어 소통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신문 홍보가 힘들 거라는 생각도 하였습니다그러나 미국에서의 생활은 제 사제생활에 새로운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걱정은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이 되었습니다부르클린 교구뉴왁교구의 사제들과 친교를 나누었고 함께 여행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언어 소통에 대한 두려움도 곧 없어졌습니다직원들이 공적인 업무를 도와주었고제가 있는 플러싱은 한국말로도 소통이 가능한 곳이었습니다신문홍보가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팬데믹으로 2년 동안 신문홍보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넓은 땅 미국에서 캠핑을 다닐 수 있었고텃밭도 가꿀 수 있었습니다저에게 미국에서의 생활은 사제생활에 새로운 도전이었고기회가 되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너는 나를 따라라.” 그렇습니다중요한 것은 주어지는 상황이 아닙니다중요한 것은 주어지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입니다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두려움도근심도박해도칼도굶주림도감옥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맺어진 우리의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이 있고,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 사도의 심정은 꽤나 착찹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은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복음 21장 17~18절)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와서 철부지 어린 시절, 파릇파릇한 청소년기, 혈기왕성한 청년 시절, 완숙한 장년기를 거쳐, 마침내 노년기에 도달하면, 기쁨보다는 슬픔이, 희망보다는 우울감이 커져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끝난 이후부터 베드로 사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 주지 않습니다. 나머지 행적을 밝혀 줄 수 있는 정확한 자료가 없기에, 전승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토대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추정컨데 베드로 사도는 안티오키아, 코린토 등 여러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다녔을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생애 마지막 시기를 로마에서 보내셨습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 자행된 대박해 때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셨다고 전해집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자신의 미래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고통투성이뿐인 혹독한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스승님께서 콕 짚어주시니,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서운한 마음이 컸을 것입니다.

  

그런 연유였던지 베드로 사도는 사도단 안에서 언제나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던 경쟁자이자 절친이었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다시 말해서 요한 복음사가의 운명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게 몹시 궁금했던가 봅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복음 21장 21절)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미래에 대해서 알쏭달쏭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하셨던 것처럼, 요한 사도의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복음 21장 22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호기심을 반기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종착점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그 사람 운명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 인간 각자는 저마다 지닌 역량이 다르고, 부여받은 사명이 다릅니다. 궁극적인 도착점은 동일하지만 목적지로 나아가는 길은 조금씩 다릅니다.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이 있고,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하거나 눈치보지 말고 당당히 우리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주변 사람들 의식하느라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피곤하게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치 보고, 다른 사람들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며 살다 보니, 내 삶에 나도 사라지고, 주님도 사라져버린 어색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 인생은 그 사람에게 맡겨야겠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 인생도 주관하시고 안배하시니 대폭 신경을 꺼야겠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분산되는 에너지들을 대폭 줄여야겠습니다. 대신 내 삶을 좀 더 주도적으로, 좀 더 충만히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내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두고 부활시기를 마무리합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호숫가에서 나타나시어 아침을 차려 먹이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사명을 맡기시고, 베드로의 장래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은 사도 요한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장래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할지라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해를 불러일으켜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으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초대교인들에게 그 진원지를 밝히면서 이러한 소문이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내용을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을 확인까지도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다른 제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오랜 고향 친구입니다.

 

그러니 그의 장래가 궁금한 것은 당연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혹은 찬구를 경계하거나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여기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요한을 위해서 묻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요한을 무척 사랑했고, 또한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사도행전 2-4장과 요한복음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본문에서 베드로는 전에 최후만찬에서 배신자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묻지 못하고 요한을 시켜서 물었기에, 이제 요한을 위해서 호의로 직접 묻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고 하십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일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베드로는 벌써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목숨을 내놓고까지 따르겠다고 하고서 이미 세 번이나 배신하고 도망가지 않았던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호숫가에서 제자로 부르실 때에도,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올라갈 때에도, 부활하시어 나타나셔서도, 오늘 복음에서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

곧 베드로는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을,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 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 21,22)

주님!

길을 가다가 멈추지 않게 하소서!

멈추다가 떠밀려가지 않게 하소서!

떠밀리다가 뒤로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

휩쓸리다가 가야 할 길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따라 가게 하소서!

눈길을 돌리느라 옆길로 새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따르느라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고,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쓸모없는 호기심은 걸림돌이다」
-반영억신부-

 

“남의 떡은 더 커 보인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 것보다도 남의 것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자기 것에 만족하고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과 비교하며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허세를 떨기도 하고 분수없이 지낼 때가 있습니다. 잘 보이려 하지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 아름답건만 그것이 마음 같지 않아 힘들어 합니다.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 주면 속을 끓일 이유가 없건만 안타까움이 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던 사람입니다(요한21,20). 그런데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21,21)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생이고 너는 너의 갈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따라라.”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 제자가 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비교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각자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이 있고 탈랜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동료애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쓸모없는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지나친 호기심은 걸림돌일 뿐입니다. 그것은 상관을 넘어서서 간섭을 하기에 이릅니다. 우리와 상관없는 일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루카9,62) 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나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걷는 발걸음에 복이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요한복음의 핵심주제는 “서로사랑하자.”로 요약됩니다. 우리 삶을 사랑으로 물들이고 그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의 삶에 끼어들어 비교하고 험담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라”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 23)

-한상우신부-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며 많은
형제들이 떠났다.

고민하고
아파한
이 자리에서
주님
말씀을 듣는
모순된 상황이다.

하느님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결단이
다시금
필요한 시간이다.

수 많은 핑계를
대며 하느님과의
나와의 관계에
또한 불충실하였다.

낡은 가치관을
버려야 할
새로운 가치관의
흐름이다.

충실한 관계는
개별성과
독자성을 통해

어려운
이 시간을
견디며
헤쳐나가는
삶이다.

오직 모르는
삶의 앞날만이
우리들에게
펼쳐진다.

앞세우지
말아야 할
우리들 뜻이다.

꺼내 놓아야 할
상대에 대한
진실한
공감이다.

공감하되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원칙은
잃지 않아야 한다.

갈등과 부딪힘을
주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상대와 타인
이웃과 형제에
대한 평가를
내려놓고

우리자신에 대한
성찰과 결심이
우리를 건강하게
하느님께
흐르게 하는
신앙의 올바른
자세이다.

떠난 형제들도
남아 있는
형제들도
모두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안에
있다.

그 어떤
뒤에도
숨지 않는다.

하느님을
찾아가는
개별성의 여정
고유성의 역사를
나는 믿는다.

말씀 나누기 - 부활 7주 토요일-방해받지도 상관하지도 않는 나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5월 22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