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1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2. 6. 1. 06:14

 2022 6 1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유스티노 성인은 100년 무렵 팔레스티나 나블루스의 그리스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그리스 철학에 몰두하던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교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입교하여 신앙의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성인은 에페소에서 유다인 트리폰과 종교 토론을 하고 이를 토대로 「트리폰과 나눈 대화」를 저술하였으며, 로마 황제와 원로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책도 펴냈다. 로마에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기도 한 성인은 165년 무렵 다른 6명의 동료와 함께 순교하였다.

☆☆☆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 17,11ㄷ-19)

 

 

"Holy Father,

keep them in your name
that you have given me,
so that they may be one

just as we are on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하고 떠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제자들을 하나가 되게 해 주시고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기도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운전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방주시입니다. 물론 주변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주변을 보더라도 얼른 전방을 주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70%의 전방주시, 30%의 ‘주변 파악’을 하며 운전하는 사람을 소위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한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전방주시를 잘하면서 운전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전방주시가 필요합니다. 전방주시는 바로 자신의 목표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운전하면서 전방주시를 하지 않고 주변만을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요? 큰 사고가 나서 원하는 목적지에 제대로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 것들은 바로 주변의 것이 아닐까요? 전방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전방주시를 하지 않고, 주변의 것이라 할 수 있는 돈과 명예만을 바라본다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똑바로 갈 수 있도록 전방 주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변의 것만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야 할 곳을 잃어버려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운전할 때, 전방을 주시하고 있지 않으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목표인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지 않고 다른 것만을 바라보며 방황한다면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기도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주님이 보여주셨던 모범을 따라, 진리에 몸 바칠 수 있도록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빠짐없이 하느님 앞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청하시지요.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7)

이는 세상이라는 세속적 영역에서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종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진리의 하느님이신 주님과 함께하면서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거룩함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더 쫓으면서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를 전방 주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전방주시는 곧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이런 것만을 바라보면서 나중에 후회할 삶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삶만이 전방을 똑바로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로 힘차게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긍정은 부정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껴안고 넘어서는 데 있을 것이다(백무산).

 구원의 확신을 위한 두 조건: 이름과 진리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SImZKB1_zZE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당신 제자들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이 아버지와 일치하는 것처럼 제자들의 공동체가 일치되어야 합니다. 가리옷 유다는 제자들에서 벗어나서 결국 스스로 구원을 포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하나가 아닌 하느님을 상상할 수 없듯, 하나가 아닌 구원의 공동체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일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두 가지를 아버지께 받아 제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하나는 ‘이름’이고 하나는 ‘진리’입니다. 
  
    먼저 이름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면 자신이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정체성과 믿음입니다. 제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일원이 되려면 이 나라에 맞는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이름은 이 나라가 인정하는 한 시민이었던 저희 아버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주민등록증이 생겼고 이 이름으로 나도 대한민국 시민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불법 체류자들이 있지만 유럽은 더 많습니다. 불법 체류자들은 매우 불쌍합니다. 그들이 경찰에게 발각되면 거의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경찰들은 먼저 그들을 때리고 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경찰입니다. 
    제가 유학 가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집시들이 저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갔습니다. 처음 당해보는 소매치기여서 놀라기는 했지만 그들의 당당한 모습에 조금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한 여자의 손목을 붙들고 계속 얼마 전에 배운 단어인 ‘폴리지아’(경찰)를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녀들은 자신들이 가진 돈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큰 액수의 지폐는 계속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폴리지아를 외쳤더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가진 모든 돈을 저에게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탈리아에서 집시들의 돈을 턴 유일한 한국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이렇게 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자녀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바로 ‘성사’를 통해서입니다. 세례 성사를 통해 세례명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아닐지라도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 백성으로 인정한 교회가 준 이름입니다. 제 이름도 나라가 지어준 이름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시민이었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라 효력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그들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요한 17,12)
  
    여기서 “멸망하도록 정해진”의 직역은 “멸망의 자녀”입니다. 가리옷 유다를 가리킵니다.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이 받은 이름에 대한 확신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름에 대한 확신을 지니도록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코리텐 붐 여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했다고 합니다. 소련의 어떤 교회에서 예배를 올리려고 하는데, 예배당 문을 걷어차면서 두 명의 소련 군인이 들이닥쳤습니다. 기관단총의 총부리를 겨누어 흔드는 두 군인은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5분간의 시간을 준다. 예수를 버리고 살 사람은 5분 내로 예배당 밖으로 나가라. 예배당 안에 남아 있는 자들은 5분 후에는 모두 죽음을 맛볼 것이다.”
  
    모든 신자가 이 무서운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는 용기의 믿음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며 견디고 있는 순간, 몇 사람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시계를 바라보고 서 있던 군인들은 “마지막 50초다. 또 나갈 사람은 없느냐?”라고 소리쳤습니다. 
남아 있는 성도들의 얼굴은 모두 거룩한 표정으로, 자기들의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비장한 모습들이었습니다. 드디어 군인들은 안으로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러더니 총을 땅에다 내려놓은 두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 두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진정으로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는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 주님께 함께 경배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받은 이름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바로 ‘성호경’입니다. 언제 어디서건 성호경을 그을 수 있다면, 심지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사람 앞에서도 성호경을 그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름을 지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지닌 것에 참 행복과 기쁨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3)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름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듯이 ‘진리’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듯이 살면 진리를 지닌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만 해야 합니다. 곧 사랑의 행위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느님의 뜻이고 법입니다.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의식만 가지고 범죄를 저질러도 될까요?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법을 지키며 세금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 유지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자기를 망가뜨립니다. 사람은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거기서 요구하는 의무를 다함으로써만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7-19)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아버지의 법을 지켜 거룩하게 되신 것처럼, 당신은 당신 공동체에 당신 법을 주어 그 법으로 그 공동체의 일원들을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도 우리나라에서 살기 위해 공부하고 일하고 배려하고 봉사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커다란 공동체에 머물기 위해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공동체가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옥사나 말라야를 생각해봅시다. 인간이지만 자신이 개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인간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이렇게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그 공동체에 머물려고 노력하면서 거룩하게 됩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92~1983)은 네덜란드의 독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유대인들을 안전한 곳에 숨겨 주다가 독일군에 체포되었고, 그녀는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수용소의 환경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코리는 환경에 불평하다 언니 벳시에게 혼이 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힘입니다. 코리는 부모님과 언니 벳시를 수용소에서 잃게 됩니다. 그것도 눈앞에서 학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코리 텐 붐 여사는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코리는 막사 안에서 예배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다 금지되었지만 코리의 방에서는 허락되었습니다. 간수들이 벼룩이 하도 많아 그 방에는 들어오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코리는 감사했습니다. 혹독한 고난과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그녀는 함께 갇힌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기적적으로 수용소에서 석방된 뒤에는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자들을 돌보았으며, 전 세계를 다니며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어느 날 뮌헨의 한 교회에서도 전에 외치던 것처럼 사랑과 용서에 대해 말씀을 전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난 후 한 남자가 자기 앞에 다가와서 “오늘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손을 내민 그는 예전에 총을 들고 여자 죄수들에게 옷을 벗으라고 재촉하며 갖은 횡포를 다해 괴롭힌 악명 높은 수용소의 독일군 간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군요. 당신도 저를 용서해 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죽은 언니가 생각나서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나도 아직 주님께 용서받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해 주시는 것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는 내가 그리스도처럼 살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다스려 주옵소서. 하느님, 내 마음속에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니까 마음이 열리고 그 남자를 용서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코리 여사는 그 사람을 용서해 주었고 그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여사는 그때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뿌리 깊은 쓰라린 원한의 상처가 치유 받고 그 후로 온 세계에 다니면서 용서와 사랑을 담대하게 전할 수가 있었다고 그녀의 책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름과 진리, 이것을 간직합시다. 이름은 내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입니다. 이는 기쁨을 줍니다. 또 진리는 그 믿음답게 살아 구원의 공동체의 일원임을 증명해내는 일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이기에 당연히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을 아는 삶입니다. 이로써 거룩해집니다. 나에게 이 이름과 진리가 있다면 나는 당연히 구원받고 오늘도 거룩해져 가고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 자녀라 항상 기쁘며, 그래서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매일 거룩해지고 있다면 나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거룩한 진리의 징검다리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luWW3arPMNo

 -조재형신부-

 

신부님들과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엘 다녀왔습니다뉴욕에서는 자동차로 8시간 정도 걸립니다웅장한 폭포를 보는 것은 즐거움입니다가고 오는 길에 사목의 경험을 나누는 것은 유익한 시간입니다첫날 제게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호텔의 제 방에 베드버그가 있었습니다방을 바꾸었지만 다리에는 벌레에 물린 상처가 있었습니다가려울지라도 긁지 않고 며칠 있으면 상처는 아물기 마련입니다하지만 가렵다고 상처를 긁으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게 됩니다육체의 상처는 경험으로 치유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뉴욕으로 돌아와서 약을 발랐고상처는 이내 아물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경험으로도 좀처럼 치유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그래서 부처님은 두 번째 화살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첫 번째 화살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고통입니다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원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겉과 속이 다른 나의 행동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 있습니다첫 번째 화살은 누구에게나 날아옵니다중요한 것은 두 번째 화살입니다자책하는 화살을남을 원망하는 화살을시간을 탓하는 화살을시기와 질투의 화살을 자신에게 날리곤 합니다그래서 첫 번째 화살로 상처 난 마음을 두 번째 화살로 더 아프게 합니다두 번째 화살을 과감하게 버릴 때 우리는 첫 번째 화살로 난 상처를 디딤돌로 삼을 수 있으며 깨달음의 길로 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저도 상대방이 무심코 던진 말에 과민하게 반응한 적이 있었습니다그래서 저 자신에게 두 번째 화살을 날린 적이 있었습니다열등감 때문에 그렇게 반응한 적이 있습니다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반응한 적이 있습니다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그렇게 반응한 적이 있습니다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인데 한 동안 괴로워한 적이 있습니다저는 몸이 유연하지 못합니다다른 사람에 비하면 공간을 지각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걷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하는 운동도 없습니다그래서 운동을 하면 다른 사람보다 부족합니다운전도 30년이 넘었지만 늘 긴장이 됩니다그래서인지 누가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운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저 자신에게 두 번째 화살을 날릴 때가 있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첫 번째 화살에 대해서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3년 동안 공들여 복음을 전하였지만 공동체에는 사나운 이리 때처럼 공동체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넣을 사람이 생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진리를 왜곡하고 거짓으로 선동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두 번째 화살을 날리지 않았습니다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길 수 있었습니다달릴 길을 충실히 달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두 번째 화살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그것은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바오로는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공동체도 바오로 사도를 볼 수 없음을 알았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떠나보낼 수 있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도 첫 번째 화살이 많았습니다박해와 시련이 있었습니다분열과 갈등이 있었습니다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나뭇잎은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내가 두 번째 화살을 날리지만 않는다면 성령께서 우리의 상처를 아물게 해 주실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아버지의 영광의 현현을 위한 기도에 이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한 이들임을 재확인하면서, 제자들을 세상의 악에서 지켜주시고 그들이 하나 되고 거룩해지기를 간청합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6절),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앞으로도 알려주겠습니다.”

(26절)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느님보다 그분의 속성을 더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낸다는 것은 아버지의 실체에 관한 모든 것, 곧 그분의 존재와 본성, 그분의 거룩함과 정의와 사랑, 그분의 능력과 보호와 신실하심을 드러냅니다.

 

사실 성경에서 기도에 대한 가장 처음 언급된 곳이라 할 수 있는 창세기에서도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곧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나자,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창세 4,26)

또한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바칠 때도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1열왕 8,29) 하신 분께 기도를 바쳤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루카 11,2)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공적 소명을 끝내시면서, 그 소명을 이어가게 될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신적 일치에 ‘하나’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곧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보호받고, 아버지와 당신의 하나 됨을 체험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하나 됨’은 그리스도란 이름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룬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실재로 초대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사도 4,32)으며,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1코린 12,13)

 

그러나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과 말씀을 주셨고 성령으로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지만(아우구스티누스), 세상은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청하면서 기도하십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요한 17,17)

 

그렇습니다.

진리이신 말씀을 행함으로서 우리 안에 거룩함은 더욱 자라게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17)

주님!

깨끗하기보다 진실되게 하시고, 흔들리지 않기보다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단지 함께 있기보다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사랑하되 행동하게 하소서.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시고, 제 안에서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반영억신부-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데 천국을 살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게 말하는 것처럼 쉬운지 아십니까? 정말 어렵습니다. 신부님은 자꾸 하늘을 보라고 하시는데 하늘을 보니 제가 땅에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땅에 있으니 땅의 처지대로 살아야겠습니다. 저도 먹고살아야지 어찌합니까! 그래도 하느님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주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진리 안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곧 진리이십니다.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걸으면 진리인 말씀을 발견하고 깨닫게 되며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면 세상이 그를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빛으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요한1,5). 그러므로 두려워 마십시오. 지금 당장 힘에 겹더라도 반드시 빛의 진가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요한3,21).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리고 육화를 통하여 인간이 되신 진리인(요한14,6)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티모2,15). 사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1요한2,3-4).

 

우리가 비록 땅에 발을 붙이고 있지만, 진리를 거슬러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험해지면 험해질수록,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믿는 이들이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남의 탓이 아니라 내가 빛나는 삶을 살지 못한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주님의 뒤를 이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미 천상을 사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어둠을 탓합니다. 믿는 이들이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모순에 있는 것입니다. 나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못마땅한 것이 보이면 보일수록 더 많이 사랑하고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어디 계시냐는 물음에 확실한 답을 줄 수 있는 건 바로 믿는 이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다독이며 살아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박병규).

 

예수님께서는 시련의 고통 안에서도 아버지와 깊은 일치를 이루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인해 제자들이 거룩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 거룩함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혹 죄에 떨어졌다면 주님의 거룩함에 온전히 맡겨드려 다시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의 기도는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악에서 지켜 주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로 요약됩니다. 그 기도가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송영진신부-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요한 17,11ㄷ-19).”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는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나서

겟세마니로 가시기 전에 바치신 기도입니다.

그래서 만찬 장소에서, 또 제자들이 듣고 있는 상황에서 바치신 기도인데,

표현은 분명히 아버지께 바치신 기도이지만,

내용은 제자들에게 하시는 ‘간곡한 권고’입니다.

(제자들 들으라고 바치신 기도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기쁨에 가득 차서’ 바치신 기도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간절한 심정으로’ 바치신 기도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이고(요한 17,6),

뜻은 ‘하느님의 권능으로’입니다.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는

제자들이 하나로 일치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권능으로 보호하고 인도해 주시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처럼’은 ‘하느님과 예수님처럼’이고, 이 말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일치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사랑 없이 이루어진 단결과 단합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치가 아닙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라.” 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들을 지켰습니다.” 라는 말씀과 “이들을 보호하여”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항상 제자들을(신앙인들을)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활동 기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승천하신 뒤에는 제자들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뒤에도 계속 신앙인들과 함께 계시면서

신앙인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그 보호는 능동적으로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보호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거부해서 못 받게 됩니다.

배반자 유다가 바로 그 경우입니다.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는 배반자 유다입니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이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유다의 배반마저도 구원사업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뜻이고,

또는 유다가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는 뜻이고, 유다에게 배반의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다는 정해진 운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반자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배반은 유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일입니다.

(이 기도는, “너희는 나의 보호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라는 당부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3).”

 

예수님께서 일부러 제자들이 듣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기도를 바치신 것은,

슬프고 두려운 일을 겪더라도 흔들림 없이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기쁨’은 ‘구원의 기쁨’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에 대한 기쁨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가 구원받는 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지금 이 세상에서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게 되는 기쁨입니다.

여기서 ‘속으로’는 ‘마음속으로’, 또는 ‘영적으로’입니다.

‘몸’은 고난과 시련과 박해 때문에 고달프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신앙인들의 ‘영혼의 평화와 기쁨’을 빼앗지 못합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한 17,14-16).”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다는 말은, ‘구원의 길’을 알려 주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 길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좁고 험한 길’로 보이는 길입니다(마태 7,13-14).

믿음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넓고 편한 길’로 걸어가는데,

그 길은 멸망을 향해서 나 있는 길입니다.

‘구원의 길’과 ‘멸망을 향해서 나 있는 길’은 완전히 다른 길입니다.

신앙인들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데,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신앙인들이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보면서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길을 걷고,

다르게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신앙인들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 일은 ‘세상의 복음화’입니다.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보호 없이 사람의 힘만으로는 ‘세상의 복음화’를 이룰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 일하려면,

일하는 사람 자신이 먼저 복음화 되어 있어야 합니다.

복음화 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거룩함’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된다는 말은(요한 17,17.19),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거룩함’에 도달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보호와 도움 없이는 거룩함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생활이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거룩함’으로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7주 수요일-이별할 때 우리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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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2021년 5월 19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