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8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요한 16,23ㄴ-28)
I came from the Father
and have come into the world.
Now I am leaving the world
and going back to the Fa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다인 달변가 아폴로는 아카이아로 건너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당신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면 무엇이든지 받을 것이고 아버지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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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성지에서 혼자서 놀고 있는 꼬마 아이를 보았습니다. 조그마한 자동차 장난감을 계속 움직이면서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다가가서 “신부님도 한 번 해볼까?”하면서 자동차를 뒤로 당겨 앞으로 가게 했습니다. 아이는 너무나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해달라며 제게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이의 즐거워하는 표정에 2~3번 연속해서 해줬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해달라며 자동차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했으니까 이제 그만할까?”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계속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이런 경우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 아이는 움직임 자체를 보기 때문에 지루해하지 않는 것이고, 어른은 알고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움직임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겨워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예도 볼 수 있습니다. 화가는 한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봅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은 그렇게 오래 볼 수 없습니다. 화가는 그 모습의 본질을 계속 찾으며 보는 것이고, 일반 사람은 겉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봐야 오래 볼 수 있고, 변화를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새로움을 보게 되면서 계속 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겉모습만 보면서 자기 판단으로 단정 짓고 맙니다. 여기에 부정적인 판단이 등장하면서 자기와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할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겉으로만 대충 보고 말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본질을 봐야 오래 볼 수가 있고, 그 안에서 새로움을 보게 되면서 계속 보고 싶은 분이 될 것입니다. 기도, 묵상, 미사, 봉사와 희생 등의 사랑 실천을 하기 싫어하고 지루해야 하는 사람은 주님을 겉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요한 16,23)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일을 선포하실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부족했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과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겉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나하나를 보면서, 주님의 본질을 보게 되고 새로움을 찾게 됩니다. 계속 주님께 머물고 싶어집니다.
여러분의 주님께 대한 시선은 과연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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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아폴로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l3MaMHf6Rgg
오늘의 말씀에서 묵상해야 할 화두는 복음에서는 기도요, 독서에서는 지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 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네 신앙 현실의 경험과 다소 아니 어쩌면 한참 동떨어집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해 오고 있지만 기도하는 것마다 들어지는 경험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는 우리의 기도가 그분의 기도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말로 기도해야 당신 귀로 들으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가 삶으로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으면 즉시 알아들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마음에 그려지는 바가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마태 6,8). 이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말로 표현하여 기도하시기 전에 먼저 마음에 그려지고 삶에서 우러나왔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삶에서 기도와 동떨어진 채 간절한 마음도 없이 입으로만 기도하는 수가 많은 것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 이해와 우리의 기도 이해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진정성이요 실천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부터 청하되(마태 6,33), 기도하고 나서는 그 기도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1,24). 이처럼, 예수님은 물론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 기도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깨달음을 정리해 놓은 인식 체계가 성경이나 교리에 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사물과 사태를 인식하는 세상 지식과는 질적으로 달라서 자신의 영혼을 다스리는 힘과 인간관계를 조정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영적인 지식입니다. 그래서 세상 지식으로는 자기자신을 변화시키기 어렵지만, 영적인 지식은 자기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의 동업자이자 동료 선교사가 된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가 아폴로라는 설교가를 만나서 한 수 가르쳐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평신도 부부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교리에 관한 지식은 성경에도 정통하고 예수님에 관한 일들까지도 정확히 가르쳤던 직업적인 설교가를 가르쳐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그 부부는 바오로로부터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 양식에 관한 초대교회의 체험과 전승을 전수받을 수 있었지만, 아폴로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에서도 지도자 역할을 한 선비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정약종은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지었는데, 그는 강학회에서 교리에 통달했던 이벽으로부터 직접 천주교 교리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이벽이 지은 ‘성교요지’와 한역서학서들을 참조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경기도 마재 교우촌에서 사귄 황일광 시몬이라는 천민 출신의 교우로부터 민중 언어는 물론 그에 담긴 민중의 심성 속에 전해져 내려오던 전통적 신관을 배워서 이 교리를 담아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미신화되어 버린 민간 무속에 대하여 영적인 식별을 정확히 해 냈으므로, 교우촌 신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읽혔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신자들의 교리 교육을 위해 명도회(明道會)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정약종을 임명한 후에 교리서 저술을 맡겨서 ‘주교요지’가 쓰여지게 되었는데, 평신도로서 정약종이 쓴 이 책이, 프랑스 선교사 마이야(馮秉正, Joseph Marie Anne de Moyriac de Mailla)가 지은 ‘성세추요(聖世蒭蕘, 대중교리서, 1733)’라는 한역교리서보다 낫다고 주 신부도 평한 바 있습니다.
박해가 종식된 직후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 보두네(Baudounet, François Xavier, 1859-1915) 신부는 호남 지방의 교우촌들을 둘러보고 나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이런 보고서를 써 보냈습니다. “새로 입교한 교우들의 협동심은 감탄스럽습니다. 그 중에서 뛰어난 미덕은 그들 서로가 사랑과 정성을 베푸는 일입니다. 현세의 재물이 궁핍하지만, 사람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조금 있는 재물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 공소를 돌아보노라면 마치 제가 초대 교회에 와 있는 듯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때의 신도들은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형제적인 애찬을 함께 나누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곳의 예비자들도 선배 형제들의 표양을 본받고 있습니다”(1889. 4. 22).
‘주교요지’를 통해 얻어진 교리 지식을 실천한 결과가 이렇듯 놀라웠습니다. 교우촌 신자들은 함께 나누는 삶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을 직접 실천하였습니다. 어려운 이웃은 물론이고 부모 잃은 어린이에게는 대부(代父)와 대모(代母)가 되어 힘써 돌보았으며, 죽을 위험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대세(代洗)를 주어 그들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초대교회에서 신자들이 지니고 있던 교리 지식의 실상이었습니다. 자기만을 위하거나 이익을 얻으려는 세상 지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식이었습니다. 부활 신앙을 살았던 영적인 지식이었으며, 공동생활 양식을 실천한 인간관계의 지혜였는가 하면, 무엇보다도 삶과 마음으로 바치는 진실한 기도였습니다.
-조재형신부-
2019년 8월 21일에 뉴욕으로 왔습니다. 당시에는 아는 분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난 지금 제 주변에는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퀸즈 성당의 신부님들은 저의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팬데믹 기간에 매주 나눔을 하였고, 지금도 나눔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캠핑도 같이 다녔습니다. 퀸즈 성당의 봉사자들은 매달 우편물 작업을 도와주십니다. 부르클린 성당의 신부님은 매주 미사를 가는 저를 위해서 기꺼이 방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토요일에 가서 하루 머물기도 하고, 일찍 가는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아늑한 방에서 잠시 쉬기도 합니다. LA에도 제가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는 부부가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명예기자로 인연을 맺었지만, 지금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초대하였던 제자들처럼 제가 LA로 갈 기회가 있으면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줍니다. 작년에 가톨릭평화신문 서부지국을 LA에 만들었습니다. 기꺼이 사무실을 내어주고, 지국장을 맡아 주신 형제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한 것은 제가 유능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부족한 저를 위해서 좋은 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폴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아폴로를 보내주셨습니다. 아폴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지만 곧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아폴로는 믿음직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 본당신부를 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살던 부부가 제가 있던 성당으로 전입 왔습니다. 형제님은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도움으로 차고를 만들었습니다. 형제님은 성당의 시설분과를 맡아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대회를 맡아 주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처럼 형제님은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처럼 늘 겸손하였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행복했습니다. 사제성화의 날에 본당에서의 사목경험을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발표를 듣고 교구 사목국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첫 본당신부를 마치고 교구 사목국에서 교육담당업무를 맡았습니다. 저와 함께 했던 봉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복 신앙과 참된 신앙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기복 신앙은 청하면 복을 받는다는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복 신앙은 자칫 하느님과 흥정을 하거나, 거래를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기복 신앙의 위험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부른다고 모두 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청하면서 함께 삶이 뒷받침이 되는 신앙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20년간 눈 부칠 겨를도 없이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였습니다.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14년간을 일하였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올 수 있는 복을 받았지만 많은 노력을 함께 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께 청하면서 삶의 터전에서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름으로 청하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사랑과 정의, 기쁨과 행복이 자라나게 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양승국신부-
오래전 연로하신 한 자매님께서 제게 기도를 부탁하셨는데, 기도 지향을 두고 기도 바치면서 너무나 웃겼습니다.
시장통에 작은 점포를 가지고 있는데, 이젠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장사하기가 힘들어서 내놓았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났는데도 매수자가 없어 답답해 죽겠다. 신부님 기도빨 세다니, 부탁드린다. 팔리기만 하면 섭섭지 않게 후사하겠다고 하십니다.
다행인지, 제 기도빨이 셌던 탓인지, 일주일 뒤에 자매님께서 환한 얼굴로 미사에 오셔서 아이들한테 아이스크림 한 턱 제대로 쏘셨습니다.
때로 우리가 지향을 두고 바치는 기도, 하느님께서 보시고 깔깔 웃으시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역세권 아파트 분양에 참여했는데, 꼭 당첨되기는 바라는 청원기도, 내가 좋아하는 축구팀의 승리를 위한 기도, 사실 이런 기도는 정확한 의미로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라기보다는 강요요 억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어김없이 들어주실 바람직한 청원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성령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성령께서 항상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대신해서 성령께서 함께 기도해주시길 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시련과 도전 속에서도 더 꿋꿋이 더 당당히 사아갈 힘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우리가 고통과 시련을 기쁘게 견뎌낼 용기를 주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과 기꺼이 맞설 의로움과 의연함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선익을 위한 지향도 필요하지만 공동선을 위해 더 많이 기도 바쳐야겠습니다. 더 이상 전쟁과 폭력이 없는 세상, 더 이상 무자비한 폭력과 살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청해야겠습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굶주리지 않는, 더 이상 그 누구도 피눈물 흘리지 않는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이런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참된 청원기도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청원 기도의 지향이 좀더 폭넓어질 때, 생기는 신기한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큰 기도를 바칠 때, 우리의 사소한 청들은 덤으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는 매일의 기도 지향을 진지하게 점검하고 성찰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기도의 폭과 지평을 좀 더 확장시켜나가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인 고별담화의 마지막 부분들은 이미 하신 말씀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시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한 한 말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요한 16,23)
여기에서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을,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을, “무엇이든지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을 드러내줍니다.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우선순위로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바람이나 필요에 따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의에 따라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입니다.
기도자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그리고 품고 있는 관심사가 무엇이고, 무엇을 필요를 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기도하는 그 사람이 담겨 있다.”
그러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욕망의 해석자이다”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곧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당연히 우리의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이 궁극적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규명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
(2615항)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특히 ‘예수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동시에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말씀은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다 장만하시고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간청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모든 것을 당신에게서 찾기를 원하십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찾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요한 16,24)
주님!
이제야 겨우 알아듣습니다.
제 힘으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뜨거운 기도가 위태로운 나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그 애틋한 기도가 있어 휘청거리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기도라는 말에는 주님의 뜻에 맞는 청원이라는 뜻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다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 매달린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물론 하느님 앞에 철부지이니 떼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토마스 아 겜피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 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셨는데 과연 예수님의 이름이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예수님의 이름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하면 좀 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6, 27)
-한상우신부-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는
믿음이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믿음이다.
우리의
출발점을
다시 만나는
믿음의
시간이다.
믿음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생명의 올바른
방향이다.
믿음은
하느님을 향한
참된 흠숭이다.
믿음은
하느님과의
참된
만남이다.
참된 만남은
우리 영혼을
다시 은총으로
깨어나게 한다.
만남을 여는
믿음의 현존이
기도이다.
생명이
시작되는 곳에
기도가 있다.
기도는
우리의
생활이며
우리들
삶 자체이다.
세상을 향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이다.
실천하기에
자기중심적이지
않으며
자기를 속이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의 정체를
결정하는 행위가
바로 기도의
실천인 것이다.
기도의 실천이
곧 자기정화이며
공동체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는
어떠한가?
서로 나누고
서로 존중하는
믿음의 진실한
공동체를
꿈꾸어본다.
미룰 수 없는
믿음의 실천이다.
말씀 나누기 - 부활 6주 토요일-근거지와 선교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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