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25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2. 5. 25. 07:10

2022 5 25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 17,11ㄷ-19)

 

 

"Holy Father,

keep them in your name
that you have given me,
so that they may be one

just as we are on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아레오파고스에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하여 증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제자들을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 이르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을 두고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이 좋다”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신력이 웬만큼 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예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며느리가 새 식구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신혼집에 방문하신 시부모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데 글쎄 밥을 태운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인상을 쓰면서 “너는 친정에서 밥하는 것도 못 배웠니?”라고 나무랐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시어머니는 “내가 한 번 봐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네. 미안하다.”라면서 오히려 사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두 시어머니 중에 누가 정신력이 강한 분일까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먼저 책임을 지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더 큰 가치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이 먼저 책임을 지며 더 큰 가치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족함으로 인해 정신력 강한 사람이 되기 힘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과 함께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향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가신 다음 제자들을 홀로이 이 세상에 남겨두지 않고 당신과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이렇게 말씀하셨었지요.

첫째, 진리의 성령으로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머물 것이며(요한 14,16-17),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며(요한 14,25-26), 셋째, 진리의 성령으로서 예수님의 일을 증언할 것이며(요한 15,26), 넷째,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요한 16,8).

오늘 복음에서는 이제 다섯 번째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안내자이신 성령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 외의 또 다른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제자들이 깨닫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도와주고 격려하여 주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길로 제자들을 이끄시는 안내자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의 안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책임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더 큰 가치를 바라보면서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지, 생각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코율릿).

 성령이 충만하면 성경해석이 잘 될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0UIs24yvWKs 

오늘 복음은 말씀을 전해 주시는 ‘성령님의 역할’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 말씀을 지금은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요한 16,12) 
 
    만약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다면 성령의 역할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하시는 말씀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떤 가톨릭 잡지에 글을 쓸 때, “예수님은 유다 한 명도 회개시킬 수 없으셨다”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편집자분이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은 유다인 한 명도 회개시킬 수 없으셨다”로 바꿔서 실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유다인 한 명도 회개시키지 못한 분이 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십니다. 이해한다는 말은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그저 아드님한테서 들으신 말씀을 당신 생각을 첨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
  
    하느님이신데도 말씀에 한마디도 더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이기에 말씀에 자기 생각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말씀을 해석하게 만드는 장본인은 분열을 일으키려는 사탄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반전이라 불리는 ‘유주얼 서스팩트’는 주인공이 자신을 심문하는 경찰을 끊임없이 해석하게 만듭니다. 그런 해석을 통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결론을 내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범인은 해석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또 최고의 반전 영화는 ‘식스 센스’입니다. 여기서도 주인공은 끊임없이 상황을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정작 죽은 유령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정작 자신이 유령임을 깨닫게 되는 때는 해석하는 대상이 아닌 해석 당하는 대상이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감히 해석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말씀에 해석 당하는 대상입니다. 감히 성령께서도 말씀을 해석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해석하려는 것은 말씀 위에 서는 교만한 행위입니다. 사람도 해석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말씀을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 말씀을 해석하려 시도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분열이 일어납니다. 해석은 오해를 낳고 분열을 낳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베드로의 믿음 위에 세우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습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여기 어디에도 베드로의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없습니다. 베드로 위에 세운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게 어렵습니다.  
 
    또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행하신 성찬례가 예수님의 진짜 살과 피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
몸과 같이 여기라거나 그냥 예식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예식을 거행하라는 명령이셨습니다. 
  
    또 그들은 진리의 기둥이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1티모 3,15)
성경은 성경이 아니라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성모님을 하느님처럼 섬긴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어떻게 인사하였습니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성모님은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셨고 주님께서 함께 계신 분이셨습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그분은 주님의 어머니이십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2-43)
  
    친구의 어머니도 공경해야 하는데 주님의 어머니를 공경하는 게 무슨 잘못일까요?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께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분으로 공경받으시는 것을 질투하실까요?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모님께 공경을 올렸고 이것은 태중의 아기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말씀만으로!”란 가치를 들고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왜 실제로는 이렇게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지 못할까요?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령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말씀을 받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십니다. 이것처럼 해야 합니다. 말씀은 해석할 대상이 아니라 믿을 대상입니다. 믿고 순종할 대상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아버지가 죽으며 밭에 보물이 있으니 파서 갖는 사람이 임자라고 두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밭은 돌이 많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버려진 밭이었습니다. 두 아들은 보물을 찾기 위해 계속 밭을 팠습니다. 
    보물이 나오지 않자 첫째는 아버지가 자신들을 속였다고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돌밭을 파는 일을 멈추었습니다. 그래도 둘째는 열심히 팠습니다. 보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돌을 다 걷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씨앗을 뿌리니 정말 엄청난 수확을 하게 되었습니다. 몸도 좋아지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왜 아버지의 말에 대한 두 아들의 의견이 달랐을까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해석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올까요?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해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분명 자신에게 좋은 일임을 알고 순종하였습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지 않았고 그래서 말씀을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류에 빠졌습니다. 반면 둘째 아들은 말씀에 순종하였고 그 보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말씀하시는 분을 믿게 만들어 그 말씀에 순종하게 합니다. 순종하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녀에게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밭을 파 보면 보물이 나올 것이라고. 이렇게 하나도 첨가하거나 빠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먼저 말씀을 믿고 순종합시다. 그러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가장 완전한 해석입니다. 해석이라기보다는 ‘이해’입니다. 한 말씀에 여러 해석이 나온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여러 개의 해석이 가능한 말을 하여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을 분열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성경 해석 문제로 갈라진다면 그건 사탄에게 속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성령이 가장 충만한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입니다. 내가 진리의 기둥인 것처럼 성경을 해석하여 옳고 그르다를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말씀의 심판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심판하게 합시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5NcqRPULDxk

사도 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광장에서 직접 아테네 시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제까지는 디아스포라의 유다인 회당을 매개로 복음을 전해온 그가 다신교 풍습에 젖어 있던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선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수한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고, 하도 섬기는 신이 많다 보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제단을 세워 놓고 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오로는 그들이 섬기던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현세에서 뛰어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현세적 상황에서도 인간적 기대가 투사되어 실현되면 신이 발생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를 ‘발생적 신관’이라고 합니다. 이는 사랑과 선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믿는 ‘계시적 신관’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모든 민족들의 종교는 자연적인 신관으로부터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느님께서 직접 밝혀주심으로써 알게 된 계시적인 신관이 생겨났습니다. 이 계시적 신관을 받은 민족이 히브리 민족과 한민족입니다(창세 10,25.30). 

한민족이 받은 계시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신성의 발자취들입니다. 즉, 민속으로는 제천의식이요 유적으로는 고인돌이며 기록으로는 단군신화에 기록된 천손의식과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한민족의 신관은 유난히 경천사상이 뚜렷하고 여기서 우러나온 효의 윤리와 선과 의로움을 중시해 온 민속 등에서 나타납니다. 고려와 조선조에 무신론적 통치 이데올로기에 눌려 수면 아래에 잠복한 채 민간 심성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던 이 한민족의 신관을 새삼 깨닫게 된 역사적 계기는 천주교를 통해 그리스도 신앙이 들어온 오묘한 섭리의 과정 덕분이었습니다. 

 

  중국에 파견된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한역서학서의 도움으로 조선의 선각자들이 본격적인 그리스도 신앙의 신관에 접할 수 있었고, 이들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 안에서 전해 내려오던 신앙 감각의 도움을 받아 그 진리성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문난적으로 몰릴 각오를 무릅쓰고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였습니다. 

 

  실제로 경천사상과 효의 윤리, 그리고 선과 의로움을 유난히 강조하는 한민족의 신관은 인종적으로 우리 민족과 유사한 이웃 중국 민족과 일본 민족이 보여주는 자연발생적 신관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신관은 쉽게 바뀌지 않고 민족성과 민족문화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법인데, 지금 중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이 보여주는 바, 힘과 부를 숭상하며 진실을 감추고 거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세속적인 행태에서도 그들의 신관이 잘 나타납니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신관이 무속과 역술 등으로 미신화된 배경에는 고구려 왕조 시대 이래 조선 왕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계시 신관을 억눌러온 불교와 유교 등의 무신론적 사상 통제가 자리잡고 있고, 이는 무수한 신들을 만들어 내는 역작용을 냈습니다. 우리 민족의 시조로 알려진 환웅과 그 아들로서 국조가 된 단군도 신으로 숭배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단군신앙입니다. 특히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신적 기원을 알려주는 국조(國祖)로서 공경의 대상일 뿐 신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 신들도 공경하고자 하는 뛰어난 조상들을 부르는 경칭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나 흔해 빠진 신 개념의 세속화 내지 사사화 현상에 대한 또 다른 부작용이 생겨나서, 과학만능시대가 도래한 21세기 한국 사회에는 광범위한 무신론과 일상적인 유물론 사상 풍조가 만연해 있는 상황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알지 못하는 신’을 공경하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선교하던 지혜로운 방식을 감안한다면 우리도 신과 하느님 신앙을 오해하는 모든 이들의 숨은 지향을 읽어야 합니다. 다신론이든 무신론이든 또는 유물론이든 신관에 대한 역작용과 부작용 현상은 신과 하느님 신앙을 부인함이 아니라 신적 가치의 실현을 갈망하는 표현입니다(사목헌장, 21항). 

 

  불교와 유교 등 무신론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는 신적 가치라는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 신분으로 차별하면서 양심과 사상과 신앙의 자유가 없었고 인간 존엄성은 너무나 하찮게 취급되었습니다. 이에 천주교는 신적 가치에 따라 평등과 자유와 인간 존엄성을 요구하였으며 백년 박해 만에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아 인간화된 문명을 앞당겨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정치적 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를 넘어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평등이라는 실질적 가치를 실현해야 하는 국내적 과제가 남아 있고, 외세에 의해 강요당한 분단과 분열을 자주적으로 극복하고 남북교류를 앞당겨서 한반도 평화를 실현해야할 민족적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과제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경직된 서구적 신관에 편향되었던 기존 신자들과 무분별하게 무신론과 유물론에 기울어졌던 많은 이들이 모두 그리스도 신앙에 따른 한민족의 신성을 체험하는 민족 복음화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토록 오래 전부터 아시아의 동방에서 하느님을 섬겨 온 우리 민족을 진리의 영께서 이끄실 섭리입니다.

 -조재형신부-

 

타밈 안사리의 다시 보는 5만년의 역사를 읽었습니다인류의 문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했다고 이야기합니다저자는 이런 과정을 석물린다.’라고 표현합니다색은 삼원색이 있습니다빛의 삼원색은 함께하면 더 밝아지고물감의 삼원색은 함께하면 더 진해진다고 합니다이렇게 색은 석물리면서 다양한 빛과 색을 나타냅니다인류의 문명도 크게 4개의 문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메소포타미아 문명이집트 문명인더스 문명황하 문명입니다이 문명은 모두 강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와 유크라테스 강에서 시작되었습니다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에서 시작되었습니다인더스 문명은 인더스와 갠지스 강에서 시작되었습니다황하문명은 황하 강에서 시작되었습니다이렇게 각자 시작된 문명은 실크로드를 통해서해상의 무역 로를 통해서 서로 석물리며 발전하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을 수 있습니다만일 하나의 복음서만 있다면 예수님의 한 모습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4복음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요한복음서는 영성적인 사유를 하게 해 줍니다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줍니다예수님의 말씀이 태초부터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우주론적인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약의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다고 이야기 합니다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임마누엘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야기 합니다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루가복음서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굶주린 이들갇힌 이들아픈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각자의 복음을 살고 있었습니다우리가 쉽게 접하는 복음서를 구하기 어려웠습니다박해의 시기였고아직까지 교회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리스의 철학과 로마의 법과 페르시아의 문학과 대화를 해야 했습니다이스라엘은 당시 세상에서는 문명과 문화의 변방이었습니다그런 곳에서 살던 사도들이 문명의 중심지인 로마와 아테네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이것은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보이고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하지만 사도들은 성령의 도우심과 뜨거운 열정으로 마침내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많은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사도들은 그 모든 일을 가능케 하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철학과 법과 문학을 뛰어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십자가의 힘을 증언하였습니다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당당하게 선포하였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제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우리들 각자의 복음서를 가지면 어떨까가브리엘 복음서안드레아 복음서마리아 복음서로사 복음서와 같이 말입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요한 복음사가처럼 깊은 영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마태오 복음사가처럼 성서에 대한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루가 복음사가처럼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입니다마르코 복음사가처럼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지금 우리 앞에 있는 도전은 그리스의 철학로마의 법페르시아의 문학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과학과 기술은 신화와 종교의 틀을 벗겨버리고 있습니다자본주의는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가치와 의미를 빨아드리고 있습니다인간중심의 사고는 함께 살아야 하는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온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푸른 별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우리에게 힘을 주시고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위로의 성령굳셈의 성령지식의 성령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 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생명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생태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나눔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그리스도인이란오늘 막사랑에 빠진 것처럼내일은 없는 것처럼오직 지금이 유일한 것처럼 서로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아레오파고스 언덕 위의 사도 바오로

 -양승국신부-

 

가톨릭평화방송 TV 기획 프로그램 아레오파고스에 출연하면서 아레오파고스라는 단어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레오파고스는 일종의 지명입니다. 고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낮은 언덕을 말합니다.

  

초창기 아테네 귀족 회의가 열리던 장소였는데, 나중에는 아레오파고스라는 말의 개념이 확장되어 회의 자체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아레오파고스 회원들은 왕의 자문위원회 역할을 수행했고, 행정, 종교, 교육 분야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이토록 대단한 장소 아레오파고스 한가운데 섰습니다. 당대 난다긴다하던 석학들과 당시 사회를 주름잡던 세력가들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여러 첨예한 주제에 대한 토론과 비판의 전문가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자칫 엉뚱한 말이나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할 경우, 그 자리에서 고발당하고, 매질 당하고, 투옥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무엇에도 거칠 것이 없이 당당하고 의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오로 사도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아테네 지식인들과 권력자들의 심기를 사정없이 긁는 표현들이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 상이나 은 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지적을 감안할 때, 당시 아테네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나 잡신에 깊이 빠져 살았습니다. 이미 깊이 빠져들어 헤어나기 힘든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복수심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던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오로 사도는 목슴을 걸고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놀랍도록 담대하게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그토록 담대하고 의연한 바오로 사도의 모습, 그 배경에 과연 무엇이 자리하고 있었을까요?

  

바로 진리의 영, 협조자 성령이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복음 16장 13절)

  

오늘 우리 안에도 항상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현존하시고,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함께 하시길 청합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바오로 사도처럼 목숨을 불사하고 진리의 말씀을 이웃들에게 선포하길 바랍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고별사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곧 마지막 말씀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다음 구절부터는 이제까지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시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별사에서만도 성령에 대한 약속을 다섯 번이나 거듭 말씀하십니다(요한 14,16-17,14,26,15,26-27,16,7-11,16,12-15).

사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성령의 개입은 크게 보면 세 시기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시기는 강생 때인데,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라고 표현됩니다.

둘째 시기는 세례 때인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마르 1,10), 또 “그 뒤에 바로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마르 10,12)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셋째 시기는 부활과 승천하실 때인데,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겠다.”(루카 24,49)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6,12-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안내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성령의 이끄심이 없이는 진리를 깨달을 수도, 진리를 행할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라고 하심은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성령의 일치 안에 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 그분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1요한 2,20-27)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을 때는 우선적으로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귀고 아빠스는 성경을 읽기 전에 “먼저, 성령을 청하라. 그러면 빛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성령의 도유, 곧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독서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 보나벤뚜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유 없는 독서는 쓸데없다. ~ 성령의 도유야말로 구원을 촉진시키는 모든 것을 가르친다.”

 

이는 성령께서 진리의 해석자이시고 동반자이심을 말해줍니다.

말씀의 뜻이 진리의 영으로 하여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그리스정교회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가 한 말을 되새겨 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십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며,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요한 16,13)

 

주님!

진리의 옷을 입고 당신 정원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하여, 당신의 정원에서 행함으로 꽃을 피우고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모상에 따라 새로워지게 하시고, 진리의 영의 숨결 되어 흐르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멘.

「진리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반영억신부-

 

민주주의 원칙 중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다수결의 원칙이 진리는 아닙니다. 따라서 진리가 다수에 의해서 바뀔 수는 없습니다. 다수에 의해서 이랬다저랬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누가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일 뿐입니다. 성 막시밀리안 콜베는 말합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리를 뜯어고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결국 진리의 길을 따르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고정되고, 우리가 그분께 기쁘고 은혜로운 일들을 찾으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행한다면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을 무장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 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에페6,14-16). 진리의 영을 받은 제자들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안내하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셨고 진리 안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믿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안내하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하겠습니다.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고 예배하도록 이끄는 세상의 많은 어두운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진리 안에 더욱 굳건해야 합니다. “숨기려고 하면 왜곡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자신의 논리로 합리화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없애려고까지 하게 됩니다”(박병규) 그러나 진리의 영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들은 이웃과 세상에 열려있습니다.

 

한 때‘다빈치 코드’소설이 영화 되어 상영되고, 많은 이야기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일 뿐입니다. 허구는 허구요, 픽션은 픽션일 뿐입니다. 근래에는‘신천지’라는 이단이 많은 이들을 유혹하고 이제는 공공연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와 굴곡 된 성경해석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 ‘구해줘’라는 드라마가 개신교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아무리 흔들고 뜯어고치려 해도 진리입니다. 거짓 논리를 통해 진실처럼 보이게 할지라도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지 거짓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는 것에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영적인 지혜, 계시 및 지식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17,17).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진리다”(요한 14,6).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제 진리의 영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진리의 영은 새로운 계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이끄는 역할을 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가져온 유일한 계시로 깊이 들어가게 하고 깨닫도록 합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마음이 열려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빕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송영진신부-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이라는 말씀은,

말하지 못한 새로운 가르침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제자들을 충분히 이해시키기 위해서 ‘보충 설명’을 해야 하는데

시간도 부족하고, 제자들도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체포되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살 준비가

아직 안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말씀,

그리고 제자들이 겪게 될 박해에 관한 말씀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9).” 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약속하신 분’은 ‘성령’이고,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기다리면서

기도에 전념하면서 지냈습니다(사도 1,14).

그러다가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받은 뒤에,

박해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대한 사도이며 선교사로

완전히 변화되어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모님의 경우에, 보통 사람이라면 감당하지 못할 말을

시메온 예언자로부터 들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그런데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고 응답할 때부터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분입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기꺼이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신앙여정과 인생살이에서 겪게 될

고난과 박해를 미리 알게 된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어떤 고난을 겪게 될지,

또 어떻게 죽게 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 21,18-19).

만일에 예수님 부활 전에 그 말씀을 들었다면,

베드로 사도는 겁에 질려서 달아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또 성령을 받고 나서 완전히 변화된

베드로 사도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 죽음을 향해서 용감하게 나아갔습니다.

그는 죽음 너머에서 영광과 새 생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또 베드로 사도처럼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고, 죽음 너머에서 새 인생과 새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물론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새 인생과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종말’에 관한 말씀에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 전의 재난들과

종말의 날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시기는 했는데(마르 13장),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인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마르 13,32).

만일에 지금이라도 어떤 예언자를 통해서

종말의 날과 시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 예고된다면 인간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인간들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 날과 그 시간이 되기 전에 인류 역사는 정지될 것이고,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고, 멸망을 향해서 내달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인지 모르는 것도 은총일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은 ‘성령’입니다.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의 말씀들을 온전히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될 것이며, ‘삶’으로 실천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예고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 박해에 맞서서 신앙을 증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증언하는 일 자체는

우리가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령께서 아무리 큰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셔도,

우리 쪽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다른 새로운 계시는 없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새로운 가르침을 주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일입니다.

 

앞으로 올 일들을 성령께서 알려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종말의 심판에 관해서 알려 주실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신다는 뜻은 아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은사 가운데 ‘예언의 은사’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아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능력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하느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직무입니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요한 16, 12)

-한상우신부-

사랑은
이런 것이다.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받아들일
때까지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삶을 깨닫게
하는
진정한 힘
사랑의
진리이다.

진리는
하느님의
것이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계신
진리이시다.

진리는
서두르지
않는다.

느림과
빠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의 참된
결행(決行)이다.

지금과
나중 사이에
이끌어가시고
알려주시는
성령이 계시다.

이 좋으신
진리의 영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주님이시다.

진리의 영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기쁜
여정이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진리의 영을
인정하고
믿는 실천이다.

사랑은
기꺼이
가장 좋은 것을
내어주는
실천이다.

예수님과
성령의
관계처럼
서로 돕는
사랑의 관계이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알려주시는
진리의 영이
계시기에

우리의
모든 길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나눔의 길이
된다.

지금과
나중을
이어주시는
진리의 영께서
모든 진리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진정한 종교심

 -김찬선신부-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얘기는 저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고,

그래서 저의 하느님 이해와 종교적 확신과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을 준 말씀이기에 너무도 좋아하는 얘기이고 자주 예를 드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오늘 다 얘기할 수는 없고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긍정적인 접근 태도와 선교에 대해서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선교할 때 부정을 하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선교사로 다른 나라에 가 우리와 다른 그들의 문화와 사고 방식을

우리를 기준으로 부정하고 그러면서 그러니 잘못을 깨우치게 하고 바꾸게 하며,

교리를 포함하여 내가 전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그들에게 잘못이 있고,

잘못 생각하거나 아직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그렇기에 잘 알려주고 모르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선교이긴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부정은 그대로 부정이 되고,

교만한 부정도 부정이 되어 선교는 시작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가 아니라 개인적인 친교나 관계에서도 그대로입니다.

누가 나에게 '너는 잘못됐어, 아주 깡그리 잘못됐어'라고 하면

성인 군자가 아닌 이상 내가 뭐가 잘못됐냐고 방어를 할 것이고,

그런 너는 잘못이 없냐고 오히려 역공을 하며 그의 모든 것을 부정할 것입니다.

 

반면 긍정적인 면을 진심으로 긍정해주고 그러나 한 가지 부정적인 면이나

부족한 것을 사랑과 겸손으로 얘기해주면 그것을 고맙게 잘 받아들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인들의 종교심이 대단함을 긍정해줍니다. 미로

그런데 아테네인들의 종교심이란 것이 부정적으로 접근하면 미신을 믿는다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인데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종교심이라고 긍정적으로 봐줍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긍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모르는 신을 인정하고 있다며 아테네인들을 극찬합니다.

 

사실 모르는 신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심이고 신앙의 태도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이고 그들이 가지지 못한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본래 신은 다 알 수 없는 분이고 그래서 본래 모르는 신입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나는 신을 다 알지 못한다고 그러나 하느님은

계시고 사랑이시고 선이실 거라고 믿으면 가장 완벽한 종교심이고 신앙입니다.

 

그런데 모른다고 없다고 하거나 나는 신을 다 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인데

무신론자나 유대인은 신에 대해 정반대의 문제를 안고 있는 자들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는 다 한 부분을 알고 있을 뿐이고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주장도 다 일리가 있을 뿐입니다.

너의 주장도 일리가 있고 나의 주장도 일리가 있을 뿐입니다.

 

모든 진리는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시고,

하느님께 대한 모든 진리는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성령께서 모든 진리를 가르쳐주실 거라고 하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교리도 모든 진리는 하느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계시해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알 수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의 완성이시고

성령께서는 이 주님께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인도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며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안다고 하는 것이 더 문제임을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5월 19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