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26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2. 5. 26. 06:23

 2022 5 26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필립보 네리 성인은 1515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때 사업가의 꿈도 가졌으나 수도 생활을 바라며 로마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활동을 많이 펼친 필립보 네리는 특히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형제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6세에 사제가 되어 영성 지도와 고해 신부로 활동하면서 많은 이에게 존경을 받았다. 동료 사제들과 함께 오라토리오 수도회를 설립한 그는 1595년 선종하였고, 1622년 시성되었다.

 

☆☆☆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16-20)

 

You will grieve,

but your grief will become jo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의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떠나시면 제자들과 달리 세상은 환호할 것이고, 제자들은 근심하겠지만 그 근심은 곧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책에서 이런 질문을 보았습니다.


- 심각한 교통체증 속에서 당신은 끝까지 침착할 수 있는가?

- 이웃이 멋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도 질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

- 주변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는가?

- 지금 있는 곳에서 늘 만족감을 찾을 수 있는가?

책에서는 이 네 가지 질문에 모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개’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이 질문을 읽으면서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이 질문들에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완벽하지 않은 모습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단지 인간은 완전해지기 위한 노력으로 조금씩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는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술, 담배를 끊는 것이 목적지가 아니라, 건강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 방향을 잘 잡아야 내 변화의 모습을 올바르게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죄에 쉽게 빠지고 사랑의 삶을 잘 살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변화해야 합니다. 그 변화를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요구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같이 드시고 십자가 죽음이 임박하셨을 때 하신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의 순간이 가까워지면서 당신의 사랑을 더 많이 드러내 주셨습니다. 성령을 보내 주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평화를 주시고, 이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기쁨도 전해주십니다. ‘조금 더 있으면’ 주님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로 다시 만나는 것을 의미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는 세상 마칠 때까지 예수님의 현존이 믿음의 삶으로 계속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을 굳게 믿는 사람은 악의 세력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죄의 그늘에 있는 사람과 죄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큰 기쁨을 차지할 수 있을까요? 또 세상을 사는 것이 쉽고 편한 삶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든 고통의 순간이 다가오게 되지요. 그때 근심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믿음의 힘으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사람은 어떨까요? 커다란 기쁨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쁨을 간직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의 의지를 계속해서 내세워야 합니다. 완벽함은 가능하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로 향한 우리의 변화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똑똑한 자는 자기가 어리석음을 안다(윌리엄 세익스피어).

 죽음의 공포가 꼭 간직하고 살아야 할 은총인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gKCzz2SKHbA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떠나심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가서 우리를 위해 필요한 것을 받아 다시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아버지께 성령을 받으셔서 우리에게 성령 강림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맞이할 준비가 바로 ‘근심’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19-20)

  

    세상이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성령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부재(不在)를 근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보이시지 않아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근심합니다. 이 근심이 있어야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기 전에 어머니는 근심합니다. 이러한 근심이 없다면 아기를 낳을 수 없습니다. 아기를 낳는 기쁨을 위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 근심은 피 흘리는 고통, 곧 죽음에 대한 근심입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이 불안 때문에 더 가지려 하고 더 먹으려 하고 더 커지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 때문에 이 불안을 없앱니다. 아니 없앴다고 착각합니다. 이때마다 주님은 다시 그 불안을 주시기 위해 그가 믿는 것을 빼앗아 가십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광야’로 여기지만 사실은 주님을 찾게 만드는 축복입니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은 세 명밖에 없습니다.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입니다. 

사울은 ‘교만’의 상징입니다. 그는 힘으로 왕권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자신의 왕권을 노린다고 여겨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무엘이 오지도 않았는데 불안해하며 하느님께 자신이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힘을 추구하는 마음 때문에 하느님은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십니다. 

  

    다윗은 ‘육욕’ 때문에 큰 곤란을 겪습니다. 하느님은 다른 남자의 아내를 탐한 그가 자기 아들에게 쫓기며 생명의 위협을 겪는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다윗이 뛰어난 왕인 것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죄 때문에 겪게 된 광야의 삶에서 하느님께 의지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솔로몬은 ‘탐욕’의 상징입니다. 그는 재물에 대한 욕심에 이방 신을 섬기는 여인들과 혼인하고 그도 이방신 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재물은 이렇게 그에게 또 다른 신이 되었고, 그 결과는 아들에게 온전한 나라를 물려주지 못하고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먹고살 것이 충분할 때도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부러라도 근심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이 죄를 짓는 이유는 세속-육신-마귀로 죽음의 불안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이 불안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 불안이 돈이 부족해서라 여기고 더 가지고 더 먹고 더 이기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죽음에 대한 불안이 부활하신 당신을 만남으로써만 해결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불안함이 당신을 만나지 못해서 생기는 것임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한 우리는 죽음의 불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불안함을 주님만을 희망하게 하는 재료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탐욕-육욕-명예욕으로 이 불안을 잠재우려 하지 못하게 하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광야’의 불안에 속하게 해야 합니다. 광야는 당장 내일을 알 수가 없어 탐욕을 부릴 수도 없고 충분히 먹을 수도 없으며 성공하려는 욕망도 소용이 없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광야의 시기를 짧게 재연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사순절입니다. 이때 우리는 ‘단식’을 합니다. 단식하여 배가 고프면 죽을 수도 있다는 근심이 듭니다. 단식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불안과 근심을 다시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잎새』라는 오 헨리의 단편 소설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화가 지망생 존시는 폐렴에 걸려 날로 병세가 악화하여 갑니다. 이 사람은 삶을 포기한 채 창밖에 있는 담쟁이넝쿨의 이파리만 세면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순간 자신도 죽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화가 지망생이 사는 집 아래층에는 가난한 노인 화가 베어만이 살고 있습니다. 이 노인은 세계적인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꿈이 있지만 현실은 그저 싸구려 광고물이나 그리면서 겨우 입에 풀칠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젊은 화가 지망생이 어느 날 창문을 바라보니 담쟁이 잎새가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보니 그 마지막 잎새가 담벼락에 그대로 붙어있습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지 않자 존시는 삶에 대한 애착을 다시 두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잎새도 저렇게 버티는데 자신이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의사가 존시의 완쾌를 알려주던 날, 그 마지막 잎새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진짜가 아니라 아래층에 사는 노인 화가가 담장에 그려놓은 그림이었습니다. 마지막 잎새를 그린 그 노인은 그림을 마친 그날 밤 폐렴을 얻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은 ‘생명’이십니다. 생명은 죽음 앞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 것에 의지해서 내가 생명의 주체가 되려 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희망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존시는 죽음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쩌면 자신이 무시하던 술주정뱅이 할아버지가 자기 생명의 은인이 됩니다. 죽음 앞에 그렇게 머물지 못했다면 참 생명이 자기 집 아래 살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 생명이신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찾도록 죽음 때문에 근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당신 십자가와 부활이 참 생명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를 만나 기쁨에 차도록 매일 죽음에 대해 근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으로 오시는 분을 만날 것이고 그러면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바오로의 동지들과 이벽의 동지들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TfobKapEJ1Y

 -조재형신부-

 

지난 어머니의 날입니다어머니들에게 드릴 꽃을 준비하였습니다스페인 공동체와 함께 만들었습니다남은 꽃을 컵에 담아 책상에 올려놓았습니다책상에 꽃이 있으니 방에 화사해졌습니다화사해진 방을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났습니다퇴근하던 길에 남편이 지하철역에서 꽃 한 다발을 샀습니다비가 내리던 날이었고예전에 아내와 데이트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남편에게 꽃다발을 받은 아내는 다음 날 꽃을 꽂으려 했는데 화병이 없었습니다예쁜 화병을 사서 꽃을 꽂았습니다그런데 식탁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식탁보를 새로 사서 깔았습니다식탁보는 마음에 들었는데 의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의자를 새로 사서 놓았습니다식탁과 의자 그리고 꽃은 예쁜데 방이 지저분해 보였습니다아내는 모처럼 대청소를 하였습니다창밖을 바라보려니 커튼이 누렇게 변색되었습니다큰 마음먹고 커튼까지 바꾸었습니다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은 작은 기적을 보았습니다꽃 한 다발이 아내의 마음을 움직였고어디에 내 놓아도 부럽지 않은 아늑한 보금자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순교성인들의 놀라운 신앙을 칭송합니다초대교회 신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추앙합니다요즘 우리가 독서로 읽고 있는 사도들의 생생한 복음 선포를 배우고자 합니다그러나 생각해보면 신앙은 어쩌면 이웃에게 내미는 작은 손짓은 아닐까요? 10년 동안 아이티에서 선교하던 꽃동네 수사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한국에 잠시 다녀왔는데 한국의 꽃동네 가족들이 모두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십년동안 했으니 고생할 만큼 했다이제 돌아와도 된다건강이 최고다건강을 잘 챙겨라.’ 신부님은 또다시 아이티로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예수님과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면서 우쭐해하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았다고 합니다. “니들이 내 마음을 아니!” 아이티로 돌아간 신부님은 똑같은 일상을 지내실 겁니다폭력가난무질서위험은 도처에 널려있을 것입니다가난한 이병든 이굶주린 이들이 매일 찾아 올 것입니다그런 이들에게 사랑의 손을 내미는 신부님은 아늑한 보금자리를 만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걱정이 많을 것입니다그러나 여러분의 걱정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사제라는 자리에 안주하려고 한다면사제에게 주어지는 특권에 연연하려고 한다면말로만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면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걱정으로 바뀔 것입니다주님께서는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사제들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면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마음으로 사랑한다면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려는 결심으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면 지금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고난과 시련도 기쁨으로 가는 디딤돌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그분의 겸손입니다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다는 그분의 희생입니다자신의 역할이 끝났지만 협조자를 보내시려는 그분의 책임감입니다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하고헐벗고병든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는 그분의 열린 마음입니다힘든 일어려운 일은 앞장서서 하시고 영광은 하느님께 돌리는 그분의 양보입니다우리는 모두 가족친구이웃직장성당에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그곳에서 웃음이 꽃핀다면그곳에서 사랑이 열매 맺는다면그곳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다면 그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만약에 그곳에서 원망과 불신이 자라난다면분열과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면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공동체는 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미는 작은 손짓은 꽃 한 다발일 수도 있고다정한 말 한 마디 일 수도 있고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작은 손짓을 내미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란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양승국신부-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 전, 엄숙하고 경건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와 사회 분위기 속에 참으로 유쾌하고 매력적인 사제가 활동했으니, 그 이름은 로마의 성자요 젊은이들의 친구 필립보 네리 신부님(1515~1595)이었습니다.

  

음악과 시와 예술의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난 그는 로마로 순례를 오게 됩니다. 순례 효과는 200퍼센트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성지들을 순례하면서 받은 큰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열망으로 불타올랐습니다. 

 

필립보 네리는 병원을 찾아가 병자들을 방문했습니다. 직장에서 높은 근무 강도에 시달리는 근로자들에게 다가섰습니다. 도시 광장이나 술집에서 빈둥거리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다정한 말과 친절하고 소탈한 태도로 많은 사람들을 신앙의 길로 돌아서게 만들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강력한 권고로 필립보 네리는 1551년 36세의 나이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는 하루 15시간까지 고해를 듣곤 했습니다. 고해를 본 사람들 가운데 몇몇 신자들을 뽑아 따로 영적 지도를 했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를 결성했습니다. 

 

다들 내가 신부인데, 에헴, 하고 한걸음 크게 뒤로 물러나 있던 시절, 필립보 네리 신부님께서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개구쟁이 아이들과 한바탕 신나게 놀고 계셨습니다. 마음 둘 곳 없는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이러한 신부님의 영성과 활동을 300년 세월이 흐른 뒤 돈보스코가 이어받게 됩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은 울적한 얼굴의 청소년들, 힘겹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성당에만 앉아 있지 않고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기쁨 속에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다양한 단체들을 설립했으며, 수많은 이벤트들을 마련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필립보 네리 신부님은 당신 자신 존재 그 자체를 기쁨의 원천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루는 신부님께서 길거리를 걸어가시는데 사람들이 다들 포복절도를 했습니다. 이유는? 신부님께서 아침에 면도를 하시면서, 아마도 의도적으로 그러셨겠지요. 콧수염 한쪽은 그냥 더부룩하게 두고, 다른 쪽은 싹 밀어버렸습니다. 

 

이토록 인간미 넘치고 유머 감각이 탁월했던 필립보 네리 신부님이었기에, 그의 주변에는 언제사 수많은 어린이들, 노약자들, 여인들, 정치인들, 교회 지도자들이 들끓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그 자체가 휴식이요, 기쁨이요 행복이라고 당당히 증언했습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을 찾아와 영적 지도를 청하곤 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보면 두 다리가 후덜덜 떨릴 지경입니다. 로욜로의 성 이냐시오 신부,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이쯤 해서 무척이나 부끄러워지는군요. 세상 사람들은 나란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기쁜지? 행복한지? 나와 함께 있는 그 자체가 천국 체험인지? 나와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는지? 나와 함께 있는 그 시간이 주님을 만나는 시간인지?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막바지에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며 우리의 길이 됩니다.

 

그분의 삶의 마감이 끝이 아니라 끝에서 오히려 길이 됩니다.

그분의 떠남은 떠남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길이 됨을 밝혀줍니다.

 

언젠가 소개했던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를 다시 한 번 새겨 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바로 그러한 ‘봄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6,16)

 

앞 구절의 “조금 있으면”이란 단어는 오늘 복음에서 일곱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짧은 시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뒤 구절의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단어는 부활하신 후에서 승천까지, 혹은 재림의 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곧 “다시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당신의 죽음을 준비시키고자 애쓰시건만, 정작 제자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과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이는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근심이나 슬픔이 지나가면 기쁨이 온다.’는 고진감래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혹은 ‘슬픔이나 근심 대신에 기쁨이 주어진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슬픔 그 자체가 기쁨으로 변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겪고 있을 때는 아픔이었지만, 뒤돌아보니 그것이 은총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이 열리면, 신비롭게도 슬픔이 곧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슬픔인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슬픈 일 자체’가 기쁜 일로 바뀐다는 이 사실, 곧 슬픔은 슬픔이 아니라는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이미 기쁨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셨고, 성령이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여전히 근심과 슬픔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근심과 슬픔 속에 깃들어 있는 ‘이미 베풀어진 자비’를 관상하고, ‘여전히 베풀어지고 있는 사랑의 선사’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와 있는 '기쁨'을 덮어버리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그 어떤 근심과 슬픔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빼앗기지 않는 기쁨”(요한 16,22)이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그렇습니다. 주님!

근심이 지나고 나야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근심, 바로 그것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바람은 근심도 기쁨도 떠나와, 떠남도 머무름도 떠나와, 불고 싶은 대로 불고, 그 속에서 열매는 싹으로 바뀌고,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아멘.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반영억신부-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합니다. 평생 이별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한다 해도 때가 되면 이별을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사랑의 관계가 참되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잠시 잠깐의 만남을 기뻐하고 어떤 이는 좀 더 오랜 만남을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기왕이면 떠날 때 떠나더라도 가슴에 남는 만남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16,16. 20). 하고 말씀하시며 세상을 떠나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됨을 제자들에게 거듭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자들은 십자가에 무참하게 처형된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겪은 후에야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면, “조금 있으면...‘보지’ 못하고...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앞의 ‘보다’는 ‘테오레오’라는 단어로 구경거리를 보는 일차적 의미를 지니고 뒤의 ‘보다’는 ‘호라오’라는 단어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본다는 이차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시선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보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 이해한 다음에 수용하겠다는 것도 꼭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머리가 아니라 먼저 가슴으로 따르고 비로소 논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알아듣지 못해도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그때 아는 것은 이미 있었던 진리를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까지 제자들은 함께 해산의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우리 앞에 놓인 힘든 일은 그만큼 큰 기쁨이 숨겨져 있음을 확신하게 합니다.

 

스승과 깊은 신뢰를 쌓고 스승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스승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참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승은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어서 스승입니다. 지금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을 믿고 여기서 기쁨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진통이 끝난 뒤 반드시 새로운 기쁨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매 순간 그분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주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여정도 한결같이 좋기만 할 수도 없고, 한결같이 힘들고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기쁨을 희망하는 만큼 아픔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너희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송영진신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이제 곧 당신의 수난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죽음’은 볼 수 있는 상태에서 볼 수 없는 상태로 바뀌는 일입니다.

부활을 안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는 일”, 즉 영원한 이별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우리는, “죽음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잠깐 동안만’

못 보는 일”, 즉 잠깐 동안의 이별로 생각합니다.

부활 후에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이별’은 없습니다. 부활할 수만 있다면.

<따라서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더 이상’이라는 말은, 제자들이 아직 부활 신앙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이 짧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은 ‘만 이틀’이 안 됩니다.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성금요일 저녁부터 부활절 아침까지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마리아 막달레나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을 겪게 되면,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을 다시는 못 보게 될 것처럼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슬픔과 고통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슬픔과 고통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부활해서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과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그 슬픔과 고통을 극복합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애통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 울음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제자들이 울며 애통해했다는 말이 없는 것은

아마도 예수님 부활 후에 복음서가 기록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적대자들과 박해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뒤에 기뻐하고 좋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기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기뻐한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위험인물을 성공적으로 제거했다고 안심했을 것입니다.

사탄과 마귀들은, 나중에 자기들이 어떻게 될지를 모르고서

예수님의 죽음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의 예언자들’의 죽음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묵시 11,10).”

(여기서 예언자들이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다는 말은,

회개하라는 예언자들의 설교를 사람들이 듣기 싫어했다는 뜻입니다.)

땅의 주민들이 예언자들의 죽음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선물을 서로 보낸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얼마나 심하게

악에 물들어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앞의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이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근심’은 ‘슬픔’입니다.

그래서 ‘근심하겠지만’은 ‘슬퍼하겠지만’이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는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입니다.)

제자들의 슬픔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생긴 슬픔이고,

기쁨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엠마오를 향해서 갈 때에는

‘침통한’ 모습이었습니다(루카 24,17).

그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는

‘기쁨에 가득 찬’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큰 슬픔이 큰 기쁨으로 바뀌는 것은 죽음과 부활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의 우리 인생에서도 체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1,5-9).”

이 세상은 슬픔과 고난의 연속인 ‘한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영원한 기쁨’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이고, 그 기쁨을

얻어 누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믿음과 희망 속에서

지금 여기서도 기뻐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 20)

-한상우신부-

지금이
가장 좋은
때이다.

참된 기쁨이
우리들 사이에
탄생한다.

가장 좋은
위로와 위안을
주님께서 주신다.

잡을 수
없는 것들이
마냥
지나간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만
체험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삶이다.

알 수 없는
삶의
이 여정이다.

우리들
어리석음보다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끝이 된다.

근심도 기쁨도
하느님을 향해
이 모든 것을
기도로
봉헌한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근심도
기다림과
인내를
배우는
시간이다.

인내를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의 인내가
길을 낸다.

조금 더
견디어 내면
근심은 이제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끝까지 희망을
지켜내시는
주님이시다.

헛된 희망이
아니라
견디어 낸
희망이며
기쁨이다.

쓰러진
십자가가
다시
일어나고

가장 아팠고
가장 어두웠던
일이 주님을
다시 보게 되는
기쁨이 될 것이다.

살아가는 법을
다시 배우는
감사의 시간이다.

가장 좋은
은총은
감사하는
지금이다.

희망하고
믿는 지금
이 순간이다.

 말씀 나누기 - 부활 6주 목요일-근심과 기쁨 그리고 신앙적인 근심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5월 13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