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24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2. 5. 24. 07:23

2022 5 24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요한 16,5-11)

 

"When the Counselor comes,

he will convince the world

concerning sin

and righteousnes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감옥에 갇힌 바오로와 실라스는, 구원받기를 바라던 간수와 그의 가족에게 세례를 베푼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성령께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3월 어느 주일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성지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지금 임종하실 것 같으니 병자성사를 달라는 전화였습니다. 곧바로 가겠다고 했고, 병자 성유와 성수 그리고 예식서를 들고 운전해서 환자가 있는 곳으로 급하게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운전해서 가는 동안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날 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비염이 갑자기 심해져서 코가 막혀 말하기도 힘든 상태였거든요. 더군다나 병자성사는 보통 본당 신부님께 청하고, 환자분이 있으신 곳 근처에는 수도원과 신학교가 있어서 신부님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굳이 거리가 떨어져 있는 성지에 청할 것은 아니지 않나 싶었습니다. 코가 막혀서 말하기도 힘드니 더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환자가 있는 요양원에 도착하자마자 운명하셨고, 저는 유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기도를 함께 바쳤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저를 찾아주신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인해 불평의 마음이 들었던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몸 상태보다 분명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 성사를 드리며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장 중요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부정적인 생각만 했던 것입니다.

어떤 부정적인 마음이 들 때, 과연 그런 생각이 중요한 것인지를 먼저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살면서 커다란 기쁨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가까웠고, 이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이별은 제자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가져왔습니다. 근심으로 가득 차서 정신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는 이 이별이 영광으로 돌아가는 이별이며, 제자들에게는 주님 대신에 하느님의 일을 맡게 되는 시간을 알리는 이별입니다.

지금 상태로는 주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을 대신하여 세상을 구원의 길로 이끄실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은 세상이 저지른 죄를 꾸짖고 깨뜨린 정의를 되돌리고 그릇된 심판을 바로 잡아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오히려 이롭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성령을 받은 뒤에는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중요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십니까?
절망에 빠지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엘제파색).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7qjcmK9ndPY

오늘 독서의 말씀은 필리피에서 복음을 전한 사도 바오로 일행이 겪은 신기한 일을 전해주었습니다. 귀신 들린 하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그 하녀를 부려 먹으며 돈벌이를 하던 주인들이 바오로 일행을 관가에 고발했고 게다가 군중을 선동하여 공격하였습니다. 고발을 받은 로마 행정관들은 바오로와 실라스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질을 하고는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발에 채운 차꼬가 풀리고 감옥 문이 다 열려버렸습니다. 놀란 간수는 문책당할 것이 두려워 자결하려고 하였지만 바오로가 말렸습니다. 

 

  그 간수가 보기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죄가 없어 보였던 데다가, 달아날 수도 있었는데도 달아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는 그들의 표양을 보고 감화를 받아서 말하였습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적 체험을 하고 구원을 청하는 그에게 바오로와 실라스가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그리스의 관문 필리피 선교에서 벌어진 이 사건의 일화는 그 도시의 영적 형편이 마귀를 섬기는 우상 숭배 풍조에 물들어 있음을 알려주는 한편, 바오로가 행한 사도직의 형편이 가족 단위로 선교하는 것이었음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면서도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등 형제들을 부르신 데에서도 나타나듯이 가족 관계를 중시하셨습니다. 피를 나눈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뜻을 함께 하는 동지가 되면 이상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던 무렵에도 가족 단위로 복음이 퍼져나간 사정은 같았습니다. 특히 교회의 창립 주역 이벽은 권씨 문중과 정씨 문중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이렇게 하여 모인 천진암 강학회에 유항검, 이단원 등이 참가하여 자신들의 출신 고향인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집안 단위로 복음을 퍼뜨렸습니다. 경기도 양근의 선비 권철신을 찾아가 열흘 동안 설득한 끝에 그 동생 권일신까지 천주교에 입교시킨 이벽은, 정약현에게 시집간 자기 누이가 세상을 떠나자 그 장례를 치루면서 정약현의 동생들인 약전, 약종, 약용 등 사돈지간의 삼형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정약현의 누이 동생과 혼인한 이승훈에게는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북경에 가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아 오라는 부탁까지 함으로써 동서 사이의 두 선비가 한국교회 창립의 두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후 벌어진 박해에서 한국교회의 맥을 이은 교우촌들이 죄다 천주교를 믿는 가족들의 집안 단위로 구성되었습니다. 맨 처음 교우촌이 이루어진 곳은 강원도 풍수원이었고, 그 주역은 신태보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신유박해가 끝나자 뿔뿔이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모든 기도서를 다 잃어버린 교우들이 어떻게 신자의 본분을 지킬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몇몇 순교자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용인 지방으로 찾아가 여자들과 어린이들만 남은 세 가정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신태보와 세 집안은 주일과 축일에 한데 모여 마치 한 가족처럼 기도하고 의지하며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매번 40리 길을 오가야 했던 불편을 줄이고 외부의 따가운 감시의 눈길도 피할 겸해서 모두 40여 명을 모아서 인적이 드문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살기로 결심한 곳이 조선 천주교회의 첫 교우촌, 풍수원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교우촌은 점차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경기도 지방에서는 양근에 살던 권일신과 철신의 집안이 효시가 되어 교우촌이 퍼졌습니다.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인 권천례 데레사는 냉담자였던 조숙 베드로와 혼인한 첫날 밤에 동정 부부로 살기를 원한다는 글을 써서 승낙을 받은 이래, 동정 부부로 살면서 정하상 바오로가 성직자 영입운동으로 북경에 자주 왕래하던 일을 뒷바라지하다가 부부가 함께 치명하였습니다. 양근과 가까운 포천에는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베에르와 그 아들 홍인 레오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포천 땅에서 교우촌을 이루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치명하였습니다.

 

  전라도 지방 교우촌의 효시가 된 집안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안입니다. 그의 아들 유중철 요한이 이순이 누갈다와 동정부부로 혼인하여 순교한 이래로 호남에 복음이 뿌리내렸습니다. 이순이의 부친 이윤하 마태오는 권철신, 권일신과 처남-매부 사이로서 처남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영세하고 아내에게도 권하였으므로 이순이는 어린 시절부터 천주교 신앙으로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정약용 요한에게서 교리를 배운 윤지충 바오로는 고종사촌지간이었습니다. 윤지충의 고모가 정약용의 어머니였습니다. 윤지충은 이종사촌 형이었던 권상연 야고보에게 교리를 전했습니다.

 

  충청도 지방 교우촌의 효시가 된 집안은 이단원과 이존창의 집안입니다. 두 사람 다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충청 지방에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의 집안도, 강완숙 골롬바도 그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렇듯 가족 단위로 믿음을 받아들여 다시 그 가족들이 연합하여 교우촌을 이루었던 이 전통이 한국교회의 뿌리입니다. 

 -조재형신부-

 

1980년대의 기억들입니다한국천주교회는 대규모 야외행사를 기획했습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가 여의도에서 있었습니다박해와 시련을 견뎌낸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대규모 야외행사였습니다당시 저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행사에 참여했습니다전날 비가 조금 내렸지만 행사 당일에는 햇살이 가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구름 뒤에 십자가의 모습이 보였고그것을 찍은 사진이 있었습니다. 1984년에는 103위 성인의 시성식이 여의도에서 있었습니다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시성식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변방의 한국교회가 세상에 알려지는 시간이었습니다당시 저는 신학교 3학년이었습니다교황님께서는 서울 신학교에서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순교자들이 성인품에 오르는 영광의 시간이었습니다. 1989년에는 44차 세계 성체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었습니다한국천주교회는 국제적인 큰 행사를 주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당시 저는 신학교 5학년이었습니다성체대회에 참가한 외국 순례자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1980년대에 대규모 야외행사도 있었고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광야에서 외치는 진리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길을 만들었습니다불의와 폭력에 쫓긴 사람들은 교회를 피난처로 삼았습니다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학생들을 잡으러 온 경찰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 학생들을 잡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잡아가야 할 것입니다그 뒤에 사제들을 잡아가야 할 것입니다그리고 수도자들을 잡아가야 할 것입니다.” 경찰들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였고학생들은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이 있었고성서 40주간이 있었고성서 100주간도 있었습니다레지오꾸르실료엠이구역모임은 신앙인들이 함께하는 구심점이 되었습니다단과학원의 강의처럼 예비자 교리에도 진리를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본당은 분가하였고신축 성당이 새워졌습니다제가 있던 본당도 지금은 7개로 분가되었습니다.

 

40년의 시간이 흘러 지금은 2022년입니다교회는 2021년 교회의 통계를 발표하였습니다. 65세 이상의 신자가 20%가 넘는 고령화 교회가 되었습니다주일미사 참례자는 전체 신자의 8%가 되었습니다물질과 자본이라는 마귀는 2000년 전에 예수님을 유혹했던 것처럼 여전히 교회를 유혹하고 있습니다성직자와 수도자들의 권위주의는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그 위선을 탓하였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다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처럼 우리들의 신앙도 약해지고 있습니다팬데믹의 바람 앞에 쉽게 넘어지고 있습니다교회가 더 이상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지 못한다면교회가 더 이상 불의와 폭력에 희생되는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기 마련입니다겨울이 가면 또 봄은 오기 마련입니다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나왔듯이 교회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이야기하십니다그것은 바로 진리의 성령입니다진리의 성령께 의탁하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밝혀질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세상의 그릇된 기준은 무엇입니까부정한 여인을 돌로 치려했던 단죄입니다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이들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그리고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의로움을 독점하려고 하는 권위주의입니다의로움은 권위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의로움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봉사에서 드러납니다십자가를 지는 희생에서 드러납니다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빌라도의 심판은 불의한 심판이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기 전에 내 분에 있는 큰 들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감옥에 머물렀습니다하느님의 영광은 모든 것을 버린 바오로 사도의 행위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목숨을 버리려했던 간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고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양승국신부-

 

오늘 5월 24일은 저희 살레시오 가족들에게 큰 축제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께서 각별히 사랑하고 의지하셨던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돈 보스코는 성모님을 바라볼 때 마다 출중하고 탁월한 능력을 지닌 변호사로서의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을 변호해주시고 중재해주시는 어머니, 자신이 펼치는 모든 사업에 늘 함께 하시며 자상하게 보살펴주시는 협조자로서의 어머니가 성모님이심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카나에서의 첫 번째 기적 사건은 성모님께서 왜 ‘도움이신’ 성모님이신가를 명백히 잘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사실 난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순간, 결정적인 공생활 시작의 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조용히 침묵 가운데 나자렛에서의 숨은 생활을 총정리할 순간입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여인이시오, 아직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서는 무리함을 무릅쓰고 아들 예수님께 졸라댑니다. 잔치의 전부 다 라고 할 수 있는 포도주가 떨어져 난감해하고 있는 혼주들의 딱한 처지를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맛있는 홍어 무침은 산더미처럼 준비되어 있는데, 시원한 막걸리가 떨어졌다면 얼마나 잔치가 밋밋하겠습니까? 더구나 유다 관습 안에서 혼례식을 일주일 내내 계속되는데, 혼주 입장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결례를 넘어 무례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성모님이셨기에 무리한 요구인지 알면서도 예수님께 거듭 청을 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딱한 처지, 난감한 상황을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선익과 구원을 위해서라면 체면이고 뭐고 다 던져버리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더라도 성모님은 도움이신 어머니이십니다. 말구유 탄생 이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아기 예수님이 직면했던 다양한 측면의 위협은 부지기수였습니다. 순간순간 성모님은 요셉의 도움을 받아 아기 예수님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무럭무럭 자라나 소년 예수로 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편으로 메시아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완전한 한 인간이셨습니다. 또래의 소년들에게처럼 의식주 전반에 걸친 어머니 성모님의 지속적인 도움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이르러 공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출가를 하십니다. 그 이후 성모님의 삶은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마음고생과 더불어 아들 예수님을 향한 밤낮 없는 기도로 매일 매일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삶은 아들 예수님을 위한 완벽하고도 철저한 도우미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아들 예수님의 아들인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한 성모님의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그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철저하게도 우리의 도우미이자 동반자, 협조자, 인도자이신 분이 성모님이 확실합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 고민과 걱정거리가 있다면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의 발치 아래 모두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성모님께서 도와주시고 중재해주시고 안내해실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승천과 성령의 파견을 예고하시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세상에 대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뒷부분은 내일 복음과 함께 보도록 하고, 오늘은 앞부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승천을 암시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요한 16,5)

이는 당신이 파견 받아 오셨다는 것과 보내신 분의 사명을 마치실 때가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다는 말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보호자’이신 성령의 파견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요한 16,7)

 

왜 꼭 당신이 가셔야만 그분을 보내시는 것일까?

아니, 성령은 이미 당신과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고 하시니 이는 무슨 말씀일까?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서만 아는 한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하면서, “동정녀의 태에서 잉태된 종의 모습이 우리 육체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 자체에 순수한 마음의 눈을 두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합니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내가 나의 육체를 너희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으면, 보호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너희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설합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오로가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적인 판단으로 알아보지 않으렵니다.”(2코린 5,16) 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함께 같이 계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눈이 영적으로 열리게 되면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제가 가야 오늘이 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시간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함께 있으면서도 오늘을 통하여 어제도 내일도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 마치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실 수 있으시지만 아들을 통하여 그것을 이루시면서 아들을 드러내시듯이, 예수님께서도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지만 성령의 존귀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심입니다.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본성이며, 삼위일체 사랑의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사랑은 자신 안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성령을 드러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드러내시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드러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서 우리가 아닌 그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요한 16,7)

 

주님!

저를 부수고 당신을 드러내소서!

보는 것, 아는 것에 매여 있는 저를 부수소서.

눈을 비추시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영을 보내소서.

아멘.

「떠나 보면 알거야」

 -반영억신부-

 

5월을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했는데 옛말이 되었습니다. 이미 한여름의 열기가 숨을 몰아쉬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봄은 분명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이 생명은 겨울의 쓸쓸함 속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봄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여름, 가을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화창한 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비오는 날을 뛸 듯이 좋아합니다. 어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둠이 빛을 더 빛나게 하고 그래서 그의 소중함도 더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빛은 빛으로써 존재하고 있었고 어둠은 어두움대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16,7).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호자 성령께서 증언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세속의 권력자들이 하느님의 정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려고 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지금 새로운 법을 만든 잣대로 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잘못된 것을 지금 알게 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야기(루카15,11-32)를 보면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버지 집의 충분하고 넉넉한 풍요로움을 새롭게 깨우쳤습니다. 그는 집을 나가서 밑바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아버지 집에 돌아와 아무 조건 없이 껴안아 주시는 아버지의 품에서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깨달아 안다는 것은 잊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떠나 보면 알게 됩니다. 자기 삶의 자리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한발 물러서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 한발 물러서 보십시오. 지금 자리를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를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지금 처지에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송영진신부-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 16,8-11).”

 

이 말씀을 쉽게 풀어서 다시 쓰면 이렇습니다.

1) 구세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다.

2)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증거다.

3) 사탄의 지배 아래에서 살고 있는 자들과 사탄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몰아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고,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 <구세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냥 죄 속에서 살다가 멸망하겠다고

고집부리는 일이기 때문에, 믿음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됩니다.

‘죄’ 라는 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내가 예수를 안 믿는 것이 무슨 죄냐?” 라고 말할 텐데,

그들은 죄 속에서 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고,

멸망을 향해 가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아서 모르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구원 문제에서 어리석음은 죄가 됩니다.)

 

2)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증거다.>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고 증언합니다(마르 16,19).

예수님이 구세주가 아니라면(죄인이라면) 승천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목격한 일은,

그들의 믿음에 확신을 더해 준 일이었습니다.

물론 안 믿는 사람들은 승천 자체를 부정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서 ‘의로움’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분’,

즉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세주’를 뜻하고,

사람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했다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안 믿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고” 라는 말씀은 ‘승천’을 뜻하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승천 후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셔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들 안에 현존하시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3)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 일은 사탄과 마귀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 세상의 우두머리’는 ‘사탄’이고,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심판이 시작되었다.”입니다.

사탄과 마귀들에 대한 심판은, 사탄의 하수인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사람들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탄이 완전히 제거되는 때는 최후의 심판 때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성령께서 밝히실 것이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뜻이 아니고,

사도들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깨닫게 될 것이고,

그것을 세상에 선포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5-7).”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 부활, 승천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라는 말씀은, 당시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이별만 생각하면서 슬퍼하고 두려워했음을 나타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라는 말씀은, “내가 떠나도 너희의

이로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로 해석할 수도 있고,

“내가 승천한 후에 성령을 통해서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너희에게 더 이롭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또 인식과 감각의 한계에 갇혀서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 예수’의 모습 그대로 백 년, 천 년 함께 사는 것보다

하느님이신 분으로서 성령을 통해서 모든 사람 안에 현존하시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한 일이 됩니다.

(떠나시는 분은 ‘사람이신 예수님’이시고,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떠나셔야만 성령께서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떠나셔도’

성령께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승천은 이별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들은 어떤 물증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 일들은 신앙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잘 받는 방법은 무엇인가? ‘기도’ 밖에 없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서 하신 일과 성모님을 찬양하는 말을 하는데(루카 1,41.67),

그것은 그들이 평소에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 7)

-한상우신부-


언제나
최선을
다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보호자이신
성령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이시다.

우리를 향한
구원의 역사는
어느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다.

끊어 주어야
새로워질 수 있고
떠나야 다시
만날 수 있는
삶의 기쁨이다.

사랑은 끝이
아니라 늘
시작이다.

너와 나를
지켜주시는
성령이시다.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우리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떠날 수
있으시기에
어디로
가야할 지도
아신다.

아픔 없이
새 역사는
시작되지 않는다.

죽어버린
역사의
이야기가 아닌
살아계신
성령의
활동이 되신다.

그릇되고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는
성령이시다.

떠나보내야
오늘을
살 수 있는
우리들 삶이다.

성령과 함께
이르러야 할 곳은
구원의 자리이다.

과거와 현재가
살아계신
성령 안에서
살아있는
시간이 된다.

만남과 떠남으로
구원이
되어 오시는
성령이시다.

 말씀 나누기 - 부활 6주 화요일-일단의 사랑에 그치지 말고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5월 11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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