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1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요한 15,18-21)
You do not belong to the world,
and I have chosen you out of the worl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마케도니아에 관한 환시를 본 뒤 그곳에서 선교할 방도를 찾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미워한 세상이 이제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제자들도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독립적인 사람일까요? 아니면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이 독립적인 사람일까요? 당연히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을 독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남에게 잘 의지할수록 더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언제든 날 도와줄 사람이 있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믿음이 사람을 더 독립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으로 지금을 더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게 합니다.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을 약한 사람 취급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나’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상당히 독립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이 세상입니다. 나를 믿는다고 하지만 나의 한계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독립적이지 못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믿으며 의지하는 것이 우리를 약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음에 큰 힘을 얻어 힘차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의지할수록 더 독립적으로 지금을 잘 살게 해줍니다.
이렇게 주님께 대한 믿음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믿음을 쓸모없는 것이라 말합니다. 주님의 계명인 사랑은 힘없는 사람의 외침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을 굳게 믿는 사람을 자신들과 다르다면서 배척합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를 이룬 것은 성부와 성자가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었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고 아버지를 앎으로써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느님 아버지를 모르고 그의 아들 예수님도 모르기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하고 아들도 미워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미움은 사랑으로 하나가 된 제자들도 미워하게 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을 자기들처럼 똑같이 추구했다면, 제자들을 자기네들과 한패로 생각했을 것이지만, 제자들은 철저하게 주님의 뜻을 따랐기에 세상의 미움을 받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주님의 뜻인 사랑의 실천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합니다. 세상과 구별되면서 주님의 진정한 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반대를 받겠지만,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가고자 하면 그런 반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주님의 편이 되어서 진정한 행복을 행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독립적인 모습으로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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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Tc-OecNSW_k
초대교회 시절에 바오로 일행은 소아시아에서 복음 선포에 진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은 서해안의 트로아스로 내려가서 유럽으로 건너가라는 환시를 받고 그리스의 마케도니아로 넘어 갔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서향하게 된 역사적 전환이 이렇게 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 서진하며 복음을 전하게 하신 성령께서는 제1천년기에는 유럽 대륙에 십자가를 세우게 하셨고, 제2천년기에는 아프리카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하셨는데, 이 제3천년기에는 아시아에 사랑의 문명을 세우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하지만 오늘날 아시아의 복음화 과업은 커다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닌 불교나 힌두교와 유교 등 아시아의 고등 종교들은 독자적 구원체계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아시아에서 태어나신 구세주께서 아시아 대륙의 백성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채 남아 계신 것이 현실입니다. 이는 중세 이후 유럽의 역사를 주도해 온 가톨릭 교회가 루터로 인한 분열 사태를 겪으면서 아시아 선교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지만, 아시아의 고등 종교와 앞선 문화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로마화된 가톨릭 교회의 서구적 신관과 교리 그리고 유럽식 교회 모델을 옮겨 심으려고 했을 뿐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 사회 안에서도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함으로써 주도권을 상실하여 팽창적인 제국주의 정책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으려던 열강들의 식민정책에 들러리로 선교활동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아시아인들이 보기에 그리스도교는 영락없는 서양 종교였고, 함포와 군대를 앞세워 개종을 강요하여 종교적 식민지를 얻으려던 제국주의 세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아시아 종교의 신봉자들은 예수님을 부처님이나 공자님 같은 성현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하느님으로 여기지는 않을 뿐만 아니라 서양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시아에 선교하러 온 서양 선교사들이 그분을 서양인의 이미지로 소개했기 때문이고, 그분의 가르침도 서양의 논리로 된 교리로써 전했기 때문이며, 그분의 교회 역시 유럽식 모델로 이식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까지도 이 세 가지 스타일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아시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이야말로 21세기와 제3천년기를 위한 성령의 이끄심이라고 믿고, 이에 따른 ‘새 복음화’가 아시아 대륙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호소한 바 있습니다. 제1, 제2천년기의 시행착오를 딛고 할 수 있는 한 근본적인 방식으로 새 복음화가 이루어지자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룩하신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방식을 고수하지 않으시고 세상에 내려오시어 사람이 되셨으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신 후 유다인으로서 말씀하시고 유다인의 사고방식과 성경과 율법도 익히신 후에 이 모든 것 속에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담아서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아시아 대륙에서 그리스도 신앙이 자리잡기 위해서는 공의회가 전제한 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우선 유럽인들이 받아들인 복음진리의 양식이 예수님의 복음진리를 정통적이고 보편적으로 표현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정통과 이단의 문제는 신앙 진리의 내용에 관한 것이지 형식과 과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서양화되어 버린 그리스도교를 아시아에 뿌리내리게 하는 토착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주체가 되어서 신앙 교리도, 성경 해석도, 전례적 표현까지도 아시아인들의 문화적 감수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아시아에 자리잡고 있는 종교들과 교세 경쟁을 하려 들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선교는 종파간 전쟁이나 교파간 경쟁이 아니며,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칠 줄 아는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공의회에서는 아시아를 비롯한 모든 대륙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인류 가족에게 봉사하려는 동기에서 정의와 평화, 자유와 연대성 같은 보편적 가치들에 바탕을 둔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일에 기존의 종교인들과 선의의 시민들과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가르친 바 있습니다.
1999년에 대희년을 앞두고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하여 요한 바오로 2세와 아시아 주교들이 아시아 시노드에 모여 한 목소리로 권고한 바에 따르면, 일찍이 2천년 전에 바오로 일행의 발길을 가로막고 복음이 서향하도록 이끄신 성령께서 이제 이 제3천년기에는 복음이 동향하도록 이끄십니다. 아시아 복음화는 복음화 열기가 가라앉은 유럽을 비롯한 전체 보편교회에도 복음화의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라고 교황청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시아의 복음화 노력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 요청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 교회가 보전해 온 가장 정통적인 전통 중에서 가톨릭 사회교리를 아시아에 적용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 때문이고, 아시아 대륙이 복음화되면 아시아에도 사랑의 문명이 세워질 수 있을 것이며고 전체 인류와 보편 교회도 그 활력을 고루 나누어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복음화의 이 역사적 전환점에 있어서 인도 캘커타에서 사랑의 봉사를 행한 데레사 수녀는 모범적인 선교활동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빈민들이 많아도 그 다음 생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여기는 종교적 미신 때문에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운 나머지, 데레사 수녀는 그들을 시신을 거두어 마치 예수님의 시신을 모시듯이 상장례를 치루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임종에도 인간적 품위가 필요하다고 여긴 데레사 수녀의 이 같은 노력을 고깝게 생각한 현지 여론은 알바니아 출신으로서 서양 그리스도교의 수도자인 그녀의 처지로 보아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려고 인도 사회의 치부를 세계에 드러내고 있다고 볼멘 소리로 비판하였지만, 그녀는 “힌두교인들이 더 좋은 힌두교인이 되고, 그리스도교인들도 더 좋은 그리스도교인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응수했던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외국 여행을 다녀오면 꼭 들려야하는 곳이 있습니다. ‘입국심사’입니다. 팬데믹이 끝나가면서 입국심사의 대기 줄도 길어졌습니다. 대기 순서는 두 갈래도 나뉘었습니다. 한 줄은 미국 시민이고, 다른 한 줄은 미국 시민이 아닌 줄이었습니다. 미국 시민이 먼저 입국심사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환승하는데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입국심사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음에는 휠체어를 타시는 분들이 입국심사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기 줄은 길어지는데 입국심사를 하는 직원은 2명이라서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1시간 정도 기다리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휠체어를 타신 분들이나, 환승에 시간이 쫓기는 분들이 먼저 입국심사를 받는 것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시민이 타국에서 온 사람들보다 먼저 입국심사를 받는 것은 고려했으면 싶었습니다. 미국에 관광 온 사람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기 보다는 적어도 미국시민과 비슷하게 입국심사를 받게 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돌아보면 사제이기 때문에 특별한 대우를 받은 적이 많았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타이어의 압력에 문제가 있다는 표시가 보였습니다. 교우분이 하는 정비소엘 갔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저의 차를 우선적으로 받아 주었습니다. 타이어에 큰 못이 박혀있었습니다. 못을 뽑고, 펑크 난 곳을 때웠습니다. 공기를 넣으니 타이어의 압력은 정상이 되었습니다. 정비소 사장님은 수리비를 받지 않고 오히려 커피 한 잔을 주셨습니다. 제가 사제이기에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식사하기 위해서 줄을 설 때도 사제라는 이유로 먼저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사제라는 이유로 독방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입국심사에서 조금 기다리는 것을 힘들어 했지만, 사실 저는 참 많은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신 거라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들판을 헤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 사도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레지오 단원들이 피정 갔을 때, 신부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레지오 단원들의 첫째가는 직무는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출석이라고 답을 하셨고, 어떤 분은 선교라고 답을 하셨고, 어떤 분은 사랑이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또 어떤 분은 기도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모든 답에 점수를 주시면서 가장 정확한 대답은 ‘자기 성화’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성화 되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출석하고, 자신이 성화 되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선교하며, 자신이 성화 되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기도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자신은 성화 되지 않았으면서 남을 성화시키려고 하는 분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분들을 볼 때도 있습니다.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곧 지치게 됩니다. 힘이 빠지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신앙이 식어버립니다. 즐거웠던 일들도 시들해지고, 성당에 나오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재미가 없어집니다. 신앙생활에 깊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화 된 사람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기도할 수 있으며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성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 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원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저 고철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원이 연결되어야만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냉장고도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성화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연결될 때, 주님 곁에 머무를 때 성화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화 된 신앙인은 박해를 받을 수 있고, 고독할 수 있으며, 십자가를 지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를 살리는 길이고, 그 길이 영광과 부활의 길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환영과 호의가 아니라 피와 고통 속에서 성장해온 우리 교회
-양승국신부-
올해 다시 한번 영광스런 순교자들의 숨결이 진하게 느껴지는 배론 성지에 와있습니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의 주교요지도 읽고 묵상하며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우리 가톨릭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박수갈채와 환호가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세상의 박해와 순교, 배척과 미움 속에서 꾸준히 성장을 거듭해왔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초대 한국 교회 공동체 역시 순교자들의 피를 자양분으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환영과 호의가 아니라 피와 고통 속에서 우리 교회가 성장해온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교회의 창립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물든 세상과는 태생적으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신 분입니다.
세속의 권력자들이 언제나 취했던 노선은 한결같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의 번영, 현세적 안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노선은 방향이 정 반대였습니다. 불완전한 이 세상의 몰락이었습니다. 그 대신 외치신 것이 천상에서의 완벽한 복락이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세상 권력자들의 비리와 악행을 만천하에 고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결같이 취하신 노선이 이러했으므로 세상으로부터의 미움과 박해는 불을 보듯이 명백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자기 한목숨 부지하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와 음해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유한함을 일깨우시며 하느님 나라의 영원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때로 결코 만만치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처신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다 보면 자주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래전 이러한 현상을 미리 예견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요한복음 15장 18~20절)
예수님을 스승이요 친구, 아버지로 모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또 한 명의 순교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잘살기 위해서는 순교 영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순교자들의 후예들입니다. 우리들의 피 속에는 순교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토록 큰 은총을 입은 우리 순교자들의 후예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더이상 신유박해나 기해박해가 없는 오늘날의 이 시대, 우리 선조들이 지니셨던 그 놀라운 순교 정신, 순교 영성을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서 실천할까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너무나 간단하더라구요. 죽을 각오로 현실의 고통에 직면하는 일입니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순교자의 마음으로 정말 용서하기 힘든 그 인간, 정말 꼴 보기 싫은 그 사람을 다시 한번 용서하고 포용하는 일입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이다.’ 라고 외치며 최선을 다해서 사는 일입니다. 앞으로의 1년을 내 생애 가장 멋진 1년으로 장식하겠다고 다짐하며 불꽃처럼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바로 순교영성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삶이란 것, 멋진 티브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호화찬란하다거나 특별하지가 않습니다. 때로 지루하고 때로 따분하고 때로 구질구질하고, 때로 엄청나게 구립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은 우리들의 삶입니다.
순교 영성을 산다는 것은 이렇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도 활짝 웃으면서, 기쁜 얼굴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인내가 신앙 활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로마서 8장 18절에서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매일의 고통을 기쁘게 견뎌내는 것 그 자체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참여하는 길이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환난에서 모자라는 부분”(콜로 1장 24절)을 채우는 일이며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에 걸 맞는 노력과 정성이 함께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대한 꿈을 지니되 선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거나 선에 대치되는 꿈과 희망은 결코 현실화 될 수 없습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모 그룹 재벌회장이 술집에서 폭행을 당한 아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보복을 하였다는 얘기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구속되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선에 대치되는 방법을 선택하였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빌미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을 폭행한 학부모도 있습니다. 폭행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자녀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 부모의 자녀에게는 바른 인성을 기대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자기사람으로 만들고 그것을 즐깁니다. 옳고 그렇지 않고는 상관없이, 좋고 싫고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가치를 두지만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저 멀리 하늘의 가치를 봅니다. 그래서 결국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거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움을 당하는 것은 악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사악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조직폭력배와 공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이들은 누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구애 없이 선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뽑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삶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난 형태의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는 현실에 공감하시고 "매일 공동선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일종의 순교와 같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저분하게 되거나 지치게 되더라도 우리는 현실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되 갚아주시길 다짐하며……'더 큰 사랑으로',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반영억신부-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에 걸 맞는 노력과 정성이 함께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대한 꿈을 지니되 선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거나 선에 대치되는 꿈과 희망은 결코 현실화 될 수 없습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모 그룹 재벌회장이 술집에서 폭행을 당한 아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보복을 하였다는 얘기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구속되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선에 대치되는 방법을 선택하였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빌미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을 폭행한 학부모도 있습니다. 폭행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자녀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 부모의 자녀에게는 바른 인성을 기대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자기사람으로 만들고 그것을 즐깁니다. 옳고 그렇지 않고는 상관없이, 좋고 싫고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가치를 두지만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저 멀리 하늘의 가치를 봅니다. 그래서 결국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거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움을 당하는 것은 악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사악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조직폭력배와 공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이들은 누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구애 없이 선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뽑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삶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난 형태의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는 현실에 공감하시고 "매일 공동선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일종의 순교와 같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저분하게 되거나 지치게 되더라도 우리는 현실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되 갚아주시길 다짐하며……'더 큰 사랑으로',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5, 21)
-한상우신부-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은
하느님이시다.
보내신 분을
아는 것이
신앙의 참된
중심이다.
모든 출발은
중심에서
출발해야 한다.
참된 중심은
이와같이 우리
삶의 자리인
뜨거운
마음에서
마음으로
깊게 전달된다.
중심을
잃어버리면
사랑도
사라진다.
미움과
사랑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은
사랑의 진리를
실천한다.
가장 적절한
사랑은
하느님께서
물려주신
우리들의
정체성이며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가장 좋은
실천이다.
보내신
하느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
보내신 분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미움과 박해의
현실적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참된 일치를
위해 역사의 현장
우리 삶의
현장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이시다.
사람 속으로
사람 속으로
들어오시고
세상 속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오시어
참사랑을
회복하신다.
미움으로
닫혀진 관계를
다시 사랑으로
여시는 분이시다.
이와같이
열리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보내신 분을
알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들의
관계이다.
관계의
그 중심에
뜨거운 열림
사랑이 있다.
진짜 사랑이
있는 곳에
진짜 신앙인이
있다.
중심이 올바로
섰을 때 올바른
사랑도 따라온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참된 삶의
중심을
다시 잡아야 할
열림의 때이다.
말씀 나누기 - 부활 5주 토요일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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