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9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요한 15,9-11)
If you keep my commandments,
you will remain in my love,
just as I have kept my Father’s commandments
and remain in his lo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베드로는 사도들과 원로들을 향하여,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형제들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어려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쁨이 충만하도록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피츠버그 대학 학자들은 관심과 외로움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은 건강 악화와 조기 사망의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상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사회적 접촉을 장려할 수 있는 치료 방법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 관심 기울이기 운동을 제시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관한 관심과 배려를 하루 20분씩 하는 것입니다. 2주 후, 성실히 이 운동을 따른 사람은 외로움을 덜 느끼고, 외롭다는 느낌이 1/4 정도 줄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외롭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외로움은 자신의 감정입니다. 실제 혼자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자기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날 배려해주고 관심을 주면 좋겠지만, 어지간해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먹고 살기에도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이에게 관심과 배려를 베푸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자신을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나’를 스스로 살리는 것입니다. 관심과 배려라는 사랑은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을 느끼는 것은 내 편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진정한 내 편은 ‘나’뿐입니다. 부모, 형제 역시도 따지고 보면 ‘나’가 아닙니다. 그래서 가정 안에서도 외로움과 고립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우리 편이 되어서 사랑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외로움과 고립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머물 수가 있을까요? 우리도 사랑을 실천해야지만 가능합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주님과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 받기만을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랑이 아닌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당연히 상대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그 사랑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의 외로움과 고립에서 벗어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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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지옥일까, 혼자가 지옥일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N1UeeVAZ3TE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당신도 제자들을 사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관계를 제자들과도 이루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공동체에는 ‘법’이 있습니다. 이 법에 따라 그 공동체가 하느님 삼위일체 모습을 닮던지, 아니면 모기떼와 같은 모습을 닮든지 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수준에 따라 그 구성원들이 느끼는 기쁨도 다릅니다.
하느님 삼위일체 공동체의 행복은 완전한 사랑에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이란 상대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교회도 당신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법을 따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그 공동체에 속해서 오는 기쁨이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제자들도 똑같아 느끼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행복을 공동체에서 느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느끼는 행복보다 그 의무를 수행하는 고통이 더 크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더 랍스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한 주인공이 이혼을 통보받습니다. 이런 경우 그런 사람들은 한 호텔로 끌려갑니다. 그 호텔 안에서 일정 기간 안에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각자 살아남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혼인합니다.
이런 것이 싫은 주인공은 그 호텔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몰래 숨어 혼자 살아가는 사람 중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이 사실을 안 독신자 대장은 여자의 눈을 잃게 만듭니다. 이 사회는 결혼해서 살려면 공통점이 있어야 합니다. 단지 난시라는 것만이 공통점이었는데 이제 둘은 공통점이 없어진 것입니다. 남자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자신도 눈을 잃어 눈이 보이지 않게 되던가, 아니면 랍스터가 되어 동물처럼 100년을 살던가.
이제 우리의 선택이 남았습니다.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에 참여하든지, 아니면 솔로의 삶을 지향하여 고생 안 하고 솔로 지옥에 갇힐 것인지.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이유는 관계를 맺음이 혼자 있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모습을 닮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관계 맺으시는 것처럼 타인은 지옥이라면 혼자 지내는 것보다 관계를 맺어감이 더 행복합니다.
1997년 허난성, 당시 나이 50의 노총각 장 솽치 씨는 쓰레기를 주워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겨울 짚 더미 속에 버려져 있던 4개월 된 여자아이를 발견합니다. 자신도 고아로 자란 장 씨는 가족이 없는 슬픔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아기의 아빠가 되어주기로 결심합니다. 하얀 비둘기란 뜻의 ‘장 백기’로 딸의 이름을 짓고 혹시 친부모가 백기를 찾을지 몰라 재산의 절반을 털어 딸의 증명사진도 찍어둡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딸을 키우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먹을 것도 없으면서 지극정성으로 백기를 돌봤지만 늘 부족했습니다. 사춘기가 된 백기는 아빠를 원망했고 아빠는 그때마다 몰래 눈물을 훔쳤습니다. 하지만 백기가 상처받을까 봐 여전히 버려졌던 아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백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커가면서 아빠와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을 한 백기는 결국 아빠가 버려졌던 자신을 거둬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을 애지중지 키워준 아빠에게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백기는 도시로 나가 닥치는 대로 일합니다. 그리고 올해 스물넷이 된 백기는 놀랍게도 연 매출 190억에 달하는 한 회사의 CEO가 됩니다. 이제 백기는 74세가 된 아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큰 세상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소망의 씨앗이 마음속에서 자랐습니다. 베이징에서 창업하여 7년 만에 사장이 되었는데 지금은 회사가 1억 위안(약 190억) 정도의 가치가 됩니다.”
그녀는 아빠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예 캠핑카를 사서 아빠와 함께 세계를 일주하고 있습니다. 또 연애 한 번 못하고 평생 혼자 산 아빠를 위해 결혼도 시켜드렸습니다.
[출처: ‘버려졌던 갓난아기의 보은... 노총각 아빠에게 일어난 기적’, 유튜브 채널, ‘엠빅뉴스’]
장 백기 씨를 예수님이라 가정하고 장 솽치 씨를 하느님 아버지라 가정해봅시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람의 아들로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행복을 모르고 버려진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드님을 부르셔서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세례 때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은 장 씨가 딸 백기에게 준 모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공동체는 법이 있습니다. 받았으면 주어야 합니다. 그만한 사랑을 받았으면 그만한 사랑을 주어야 하는 게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그 보답을 하기 싫으면 그냥 공동체에서 오는 소속감의 행복을 버리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아버지의 법을 따랐습니다. 백기 씨도 아버지께 받은 것을 보답하기 위해 피땀을 흘려 회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드립니다.
이 가운데 한 여인이 또 이 공동체의 행복에 참여하게 됩니다. 백기 씨가 아빠에게 소개한 여인입니다. 그 여인도 이 공동체의 행복에 참여하려면 분명 백기 씨가 자신에게 베푼 대로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의 행복은 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사랑에 보답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 공동체의 행복을 잃게 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참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우리가 성당 공동체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가족으로서의 행복을 누리도록 사랑의 법으로 살아갑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그 공동체에 들어오고 싶어서 줄을 설 것입니다.
복음적 기쁨이 지닌 사회적 위력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5bN_W0s55M8
오늘 독서에서는 이방인 입교자들에 대한 할례 논쟁이 극적으로 타결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의 율법을 서약하는 의미가 있는 할례를 요구하겠다던 기성 사도단의 요구는 편협한 선민의식의 발로였습니다. 할례는, 믿음이 아니라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성령께서 사도들의 마음을 움직여주셔서 초대교회는 날개를 단 것처럼 이방인 선교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기성 사도단에 속한 주류가 아니었음에도 초대교회 지도부가 두 사도의 믿음과 헌신에 대해 보인 인간적 신뢰도 깊이 작용했을 것인데, 사도회의 후에 예루살렘 공동체의 책임자였던 야고보 사도가 이방인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 있는 다음 표현으로 그렇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사도 15,26). 이 모두가 하느님을 믿는 데서 오는 영적인 힘이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영적인 힘을 ‘기쁨’이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기쁨의 힘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이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등 유다교 지배층이 적대하는 완고한 분위기에다가, 가는 곳마다 몰려들던 군중도 사실은 자신들이 받을 혜택에만 눈이 멀어 있었고 삼년 동안이나 그분의 가르침을 듣던 제자들 역시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몰이해의 분위기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실 수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 신자들도 엄청난 사회악 현상 속에서 끔찍한 박해를 받으면서 복음을 살고 있었습니다. 먼저 당시 사회상에 대한 보고를 살펴보겠습니다. “온 나라가 온갖 재앙 때문에 흔들리고 비참한 상태에 있습니다. 가난한 자, 부자, 천주교 신자, 비신자, 양반, 서민, 강자, 약자,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항상 입으로는 ‘평화, 평화!’라고 외치면서 줄곧 놀이와 음주, 못된 구경거리로 자기 자신과 백성들을 다 망치고 있습니다. 왕이란 이름뿐이고 아무 힘도 없습니다. 고관들에게 보다 돈을 많이 바친 자만이 지방으로 나가게 됩니다. 지방관들은 벼슬을 얻느라고 진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친족을 살찌게 하고 자기들의 은인을 위해서만 일합니다. 그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습은 왜 이다지도 비참합니까!”(1853.10.23.) 이 편지는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올 무렵의 사회상에 대하여 최양업(1821~1861) 신부가 주중 공사이자 홍콩 총독이었던 바우링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내용입니다. 고조선 문명 시기, 그러니까 우리 민족의 역사 초창기에 드높았던 하느님 신앙과 공동선 의식이 왜 조선 시대에는 이토록 끔찍한 사회악 현상으로 변질되고 말았을까요?
2천여 년이 넘도록 우뚝 서 있던 고조선 문명이 내부 분열과 중국 한 왕조의 침입으로 망하고 나서 그 땅에 고구려 왕조가 들어섰습니다. 그러다가 고구려 제17대 임금인 소수림왕이 서기 372년에 들여온 불교를 지배층과 지식층이 수용하고 백성들에게도 장려한 이래로, 고려조에서는 불교를 아예 국교로 높였고 불교로 인한 폐해가 커지자 일어난 조선조에서도 주자학을 유교처럼 떠받들었으므로, 고조선 시대 이래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등 모든 백성이 모여 하느님께 제사 드리고 그로부터 받은 뜻을 공유하며 백성 모두가 천손으로서 잔치를 벌이던 전통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요즘의 종교질서로 풀이하자면, 제천의식을 주례할 사제를 양성할 수 없고, 경천사상을 체계화시킬 학문체계도 없었으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세상을 선하고 이롭게 하려던 민족 고유의 전통은 민간으로 숨어들었고 사사로운 길흉화복을 점치는 미신으로 변질되어 공동선이 실종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조선 후기 사회를 이토록 망가진 모습으로 방치해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시대 상황 속에서 이벽을 비롯한 선각자들은 하늘의 진리를 갈망하던 차에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고 백성들 역시 마른 땅에 빗물이 스며들 듯이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므로, 마치 민중운동과 같은 양상으로 퍼져 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을 하느님 나라에로 변화시킬 수 있는 진리는 예수님에게서 보여지는 생애와 그분의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즉, 진리이신 하느님과 하나라는 일체감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체험과, 하느님을 믿는다는 경천의식에서 우러난 복음적 기쁨이 작동되면 이 힘으로 온갖 박해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거나 알아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 특징은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회적 신분으로 차별하고 백성을 억압하는 우상 숭배적 전통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랑이라는 가치 대신에 힘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최고선의 가치를 지키는 역할이 종교의 몫입니다. 여기서 나온 공동선이 백성을 이롭게 하도록 진리를 증거해야 하는 파수꾼 역할은 교회의 몫입니다. 공동선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잘 식별해야 하는 일도, 복음의 기쁨을 잘 관리해야 하는 몫도 매우 중요한 교회의 일입니다. 지난 역사의 교훈을 잘 헤아려서 지금 나타나는 시대의 징표를 잘 식별해야 하되, 특히 복음의 기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건강한 세포들은 자신들의 영양분을 이웃의 세포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병든 세포들은 자신들의 영양분을 나누어 주지 않고, 이웃 세포들의 영양분을 받아들이기만 한다고 합니다. 비대해진 세포는 결국 슬픈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지체들은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내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대와 나눔은 건강한 몸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위대한 제국이 망하는 과정은 외부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문을 열고, 다른 문화와 다른 민족들을 수용하고, 받아드릴 때는 더욱 발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을 닫고, 외부의 문화를 거부하고, 다른 민족을 탄압할 때는 고인 물이 상하듯이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동생 수녀님은 참 여러 곳에서 소임을 하였습니다. 서울교구, 춘천교구, 인천교구, 부산교구, 수원교구, 마산교구에서 있었고 지금은 다시 서울교구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문득 사제들도 그렇게 인사이동을 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어떤 교구는 사제가 많아서 인사적체가 심각하고, 어떤 교구는 사제가 적어서 사목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사이동을 할 수 있다면 한국교회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 같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결정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조건에는 필요조건이 있고, 충분조건이 있고, 필요충분조건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필요한 조건입니다.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본당에서 주최하는 행사와 전례에 참석하는 것은 충분한 조건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 미사에도 참석하는 사람은 삶의 우선순위에서 신앙이 먼저입니다. 이런 분들이 많은 본당은 활력이 넘치고, 사목자에게도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 성녀는 예수님께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한다면, 건강보다 아픔을 택한다면, 장수보다 단명을 택한다면 이는 신앙생활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입니다. 순교자들은 바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성인 성녀들 또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여러분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입니다.” 행복에 대한 지침서도 많습니다. 건강에 대한 지침서도 많습니다. 재물에 대한 지침서도 많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만으로는 행복해지기 어렵습니다. 건강해지기 어렵습니다. 재물을 늘리거나 지키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책의 내용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신앙 안에서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권고나 부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겸손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이영근신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요한 15,9)
이는 우리가 이미 사랑을 받았다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기원이 아버지께 있다는 선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이미 사랑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버지께로부터 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진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결코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호의와 자애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곧 선사된 사랑이 베풀어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사랑 안에 머무르기를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
여기에는 ‘먼저’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 전제됩니다.
곧 선사되는 당신의 사랑을 먼저 받아들여 그 안에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사랑이 우리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먼저 자신을 허용하고 승복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다른 사랑이 아니라, 선사받은 바로 그 사랑 안에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 안에 머무는 방법도 함께 가르쳐주십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요한 15,10)
이미 당신께 선사받은 그 사랑을 지키는 것이 곧 당신 사랑 안에 머무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그 어떤 사랑이 아니라 선사받은 그 사랑을 간직하고 준수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의 사랑은 말이나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기를 실행할 때 그 실행 안에 머문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 사랑을 실행하는 것이 ‘새 계명’으로 선포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 15,12)
그리고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되면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들고 우리 또한 기쁨으로 차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그 기쁨은 뒤에서 요한이 말한 대로, '그 누구에게도 빼앗겨지지 않는 기쁨'(요한 16,22)입니다.
그러기에 그 기쁨은 예수님께로부터 선사받은 신적인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은 결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사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만족, 나의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의 실현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오늘 하루 그 기쁨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요한 15,9)
주님!
저는 분명 이미 사랑을 먹었습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당신의 호의를 입었습니다.
먹고서도 먹은 줄을 모르는 무지를 깨우치소서.
더 이상은 그 사랑을 내팽개치거나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삶이 온전히 당신의 사랑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원하는 바를 다 이루어라」
-반영억신부-
우리는 흔히 기도한다고 하면 무엇을 청하는 기도를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나의 바람을 정해 놓고 그것을 꼭 이루어 달라고 하소연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라는 기도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분의 뜻을 알아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을 보면,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 주소서....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 주소서……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드리게 해 주시고……복되신 성 삼위의 영광 안에 살게 해 주소서….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하나이다.”하고, 이어서 충실한 봉사와 규율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선서합니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봉헌의 기도요,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소망하며 성령께 각별한 사랑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주님 안에 머물고 말씀 안에서 주님의 뜻과 일치할 때 효과적인 열매를 맺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예수님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나를 지배하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빌면 무조건 이루어지리라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맹목적인 신앙 논리를 펼쳐서는 안 됩니다. 기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나의 할 일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심을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원의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타인 지향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사랑으로 철저히 하나가 되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열려있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나의 열매가 아니라 하느님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러므로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그분과의 일치된 마음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붙어있을 때 생명력을 지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몸통이 튼튼해야 가지의 열매도 튼실합니다. 포도나무는 전체고, 가지는 부분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나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사랑’과 ‘순명’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명을 좇지 않는다면 그는 참 제자가 아닙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살면 우리 인생에 알찬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이가 늘어난다는 의미와 함께 신앙의 삶을 통해 더 큰 생명력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로 주님 안에 머물러 원하는 바를 다 이루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하고 기도하며 오늘을 봉헌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 11)
-한상우신부-
머무름은
사랑의 참된
관계이며
관계는
사랑의 참된
기쁨이다.
애타게 찾던
사랑의 기쁨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다.
충만한 기쁨에
이르는 길을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통해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에게
충만한
기쁨이 있다.
머무름은
참기쁨으로
채워지는
참된 사랑의
새로운
방식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머무름의
주님이시다.
머무름은
관계맺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관계맺음은
받아들임의
참기쁨이다.
참된 기쁨은
과거의 기쁨에
갇혀있지 않다.
살아계신
하느님에게서
얻기에
기쁨은
언제나
살아있는
기쁨이 된다.
사랑은
가장 좋은
머무름이며
가장 좋은
기쁨이다.
온 마음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시다.
머무름의 복음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쁨이다.
우리의 기쁨을
곱씹어 보는
성모님의 달이다.
지극한 사랑
지극한 기쁨
지극한
머무름의
선물이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서로를
받아들이는
머무름을
선물로 주신다.
최고의 기쁨은
함께하는
머무름의
참기쁨이다.
말씀 나누기 - 부활 5주 목요일-하느님 사랑에 깃들이고 머물고 물을 긷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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