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7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 14,27-31ㄱ)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to you.
Not as the world gives do I give it to you.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or afra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교회 공동체마다 원로들을 임명하고, 주님께 그들을 의탁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남기고 간다고 하시며, 당신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하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수출입 회사에서 비서직을 구한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취업이 급했던 어느 청년도 공고를 보고서 이력서를 제출했지요. 그런데 서류 면접에 떨어졌다는 메시지와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은 비서직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학도 잘하지 못하고, 이력서에는 온통 오타로 가득합니다. 이런 비서를 저희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청년은 너무 화가 났습니다. 서류만 보고 자신을 함부로 판단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항의와 욕설이 가득 담긴 문자 메시지를 작성했습니다. 발송하려는 순간, 이렇게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뛴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질까 싶었습니다. 이런 항의와 욕설의 메시지를 보고서 회사에서 합격 통지서를 보낼 리가 없고, 또 자신의 화도 풀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중하게 한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자기 능력이 부족했음을 인정하며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적해줘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이 청년은 뜻밖의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비서 일은 지금 상태에서는 도저히 힘들겠지만, 열려 있는 마음을 보니 행정 부처에서 먼저 경력을 쌓으면 훌륭한 비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만약 처음의 마음대로 복수의 메시지를 보냈다면 여전히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끊임없는 충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는 것이 과연 물리적인 힘일까요? 관계 개선은 물리적인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이제 걱정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평화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진리와 빛과 생명을 토대로 이루어졌고, 삶의 기쁨을 주는 주님의 커다란 선물이었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전혀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힘으로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 서로의 마음이 좋아질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마음이 산란해지고, 겁을 내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사랑을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폭력과 전쟁으로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인정하고 받아주시면서 평화를 이뤄주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이 평화를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를 폭력의 관계가 아닌 평화의 관계로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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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자녀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모범 두 가지는?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XZiWpNGS36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아버지께 순종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를 대하는 모습을 세상이 꼭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
왜 예수님께서 세상에 당신의 삶을 꼭 보여주어야 하신다고 할까요? 그 이유는 세상이 당신을 닮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범’으로 세상을 교육하기를 원하십니다.
슈바이처 박사에게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 3가지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인즉 첫째도 본보기, 둘째도 본보기, 셋째도 본보기라고 했습니다.
자녀가 공부에 흥미를 나타내기를 원하면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부모가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것입니다. 자녀가 몸이 튼튼하기를 원하면 부모가 시간을 내서 운동하는 것입니다.
엄마 게가 아기 게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어째서 그런 비뚤어진 걸음걸이로 걷느냐. 똑바로 걸어라.”
그러자 아기 게가 말했습니다.
“엄마, 제게 걷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아이가 비뚜로 걷고 있다면 그건 엄마가 비뚜로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이는 그저 보고 따라 하며 배울 뿐입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은 모범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왜 가르침이 모범을 넘을 수 없을까요? 모범에는 ‘피 흘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피 흘림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을 통해 흐릅니다. 누구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닮고 싶어 합니다. 지시하는 사람에게는 피가 흐르지 않습니다. 자기 편해지자고 말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취객이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것을 보고 아무도 돕지 않으려 하자 우리나라 청년 이수현 씨가 뛰어들어 그를 구하다가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그렇게 선로에 떨어진 사람들을 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신문에 많은 사람이 선로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지식은 피와 함께 전해져야 합니다. 학교에서 아무리 가르쳐도 그 사람을 닮고 싶게 만드는 사랑이 섞여서 오지 않으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진리와 은총이 항상 함께 와야 합니다. 은총이 피입니다.
이태석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의 제자 47명이 이미 의사가 되었거나 의대생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톤즈는 시골이고 수단에서도 의대에 들어가는 것은 공부를 굉장히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들이 다 의사가 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태석 신부가 의사의 모범으로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이태석 신부가 돌아가시지 않고 말로만 의사가 되라고 했다면 몇 명이 그분의 말을 따랐을까요?
우리가 세상에 대해 선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범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범으로 세상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그분께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세상에 이 두 가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거의 필요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본받게 하고 싶어서 가르치고 싶은 두 가지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법과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고 비난하고 순종하는 모습도 없다면, 자녀가 그런 어머니를 사랑하고 말을 잘 따라줄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모범도 없고 피 흘림도 없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말 안 듣는 자녀를 고치는 수많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고쳐질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그런 자녀를 자신이 직접 혼내서는 안 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서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고 순종하게 해야 합니다. 물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현대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하는 것을 보십시오. 현대에도 가능합니다. 신앙의 힘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모습과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겠습니까?
‘금쪽같은 내새끼’의 ‘폭언하는 두 얼굴의 아들’에서 무조건 화를 내고 부모에게 반항하고 막말하고 말이 도저히 통하지 않는 중학생 남자아이가 나옵니다. 게임머니로 부모 몰래 600만 원을 결제하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부모와 누나는 굉장히 이성적으로 차분하고 착해 보입니다. 이런 아이에게 손이 올라갈 만도 한데 그런 기미가 전혀 안 보입니다. 아이는 어린데도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냥 죽겠다고도 하고 나중에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상해를 입혀 합의금으로 받아서 갚겠다고도 합니다. 심지어 학교도 나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착한 가족에게서 어떻게 저런 아이가 나왔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부모가 돈 버느라 너무 바빠서 금쪽이는 할머니에게 키워졌습니다. 할머니도 금쪽이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신경을 써 줍니다. 아이는 할머니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귀찮아합니다. 할머니를 쫓아내고는 마음이 안쓰러워 자기를 탓하기도 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사람은 모범을 보고 성장하지, 지시받고 성장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모범을 보아야 하는 사람은 자기를 키워주는 대상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엄마입니다. 하지만 금쪽이에게는 할머니였습니다. 문제는 할머니는 집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고 누구에게도 순종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금쪽이는 할머니를 통해 윗사람을 사랑하고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모범을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가정에서 할머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둘이 돈을 벌기 위해 아이를 거의 전적으로 할머니에게 키워지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금쪽이가 어머니를 통해 윗사람에 대한 사랑과 순종의 모범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과 순종을 보고 배우도록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사제가 주교님을 사랑하지 않고 순종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신자들에게 자신을 사랑해주고 자기 말을 따라 달라고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신자들이 그 사제를 사랑하고 순종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자들을 잘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또 그 중간에 총회장이나 간부들이 있다면 그 간부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나의 모범으로 해야 합니다. 이런 것 안에서 모든 조직이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가 됩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w9bwGy3gZUs
오늘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리스트라에서 돌에 맞아서 죽을 지경으로 심하게 겪은 박해의 상황을 전합니다. 그렇게 심하게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 선포의 뜻을 접지 않았음은 물론, 가사(假死) 상태에서도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고백했는데 그 내용은 복음 선포를 멈추지 말라는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정도의 환난은 겪어야 마땅한 것이니,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신자들을 오히려 격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처신과 태도에서 복음 선포의 진정성을 본 티모테오는 감동한 나머지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참조: 2티모 3,11). 또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 활동의 결실로서 하느님의 평화를 세상에 남기시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짊어지신 십자가와 그로 인한 부활의 은총으로 성취한 하느님의 평화를 선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과 함께 한민족의 역사도 이끄신 성령께서는 속죄와 감사와 경천의 문화 속에 이 진정성과 평화의식을 집어 넣으셨습니다. 속죄와 감사의 지향에서 진정성 있게 하느님을 닮고자 몸과 마음을 수양(修養)하는 구도적 정신 전통이 생겨났다면, 경천의 지향에서는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문명의 도구로서 천문 관측과 역법, 농경 질서와 수리 철학과 존대어법의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낮에는 비온 뒤에 하늘과 땅에 걸쳐 세워지는 무지개로써 하느님의 축복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밤에는 별자리의 이동 경로를 관측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알아들어 문명의 질서를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한민족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별자리를 고인돌에 새겨 넣거나 각종 역사 일지에 기록하여 남겼으며, 특히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궤도가 서로 다른 태양계의 별들이 일렬로 늘어 선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이라든지 작은 달이 커다란 해를 가리는 일식(日蝕) 현상은 커다란 하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보아서 반드시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러한 천문관측활동에서 알아낸 지식에 기초하여 해의 공전주기로 일년을 삼고, 달의 공전 주기로 한달로 삼으며, 해의 자전 주기로 하루로 삼았으며, 역법에 따라 농사를 짓는 농업 문명이 이로써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천문 관측 활동은 땅의 질서를 이끄시려고 하느님께서 하늘에 보여주시는 뜻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 부산물로 천문 현상에 대한 사색과 이를 수로 표현하는 수리 철학이 생겨났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뜻에서 하나요, 하늘과 땅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세상의 기본 질서에서 둘을 이끌어 냈으며, 하늘과 땅과 사람에서 셋을 삼았고, 동서남북의 방위에서 넷을 보았으며, 땅에 있는 물질 중에 불(火)과 물(水)과 나무(木)와 쇠(金)와 흙(土) 등이 기본이라고 보아 다섯을 착안했습니다. 천지(天地)와 음양(陰陽), 천지인(天地人),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방(四方)과 화수목금토(火水木金土)의 다섯 가지 기본 물질이 모두 하나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성찰한 사색이 이 십진법의 수리 철학에 담겨 있습니다(天符經).
이 기본 수에서, 천지의 둘과 사방의 넷을 합해 여섯을 만들고, 낮에 빛을 비추는 해(日)와 밤에 빛을 비추는 달(月)과 다섯 별(火星, 水星, 木星, 金星, 土星)로 일곱을 만들었으며, 네 가지 방위를 다시 세분하여 여덟을 만들었고, 땅의 사방과 다섯 물질을 합한 땅의 완전수로서 아홉을 만들고, 땅의 다섯 물질에 상응하는 하늘의 다섯 별 즉 화성, 수성, 목성, 금성과 토성이 움직이는 길을 오행(五行)이라 하고는 다섯에 다섯을 더한 열을 하늘의 완전수로 삼았으니, 이로써 인류 문명의 십진법이 완성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우러러 받드는 경천의식으로부터 부모와 윗사람을 공경하는 효(孝)의 도리가 나왔는데, 문명의 역사를 연구한 아놀드 토인비도 고조선 문명의 효 사상에 대해서 듣고는 인류를 구원할 사상이라며 경탄했던 독특하고 고유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 경천과 효 사상이 반영되어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 불리었으며, 그 결과로 전 세계 모든 언어 가운데 유일하게 존대어법이 발달한 언어가 한국어입니다. 특히 ‘말씀’, ‘우리’와 같은 단어는 한국어에서만 통용되는 경천의 낱말들입니다.
이렇듯, 속죄와 감사와 경천의 요소들이 모인 결실이 하느님을 닮고자 노력하는 정신 수양의 구도적 전통과, 이를 위해 문명의 질서를 수립하는 평화로 나타났습니다. 속죄와 감사와 경천의 지향으로 제사를 주재하는 사제는 흰 옷을 입었습니다. 이 전통에서 우리 민족은 흰 옷을 즐겨 입는 백의민족이 되었습니다. 사제의 직책을 받은 민족이 즐겨 입어온 흰색은 빛이 비추어오는 밝음의 색으로서 하느님을 뜻하는 동시에 그분이 주시는 평화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강성해진 주변 민족들이 숱하게 침략을 해 왔어도 단 한 번도 다른 국가를 침략하거나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민족은 분단 구도를 극복하여 평화를 되찾고 인류 전체에게 평화를 나누어주는 평화의 샘이 되어야 합니다”(요한 바오로 2세,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세계 제44차 성체대회, 1989년). 이 모든 역사적 징표에서도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게 하신 성령의 이끄심이 엿보입니다.
-조재형신부-
엠이 주발 발표를 앞두고 리쿠르트(주말 체험 홍보 및 체험자 모집)를 다녔습니다. 동북부에 있는 성당 주일미사에 참례하면서 엠이 주말을 홍보하고, 체험자들을 모집하는 일입니다. 롱아일랜드, 부르클린, 버지니아, 워싱턴 DC, 우드사이드, 베이사이드, 펠리사이드, 퀸즈, 메이플우드, 데마레스트, 필라델피아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부르클린과 워싱턴 DC를 다녀왔지만 다른 발표부부들은 대부분의 본당으로 홍보를 다녀왔습니다. 거리가 먼 곳은 전날 미리 가서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홍보를 하였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열정에 불타올라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처럼 엠이 주말을 사랑하는 마음에 힘든 줄 모르고 홍보를 다니는 부부들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홍보를 열심히 다녔으니 제78차 동북부 엠이 주말은 하느님의 축복 속에 잘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1993년 용산성당에 보좌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재개발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아파트로 전입오는 교우들이 많았습니다. 본당신부님과 나누어서 집 축복 및 가정방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이라고 하셨듯이, 가정방문을 하면서 본당 공동체를 위해서 봉사하실 수 있는 보석 같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저는 주로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레지오, 성서공부, 빈첸시오, 청년연합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청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힘든지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졌습니다. 그리고 무거워서 건질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30년 전의 가정방문은 마치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졌던 것처럼 풍성한 수확이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전도여행을 다녀온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언어와 문화라는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 선입견과 질투라는 장벽을 거두어야 합니다. 날선 토론과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이유 없이 배척당하고, 매 맞기도 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장애가 사도들의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그 위로 싹이 나와 많은 열매를 맺듯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씨앗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세상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사도들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켰습니다.
2022년 5월 17일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본과 물질은 욕망과 탐욕을 만나서 우리들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제 앞에 놓인 현실도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인터넷 시대에 종이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전출하는 교우들은 늘어나는데 전입오는 교우들은 거의 없는 성당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30년 넘게 가톨릭평화신문을 애독하시는 구독자들이 계시기에 힘이 납니다. 오직 믿음으로 35년 넘게 본당을 지켜오는 교우들이 있기에 오늘도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평화는 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피어나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당신의 복음 선포 사명은 고스란히 사도들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사도들의 활약상은 그야말로 요즘 잘 나가는 손흥민 선수 저리가라였습니다. 종횡무진 그 자체였습니다.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승천하신 주님의 대리자이자 협조자이신 성령의 은총과 축복이 흘러넘쳤습니다. 사도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씀 한마디에 지긋지긋한 악령들이 뒤로 넘어졌습니다. 평생토록 괴롭혔던 병마도 순식간에 빠져나갔습니다. 이미 숨이 끊어져 사방에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시체가 다시금 생기를 되찾고 벌떡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적대자들의 반발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는 사도들이 받았던 냉대와 박해에 대해서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이방인들의 전도 여행길에 나섰던 바오로 사도가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고 있던 중에,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몰려온 동족 유다인들이 바오로 사도를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그냥 돌이 아니라 살상용으로 사용되던 큼지막한 돌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작정하고 합심해서 던지는 큼지막한 돌을 방패도 없이 온 몸을로 견뎌야 했던 바오로 사도는 마침내 지독한 돌팔매질을 견디다 못해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혼절을 한 것입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모습에 소원성취를 한 유다인들은 희희낙락했습니다. 드디어 눈엣가시 같은 바오로 사도가 죽었다며 그를 멍석에 둘둘 말아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미동도 하지 않던 바오로 사도를 보고 제자들은 스승님이 죽었구나, 장례식을 어떻게 치러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바오로 사도의 눈이 열리고, 입이 열리고, 스스로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제가 바오로 사도 같았으면, 그토록 많은 돌팔매를 맞았겠다, 그동안 쌓인 여독도 만만치 않겠다, 넘어졌을 때 쉬어간다고, 한 일 주일 푹 쉬면서 안정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를 보십시오. 바로 그 다음 날 아침, 아직도 여기저기 쑤시고 몸도 성치 않았을 텐데, 억지로 억지로 몸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나는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웁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세운 바오로 사도는 또 다른 도시 데르베로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리스트라와 이코이온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고 다시 안티오키아로 되돌아갔습니다.
온몸과 마음이 혹독한 돌팔매질과 매질,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너덜너덜한 상태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초기 교회 공동체 교우들을 따뜻한 어조로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오늘 우리 사목자들도 이 시대 교우들에게 틈만 나면 되풀이해서 외쳐야 할 소중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행전 14장 22절)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이영근신부-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 14,27)
주님께서는 단지 남기고만 가신 것이 아니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시며, 분명히 우리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평화롭지 못하다면 무슨 까닭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4,27)
성경에서 '평화'란 단지 외적으로 갈등이 없고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는 전쟁이 없는 조약이나 힘의 균형 상태나 평온하고 태평스러운 안정된 상태만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의 결과로 나타난 그분 다스림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평화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고 그리스와의 일치 안에 있을 때 충만해지는 평화입니다.
그것은 사랑과 정의와 진리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평화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마땅히 평화를 지켜야 하고, 평화의 파괴를 막아야 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을 위해 자신이 죽음으로써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내어주고 비워짐으로써, 타인을 떠받들고 자신이 낮아지고 작아짐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기에 오히려 세상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기만적인 안전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오히려 하느님의 평화가 항상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이처럼 우리가 평화를 얻는 길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 5,9)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4,27)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참 평화를 갈망하라」
-반영억신부-
우리는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면서 전쟁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를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자기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방비를 증가시킵니다.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평화를 방해하는 물리적인 환경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내가 마음의 평온 가운데 머물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에게 평화를 줄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평화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주체이십니다.
예수님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은 ‘로마의 평화’를 널리 선전하였습니다. 이 평화는 힘으로 얻은 평화, 약한 이를 굴복시킴으로써 얻은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다”(요한14,27).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는 것은 바로 평화가 ‘밖’으로부터 오는 평화가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평화입니다. 강한 힘으로 누르는 데서 오는 평화가 아니라 당신의 것을 몽땅 내어주는 사랑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예수님께서는 협조자 성령께 당신의 것을 모두 내어주십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자신이 먼저 평온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남에게도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내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평화는 죽기까지 흔들리지 않는 사랑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1,20). 세상은 권력이나 힘으로 다툼과 소란을 억압해서 평화를 이루고자 합니다. 북한의 핵실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탈북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억압하지 않고 서로 다른 생각을 존중하며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심으로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시지만, 제자들이나 우리가 곧장 평화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며 주님께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평온하지 못한 것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는 만큼 자신이 맑아져야 하고 고요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감정에 휘둘리는 자신을 보면서 감정을 다스리는 사랑을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아우구스티노).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송영진신부-
‘예수님의 평화’는 ‘영혼의 평화’, ‘공동체의 평화’, ‘구원의 기쁨과 행복’입니다.
1) ‘영혼의 평화’ -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은
몸만 편안하면 그것을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평화는 ‘영혼의 평화’입니다.
영혼의 평화는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이루어집니다.
죄 속에서는 영혼의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누구나 경험하는 일입니다.
2) ‘공동체의 평화’ -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은 남이야 어떤 고통을 겪든지
말든지 관심 없이 ‘나만 편안하면’ 그것을 평화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혼자서만 누릴 수는 없고, 공동체가 ‘함께’ 누려야 합니다.
(여기서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웃들과 자기 사이에 높은 담을 쌓아 놓고서 그 안에서 혼자 살면서,
혼자서만 평화를 누린다면?
그것은 그냥 감옥 생활입니다.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도 없이 성당 안에 숨어서 자신을 위한 복을 받기만을
바라는 기도만 한다면, 그것은 평화도 아니고, 신앙생활도 아닙니다.
사랑 없이는 평화도 없습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부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야고 5,1.4).”
하느님을 안 믿는 무신론자들이라고 해도 본성적으로 ‘심판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그 두려움 때문에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참된 평화는 참 사랑으로만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3) ‘구원의 기쁨과 행복’ - ‘예수님의 평화’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 행복’과 하나입니다.
(구원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상태가 곧 평화이고,
바로 그 평화를 누리는 모습이 곧 기쁨과 행복입니다.)
‘구원의 기쁨과 행복’은 예수님을 믿을 때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리는 ‘참된 평화’는 아직 미완성이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완전하게 완성된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페 2,14-17).”
<‘예수님의 참된 평화’를 누리려면 하느님과 화해해야 하고,
이웃과도 화해해야 합니다.
‘화해’ 라는 말을 ‘사랑’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완전한 단계에 도달할 때,
그때 우리는 완전하고 영원하고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평화’ 라는 것이 무슨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물건을 주고받는 것처럼 그렇게 평화를 주고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내 평화’입니다.
‘내 평화’는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참된 평화’입니다.
그래서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라는 말씀은, “내가 누리고 있는 평화를
너희도 누리기를 바란다.”이고, 좀 더 길게 표현하면, “너희는 나를 믿고,
믿는 대로 살면서, 내가 누리고 있는 참된 평화에 참여하여라.”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라는 말씀은,
“평화를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믿음으로’ 극복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은,
가난, 질병, 죽음에 대한 두려움, 먹고사는 일에 대한 걱정, 여러 가지 욕심들,
욕망과 집착들, 미움, 원한 등 참으로 많습니다.
(지금 인간 세상을 보면, 남의 평화를 짓밟는 자들이 많습니다.
남의 평화를 짓밟는 그자들 자신들은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남의 평화를 빼앗는 것은 그 자신의 평화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삶으로 실천하는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극복하려고 노력할 때,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4,28).”
이 말씀은, 부활 후의 현존을 약속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승천과 재림을 예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슬픈 이별’이 아닙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기 위해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일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고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0-5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세상살이와 신앙생활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예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의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담담함의 평화와 든든함의 평화
-김찬선신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제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평화의 반대는 불안과 불화이고
그래서 평화는 평안과 화평의 두 차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말 미사에서는 평화 대신 평안이라는 말을 쓰고
우리는 평화라고 하는데 그들은 화평이라는 말을 즐겨 씁니다.
아무튼, 평화에는 평안과 화평의 두 차원이 있습니다.
먼저 화평은 관계적 차원입니다.
관계가 좋지 않고 갈등 관계이거나 싸움이나 전쟁 상태일 때
우리는 화평을 청하기도 하고 그래서 화해가 이뤄졌을 때 평화롭다고 하는데
이처럼 평화의 중요한 한 축은 관계의 화해가 이뤄진 상태로서의 화평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평화는 평화의 다른 한 축인 평안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이 산란해지지도 겁내지도 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분명히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말씀하신다고 하십니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시는 겁니까?
이 얘기가 최후 만찬 때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니
당신이 돌아가실 것을 예견하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곧 당신이 돌아가시고
당신을 죽게 한 사람들이 제자들도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심란해하거나 겁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습니까?
이런 경우 최악을 각오하면 곧 죽기를 각오하면
그런 상황이 와도 담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이런 평화는 담담함의 평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최악을 각오하는 것은 최고의 가난이기에 그러기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최악을 각오하는 순간 모든 것이 선이 되는 건 사실이기에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각오하고 미리 대비하고 있다가 왔을 때 너 이제 왔냐 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그런 것이 아님이 틀림없습니다.
마음의 각오로 인한 평화가 아니라 당신이 주시는 평화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마음의 각오는 나 혼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이런 평화는 마음 수양을 통해 내가 이루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관계적이고 인격적인 평화이고
그것은 주님께서 갔다가 다시 오심을 믿을 때 생기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평화를 준다고 하신 다음 바로 이어서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런 평화는 든든함의 평화요 믿음의 평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무엇보다도 든든하고 무서울 것이 없을 터이니
주님의 오심을 믿고 심란해하지 말고 겁내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에 달렸습니다.
인간을 믿지 않고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주께서 함께 계시니 무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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