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15일 부활 제5주일

Margaret K 2022. 5. 14. 06:53

2022 5 15일 부활 제5주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1-33ㄱ.34-35)

  
 I give you a new commandment: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also should love one another.
This is how all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have love for one ano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자, 사도들은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친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들이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복음을 전하다 갇혔기에 도망쳐야 할 텐데 이들은 또 같은 곳에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들이 다시 잡힐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것이 참된 진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맛본 이들은 거기에서 얻는 행복 때문에 그 진리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진리를 증언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십니다(요한 18,37 참조).
오늘 복음에서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선포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어두운 동굴에 비치는 한 줄기 빛처럼 우리에게 당신만이 참행복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참행복으로 여기는 이들은 그 빛을 따라 어두운 동굴에서 나오게 됩니다. 분명 그분을 행복이라 믿지 않는 이들은 동굴에 머물 것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참행복이심을 믿지 않는 이들은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진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름이, 곧 복음을 선포함이 나의 유일한 행복이 될 때 오늘 독서의 사도들처럼 영원한 빛 속에 머물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절박한 사랑의 계명

-한민택신부-


신흥 종파에 빠졌다가 가톨릭교회로 돌아온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왜 이렇게 하느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없는가요?”

비록 그릇된 교리와 성경 공부에 현혹되어 올바른 신앙을 잃었던 그들이지만, 그들은 ‘남아 있는’ 이들에게 최소한 할 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느님을 향한 열정으로 뜨거웠습니다. 세상 종말이 곧 올 줄로 믿고 정신을 차려 깨어 있었으며, 매일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비록 믿고 기다린 종말의 날이 오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종말론을 주장하는 신흥 종파들이 일깨워주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리스도 신앙의 ‘종말론적’ 특성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곧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였으며, 당신과 함께 그 나라가 이미 세상에 와 있음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종말을 너무 먼 훗날로 밀어놓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사는 우리의 신앙과 삶이 열정적이지 못한지도 모릅니다. 다음의 묵시록 말씀이 우리에게도 해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오늘 제2독서의 묵시록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새 예루살렘이 도래하면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분께서 인간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며,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한 기다림은 신앙을, 그리고 사랑의 계명을 매우 절박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단순히 서로 사랑하라는 윤리적 가르침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희망에 찬 기다림이며, 지금 여기 존재하는 불의와 부조리, 폭력과 죽음, 상처와 절망에 대한 저항이며 울부짖음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액세서리와 같이 여기지 않는지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먼 훗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티켓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절박함’을 발견할 수 있는가요?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3-34)

예수님은 당신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죄와 죽음의 그늘에서, 불의와 부조리의 사슬에서, 슬픔과 절망의 심연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복음은 오늘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우리가 형제와 이웃의 삶에서 죽음과 슬픔, 울부짖음과 괴로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간절히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매일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모든 것을 새롭게 

-장재봉신부-


제 이메일에는 “무엇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하면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라는 꼬리말이 달려 있습니다. 저와 연락하시는 분들께서 무엇이나 어떤 일에서나 주님을 기억하여 복음을 살아가시길 바라는 청원을 담았지요. 복잡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 수없이 벌어지는 삶일지라도 모든 것, 모든 순간에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응답해 드릴 때, 아주 작고 소소한 일도 ‘거룩’한 주님의 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이신 그분과 함께하면 무엇이든 하늘의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당히 말씀드립니다. 사제로서 확신하며 권고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모두를 전혀 ‘새 것’으로 만들어주셨다는 것, 이미 새로운 삶의 모범을 살아갈 힘을 제공하셨다는 진리를 깊이 새겨 살아갑시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8-19)라는 주님의 약속을 얻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새로워지도록 합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은혜 안에서 참 생명을 기쁘게 살아가는 존재이니까요. 우리는 그날 “하느님 친히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 주며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바로 그 주인공이니까요.

오늘 1독서는 1차 전도 여행을 성공리에 마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순탄치 못했던 여정을 전하는 글임에도 오히려 기쁨과 감사로 그득한 것을 읽으면서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진짜로, 우리에게 기쁨만을 주고 계신다는 진리를 절절 깨닫게 되는데요. 그 험한 선교 여정을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맡기고 이겨냈다는 구절에 울컥했습니다. 무엇보다 ‘새 신자’를 맞아들이는 기쁨이 힘의 원천이었다는 고백에 선교를 위해서 애쓰시는 본당 교우님들의 모습모습이 눈에 선해서 저절로 성호경을 긋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에 걸음걸음을 맡기고, 낯선 사람들을 찾아 복음을 전하는 일이 때론 무모하게 여겨지기도 할 것이고, 심한 배척에 열정이 꺾이는 경우도 수없이 많을 테니까요. 어쩌면 오늘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라는 성경의 표현에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도 깊은 감회에 젖어들 것만 같은데요. 주님의 일을 하며 지내는 행복에 겨울 때, 정말로 간 크고 담대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거듭 배웁니다.

1차 전도 여행에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가 선교를 위해서 겪어야 했던 고생은 엄청났습니다. 더해서 2차 3차 여행에서는 더 큰 고통의 여정이 펼쳐졌습니다. 그들을 지탱 시켜준 힘은 틀림없이 내일을 계획하지 않고, 다만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했던 덕이었을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희망을 살아내는 것이 복음의 행복을 누리는 최고의 비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고난의 길은 가고 또 걸어야 할 우리네 삶의 길과 닮았습니다. 그래서 문득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께 전도 여행 중에 제일 혼돈스러울 만큼 곤란하고 당황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묻게 되더군요.

그리고 두 분께서는 입을 모아 리스트라에서 설교를 했을 적에 군중의 뜨거운 반응을 만났던 때라고 말할 것이라 어림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에게는 자칫 ‘교주’로 등극 될 위기가 닥쳤으니 말입니다. 하물며 ‘신’으로 추앙을 받게 될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으니 말입니다.
 

두초 디 부오닌세냐의 ‘그리스도의 사도들에게 작별 인사’.


따져보면 이런 상황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와 무관하지가 않은데요. 자칫,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거나 ‘엄지 척’하며 으뜸이라 추켜 줄 때, 누구나 고무되기 마련이니까요. 그야말로 하느님의 축복인 양 으스대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좀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일을 좀 더 폼나게 하려는 ‘나쁘지 않은’ 포부에 젖어 교만의 뾰루지를 키우게도 되니까요.

솔직히, 애쓰고 최선을 다해서 이룬 성과가 제대로 평가받는 것이 그른 일은 아닙니다. 이런 생각이 꼭 어긋나고 죄 된 소망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몹시 민감해야 합니다. 설사 우리가 맡은 일을 완전무결하게 ‘완수’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마음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바로 그 짧은 순간에 스민 생각이 삶을 뒤바꾸어 흔들어버릴 수가 있으니까요.

최선을 다한 후에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은 일면 당연한 결과임에도 때론 유혹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혼란을 초래하는 시험으로 작용하는 걸 보면, 참으로 ‘만사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딱 맞는다 싶군요. 만약에 그날,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가 우쭐해져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욕심에 빠졌더라면…… 결코 성인 바오로와 성인 바르나바는 탄생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세상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 없는 영광을 취하라고 속삭입니다. 어렵고 힘든 환란을 굳이 자초하는 이유를 묻고 슬프고 힘든 십자가를 피할 방법을 수없이 제시하기도 합니다. 오늘 이스카리옷 유다는 무엇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하냐고, 왜 굳이 십자가 근처에서 서성대냐고, 그 추한 방법을 피할 수 있다고, 더 나은 방법을 찾으라고 속살대는 사탄의 꼬드김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어쩌면 유다는 넓은 길을 마다하고 좁고 험한 길로 들어서는 예수님이 답답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굳이 굳이 고통을 자초하시려는 주님을 말릴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때를 답답해하며 하느님의 방법이 의아한 경우가 수 없으니,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유다가 주님께 등을 돌리게 된 가장 큰 요인이 스스로 하느님 자녀의 고귀함을 간과했던 탓이라 싶습니다. 자기가 지녔던 과거의 사고방식에 붙잡혀서 새로움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결과라 싶어 안타깝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이스카리옷 유다가 외면했던 바로 그 십자가를 온 힘을 다해서 짊어졌던 사람들이 천국에 있다고 밝혀줍니다. 그곳 천국에는 희생의 땀으로 온몸이 젖고 얼굴에 눈물이 흥건한 사람들로 가득하다고 알려줍니다.

새 예루살렘, 하느님께서 마련해두신 그 찬란한 도성에서 하느님께서 손수 위로하시고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은 모두가 죽음으로, 슬픔으로, 괴로움으로 피와 땀과 눈물에 젖어 울부짖었던 사람들이라고 밝힙니다. 이 얼마나 충분한 위로이며 든든한 희망의 말씀인지요? 얼마나 벅차고 감격스러운 선포인지요?

세상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던 그분께서는 세상을 창조하는 일보다 훨씬 더 힘들게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끝없이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정의 앞에 의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엄청난 은혜에 보답하고자 서로 사랑하고 더 사랑하려 애쓰며 끝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하늘의 사람이 부활인입니다.

성모성월, 어머니 성모님께서 우리 “마음을 누르는 죄의 사슬”을 신속히 벗어나도록 순간마다 붙들어 주시길 청하며 오직 기쁘고 행복한 새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하나의 길에서

- 허규신부-


구약성경의 하느님 백성들이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체험 한 사건은 이집트 탈출과 광야생활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은 하느님을 ‘함께 있는 분’으로, 그들을 해방시키 고 이끄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40년간의 광야생활 동안 수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시나이산에서 맺은 계약은 하느님의 올바른 백성이 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계약의 중심 은 하느님께서 직접 쓰셔서 모세를 통해 백성에게 전해 준 십계명입니다. 열 개의 계명은 지켜야 할 의무이기도 하지 만,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자로 전해주 었다는 의미도 갖습니다. 십계명 안에 담긴 것은 백성을 위 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렇기에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 은 하느님의 길을 걷는 가장 바른 방법으로 여겨졌고 어렵 지 않게 이런 내용을 구약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크게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세 계 명은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필요한 것을, 그리고 나머지는 백성 사이에서 필요한 것을 규정합니다. 하느님과 인간 상 호 간의 계명인 셈입니다. 이것을 지키는 것이 벅찼던 걸까 요? 예수님은 이 계명을 요약해서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수난이 머지 않은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큰 계명 을 주십니다.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흔히 황금률이라고도 부 르는 이 계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유 일한 계명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계명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 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얼핏 보면 열 개에서 두 개로, 두 개 의 계명에서 하나로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예수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 어 함께한 사랑,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주고 그 들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도록 이끌어 준 사랑, 고통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준 사랑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 아 보입니다. 더욱이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제자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라는 말 역시 개인의 삶을 생각해 보면 너무 먼 얘기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결국 광야의 십계명에서 예수님의 계명에 이르는 길은 하나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 실천 하는 길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을 받아들여 그대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시대에 따라 표현은 다를 수 있지만, 우리의 실천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 님의 사랑은 시대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드 릴 수 있는 가장 큰 광일 것입니다. 

 

신부님, 사랑해 보신 적이 있나요?

이종건 신부-


  “신부님, 사랑해 보신 적 있나요?”하고 묻는 신자가 가끔 있습니다. 속으로 ‘사 람 우습게 보네, 세상에 사랑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담.’하고는 “많이 해 봤지요. 문제는 어떤 사랑인지가 중요하지요?”  사제로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없이 사랑을 얘기하고, 가르쳐 왔지만 정작 사 랑에 대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참 힘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냥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가르 쳐 주십니다. “내가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사람은 누구나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자들에게 몸소 보여준 예수님식의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문득 제가 했던 사랑을 돌이켜 봅니다. 나의 방식대로 했던 사랑들, 하고 싶을 때만 하는 사랑들, 말로만 베풀었던 사랑들. 하지만 부끄러운 사실은 베푼 사랑보다 받은 사랑이 너무나 많았다는 사실 입니다. 받기만 하고, 내 방식대로 사랑한 저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해 보라고 SOS어린이마을로 보내 셨나 봅니다. 아니, 당신의 사랑과 참 닮아있는 마을 어머니들의 사랑을 가까이에서 배우라고 보내셨 나 봅니다. 

  젊은 나이에 결혼도 하지 않고, 무작정 아이들과 살고 싶어 이곳에 오신 마을 어머니들. 많게는 일 곱이나 되는 아이들을 애지중지 키우시는 모습들, 아이들을 성장시켜 놓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육아전쟁과 학부모로, 은퇴하는 순간까지 한결같이 베풀기만 하는 사랑을 배우라고 …….

  오늘도 사랑에 대해 한 수 배우고 있습니다.  주님! 언제쯤이면 당신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엄기영신부-


찬미 예수님!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 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과 만물을 새롭게 하 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사랑의 새 계명을 주 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새 계명을 묵상하며 언젠가 ‘좋아한다’는 말과 ‘사랑한다’ 는 말의 차이점에 대해서 들은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좋아한다는 말은 흔히 상대방의 장점 때문에 그를 좋아한다는 의 미입니다. 내 말을 잘 들어줘서, 성실해서, 얼굴이 잘생겨서, 유머 감각이 좋아서, 가진 게 많아서 등등. 그러나 그 장점보다 단점이 눈에 많이 보이는 순간 좋 아하는 감정은 작아지고 사라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함께 가까이에서 살면 살수록 장점보다 는 단점이 눈에 잘 보이는 것이 우리들 삶의 모습입니다. 반면, 사랑한다는 말에는 그 앞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여덟 글자가 덧붙여진다고 합 니다. 성격이 원만하지 않지만, 가진 것이 없지만, 늘 무뚝뚝하지만, 배운 것이 없지만, 등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부족함을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참사랑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사 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당신에게 잘하는 사람만, 죄없는 사람만 사랑하신다면 과연 우리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죄를 짓고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 게 하는 우리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죄 없으신 분이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죄 많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 가에 못 박히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그렇게 사랑할 때,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내 뜻대로, 내 고집대로의 좋아 함이 아니라, 상대방의 단점까지도 감싸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참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도 부활 신앙을 살아가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네가 원하는 것은?

-임성섭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 곧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의 문화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 변형됩니다. 왜냐하면 시대에 따라 사람들이 가진 생각과 삶의 방식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에 대한 기준 역시 변화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사랑이 변화하고 사랑의 기준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랑을 수용하는 우리의 이해와 이해방식, 의미화의 과정이 바뀌는 것입니다.

다만, 사랑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은 의미화의 과정에서 다른 모양으로 변할 뿐입니다. 

우리 인류는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사랑하고픈 사람만 사랑하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사랑하려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바로, 자기 방식대로 하는 사랑,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 방식대로 내 기준대로 하는 사랑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자 하는 오류일 수 있습니다.

상대를 완전히 소유하려고 하는 순간, 이미 진정한 사랑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사랑하고 있다’라는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은 우리를 위한 제물로 자신을 완전히 내놓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신 모습을 자세히 보면, 상대방이 자기다움을 지니며 살도록 배려하는 것이 참 사랑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내 주위에 있는 ‘너’는,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것이 사랑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만이 더불어 살면서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구 간에, 형제간에도, 부부간에도, 상대방이 완전히 나와 같아지기를, 나에게 맞춰주기를 요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나’가 아닌, ‘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것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서공석신부


요한복음서가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 복음서의 저자는 이미 기록된 다른 복음서들 안에 있는 주제(主題)들을 정리하여 명상(瞑想)하는 식으로 엮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명상합니다.  그 시대 그리스도신앙 공동체들은 예수님의 최후만찬에서 비롯된 성찬을 이미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요한복음서저자는 최후만찬 이야기를 새삼 하기 보다는 신앙공동체들이 이미 거행하고 있는 성찬이 지닌 의미를 명상하는 식으로 기록합니다.  그래서 기록된 것이 최후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은 이야기였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종의 몫입니다.  이 복음서는 종이 하는 일을 몸소 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주면서 성찬에 참여하는 신앙인도 종과 같이 섬김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알립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제자들의 발을 씻은 후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요한복음서가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었다고 말할 때는 그분이 하신 일이 하느님을 보여주었다는 뜻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그분이 영광스럽게 되신 대표적 사건으로 말합니다.  죽음은 그분이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결과였고하느님이 내어주고 쏟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제자들의 발을 씻은 예수님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제 하느님이 어떤 섬김이신지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당국이 하느님을 생각하던 것과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높고 훌륭한 것을 좋아하는 인간 세상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느님도 지극히 높으시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주셨다는 율법(律法)은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하고,  제물(祭物)도 하느님에게 반드시 바쳐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은 하느님을 이 세상의 권력자에 준해서 상상한 결과였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최대의 혜택을 받아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그렇게 가르쳤고,  그런 가르침에 길들여진 마음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유대교 당국은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단정(斷定)하여 십자가의 처형(處刑)으로 제거하고 말았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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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글을 쓰기 위해 호텔에 들어가곤 합니다. 밖에 나오지 않고 호텔 안에만 있으면서 온전히 글 쓰는 데에만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식사 때가 되어 컵라면이라도 하나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호텔 1층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컵라면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습니다. 너무 많은 컵라면의 종류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를 도저히 모르겠더군요. 전에 맛있게 먹었던 이 라면을 먹자니,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맛의 컵라면에도 관심이 갑니다. 또한 자극적인 맛을 내는 컵라면 역시 저의 선택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 개의 컵라면을 한꺼번에 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컵라면 하나 구입하는 데에도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는 우리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 안에서 끊임없는 선택의 갈등이 생깁니다. 하긴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선택하기가 힘들어서 ‘짬짜면’이라는 새로운 메뉴도 등장하지 않습니까? 

나의 선택이 모든 것을 다 충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는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하나의 선택에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후회할 이유를 만들지 않는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세속적인 욕심을 내세워서 모든 것을 다 선택하려고만 합니다. 이 과정 안에서 사랑을 선택하지 못하고 나의 욕심과 이기심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이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선택하고 모든 것을 가져야 행복할 것 같지만, 단 하나 사랑만으로도 우리는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하며 사는 것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삶이며, 행복의 길로 들어서는 지름길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제2독서의 요한 사도가 말하고 있듯이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스마트폰 때문에 사람들의 기억력이 감소되고 있다고 합니다. 소위 ‘디지털 치매’를 앓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고노 임상의학연구소에서는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가 내 번호밖에 없다, 전날 먹었던 음식이 떠오르지 않는다, 신용카드 서명할 때 외에는 거의 손으로 글씨를 쓰지 않는다.’라면 치매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자꾸 뇌를 연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 역시 계속해서 실천하고 기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 자체를 잊어버립니다. 사랑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랑 없이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랑 앞에는 많은 말이 생략되어 있다. 무조건, 그냥, 무슨 일이 있어도(이창현). 


 

어머니의 후회

어느 어머니의 울음이 기억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이 자매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이 자매님께서는 고등학생이 된 아들에게 공부가 더 중요하니까 성당에 가지 말고 공부에 집중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대학에 들어가서 열심히 하라고 했지요. 이제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뒤 아들은 성당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거부하면서 잘못된 길로만 가더라는 것입니다. 

성당에서 복사까지 했던 착한 아들이었는데 이제 부모까지 거부하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에만 모든 것을 쏟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는 사기사건에 연류 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앙생활을 막았던 자기 탓이라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을 멀리하고 세상과 가까워질수록 후회할 일만 만들어집니다.                   
 

감사해야 사랑이 가능한 이유 

-전삼용신부-


이영지 씨는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습니다. 


“영지야, 네 남편 오늘 늘씬한 여자와 호텔서 나오더라. 보통 사이가 아닌 거 같았어. 여자가 스스럼없이 팔짱까지 끼던걸.”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정말 자신의 남편이 맞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친구는 확실하다고 합니다.
‘나쁜 놈.’

그때 학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외칩니다.
“엄마, 배고파. 밥 줘.”
영지 씨는 소리를 버럭 지릅니다.

“그놈의 밥. 한 번쯤 굶으면 병 나냐? 네가 차려 먹어!” 귀가한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기조차 역겹습니다. 그래서 거실로 나와서 잠을 청해보지만 상상이 상상을 낳아 밤을 하얗게 지새웁니다.
‘뻔뻔스러운 이중인격자! 더러운 철면피!’
그동안 속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오장이 뒤틀립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옵니다.
“언니, 형부가 어제 저녁 사줬어. 취직 축하한다고. 멋진 호텔에서.”
“멋진 ... 호텔?”

갑자기 지금까지 남편을 의심했던 것이 미안해집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착실한 남편을 의심하다니.’
영지 씨는 번개처럼 일어나 장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갑니다. 영문도 모른 채 아침도 거르고 나간 남편이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영지 씨의 발걸음은 매우 가볍습니다. ㅍ
[‘왓칭; 나를 바꿔놓는 요술 일곱 가지, 부정적 생각 버리기’, 김상운, 정신세계사] 

사랑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지옥으로 이끄는 나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생각’입니다. 이 생각이란 것이 사랑에 어떤 장애가 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평생 온전한 사랑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영지 씨는 남편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먼저 배웠어야 합니다. 

사랑은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항상 삐걱거려야합니다. 인간 안에는 아기(육체적 감정)와 성인(이성)과 하느님(마음)이 공존합니다.
아기는 생존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인간의 뇌 해마 끝 쪽에 위치한 ‘편도체(아미그달라)’가 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아기의 유일한 목적은 생존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존과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적으로 여깁니다. 

엄마를 보면 안정감을 찾지만 엄마가 아닌 다른 존재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불안해지거나 두렵거나 화가 납니다. 아미그달라는 외적 요인을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감정을 옷입혀 기억저장소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동물의 가장 오래되고 원초적인 뇌의 부위입니다. 만약 여우가 호랑이를 보고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큰일 날 것입니다. 인간은 5세까지는 전적으로 이 아미그달라의 지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5세가 넘어서며 이성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이 아미그달라가 자아내는 감정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생존만을 위한다면 부모나 형제 외에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사회생활을 위해여 언어의 발달과 함께 ‘이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이 아미그달라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감정들을 통제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 큰일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인 제이슨 군이 물리교사를 부엌칼로 찌른 것입니다. 모든 과목 학점이 A인 하버드 의대 진학을 꿈꾸는 수재였습니다. 그런데 물리시험에서만 B를 맞은 것입니다. 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칼을 가방에 숨기고 갔습니다. 물리 교사와 둘이 있을 때 점수를 올려 달라 청했습니다. 교사가 이를 거부했고 제이슨은 그를 칼로 찌른 것입니다. 

판사는 제이슨 군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정신과 의사 네 명이 법정에서 범행 당시 제이슨 군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진술했기 때문입니다. 제이슨 군은 다른 학교로 전학했고 다른 학교에서 전교 1등으로 졸업했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상황이 아미그달라의 감정에 지배당한 상황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자신의 생존이라고 하는 목표에 빨간 불이 들어오게 하는 사람은 제거의 대상이 됩니다. 이것이 동물적 본성이고 이것을 이성이 통제하지 못하면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현대인들이 많이 겪고 있는 ‘분노조절장애’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은 아미그달라가 생성해내는 이분법적인 감정은 90초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계속 솟구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생존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지속하면 심장과 혈관이 버티어내지 못합니다.
부정적 감정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1분 30초면 사라집니다. 그런데도 분노가 몇 시간,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속되는 이유는 그 때 일었던 감정을 계속 생각함으로써 꺼져가는 불씨에 기름을 붓기 때문입니다. 별거 아닌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살인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심장입니다. 마음인 것입니다. 서먹서먹했던 사람이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면 심장박동이 빨라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미그달라에서 나오는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성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옆에 있는 사람 때문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였다고 믿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갓 만난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성을 믿으면 착각도 사랑이 되어버립니다. 이성은 매우 단순해서 그저 일부러 맛있는 음식을 상상하기만 해도 입에서 침이 돌도록 만듭니다. 현실과 상상의 세계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이성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이성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저절로 움직이지 않고 사랑에 감동되어야 움직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감사’인 것입니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 때문에 이성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데도 치매에 걸린 부모와 다정다감하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가슴을 따듯하게 하고 뇌를 차갑게 합니다. 그러면 아미그달라의 생존본능에서 나오는 부정적 감정들이 빠르게 사라집니다. 이 과정이 있어야 타인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감사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당신 이성의 작용을 뛰어넘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46; 마르 15,34)
예수님은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하십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성을 넘습니다. 바로 감사의 마음으로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미그달라에서 나오는 두려움의 감정과 ‘내가 왜 그래야 해?’라는 이성이 마음에 의해 통제됩니다. 그래야 사랑이 가능합니다. 사랑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 부모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분들로부터 마음을 안정시킬 사랑을 받아야만 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느님께 감사하여 그분께 영광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에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프랑스의 앙굴렘 교구에서 주교님과 신자들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앙굴렘은 한국의 103위 순교 성인인 성 오매트르 신부님의 고향입니다성 오매트르 신부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수원교구 신봉동성당과 앙굴렘의 성 오매트르 성당은 자매결연의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앙굴렘 교구 신자들은 수원교구 신봉동성당의 신축 입당 미사를 함께 봉헌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길이었습니다오매트르 신부님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셨습니다프랑스에서의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박해가 진행 중인 한국으로 온 것은 숭고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남쪽에 있는 마르세이유에는 바다가 내려 보이는 성당이 있습니다이 성당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한국으로 가기 전에 파견 미사를 하였습니다파견 미사를 하면서 가족들은 모두 울었습니다박해가 심한 한국으로 가면 다시는 가족들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가족들도사제들도 알았기 때문입니다박해와 죽음이 기다리는 한국으로 갈 수 있었던 것도 숭고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오매트르 신부님도 마르세이유에 있는 성당에서 파견 미사를 하였고한국으로 떠났을 것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하고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지만우리의 현실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많은 갈등과 아픔이 생기곤 합니다언젠가 창밖에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볼 때가 있었습니다바람이 불고그 부는 바람에 나뭇잎들은 하염없이 흔들렸고그날은 나뭇잎이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많은 일을 하게 될 때가 있었습니다직책 때문에욕심 때문에눈치를 보기 위해서남의 눈이 두려워서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나는 저 나뭇잎과 무엇이 다른가!

 

바람만 불면 흔들려야 하는 저 나뭇잎은 그러나 한 번도 불평하거나불만을 표시하지 않습니다그저 부는 바람대로 흔들리고 있을 뿐입니다그 바람이 결국은 나뭇잎에 생기를 주고나뭇잎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러나 나는 나의 삶에 있어서 고난의 바람절망의 바람눈치의 바람욕심의 바람분노의 바람이 불어올 때 얼마나 많이 원망했는가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내색을 하지 않는 나뭇잎그 바람 때문에 미처 피워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다 해도 그것을 서러워하지 않는 저 나뭇잎을 보고 배우려 합니다말 없는 나뭇잎이 제게 새로운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새로운 길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입니다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생각해봅니다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적인 사랑입니다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것은 악마적인 사랑입니다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용서는 왜 해야 합니까그것은 하느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이른 번이라도 용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것은 나를 살리기 때문입니다분노하는 사람은 분노 스트레스가 나와서 혈관이 수축하고 피의 순환을 방해하기 때문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보다심장 질환에 걸린 확률이 3배나 높다고 합니다실제로 화병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예수님의 성탄 다음날 축일은 스테파노 축일입니다스테파노는 바로 예수님처럼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고그들을 용서했던 성인입니다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 축일 다음에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을 정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제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사랑 때문에 비록 박해와 고통이 따를 수도 있지만그 사랑을 선택했습니다그리고 후회 없는 사랑을 합니다그 사랑은 비록 많은 수고와 땀이 필요했지만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었고 그분들은 지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만능열쇠입니다잠겨있는 모든 것들을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랑은 종합비타민입니다고통과 번민원망과 분노갈등과 상처를 치유합니다사랑은 최상의 거름입니다사랑을 뿌려주면 죽은 뿌리에서도 싹이 나옵니다사랑을 뿌리면 10,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으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것입니다그 사랑은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다시는 죽음이 없고다시는 슬픔도울부짖음도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평생 공부

-서로 사랑하시오- 

 -이수철신부-

 

새벽부터 하늘 아버지로부터 내린 은총의 단비가 가뭄에 목타던 어머니 대지를, 초목을 촉촉이 적셨습니다. 향긋한 흙내음, 풀내음, 꽃내음이 그대로 성모님의 향기, 파스카 주님의 향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보다 대자대비하신, 공평무사하신 하느님 사랑을 잘 드러내는 것은 없습니다. 저절로 생각나는 ‘봄비’라는 자작시입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 있다면/이름은/무조건 봄비나 단비로 하겠다.”-

 

어제는 좀 분주하고 힘든 하루였지만 참 화창한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신록과 꽃과 열매의 계절인 5월 성모성월, 저절로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성가도 흘러 나왔습니다. 온통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었습니다. 참 많은 분들이 하느님 사랑을 찾아, 하느님 평화를 찾아 수도원에 머물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자 동시에 ‘자연의 자녀들’인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행복한 얼굴 표정들이었습니다. 흰꽃들 가득했던 때가 얼마 전 같았는데 벌써 물앵두는 빨갛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아주 예전에 빨갛게 익어가고 있는 물앵두 열매를 보며 써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열매들은 모두 하느님 사랑의 열매를 상징합니다.

 

-“사랑합니다”/마침내/빨간 열매로 사랑을 고백하는/앵두나무

초록빛 나뭇잎들/믿음 사이로/수줍게 살며시/얼굴 내밀고

사랑을/고백하는/빨간 앵두 열매들/부끄러워/빨갛게 물들었네-1996.5.

 

얼마전 단체피정을 다녀갔던 연로한 분들중, 낯모르는 고령의 87세 요셉 형제가 또 저를 찾았고 전통공예 부채를 선물했습니다. 한눈에 펼쳐진 한문으로 씌어진 1테살5,16-18절, “늘 기뻐하라. 늘 기도하라. 늘 감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고백성사 보속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의 명약名藥입니다. 사랑의 열매이듯 사랑의 선물입니다. 저에겐 이 또한 하느님 사랑의 선물입니다.

 

또 하나는 만남의 선물입니다. 며칠 전 스승의 날을 기억한 41년전 초등학교 4학년 11세 때 제자들이 52세 장년이 되어 스승인 저를 찾았던 것입니다. 잠시 외식후 집무실에서 대화도 나눴고 수도원 경내를 거닐며 사진도 찍었습니다. 저에겐 이 또한 하느님 사랑의 선물, 만남의 선물입니다. 떠난후 주고 받은 문자 메시지입니다.

 

-“선생님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아 죄송했습니다만 저희는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인자하신 선생님 만나 뵈어 넘 행복합니다. 우리 생각만하고 사진만 찍어서 힘드셨을텐데 죄송해요. 시집 읽으며 선생님 생각할게요. 감사합니다.”-

에 이은 저의 답신 메시지입니다.

 

“아, 사진들 모두가 아름답다. 나도 행복했다. 41년전 신우초등학교 시절 너희들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니! 그때는 너희들이 내 사랑 전부였고, 지금은 하느님이 내 사랑 전부란다! 그때는 선생님으로 행복했고 지금은 수사님으로 행복하다!”

 

결국은 자랑이 되고 말았는데, 하느님 사랑의 자랑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 특기가 하느님 자랑입니다. 이 강론도 결국은 좋으신 하느님 사랑의 자랑입니다. 아주 예전 초등학교 동창이 저를 찾았고 한시간 이상 자랑을 풀어 놓고 갔습니다. 

 

저는 할말이 없어 시종일관 듣기만 했습니다. 결국은 자식자랑, 돈자랑으로 요약되었고 저는 정말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간 떠오른 것이 하느님 자랑이었고 하느님 사랑의 자랑은 제 주특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유언이자 우리 모두에 대해 주님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유일한 말씀입니다. 존칭으로 바꿔 인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말로 하셨다면 분명 반말이 아닌 존칭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 여러분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여러분이 내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언디서나 현재성을 띕니다. 바로 오늘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에게 주님 친히 하시는 사랑의 명령입니다. 신구약 성서를 요약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유일한 단 하나의 소원이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 말마디가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입니다. 분명한 사랑의 잣대가, 기준이 제시된 것입니다. 제 좋을 대로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집착없는 초연한 사랑, 생명을 주고 자유롭게 하는 주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신구약성서가 바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방식에 대한 사랑의 교과서입니다. 바로 이 사랑을 배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평생학인이 되어 평생 하느님 사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참으로 갚을 길 없는 무한한 하느님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을 배워 실천하는 것입니다. 

 

무지에 눈이 가려져 몰라서 그렇지 눈만 열리면,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하느님 사랑에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 하느님 사랑을 깨달아 가는 ‘깨달음의 여정’이라 인생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유일한 평생 치유제도 이런 사랑뿐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깨달아 알아 실천해가면서 무지의 치유로 저절로 영육의 건강도 회복됩니다. 날로 하느님을 닮아 지혜롭고 자비로운 사람,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평생공부가 하느님 사랑의 공부입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우리는 영원히 사랑공부에 초보자일 뿐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때가 될 때까지 끝없이 기다리시는 주님의 인내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목자이시고 의사이시고 인도자이시고 중재자이시고 상담자이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표현됩니다. 끊임없이 섬기시고, 돌보시고, 떠받쳐 주시고, 나눠주시고,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끊임없이 믿음, 희망, 사랑을, 기쁨, 평화를 선물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사랑에 감격할 때 저절로 흘러 나오는 오늘 화답송 후렴 하느님 찬미입니다.

 

-“내 하느님 임금님 기리오리다. 영원토록 당신 이름 기리오리다.”-

 

그러니 바로 이런 하느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정말 평생 공부가 이런 사랑 공부입니다. 아무리 세상 공부 많이했어도 하느님 사랑 공부 못하면 헛공부이고 무지의 어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 공부를 위해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수행을 권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해야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아 실천할 수 있고 주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사랑을 깨달아 알 때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하여 우리가 하느님 사랑에 감사, 감동, 감격하여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미사전례와 시편전례기도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가 우리 사랑의 눈을 활짝 열어줘 세상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가득 찬 세상임을 깨닫게 합니다. 다음 행복기도문 그대로입니다.

 

-“주님/눈이 열리니/온통 당신 사랑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사랑의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에 항구할 때 주어질 때 황홀한 비전과 꿈이 바로 사랑의 사도 요한이 보여주는 묵시록의 천상적 삶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미리 맛보는 천상의 행복입니다. 이런 천상교회에 대한 꿈과 비전이, 희망이  샘솟는 사랑의 원천이 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 실천을 통해 앞당겨 실현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천상 낙원입니다. 

 

묵시록의 주님 말씀은 바로 이 거룩한 천상 미사전례 사랑의 축제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언젠가 그날의 하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오늘 여기서부터 실현되어야 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 나라입니다. 다음 말씀은 얼마나 고무적이고 위로와 치유가 되며 격려가 되는지요! 우리의 영원한 하늘 나라의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입니다. 그대로 천상 미사 전례를 통해 미리 맛보는 현실입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바로 이 사랑의 미사은총이 끊임없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치유와 위로의 구원을 주십니다. 사랑의 관상에서 샘솟는 사랑의 활동입니다. 사랑의 관상은 활력의 샘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을 체험해 갈수록 진짜 주님의 전사가, 주님의 형제, 주님의 학생이 됩니다. 

 

바로 그 빛나는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모범이, 백절불굴의 주님 전사의, 선교사의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선교를 마치고 안티오키아 교회에 돌아와 활약상을 보고하는 두 사도입니다. 교회에 철저히 뿌리 내린 사랑의 선교활동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대목이 특히 두 사도의 사랑의 역동성을 잘 보여 줍니다. 하느님 사랑에 목숨을 내 놓은 두 사도의 선교여정이 참 감동적입니다. 그대로 주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에 힘을 붇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하고 말하였다.-

 

평생공부가, 죽어야 끝나는 평생공부가 사랑 공부입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평생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죽어야 졸업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우리에 대한 유일한 소망은 단 하나, 주님의 사랑을 평생 부단히 공부하고 배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사랑 실천의 수행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상대방이 더욱 빛나고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랑!

-양승국신부- 

 

존경하는 소설가 김훈 선생님께서 여러 차례 결혼식 주례사를 서셨는데, 그나마 덜 비판 받은, 어느 정도 성공한 주례사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셨는데, 참으로 공감가는 내용이었습니다.

  

“결혼이란 오래 같이 살아서 생애를 이루는 것인데, 힘들어도 꾸역꾸역 살아내려면 사랑보다도 연민이 더 소중한 동력이 됩니다. 불같은 사랑, 마그마 같은 열정은 오래 못갑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대개 이기심이 섞이게 마련이고 뜨거운 열정은 그 안에 지겨움이 들어 있어서 쉽게 물립니다.

 

연민은 서로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연민에는 이기심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식은 자리를 연민으로 메우면, 긴 앞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래 연애하다가 결혼한 부부가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연애를 오래했으면 서로 성격을 잘 알 터인데,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는 말은, 이른바 사랑이 사그라진 자리에 연민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거리이고 연민은 장거리입니다. 빚쟁이처럼 사랑을 내놓으라고 닦달하지 말고 서로를 가엾이 여기면서 살아가십시오.”

  

가끔씩 우리는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제한적 사랑, 유한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지속적인 정화와 쇄신과정을 통해 신적 사랑으로 충분히 승화될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사랑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 한 전문가 집단의 연구에 따르면, 사랑의 유효기간은 대체로 약 30개월 정도랍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슴설레는 순간, 불같은 순간 30개월이 지나게 되는 바로 그 시점은, 사랑의 유효기간을 연장시켜나가기 위한 불굴을 노력을 시작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순교자의 후손 답게 순교 영성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을 향한 순교자적 인내와, 목숨 건 기도와, 불굴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유효기간을 연장시켜나가는 데 아주 좋은 조건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시들해갈 무렵, 다른 사람들은 그 고통, 그 결핍을 채우지 못해 방황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좋습니까? 인간에 대해서 실망을 느낄 때, 염증을 느끼고 좌절을 느낄 때, 찾아갈 때 마다 반겨주시는, 불멸의 연인, 영원한 연인이신 우리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 주님 사랑 안에 위로를 받고, 다시 힘을 내서 사랑의 유효기간을 더 연장시켜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영성생활이요 기도생활인 것입니다.

  

놀랍게도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 사이에서 주고받는 사랑 안에도 불사불멸의 사랑, 절대적인 하느님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한하고 나약하고 사멸하는 흙부스러기 같은 피조물인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인간끼리 주고받는 작은 사랑을 통해 무한한 신적 사랑에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참으로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까?

  

관건은 사랑에 대한 충실성, 사랑에 대한 지속성, 사랑에 대한 신의요 배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그릇 안에 있는 담겨 있는 순수하고 밝은 것,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들을 지속적으로 내어놓는 행위야말로 참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더욱 빛나고 품위 있는 삶, 완성되어 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참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그분은 시종일관 우리에 대해 낙담하거나 염증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태생적으로 지닌 결핍이나 나약함, 한계와 죄까지도 당신 뜨거운 사랑으로 정화시켜주십니다.

  

어제의 배신, 어제의 죄, 어제의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새로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새롭게 우리와의 관계를 설정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신적 사랑입니다. 갚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어제의 나를 잊어버리시며 새롭게 시작하자고 늘 초대하십니다. 어제 하루 우리가 아무리 어둡게 살았어도 늘 밝고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새로운 계명

 -조욱현신부-


보아라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즉 그리스도께서 이끄시어 완성시키시는 그 새로움은 모든 경계를 초월하여궁극적인 해방을 기다리며 신음하는(로마 8,19 참조온 세상을 포용하고 있다.

 

2독서묵시 21,1-5: “보아라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2독서는 악의 완전한 패배를 묘사하고 있다. “나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1). 즉 지금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맞이하는 것이며사탄의 생활의 근거지이고 악의 상징인 바다(욥기 7,12; 26,12; 40,25)는 새로운 예루살렘의 승리 앞에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여기서의 새로움은 그러기에 사물의 새로움이 아니라 인간들의 새로움이다.

 

1독서는 이 새로움을 천상 예루살렘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2). 이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구원의 사랑을 영원히 거행하기 위해 세상 종말에 어린양의 주위에 모이게 될 구원받은 이들의 공동체를 암시한다.

 

이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온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예루살렘의 시민이 될 수 없다이 때문에 천상 예루살렘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2)라는 표상으로 제시되고 있다이 때문에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선택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했던 혼인의 비유의 주제가 나타나고 그 예언적 사상이 실현되고 있다이 혼인관계는 죽음 앞에서조차 변치 않는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심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당신의 동반자로 포용하시는 혼인애를 들어 높여주신다그러기에 나머지 대목에 나타나는 기쁨의 의미도 알 수 있다. “그 때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3-4).

 

복음요한 13,31-33a.34-35: 새 계명을 주겠다

이 혼인의 계약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랑은 양쪽에서 흘러나와 나누어져야 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32). 예수께서는 성부께서 당신을 기꺼이 받아주실 것을 의심치 않으신다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고 하셨다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이의 무한한 사랑의 관계를 드러낸다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의 현존의 징표를 일치를 통해서 반향 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어 당신의 현존을 확장시키도록 하신다다른 사람들은 이제 제자들의 완전히 새로워진’ 사랑을 통해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얘들아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서로 사랑하여라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너희가 서로 사랑하면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3-35). 예수께서는 이 새 계명을 계약으로서 제자들에게 남기시려 한다예수님의 이 계약도 무상의 선물이다. “새 계명을 주겠다.”(34)의 주다라는 동사는 보통 선물을 뜻한다.

 

그러나 어떻게 계명이 선물이 될 수 있는가그 계명이 어떤 의무를 부과하기보다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차원을 발견케 하고 또한 형제적 사랑을 나누게끔 되어있는 인간적이고 그리스도인적인 내적 신비를 깊이 알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은 선물이 될 수 있다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강압적으로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우리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길을 밝혀주시는 분이시다우리는 이제 단지 하느님의 뜻만을 알아보는 일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형제적 사랑을 새 계명이라 하는가율법에서도 이웃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레위 19,18; 마태 22,39)는 계명을 원수들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시면서(마태 5,43-48) 당신의 계명으로 만드신다그러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34)고 이웃 사랑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바로 당신이 지금 모든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수난의 길에 계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옹졸한 마음이 아니라하느님의 무한히 넓은 마음을 그 사랑의 척도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형제들에게 발을 씻어달라고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그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을 의미한다(요한 13,1-20 참조). 그러기에 우리는 새 계명이 법적인 계명의 의미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2독서와 복음에서 내용이 새로운이라는 형용사에서 수렴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계명’ 등등그러나 이 새로움은 이 세상 마지막에 가서 그 빛을 발하게 되겠지만 이미 와 있는 것이다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면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즉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는 사랑으로그 사랑의 새로운 힘으로 교회와 사회를 활성화시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셨던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분을 닮아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그 안에 세상을 포용하는 우리의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

-한상우신부-

예수님과의
사랑에서 
모든 사랑은
시작됩니다.

모든 사랑에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결과가 아닌
사랑하려는 우리의
모든 여정입니다.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실패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또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전교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아있는 영광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사랑의 주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삶이란
사랑할 때 완성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오상선신부-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한달이 훌쩍 지나 벌써 부활 제5주일을 맞이했네요. 오늘 독서와 복음에 반복해서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새로움"(new)입니다. 새로운 노래(입당송), 새로운 교회 공동체 구성(제1독서 사도행전), 새 하늘과 새 땅(제2독서 요한묵시록), 새 계명(요한복음)...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셨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실천으로 그리스도를 입은 '새' 인간이 되었음을 증거하면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기다리는 것이 성령강림대축일을 향해 가는 부활 제5주일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셨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요한 13,31)

인간에게 영광이라면 흔히 출세, 부귀영화, 입신양명 등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이미 다 가지고 누리고 계시니,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신"의 영광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켜 "영광"을 이야기하십니다. 인간적 고정관념으로는 어불성설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이렇게 접근하면 어떨까 싶네요. 생명의 주인, 시간의 주인으로서 영원한 생명, 불사불멸을 누리는 "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아니 신이 굳이 접근할 필요가 없었던 "고통과 굴욕과 죽음"이라는 영역에까지 들어가신 예수님은, 빛이신 하느님 존재 뒷편의 그늘, 어둠의 절정에까지 침투하심으로써 신의 영역을 확장하신 것이고, 인간의 마지막 원수요 한계인 죽음을 몸소 겪고 부활을 통해 승리하심으로써 진정한 완전성을 쟁취하신 것이라고!

아드님의 온전한 순명은 인류를 위한 구원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하느님께 또한 영광을 드렸고, 하느님께서 죽으셨던 아드님을 친히 일으켜세우심으로써 죽음의 권세까지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그동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당신의 사랑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받으실 영광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은 그저 자랑삼아 하신 말씀이 아니었음은 명백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드러내심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그것도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목숨까지 바쳐 사랑하라는 이 새로운 계명을 이해시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태동 과정이 마치 교과서처럼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제 막 신앙의 길에 들어선 "제자들 마음에 힘을 북돋아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사도 14,22)합니다. 그들 모습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연스럽게 우러나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좋고 쉽고 편한 꽃길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사도 14,22)한다는 진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또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사도 14,23)합니다. 사랑의 계명에 중심을 둔 교회 공동체에 외적 조직과 제도까지 정비하는 모습이지요.

제2독서인 요한묵시록은 세상의 종말론적 완성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 신부인 교회와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사랑 가득한 혼인 잔치를 관상합니다. 감사하게도, 이제는 눈물도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전 것은 모두 사라져 더 이상 없다고 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기"(묵시 21,3)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거처."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말씀이지요. 과거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와 광야를 떠돌 때 하느님께서 그들 한가운데서 천막을 옮겨다니며 현존하셨지요. 이후 성전 안 지성소에 머무르시다가, 육화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로 사람들 사이에 함께 숨쉬고 울고 웃으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가 되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니"(요한 13,33)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내 현존을 이어달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에 언급된 사도들의 활동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고요.

오늘날, 하느님께서는 말씀과 예수님의 성체 성혈로 이 세상 안에서 당신의 현존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아울러 우리! 부족하기 짝이 없고 죄인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기꺼이 당신의 처소를 지으시고 누추한 곳에 머무르시면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주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이상적이고 완전한 하느님 나라인 "새 하늘 새 땅"이 멀게만 느껴지는 오늘의 현실을 살면서도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는 하느님의 힘찬 말씀에 희망을 가져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고통과 죽음이라는 "이전 것들이" 사라졌음을 이미 체험한 인류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과 함께 완성될 천상 예루살렘의 도래는 기대 가능한 실재가 되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의 할 일이란, 이 세상에서 주님 현존의 도구로서의 소명을 묵묵히 이어가는 것입니다.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성공을 통해서건 실패를 통해서건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 각자가 제2의 그리스도로 존재하는 겁니다. 그 조건, 비결은 우리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여라"에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서로 사랑하면서 주님께 "새로운 노래"(입당송)를 부릅시다. 그 기적들을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시니까요. 아멘. 

생활의 사랑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218700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4월 24일 부활 제5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