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2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
(요한 13,16-20)
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receives the one I send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the one who sent me."
![요한_13.16-20.jpg](https://blogfiles.pstatic.net/MjAyMjA1MTJfMTQ3/MDAxNjUyMzAzMzMyMjQ4.hpTRvmeb_L9_53scrGwsHAhgMPxqcgoEBUjEZ1JT5hMg.FFYDaIVZ9qIY6dQNNakZYgcrkRmt0p1nMNuwSUAwxI4g.JPEG.kslofs/%EC%9A%94%ED%95%9C_13.16-20.jp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오셨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파견과 사명 수행은 당신의 파견과 사명 수행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의 ‘프레이밍햄’ 연구가 적혀 있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었습니다.
“행복한 사람과 친한 사람은 평균 15% 더 행복해진다. 그 행복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친구의 친구도 10% 더 행복해지고, 그 사람들의 친구들은 6% 더 행복해진다. 세 관계에 걸쳐 이어지는 경이로운 전달이다.”
행복과 기쁨은 이렇게 전달됩니다. 그렇다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행복한 사람 곁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 곁으로 가기보다는 혼자 있으려고만 합니다. 불행의 마음이 자기 안에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또 행복한 사람들은 이렇게 불행한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관심과 배려라는 사랑을 나눠서 그들에게 행복을 전달해줘야 합니다.
행복과 기쁨을 삶에서 느끼는 사람 곁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듭니다.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더 행복해지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마음으로 절망의 상황만을 만들고 있으면 사람들은 다가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절망의 상황에 깊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 역시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마음이 있다면, 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의 곁에 서는 것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역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 전,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토론했었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 때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께서는 이 발 씻김의 뜻을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권력 지향적이어서는 안 되고, 솔선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자신을 낮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고 삶으로 겸손을 보이는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에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보다, 세상의 물질적인 풍요보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주님께서는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고, 자기 행복을 세상의 전하는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행복의 길: 발을 씻어주된 먼저 하느님이 되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그대로 실천하면 행복할 것이란 약속을 해 주십니다.
행복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낮아짐’이 행복이라 말씀하십니다.
한 여인이 군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 주 모하비 사막 훈련소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섭씨 45도를 오르내리는 지독한 무더위 속에 시도 때도 없이 모래바람이 불어 입과 눈과 음식으로 들어가기 일쑤였습니다. 뱀과 도마뱀이 우글거리지만, 주위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몇 달 만에 우울증에 걸린 그녀는 고향 부모에게 이렇게 하소연하였습니다.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차리라 감옥에 가는 게 나아요. 정말 지옥이에요.”
그러나 아버지의 답장은 이 단 두 줄만 적혀있었습니다.
“감옥 문창살 사이로 밖을 내다보는 두 죄수가 있다. 하나는 하늘의 별을 보고, 하나는 흙탕길을 본다.”
이 두 줄의 글을 받아들인 그녀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꺼리던 인디언들과 친구가 되었고 공예품 만드는 기술과 멍석 짜기도 배웠습니다. 사막의 식물들도 관찰해보니 매혹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사막의 저녁노을은 신비한 아름다움을 선사했습니다. 그 속에서 『빛나는 성벽』(Bright Ramparts)이란 소설을 썼는데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델마 톰슨(Thelma Thompson)은 말합니다.
“사막은 변하지 않았다. 내 생각만 변했다. 생각을 돌리면 비참한 경험이 가장 흥미로운 인생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개미와 같은 존재가 겸손해지는 기쁨을 가질 수 있을까요? 겸손해지는 기쁨을 가지려면 먼저 높아져야 합니다. 사람이 동물에게 잘 대해줄 때 기쁜 이유는 내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체가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으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발을 씻어주시며 그 방법으로 낮아져야 함도 알려주십니다.
요한복음엔 성찬례 제정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성찬례의 의미를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삶이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삶이 되지 못하면 성체의 삶을 사는 게 아닙니다. 성체는 내가 양식이 되어주며 상대도 자신보다 높을 수 있음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를 높여주면 상대가 교만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겸손해집니다. 내가 상대를 겸손하게 하려고 찍어누르려 하면 상대는 교만해집니다. 당장은 겸손한 척하겠지만 뒤에서 칼을 갑니다.
상대를 겸손해지게 만들기 위해서는 상대를 한없이 들어올려야 합니다. 이 방법이 상대를 자신보다 이미 높은 사람으로 여겨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나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낮아져서 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게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학자, 혹은 이적 엄마라고 많이 불린다는 자녀교육 멘토 ‘박혜란 작가’가 자녀들에게 한 가장 많은 말은 “알아서 커라!”입니다. 박 작가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란 말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세 아들이 모두 서울대를 졸업했습니다. 현재 첫째는 건축학과 교수이고, 둘째 이적은 가수이며, 셋째는 방송국 드라마 PD를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키우는 비법을 물을 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이를 키우려 하지 마라. 이것이 비법이다.”
그래도 아이들을 키운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제가 키웠다면 아이들이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라며 웃습니다. 『믿는 만큼 자란 아이들』이란 책의 제목처럼 어머니는 아이들을 그저 믿어주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언제 우리를 키웠다고 그런 책을 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내가 언제 키웠다고 쓴다고 그러디? ‘난 너희들이 믿는 만큼 자라는 것을 지켜봤다’라고만 쓸 거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박혜란 씨는 “아이를 손님처럼 대하라”고 말합니다. 자신과 동등한 어른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적 씨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저희를 애들 대하듯이 잘 안 대했습니다.”
아이를 애들 대하듯이 대하면 아이는 크지 않습니다. 비가 갑자기 올 때도 다른 아이들 어머니는 우산을 들고 아이들을 마중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적 어머니는 한 번도 오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운했을까요? 그는 뿌듯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어른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비를 맞으며 장난치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며 이런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한 번 젖으면 더는 안 젖는구나!”
엄마가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고3 막내아들에게 도시락을 싸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형들은 대학생이니 늦게 일어나고 엄마는 외국에서의 삶으로 바쁘니 막내가 일찍 일어나 형들 먹을 밥을 해 놓고 자기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막내는 제가 고3인 것과 어머니와 무슨 상관이냐며 외국에 가서 일 보시라고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어머니가 자신들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하는 독립적인 존재로 믿어준다는 것이 바로 자녀를 이용하여 자기 만족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마음을 죽인 피 흘림인 것을 압니다. 이 피 흘림으로 자녀들의 자아의 발꿈치가 닦여지는 것입니다.
이적(이동준) 씨가 중3 때 ‘엄마의 하루’란 제목으로 이런 시를 썼습니다.
“습한 얼굴로, am 6:00이면, 시계같이 일어나, 쌀을 씻고, 밥을 지어, 호돌이 보온 도시락통에 정성껏 싸, 장대한 아들과 남편을 보내놓고, 조용히 허무하다.
따르릉 전화 소리에, 제2의 아침이 시작되고, 줄곧 바삐, 책상머리에 앉아, 고요의 시간은, 읽고 쓰는데, 또 읽고 쓰는 데 바쳐, 오른쪽 눈이 빠져라, 세라믹 펜이 무거워라, 지친 듯 무서운 얼굴이, 돌아온 아들의 짜증과 함께, 다시 싱크대 앞에 선다.
밥을 짓다, 설거지를 하다, 방바닥을 닦다, 두부 사오라 거절하는, 아들의 말에, 이게 뭐냐고 무심히 말하는, 남편의 말에, 주저앉아 흘리는 고통의 눈물에, 언 동태가 되고, 아들의 찬 손이 녹고, 정작 하루가 지나면, 정작 당신은, 또 엄마를 잘못 만나서를 되뇌시며, 슬퍼하는. 슬며시 실리는, 당신의 글을 부끄러워하며, 따끈히 끓이는, 된장찌개의 맛을 부끄러워하며, 오늘 또, 엄마를 잘못 만나서를, 무심한 아들들에게, 되뇌이는. ‘강철 여인’이 아닌, ‘사랑 여인’에게, 다시 하루가 길다.”
엄마는 해 준 게 없다고 여기지만 자녀는 압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것만큼 피를 흘리는 사랑은 없다는 것을.
진정 믿어주는 만큼 자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내 살을 깎아내는 아픔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동물처럼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어주셨습니다. 그 믿음의 표징이 바로 당신의 살과 피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하느님처럼 순결하고 거룩하고 능력자로서 살아갈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자녀들을 어른으로 대하고 믿어줄 때 어른으로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하느님 대하듯이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당신이 낮아지고 그 낮아짐으로 당신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이웃을 이미 하느님이 된 존재로 믿어야 합니다. 믿고 정말 하느님이 되는지 바라보면 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믿어줌으로써 내가 피 흘리고 낮아지기 때문에 나는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하니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가 이웃을 하느님으로 대하며 자신도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성체의 삶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channel/UCuUtL9J89jdK7sVXbNd0Beg
복음 말씀을 듣다 보면, 예수님께서 구사하신 화법에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빌라도가 “당신은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도저히 수긍할 수도 없지만 부인하기에도 가당치 않은 질문을 해 올 때에는,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마태 27,11) 하고 응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25)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방어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는 상대방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서 소극적으로 응수하시기도 합니다. 미나의 비유에서 한 미나를 받아 그대로 보관해 두었다가 반납한 종에게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루카 19,22 이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하고 여쭙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대단히 강조하고자 하실 때에는 오늘 복음에서도 들으셨다시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요한 13,16) 하고 전제하고 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른바 적극적으로 진정성을 표현하는 화법입니다. 의협심이 강해 보이던 나타나엘에게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실 때나, 니코데모에게 부활의 신비스런 이치에 대해 알려주실 때에도(요한 3,3)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또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는 두 번이나 거듭해서 군중에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요한 6,47. 53).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시며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느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14.20). 이처럼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진정성을 담아서 강조하신 바는 서로 섬기라는 것이고 이 상호 섬김의 행동양식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일 수 있는데 이는 또한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일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재림과 그리스도의 현존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길이 여기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중요한 진리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개인적으나 교회적으로나 민족적으로도 살아가는 데 명심해야 할 진리요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포함하여 인류가 역사상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겨우 들은 계시 진리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해석하거나 미래를 전망할 때 반드시 적용해야 하는 기준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그렇게 적용하였습니다. 즉, 유다인들은 이스라엘 본토에서나 피시디아주의 안티오키아 같은 해외 디아스포라에서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였으므로, 사도 바오로는 작정한 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메시아니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들려준 것입니다. 올바른 역사의식이야말로 신앙의 디딤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분단된 상태에서도, 또 분단된 동족끼리 전쟁을 치루는 바람에 3백만 명 이상이 희생되고 국토가 폐허로 망가진 처지에서도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으며, 선진국들 안에서도 선도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된 오늘날, 외국의 역사학자들이 한민족의 찬란한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한민족을 억누르던 시절에 그토록 감추고 싶어 하던 고조선 문명의 역사를 재발견하려는 학계의 노력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고 인류 역사가 사람들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이끄심과 흔적을 도외시하는 이른바 학자들의 ‘과학적 태도’를 저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무신론적인 학문 성과에만 의존해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이끄시는 역사의 진리를 온전히 알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화인류학, 고고학, 유전학의 성과를 활용함으로써, 숱한 역사 문헌을 왜곡해 놓은 중국과 일본이 건드리기 어려웠던 유적과 유물을 분석하여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에 대해서 바람직한 일이라고 평가를 할 수 있지만, 이들 과학적 성과가 하느님의 이끄심을 기록한 성경을 반영한 신학적 성과를 담아내지는 못하고 있는 까닭에 아쉬움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의 상고사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일은 장기적 과제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근세와 현대에 일어난 우리 교회의 초창기역사에 대해서만큼은 관심을 지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어떻게 이끄셨는지를 아는 일은 지금과 향후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의 삶의 질을 직접 좌우할 문제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역사의식이 없거나 빈약하면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어 있고, 정체성이 희미하면 신앙도 정립되기 어렵습니다. 진정성을 담아서 강조하시던 예수님의 심정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조재형신부-
1988년 창간된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올해 창간 34주년이 되었습니다. 창간호에 실린 독자들의 광고를 보았습니다. 광고의 주된 내용은 2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신문이 하나만 있었더라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빛과 소금 그리고 거울로서 사랑을 꽃피우는 신문이 되어 주시길”입니다. 34년 전 미주지역의 신자들은 정의에 대한 갈망이 컸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사명을 다 해 주기를 염원했습니다. 34년 전 미주지역의 신자들은 말씀에 대한 갈망이 컸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기를 염원했습니다. 창간호를 읽으면서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그와 같은 갈망과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도 이렇게 축하인사를 전하였습니다. “평화신문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에만 의존 할 것이 아니라 내 손은 세상의 평화를 주신 그리스도의 손이 되고, 내 눈은 그리스도의 눈이 되어 세상을 보고, 내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어 세상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면서 평화신문을 만들어간다면 어떠한 문제에라도 옳은 판단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신문을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신 재미동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 사람의 꿈은 꿈으로 끝나겠으나 많은 이가 함께 꾸는 꿈은 반드시 현실로 이룩될 것입니다. 평화를 꿈꾸는 우리 모두의 꿈이 바로 그것입니다. 미주 평화신문의 꾸준한 성장과 발전을 기도합니다.” 뉴욕 대교구의 주교님께서도 이렇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평화신문 미주판 발행을 큰 기쁨으로 환영합니다. 이토록 중요한 매체를 통해 미국에 이민을 와 있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현대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사회정의와 평화의 필요성에 크게 격려되고 동시에 도전받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은 내가 기뻐야 전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세상의 명예로 얻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공동체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듯이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듯이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야 합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지면을 통해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소식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저 또한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영적인 갈망을 풀어주는 ‘마중물’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치 광장이 그 도시의 역사를 알려주듯이,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언자를 보내셨고, 판관, 왕을 보내셨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는데 세례자 요한이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수 없을 만큼 위대하신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회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의 설명을 들었고, 하느님 구원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음을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시적인 구원의 역사를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골목길이 사람의 냄새가 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참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에게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셨고, 그들의 갈망을 풀어 주셨습니다. 사랑은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듣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족례는 당신의 진심, 본심을 말해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주 높은 벽 앞에 서시곤 했습니다. 아무리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귀를 닫고 마음을 닫아버렸기에, 목청껏 외쳐도 그 말씀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특히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향한 노골적인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있었기에, 그저 고발 건수를 찾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지,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의도는 아예 없었습니다.
때로 제자들마저도 말씀의 진의를 알아듣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였습니다. 한번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점심때 먹을 빵을 챙겨오지 않았다고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오늘 복음만 해도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자주 아래로 내려가라, 군림하지 말고 섬겨라,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라고 강조했지만, 전혀 알아듣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는 제자들의 모습에 얼마나 안타까우셨던지,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가르침을 주셨는데, 세족례였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허리를 깊이 숙인 후 그들의 더럽고 냄새나는 발을 일일이 씻겨주신 스승님께서 일어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복음 13장 16~17절)
과거 유다 문화 안에서 세족(洗足)은 노예 가운데서도 몸종들이 주로 하던 일이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의 기후는 건기의 여름과 우기의 겨울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덥고 건조한 여름의 경우 바깥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먼지와 땀으로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이었습니다.
따라서 주인의 귀가 시간에 맞춰 몸종은 주인의 말을 씻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몸종은 주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허리를 굽혀 먼지투성이의 발에 물을 붓고 뽀득뽀득 씻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수건으로 정성껏 발의 물기를 닦곤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시대 세족은 철저하게도 노예에게 주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일회성 행사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메스컴을 의식해서 적당히 포즈만 취하고 마는 그런 행동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먼 길 떠나기에 앞서 당신께서 극진히 사랑했던 제자들 한명 한명을 위해 기도하며 정성껏 행하신 세족례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행동, 당신의 본심을 말해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예의 일이었던 세족을 하느님의 일인 세족례로 승격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족례를 통해서 이제 세족은 노예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었습니다. 몸종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6-17)
분명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체가 높은 주인이 지체가 낮은 종을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모든 자가 복된 것이 아니라 이를 알고 실천하는 자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실행하는 자가 참으로 복됩니다.
그러니 ‘섬김의 도’는 실행하는 자만이 배울 수 있는 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가르치시고 섬김을과 기도를 가르치시되, 동시에 그것을 배울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은 유일한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섬기면서 섬김을 배우고, 사랑하면서 사랑을 배우고,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는 방법입니다.
곧 실행을 통해 배우는 방법입니다.
마치 수영을 배우는 방법은 수영을 하면서 배우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길은 자전거를 타면서 배우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자전거를 타지 않고는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섬김을 배우는 방법도, 사랑을 배우는 방법도, 기도를 배우는 방법도, 그것을 실행하면서 배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실천’이 중요합니다.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실행되지 않은 섬김은 섬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공관복음에서 말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마태 20,28; 마르 10,45)
이토록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서로에게 “종이 되어라” 하십니다.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요한 13,8)
그러니 우리는 이미 주님의 섬김을 받은 이들입니다.
주님의 섬김에 한 몫을 받은 이들입니다.
결국 진정 섬김을 받은 자만이 진정 섬기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섬김과 존경을 받고 싶고, 크고 높은 자 되고 싶어 합니다.
진정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먼저 섬기는 이가 섬김을 받고, 먼저 존경하는 이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낮출수록 사실은 더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 13,20)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7)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7)
주님!
저희가 서로 발을 씻어주게 하소서.
서로에게 종이 되게 하소서.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아는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실천하여 진정 알게 됨이 저의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분수를 알면, 여유가 있다」
-반영억신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 일 때가 있습니다. 일찍이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하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야 욕심을 부리지 않고 여유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아는 데 있어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은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그 자녀로 살아가고 있으며 아울러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몫이 있는데 그것을 얼마나 충실히 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신분에 따라 다양한 몫이 있는데 성직자나 수도자로서,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와 남편 자식으로서의 몫이 다르고 스승과 제자로서의 위치도 다릅니다. 기관의 장이나 구성원이 해야 할 일이 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 위치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분수를 알면 알맞은 처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분수를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을 빌미 삼아 나를 내세우지 말 것이며 오로지 주님의 도구로써 만족하라.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믿음을 표현하고 자기 위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 안에는 주인이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았으니 그보다 높지 않은 종은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높은 자리를 탐할 때 반역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중에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내가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고 하셨습니다. 모두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걸립니다. 지금 열심히 사는 사람은 더 열심히 하고 아직도 부족한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인간의 연약함을 탓하고 맙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는 주님의 말씀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습니다. 지금 여기서 나에게 주어진 몫에 더욱 충실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분명, 우리는 파견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의 믿음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모든 시련과 고통, 예기치 않은 일 등등.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은총의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더더욱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헤아려 지금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알면 아는 만큼 실천할 일입니다. 실천하면 행복합니다. 분수에 맞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이 말씀은, 바로 앞에 있는 말씀과 합해서 읽어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3-15).”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서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따라서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더 낮은 위치에서 서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해야 한다.”
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서로’ 라는 말은, 누구는 낮추기만 하고, 누구는 높임을 받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것, 또 누구는 섬기기만 하고, 누구는 섬김을 받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두가 낮추어야 하고, 모두가 섬겨야 합니다.
(그게 완벽하게 실현된다면, 그곳이 곧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더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 모두가 서로 섬기는 나라입니다.)
“너희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복되다.”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복되다.’ 라는 말은 ‘구원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도(사도라고 해도)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경고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 라는 명령과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명령은
‘같은 명령’입니다.
낮춤과 섬김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이유입니다.
만일에 낮춤과 섬김에 사랑이 없다면,
그 낮춤과 섬김은 아무 가치 없는 ‘비굴함’입니다.
또 사랑에 낮춤과 섬김이 없다면,
그것은 세속에서 말하는 ‘좋아하는 감정’일 뿐이거나 소유욕일 뿐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낮춤과 섬김으로써 실천하는 사랑은
예수님의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사랑이 없이는 신앙을 증언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일을 할 때, 즉 선교활동을 할 때,
‘낮춤과 섬김으로써 실천하는 사랑’ 없이 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증언하지 못하는 ‘헛일’이 될 뿐입니다.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요한 13,18).”
예수님께서 낮춤과 섬김을 강조하시다가 ‘갑자기’ 유다의 배반을
말씀하신 것은, 낮춤과 섬김 없이는 사도직 수행을 할 수 없음을
다시 강조하신 것일 수도 있고,
유다가 배반하게 된 이유를 암시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유다는 서로 발을 씻어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반감을 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아마도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기를
바라고서(루카 22,25) 예수님을 따랐던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씀하시니까(루카 22,26)
예수님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유다는 최후의 만찬이 행해지기 훨씬 전에 이미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는 활동 초기부터
낮춤과 섬김을 가르치셨습니다(루카 9,48).
유다는 예수님의 그 가르침에 실망하면서 점점 더 멀어지다가
수난이 임박하자 완전히 떠나버렸을 것입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19-20).”
여기서 ‘일’이라는 말은,
유다의 배반과 예수님의 수난,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모르고 당한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당한 일도
아니고, 인류 구원이라는 하느님 뜻의 실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제자들이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도단 안에서 배반자가 생긴 일 때문에 사도들의 위신이 실추되더라도
위축되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배반자가 되어서 떨어져 나가도
다른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위와 권한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보증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에게 맡겨진 직무와 권위와 권한은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흔들지 못합니다.
받아들임에 대하여
-김찬선신부-
어제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맞아들이고 받아들임에 대하여 두루 성찰하고자 합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갈수록 받아들이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고
그만큼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사랑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왜 갈수록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어갈까요?
그것은 우리가 감성의 시대를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감성의 시대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중에서
곧 이성과 의지와 감성 중에서 감성에 더 의존하고,
다른 것들보다 더 감성에 따라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감성에 따라 산다는 것은 좋고 싫은 감정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사람은 아무리 싫어도 의지적으로 해야 할 것을 하며 살고
이성적인 사람은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는 데 비해
감성적인 사람은 자기가 좋아야지만 하고
아무리 옳아도 또 아무리 다른 사람이 원해도 싫으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성의 시대인 오늘날, 좋다느니, 완전 좋다느니 그런 표현이 많고,
아무리 어른이나 집단이 원해도 싫다는 말을 너무도 쉽고 당당하게 하여
이전 세대의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합니다.
그러니 좋아하는 사람은 받아들이고 싫어하는 사람은 거부할 수밖에 없고,
좋고 싫은 것이 너무도 분명하고 까다로운 사람은 싫은 것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
며칠 전에 엄마와 아들이 저의 식당에 오셨는데
저희 실수로 음식이 그분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맛 없어도 아깝다고 다 먹고
아들은 조금 먹어보고는 거지반 남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음식값을 받지 않겠다고 돌려드리니
자식은 받아 가려는데 엄마는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하며 굳이 돈을 내고 가셨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도 감성적인 사람이었고
회개하기 전에는 싫은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환우를 피해다닐 정도였는데
주님의 은총으로 회개한 다음에는 나환우를 받아들였으며
이때 그는 역겨웠던 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다고
그리고 세속을 떠났다고 유언에서 회고하지요.
사랑이 없고 자기가 강한 사람이 싫고 좋음이 강합니다.
그래서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으며
좋은 사람은 받아들이고 싫은 사람은 강하게 거부합니다.
싫은 일도 사랑으로 하고 싫은 사람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싫고 좋음이 없고
설사 싫은 것이 아직 있어도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랑 중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사랑 까닭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두를 받아들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부모를 진정 사랑하는 자식이라면 부모가 사랑하는 다른 자녀들
곧 자기의 형제들을 형제로서 사랑하고 받아들일 것이는 것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사랑 까닭에 주신 것으로 모두 다 받아들일 것입니다.
고통과 고통을 주는 사람도 받아들일 것이며 마침내 죽음까지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것으로 그리고 자매와 형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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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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