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10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2. 5. 10. 06:13

 2022 5 10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요한 10,22-30)


My sheep hear my voice;
I know them, and they follow me. 
I give them eternal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 교회로 보내는데, 그곳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메시아이신지 분명히 말해 달라는 유다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 당신을 증언한다고 하시며 아버지와 당신께서는 하나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어디일까요? 집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미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어디일까요? 역시 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한집에 살면서 가장 미워하게 되는 곳이 집입니다. 실제로 가족은 가까워지기도 쉽지만 멀어지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가깝게 지내는 집의 공통점은 말을 예쁘게 하고, 멀어져 지내는 집의 공통점은 말을 밉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깝고 소중한 가족인데 말조심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가까우면 긴장이 풀리고, 긴장이 풀리니 자신도 모르게 속에 쌓여 있는 감정이 폭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밖에서는 얌전한 사람이 집에서는 폭군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정 폭발이 서로 일어나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이제 더 큰 긴장의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서 남보다 더 먼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예의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없애는 따뜻한 예의를 통해, 긴장이 풀리는 편안한 관계를 가족 안에서 분명하게 만들어 갈 수 있게 됩니다.

사회 안에서 성공한 사람을 보면 대부분 예의 바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성공을 우리 가정 안에서 먼저 이루어야 합니다. 남 대하듯 믿음이 담긴 예의를 가족에게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부정합니다.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면 주위의 적들을 물리치고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선악을 가리어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소문은 몹시 신경이 쓰였습니다. 로마의 점령하에 있던 현실에서 국가 안보에 관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입으로 직접 ‘메시아’라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적대적인 유다인들에게 당신이 메시아임을 직설적으로 밝히지 않으십니다. 이 말을 직접 듣고 확증을 잡아서 로마 당국에 고발하려는 심보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자기 목자의 목소리와 몸짓을 알아듣듯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만 예수님의 정체가 보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보고서도 믿지 못했던 것은 적대적인 관계의 시각에서 예수님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편이라고 하면서도 하느님과 가장 먼 사이가 되고 맙니다.

예의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 믿음이 없으니 예수님을 배척하는 예의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지요?
내 앞으로 걸어가지 마라. 나는 따라가지 않을 테니. 내 뒤를 따라오지 마라. 나는 이끌지 않을 테니. 내 옆에서 걸으면서 친구가 되어다오(알베르 까뮈).

 하느님과 하나라고 믿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XGWW9n3IdhQ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참 목자가 되기 위해 왜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여야 함을 말씀하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시는데,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합니다. 그들은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 하였다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며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으면 당연히 하느님이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십니다.  

 

    요한복음은 오늘 ‘성전 봉헌 축제’날이라고 말합니다. 마카베오가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고 성전을 다시 주님께 봉헌한 날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왜 굳이 이 날이라 말하는 것일까요? 성전은 목자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지만, 또한 하느님의 집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마치 목자처럼 양들을 자신 안에 모읍니다. 그런데 그 성전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집을 모독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당신이 하느님이시라고 주장하셨는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양들을 당신께로 이끌고 오라고 파견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처럼 하느님이라 믿지 않으면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이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고 여기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만들 수 없고 내가 하는 사죄경이 아무 효과가 없다고 여기면 어떨까요? 이때 나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권위,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을 때 가졌단 믿음은 그래서 교회가 가져야 할 꼭 필요한 믿음이었습니다.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의 공통점은 모두 암행어사 직을 수행했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암행어사라고 하면 유일하게 기억하는 인물이 ‘박문수’입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박문수를 신으로 섬기며 아직도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어사 박문수는 탐관오리들을 숙청하는 일은 물론 젊은 사람들의 혼례까지 해결해주고 다녔습니다. 한 가난한 집에 들렀을 때 늙은 아버지가 젊은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뛰어 들어간 박문수는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부잣집 늙은 사람이 자기 아들의 신부를 빼앗아 가 다음 날 혼례를 올린다는 것입니다. 박문수는 하루만 참아달라고 하고 암행어사 출두합니다.  

 

    또 부자 양반의 딸과 가난한 청년이 사랑에 빠졌는데, 그 부잣집 양반이 결혼을 불허하는 것은 물론 청년을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박문수는 그 부자 양반을 찾아가 딸을 그 청년과 혼인시키도록 하고 재산의 절반을 그 청년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횡포처럼 보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젊은 사람이 혼인을 못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였습니다. 박문수는 이렇게 임금에게 청하고 있습니다. 

    “지금 서울 밖의 처녀로 나이가 많아 20~30이 넘도록 시집을 못 간 자가 매우 많아 원망이 가슴에 맺혀 화기(和氣)를 손상할 것입니다.”(영조실록, 1730년 12월 24일)

  

    하지만 박문수가 위대한 인물일 수 있는 이유는 ‘임금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조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임금이면 가져야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영조에게까지도 비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백성은 궁핍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하나도 믿을만한 것이 없으니 삼백 년 종사가 어찌 전하 때에 망하려는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국사를 물리치고 마음을 붙이려 하지 않으시니 장차 국가를 어떤 지경에 두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한 신하가 자신의 정치를 비난하는 것에 화가 날 만도 했지만, 영조는 친필로 “쓸데 없는 비용을 삭감했다”라는 글을 써서 박문수에게 주었습니다. 

     

    하지만 박문수는 이렇게 임금의 신임을 받아, 갈수록 더욱 다른 신하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왜 서민만 무거운 세금을 감당해야 하느냐며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거둘 것을 건의했고, 나라와 양반 두 군데서 뜯어가는 세금에 백성이 굶주리니 신하들의 녹봉을 감하여 그것들이 백성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주장하는 것마다 마음에 거슬렸던 노론파가 소론파에 속한 박문수를 모함하여 감옥에 가두는 일이 생겼습니다. 신하들의 마음도 신경을 써야 했던 영조는 그래도 박문수를 믿어 한 달만에 박문수를 다시 복귀시켰습니다. 

     

    하지만 소론파가 역모를 꾸몄고 거기에 박문수도 가담했다는 노론파의 주장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30여 년간 영조를 목숨을 바쳐 섬겼던 박문수는 영조 앞에서 심문당하는 모욕을 당하였고 이 일이 있고 난 후 1년 만에 사망하게 됩니다. 영조마저 처음에는 박문수를 믿지 않았고 박문수도 죄인이라 자청하며 마음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자 영조는 슬퍼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박문수이며 박문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영조실록, 1756년 4월 24일)

  

    영조실록의 기록에 그는 이렇게 평가되어 있습니다.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다.”  

[출처: ‘한국사전-박문수는 왜 암행어사의 전설이 됐나’, 유튜브, ‘KBS 역사저널 그날’]

  

    그는 마치 자신이 임금인 것처럼 임금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고 또 임금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임금의 흐트러진 마음까지도 바로잡게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내가 임금이라면!’이란 생각하지 않고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아버지와 동등하게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성전이고 아버지는 그 성전의 주인임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다만 성전도 그 안의 주인과 하나임을 믿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우리는 우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우리가 그분과 하나이고 그분이라 믿어야 그분 마음을 알게 되고 그분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파견받은 자의 의무입니다. 

  

    슈퍼맨이 지구의 사람들을 살리는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인간의 후손이 아니라 다른 별에서 왔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의 아버지는 자신을 희생하며 아들을 놓아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본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래야 자신을 지구로 보낸 아버지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마음과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내가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임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천주학쟁이'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FmRBKIsB3Qw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잘 알아 들을 것이라고 자신하셨습니다. 과연, 초대교회 시절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이들에 대해서 유다인들은 자신들처럼 율법을 따라 살지 않고 낯선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이유에서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들’(사도 9,2)이라고 다소 막연하게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스테파노로 인한 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이 다시 안티오키아에 모여서 공동생활을 했는데, 이를 본 주변 이교인들이 이 신자들이 가는 ‘새로운 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때문임을 알고 나서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구체적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사도 11,28).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임을 알아볼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는데, 안티오키아에 있던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생활을 통해 서로 사랑하며 살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이끄시는 삶의 형태는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에는 부활신앙이 녹아있기 마련이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영적인 몸의 사기지은(四奇之恩)도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즉, ‘상하지 못함’의 은총은 공동체가 세상의 죄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 사랑을 지향함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빛남’의 은총은 공동체가 그 구성원들이 지닌 하느님 사랑의 신앙과 상호간에 나타나는 인간 사랑의 신뢰로써 불신에 가득 찬 세상의 어둠을 비추어주는 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빠름’의 은총은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사도직 활동을 사회에서 해 나감에 있어서 일과 돈에 대해서 증거하는 신용으로 나타납니다. 필요하다면, 일에 있어서든, 돈에 있어서든 약속을 지키는 행태로써 신용을 쌓아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겠다고 해도 과연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을 수 있으며 무슨 용도에 돈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 말만 믿고 아무런 담보가 필요 없이도 빌려줄 수 있을 만큼, 말에 힘이 있고 그 말만 듣고서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을 수 있게 됩니다. 말이 말씀의 무게를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대단히 중요한 점입니다. 사람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변화되는 장이 전례인데, 공동체에서도 전례에서처럼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하느라 주고 받는 말이 말씀처럼 무게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공동체가 인간의 구원에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지를 웅변과도 같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전혀 이렇지 않지요. 

 

  이 세 가지 은총이 종합된 결과가 ‘사무침’의 은총으로 나타납니다. 시간적 통공과 지역적 연대로 나타나는 이 은총은 공동체들끼리의 관계와 유대가 물 흐르듯이 맺어져서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공동체에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과 서로를 믿는 신뢰와 일과 돈에 관한 사회적 신용이 조화를 이룹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비유되어 온 교회의 뿌리요 원형입니다. 

 

  이 땅에 복음을 들여와 교회를 세운 선각자들은 서적과 지성을 통해서 신앙을 깨달았고 또 사람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를 믿게 된 이들을 조선시대 사람들은 ‘천주학쟁이’라고 낮추어 불렀지만, 이 비하된 천주교 신자의 별명 속에는 그들이 천주교 교리를 진리로서 받아들이고 지성을 발휘하여 새로운 지혜를 얻었음을 인정하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백성을 신분으로 나누어 차별했지만 천주교 교리는 모든 백성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고 귀한 존재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조선왕조 시대에 양반들끼리만 지식을 독점하고 이 지식을 무기로 휘둘러서 나머지 신분의 사람들에게 위세를 부렸지만, 천주교 교리는 모든 백성이 하늘의 진리와 땅의 지혜를 알아야 하며 그렇게 깨달은 진리와 알게 된 지혜로 서로를 가르쳐서 모두가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르면 자유로울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이러한 가치와 가르침은 우리 민족이 오랜 옛날부터 전해 받았던 천손의식과 홍익인간 이념을 상기시켜 주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러하셨듯이 당신을 믿는 이들도 죽기 전에 이미 천국을 살 수 있으며 부활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 선조들은 박해 중에서도 교리를 힘써 배워 익혔습니다. 이것이 천주교 신자들을 그저 천주교도가 아니라 ‘천주학쟁이’라고 부르게 된 배경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믿는 바를 교리에서 분명히 알고 또 이웃에게 전해 주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교리에는 성경 말씀이 녹아 있으며, 성경과 교리는 우리를 이끄시는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입니다. 그분의 양 떼라면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야 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그저 막연하게 착한 천주교 신자에 머물지 마시고 성경과 교리를 구체적으로 잘 아는 ‘천주학쟁이’가 되어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하여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저는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국인입니다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들이 있습니다한국 정부에서 저에게 발행해 준 한국여권입니다여권에는 제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것을 명기하고 있습니다저는 한국어를 사용합니다다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제가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말은 한국어입니다저는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알고 있습니다한국 사람은 부지런합니다주어진 일은 빨리 합니다저 역시도 부지런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주어진 일은 빨리 해결하려고 합니다음식도 한국음식을 선호합니다미국에 살고 있지만 반찬을 주로 먹고한국 식당을 자주 이용합니다저는 한국인으로 자부심이 있습니다미국 생활을 마치면 제가 살던 한국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그래서 누군가 저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한국사람 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2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말씀과 표징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3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첫째는 병자들을 고쳐 주라는 것이었습니다누가 병자입니까하느님을 믿었으면서도 세상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들이 병자입니다육신은 건강해도 우리는 모두 조금씩 영적으로 병들어있습니다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째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또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하느님과 함께하면 영적인 치유가 일어납니다사도들은 바로 그런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둘째는 마귀들을 쫓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마귀는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머리를 풀고 하얀 소복을 입고 길에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 중에도 마귀의 유혹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마귀는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들의 신앙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돈 마귀 때문에 성당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돈 마귀 때문에 친구를 배반하고양심을 속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돈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교만의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가족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사람이 되셨고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교만함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커다란 마귀의 유혹입니다.

 

세 번째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기쁜 소식은 내가 기뻐야 전할 수 있습니다돈으로 살 수 없고세상의 명예로 얻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이 기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겠습니다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바르나바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바르나바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병자를 고쳐 주었으며마귀들을 쫓아내었습니다그때부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요섬기는 사람입니다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듯이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십자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듯이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야 합니다그런 사람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것입니다오늘 하루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가 받은 것들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양승국신부-

 

이스라엘 백성은 축제를 좋아했습니다. 역사적 기념비가 될만한 큰 사건들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념하고, 경축하면서 부단히 현재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축제가 다른 이방인들의 축제와 뚜렷이 차별화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었으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감사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전 봉헌 축제는 안티우쿠스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된 예루살렘을 유다 마카베오가 되찾은 후, 성전을 정화시키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겨울에 거행되었습니다. 이 축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승리의 날을 경축하고 기렸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도 이 축제에 참석하셨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마치 하이에나 떼처럼 예수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유다인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복음 10장 24절)

  

유다인들의 어투를 참작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손톱만큼의 호의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던가 확신하며 던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강한 적개심과 증오심으로 무장한 채, 빈정거리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축제에 참석하셨습니다. 그때마다 무엇 하나 숨기지 않고 드러내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진작에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분이 메시아임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몰지각하고 파렴치한 유다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자극해서 빌미 잡힐 말을 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말만 골라 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복음 10장 25~27절)

  

그간 예수님께서 행하신 설교 말씀을 귀담아들었더라면,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유심히 바라봤더라면 유치원생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메시아성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 주변을 맴돌면서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유다인들은 유치원생보다 못한 존재들이군요.

  

오늘 다시 한번 알아들을 귀를 청합니다. 들은 바를 잘 실천할 힘도 덧붙여 청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유일무이한 메시아이심을 고백합니다. 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너희는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의 후반부(27-30절)는 이번 주일 복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앞 부분(22-26절)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에서 ‘성전 봉헌 축제’ 때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을 들려줍니다.

이날 벌어진 논쟁의 주제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는 ‘봉헌 축제’가 열린 시절이 추운 한겨울이었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 유대인들의 마음이 얼어붙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그러한 그들의 얼어붙은 마음은 성전 안의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신 예수님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직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4) 라는 그들의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위협적으로 '둘러싸고' 따지고 대드는 모습에서 그들의 의혹이 얼마나 심각하고, 그들의 감정이 매우 도전적이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초미의 관심은 ‘이분이 메시아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분명히' 말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요한 10,2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이미' 말로서 밝히셨고, 또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로써 '분명히' 드러내 밝히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분명함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신뢰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들은 믿기를 원하지 안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착한 목자'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현실적, 정치적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할 메시아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라기보다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양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 10,26)

 

그러니 참으로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혹 우리도 자신이 원하는 메시아, 자신이 만들어 놓은 메시아를 따르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그분의 뜻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요한 10,28)

 

주님!

제게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도, 빼앗길 수도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손수 빚어 만드시고, 제 영혼에 당신 손의 지문을 새기신 까닭입니다.

아멘.

「사랑하면 하나가 된다」

 -반영억신부-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께서 ‘너는 언제까지 내 속을 태울 작정이냐?’ 하고 유다인에게 해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말썽꾸러기 자녀를 둔 어버이 마음입니다. 여러 표징을 보여주면서 이미 다 말하였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는 것처럼 교묘히 말하는 그들을 모를 리 없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이 말씀은 입으로 이런 소리 저런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먼저 믿어라. 그리고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행하면 행할수록 진실을 깊이 알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내가 마음을 닫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지 않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들려서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신 말씀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어떤 것에 대한 자기의 지식, 기대나 생각, 바람, 선입견이 그를 귀먹고 눈멀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듣고 보려는 고집이 문제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놓은 아들의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은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물론 아버지는 아들이 순명을 하든 그렇지 않든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되면 자녀 또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나가 됩니다. 완고한 고집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지닐 때 비로소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하느님과 하나가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느님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때 주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일러 주더냐?" 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탄의 말을 따랐구나!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흔들림 없이 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송영진신부-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2-24)”

 

“때는 겨울이었다.” 라는 말은, 실제 계절이 겨울이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고, 유대인들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또는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요한 10,31).

그래서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라는 말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그만하라고 비난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라, 믿기 싫어서 한 말입니다.

이 말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표징을(증거를)

내놓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니까 표징을(증거를) 내놓을 수 없다.” 라는

생각으로 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한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사제들이 한 말과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 27,42ㄴㄷ).”

이 말에서 ‘믿을 터인데.’ 라는 말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빈말’입니다.

그처럼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라는 말도, 믿을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도 믿을 것처럼 한 말이고, 그래서 이 말도 ‘빈말’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나는 메시아다.”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면,

그들은 곧바로 로마 당국에 예수님을 반역죄로 고발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5-26).”

 

예수님의 복음과 설교와 여러 가지 가르침들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조금 있었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안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탓이 아니라, 사람들 쪽의 문제입니다.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마태 13,15ㄱ).”

여기서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전부, 그리고 예수님의 삶 전부를 가리킵니다.

그 삶과 일은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천사는 천사의 일을 하고, 마귀는 마귀의 일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진짜 메시아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고,

가짜 메시아는 사람들을 속이는 일만 합니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태 7,17).”

그런데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마태 27,63).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진짜 메시아의 일’을 보았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가짜 메시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단순히 예수님을 못 믿은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음을 나타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지 않으면 내 양이 될 수 없다.”,

즉 “나를 믿지 않으면 내가 주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의 양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예수님의 ‘참된 양’이 되고,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 예수님의 양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자기가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27-3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라는 말씀은,

“나의 참된 양이 되려면 내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참된 양이 되려면, 당신과 하나가 되자고 권하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응답하고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묵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최후의 심판’을 보면,

그 심판 때에 ‘죽음’과 ‘저승’이 완전히 소멸되고 (묵시 20,14),

사탄도 완전히 제거됩니다(묵시 20,10).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얻어 누리는 영원한 생명은,

‘영원히 그 무엇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글자 그대로 ‘영원히 안전한 생명’이 됩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인데,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양 우리’ 밖에서 ‘잃은 양’으로 살다가

‘되찾은 양’으로 변화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과 자신의 응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1티모 1,1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1티모 1,14).”

신약성경 어디에도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을 만난 뒤에

절망하고 좌절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참된 양이 된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4주 화요일-예수쟁이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4월 27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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