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9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요한 10,1-10
I am the gate.
Whoever enters through me will be saved,
and will come in and go out and find pastur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었다고 따지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무아경 속에서 본 환시를 설명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양들의 문이라고 하시며,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적 편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사 분담 문제로 부부 싸움을 많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가사를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고, 남편은 나름 많이 가사 일을 돕는다고 말합니다. 서로 자신의 가사 분담이 크다면서 다툽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는 과장되게 말하고, 불리한 부분은 무시해버립니다. 자기중심적 편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는 승리를 자신이 쏟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패하면 날씨나 심판의 편파적인 경기 운영 같은 다른 요인으로 탓을 돌립니다. 운전하는 사람도 대부분 자신이 운전을 능숙하게 하고 미숙하게 운전하는 다른 사람 때문에 운전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기적 편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기적 편향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권력까지 드러냈던 사람들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일침은 “이 위선자야~”였지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을 갖추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겸손의 모범을 갖추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십니다. 그에 반해서 잘못된 길로 이끌면서 자신의 이기적 편향을 내세우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도둑이며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양들만 생각하는 착한 목자였고, 종교 지도자들은 양들의 안녕은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 탐욕에만 골몰하는 가짜 목자라는 것입니다.
양들은 자기들을 보살피는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모든 것을 내맡기고 무조건 따라갑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면 산신이 흩어집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 ‘이기적 편향’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 모두가 낯설게만 들릴 수밖에 없었고, 주님의 곁에서 멀어졌던 것입니다.
이기적 편향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양들의 문이신 주님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양의 우리가 되어 안전하게 우리를 보호해주실 뿐 아니라, 목자로서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이들도 불러들이는 사랑과 보살핌으로 당신 임무를 완수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사도 11,18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LK38wedPzqM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제자들과 아나빔들이 그 복음을 알아듣는 매카니즘, 즉 메시지의 선포와 수용의 이 관계를 목자와 양 떼에 비유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가 자신들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때 의미로가 아니라 음색으로 알아듣기 때문에, 낯선 음색으로 자신들을 부르는 거짓 목자의 목소리에는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이를 피해 달아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알아듣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역사적 시행착오를 들려주었습니다. 예수님도 혈통상으로 유다인이셨고 제자들도 유다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유다인 출신 초대교회 신자들도 할례 받고 율법 준수를 서약한 유다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생각만 했지,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목자로서 부르시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두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세 번째에 가서 드디어 베드로가 목자의 음색을 알아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즉 다시 말하면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성속의 구별은 의미가 없으며,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희생으로 모든 사람들을 인종에 상관없이 깨끗하게 성화시키셨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동안 이방인보다 깨끗하다고 자부했던 유다인들이 앞장서서 구세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터에 유다인들만을 선교의 대상으로 국한하는 선교노선은 이미 사실상 의미를 상실한 터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너무도 자명한 이치를 깨닫는 데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본성적인 한계와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벽을 넘어서는 도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250여 년 간에 걸쳐서 황제를 신으로 경배하라는 우상숭배를 강요당하면서 굶주린 맹수의 먹잇감으로 던져져서 죽어가야 했던 박해를 이겨내고 마침내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게 만드는 ‘신앙의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리고 나서는 이교적 풍습 일색이었던 로마제국의 관습과 제도와 권력까지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어처구니 없는 로마화, 서구화의 늪에 빠져들었습니다. 박해자였던 로마제국이 국교로 받아들이자, 순식간에 서구화된 로마식 가톨릭교회는 자신들보다 더 오랜 종교와 더 합리적인 문화를 지닌 동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면서도 서구식 신앙 형식과 교회 모델을 강요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불교와 유교의 문화를 우상숭배 풍조로 단죄하며 아시아 선교를 감행했으니, 그 결과는 대규모로 장기간 진행된 저항과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 그리고 그로 말미암안 선교 실패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가 아니라 낯선 목소리를 따라간 결과였던 것이고, 이는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로 복음의 시선을 향하기를 주저하던 베드로 당시 초대교회 유다인들의 관성적 선교 태도를 답습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본래 말씀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초대교회 역시 아시아 서쪽 끝 이스라엘에서 탄생했었습니다. 동방으로 향한 복음화의 물결을 끔찍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조선의 선비들과 민중들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초석을 다진 선각자 선비들과 박해시대의 교우촌 신자들은 보편교회 초대교회의 신자들처럼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던 양 떼였습니다.
지금은 아시아인들을 제국주의적 침략 노선으로 위협하던 서구 열강 국가들을 경제적으로나 군사력으로 따라잡고 문화력으로도 앞선 우리 대한민국이 이제 새롭게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할 때입니다. 아시아는 물론 가톨릭의 보편교회까지도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응답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의 섭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서구 교회의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한국교회에 전해준 정통 신앙을 귀중한 자산으로 삼되, 서양 옷 대신에 우리 옷을 입었으면 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전해줄 때에 이미 우리 선조들이 전해준 하느님 신앙이 저변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웃 중국과 일본에서 박해에 눌려 거의 죽어버린 신앙이 유독 이 땅에서만은 백 년을 버티었고, 그예 되살아나서 아시아의 독보적인 가톨릭 세력으로 우뚝 섰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신앙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까지! 이 점에서 사도 바오로의 발자취가 우리의 참고가 됩니다. 바리사이즘이 전부인 줄 알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과 민족의 정체성을 찾은 후에 이를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알리려 했던 그가 우리의 모범입니다, 예수님 다음가는!
교우 여러분!
메시지 선포와 수용의 매카니즘에 있어서 한류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자의 음색을 알아듣고 제대로 그분의 부르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제대로 된 양 떼라면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가는 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5천 년 전부터 당신 목소리로 희미하게 우리를 부르시다가 2백 4십여 년 전에 제대로 불러주셨습니다.
-조재형신부-
어제는 석가 탄신일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자비가 세상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불가에서는 부처님이 이런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히말라야 산을 베개로 하고, 대지를 큰 침상으로 하여 누웠는데 왼 손은 동쪽 바다에, 오른 손은 서쪽 바다에 놓여 있고 두 발은 남쪽 바다에 두고 누워 있는 꿈, 부처님 배꼽에서 일종의 넝쿨나무인 띠리아 풀이 나와서 자라기 시작하는데 계속 자라 구름까지 닿은 뒤에 멈추는 꿈, 수많은 벌레들이 몸통은 흰색인데 머리는 까만 벌레들이 부처님의 두 발에서부터 기어올라 양 무릎까지 잔뜩 붙어 있는 꿈, 부처님께서 앉아 계신데 사방에서 각기 다른 색의 새 네 마리가 날아와 부처님의 발아래 내려앉더니 모두 흰색으로 변하는 꿈, 부처님께서 똥오줌이 가득한 산에 들어가 걸어가는데 발이나 몸이 하나도 더럽혀지지 않는, 전혀 묻지 않고 깨끗한 꿈”입니다.
이런 꿈들을 불가에선 이렇게 해석하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 꿈은 깨달음이 크다는 것을 뜻합니다. 두 번째 꿈은 깨달음이 모든 이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 꿈은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는 다는 것을 뜻합니다. 네 번째 꿈은 신분과 혈연을 넘어서 많은 이들이 해탈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섯 번째 꿈은 세상의 것들에 홀리거나 집착을 내거나 탐착하거나 하여, 오염되거나 묶이지 않으며 거기에서 위험을 보고 벗어남을 통찰하면서 스스로를 잘 지킨다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다섯 번째 꿈의 해석을 생각합니다. 진세를 버리고,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다고 하지만, 그래서 사제가 되었지만 세상의 것에 너무도 쉽게 물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십자가를 너무 쉽게 내려놓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편견, 우월감, 선민의식이라는 잣대로 세상을 보지 말자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유대인도, 이방인도, 남자도, 여자도, 부유한 이도 가난한 이도, 고아와 과부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거짓과 욕망으로 굳게 닫힌 우리의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위선과 미움으로 닫힌 우리의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면 이제 우리는 주님의 눈으로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엄마는 말을 못 하는 아이의 표정과 몸짓만을 보고서도 아이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해서 아이의 눈에 맞추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언어로 눈높이를 맞추셨습니다. 내가 나의 능력과 나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나를 이곳까지 이끌고 오셨음을 느끼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감사해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이웃을 주님께로 초대해야 합니다. 대화가 되지 않을 때, 혹시 내가 나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자존심과 욕심으로 나의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나의 선입견으로 내가 듣고 싶은 것들만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지요?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진정한 떠남은 그릇된 자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요한 복음사가는 착한 목자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착한 목자는 자신이 치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불러주는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로부터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받는 목자입니다. 양들을 먹거리 풍성한 초지로 인도하고 맹수들로부터 보호해주는 목자입니다. 양들에게 가장 좋은 것,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선물로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항구하고 충실하게 착한 목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착한 목자가 되기 위해 무한 노력을 반복했던 헨리 나웬 신부님 역시 틈만 나면 그 어려움을 하소연했습니다.
요즘 많은 사목자들이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경향이 하나 있는데, 분노랍니다. 선배 사목자들 중에 자신을 이끌어줄 모범이 되는 사람이 없다고 분노합니다. 교우들을 바라보면서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는다며 분노합니다. 쉬는 교우들이 점점 증가하며 미사 참석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에 분노합니다. 교회에 정기적으로 나오는 교우들에게는 열정이나 헌신이 없다고 분노합니다. 기대에 못 미치는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도 분노합니다.
그런데 사목자들은 이런 분노를 공공연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터트리지 않는답니다. 많은 경우 분노는 부드러운 말과 웃는 얼굴, 예의 바른 인사 뒤에 숨어있답니다. 억압된 분노는 점점 굳어져 사목자들의 마음과 영혼을 마비시키고 무력화시킨답니다.
일찌감치 이러한 체험을 온몸으로 경험했던 사막의 교부들은 침몰하는 배 같은 자신의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쳤고, 가까스로 그곳을 빠져나왔으며, 결국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자리는 바로 사막이라는 고독의 자리였습니다.
복잡다단한 이 시대 착한 목자로 살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입니다. 착한 목자로 올곧게 서기 위해서는 무한 반복의 정진과 구도가 필요합니다. 내공을 잘 닦아야 합니다. 작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 되어야 합니다.
사막의 교부 아르세니우스는 두 왕자의 후견인으로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궁전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상류 사회의 위선적이고 오만한 삶의 행태에 신물이 난 아르세니우스는 간절히 주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님,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그러자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르세니우스야, 세상을 벗어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아르세니우스는 즉시 로마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갔고, 깊숙한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뭔가 미진했던 그는 또다시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님,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그러자 다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르세니우스야, 벗어나라. 침묵하라. 늘 기도하라. 이것이야말로 행복하고 죄 없는 삶의 원천이다.”
여기서 즉시 한 가지 장벽 앞에 부딪히게 되네요. 침묵하라! 네 좋습니다. 가능합니다. 늘 기도하라. 네, 이 역시 노력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벗어나라! 주어진 여건상 벗어날 수 없는 오늘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담당하고 있는 본당이나 공동체 사도직을 두고 떠날 수 없습니다. 병들어 누워계신 ‘착한 신랑’을 두고 어딜 가겠습니까? 그건 진정한 벗어남이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떠남은 그릇된 자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벗어남은 왜곡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본래의 나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 진정한 벗어남은 객관적이고 영적인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떠남은 사랑 아닌 사랑을 버리고 참된 사랑, 영원한 사랑, 불멸의 사랑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경청하고 식별한 다음 행동하라」
-반영억신부-
한 신부님이 많은 돈과 귀한 보석을 선물로 받았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재물이 생겨서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보관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성체를 모시는 감실에 두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리라’는 기발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불안하여 감실 앞에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시느니라.”하고 써 붙였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아침에 나와 보니 누군가 감실 문을 열고 보석을 몽땅 가져간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쪽지에다가“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이곳에 안 계시는 도다”하고 써 놓았더랍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고,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놓으면 주님께서 더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것이라면 비상도 먹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공것이라면 매우 좋아하여 가리지 않고 덤빈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 달아 들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최고는 아닌데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풀밭을 얻으려 한다면 먼저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며 충만한 생명을 체험하는 지름길입니다. 따라서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곧 미사 안에서 성체를 자주 모셔야 합니다. 자주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사실 “성체 조배는 예수님과 살기 위한, 예수님 안에서 참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알베리오네 신부)이 됩니다. 성체 조배를 통하여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들음은 행동, 곧 실천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기존의 삶에 안주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목소리를 알아듣고 익숙해지려면 그만큼 함께한 시간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행동은 경청과 식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식별을 거치면 근심, 걱정, 슬픔과 좌절, 실망, 불안을 조장하는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스승은 항상 당당하고, 참된 제자는 그를 따릅니다. 스승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저 따를 뿐입니다. 따름으로써 스승을 완전하게 알게 되고 믿게 됩니다. 세상 속의 헛된 목소리를 경계하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구원의 길로 가는 이정표이며 등대입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 밥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충실히 닮고 따르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목자의 비유』
-송영진신부-
‘목자의 비유’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목자다.” 라는 가르침이고,
또 “가짜 목자를 따라가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자칭 메시아’가 많았고(사도 5,36-37),
승천 후에도 많았고,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자칭 메시아, 자칭 재림 예수’는 모두 다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그 외에도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선전하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경우도 많은데,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공적인 계시는 끝났고,
더 이상 새로운 계시는 없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확고한 믿음입니다.
또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왜곡하는 사이비들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0,1).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짓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0,1-5).”
양 우리에 들어갈 때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주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간다는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문’은 합법적인 출입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 같은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문이 있다는 것은 아니고,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은 그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은 그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가짜 예언자, 가짜 메시아는 그 권한이 아예 없기 때문에
그자들이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는 것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또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는 것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마르 3,4).>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라는 말씀은,
목자의 정당한 권한 행사를 뜻합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목자가 여러 명이라면 목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문지기 역할을, 즉 일종의 ‘불침번’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목자가 한 명뿐이라면, 그 목자가 문지기 역할도 겸하게 됩니다.
지금 이 ‘목자의 비유’에서는 목자가 예수님뿐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목자이면서 동시에 문지기입니다.
(목자도 보호자이고, 문지기도 보호자입니다.)
따라서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는
“목자는 문을 열고 들어가고”로 바꿔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중재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중재자가 따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직접’ 만나시고, 나도 예수님을 ‘직접’ 만납니다.
(중간에서 거치적거리는 존재는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선교활동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경우에,
그것은 ‘옆에서’ 도와주는 인도자 역할을 하는 것이지
문지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한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하나’ 라는 말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일대일’의 관계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동시에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개인이 전체에 묻히는 일이 없는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이 특별하고 귀한 존재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목자가 ‘앞장서 가고’ 양들은 목자를 따른다는 말씀은,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생활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보다 앞에서 갈 수도 없고, 예수님보다 위에 설 수도 없습니다.)
‘낯선’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하느님의 계명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을 뜻합니다.
‘낯선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에 맞지 않는 말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자는 사이비이고 가짜입니다.
‘피해 달아난다.’는 ‘피해야 한다.’이고,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말은 들으면 안 된다.”입니다.
7절의 “나는 양들의 문이다.” 라는 말씀과 9절의 “나는 문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입니다.
‘사이비들’과 ‘가짜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만 하면서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들을 따라가면 구원의 정반대쪽으로, 즉 멸망으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살리는 것만 바라시고, 그 일만 하시는 분인데,
사이비들과 가짜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 외부에만 사이비와 가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도 있습니다.
그자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더욱 열심히 교리공부와 성경공부를 해야 합니다.
‘게으름’과 ‘무지’도 ‘악’입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4주 월요일-나와 다르다고 혐오하는 나는 아닌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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