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11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2. 5. 11. 06:26

2022 5월 11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요한 12,44-50)

 

I came into the world as light,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me might not remain in darknes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성령께서는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시어, 키프로스로 건너가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병원 응급실에 한 여자가 실려 왔습니다. 아파트 8층에서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아주 심각한 상태로, 얼굴을 심각하게 다쳤고 전신에 부서지지 않은 뼈가 거의 없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습니다. 그 병원의 모든 외과 의사들이 달려들어 그녀의 수술을 맡았지요. 자살한 사람을 살리겠다고 모든 의사가 힘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의사 중 한 명은 이런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죽겠다고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막대한 시간 낭비와 자원 낭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수술은 아주 잘 되었지만, 이 여인은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이 여인이 깨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나자마자 어떤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었을까요?

“남편이 발코니에서 저를 밀었어요.”

그녀의 말에 남편은 체포되었고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앞서 치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의사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잘못된 판단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판단에 앞서 자신이 할 일에 먼저 충실해야 합니다. 지레짐작은 한 생명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과거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지레짐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었지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 관은 세속적인 통치자, 모든 나라를 다스릴 유다인의 왕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힘 있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군대를 조직하지도 않고, 종교 지도자들의 편에 서서 행동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랑만을 강조하는 약한 모습만 보이니 메시아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특히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하느님 나라에 유다인 뿐 아니라 모든 나라 백성이 들어간다는 말씀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선민으로 자처하던 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빛이신 주님을 믿고 따라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빛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이며,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을 믿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지레짐작과 같이 잘못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얻은 것으로 생계를 꾸리고, 주는 것으로 삶을 만들어간다(윈스턴 처칠)

 죽고 싶지 않으면 꼭 만나야 할 사랑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X9MDIm2UscI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이 곧 심판의 기준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말은 곧 빛입니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빛을 보고 오징어만 그 배로 접근하여 올라오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의 말씀을 찾아 올라오는 이들은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어둠 속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아버지께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빨리 탈출하라고 소리치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 소리를 거부하고 귀를 막습니다. 구원의 길은 좁고 그 길로 들어서는 이들은 계속 줄어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을 악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줄 이를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는 이 역할을 세례자 요한이 하였고 지금은 교회가 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과 타협한다면 세상에 더는 희망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싸워 이기셨습니다. 
  
    며칠 전 검찰이 결국엔 이은해와 내연남 조현수 씨를 살인·살인미수·보험사기방지 특별법 위반 미수 혐의로 구속기소를 했습니다. 검찰은 이들이 수영할 줄 모르는 윤 씨에게 4m 높이의 바위에서 3m 깊이의 계곡물로 구조장비 없이 뛰어들게 해 살해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수영을 못하는 윤 씨가 여러 차례 거절하자 “그럼 차라리 내가 뛰겠다”라며 압박했습니다. 그리고 구조를 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하지 않아 살해했을 때 적용하는 ‘부작위에 의한 살인’이 아닌 직접 살해한 상황에 해당하는 ‘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를 적용한 것입니다.
  
    검찰은 또 공소장에 이들이 범행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윤 씨를 상대로 이른바 ‘가스라이팅’을 했다고 적시했습니다.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함으로써 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입니다. 이들은 앞서 2019년 2월과 5월에도 복어 피 등을 섞은 음식을 먹이거나 낚시터 물에 빠뜨려 윤 씨를 살해하려 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렇게 여러 차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자기를 피폐하게 만드는데도 윤 씨는 이 씨와 그의 친구들을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검찰에 따르면 이 씨는 사건 발생 8년 전인 2011년쯤부터 남편 윤 씨와 교제를 시작하면서 당시부터 윤 씨의 돈을 받아냈습니다. 그녀는 2017년 3월 윤 씨와 결혼하여 다른 남성들과 사귀면서 윤 씨를 착취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윤 씨는 6천만 원 상당 연봉을 받던 대기업 직원이었으나 이 씨와 결혼한 뒤로 개인회생을 신청했습니다. 심지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불법 장기매매를 하겠다’라는 글까지 올릴 만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끼니를 해결하려 직장 동료에게 3천 원을 빌려달라는 요청도 했습니다. 사망 당시 윤 씨 자취방에 있던 서류들을 보면 빚만 1억5천만 원에 달했습니다. 
  
    윤 씨는 결혼 2년 차인 2018년 12월에 이 씨와 통화하면서 “빚이 너무 많아 얼마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그만할까. 지친다”라며 흐느끼기도 했습니다. 이에 이 씨가 “정말 그만 만나고 싶냐?”라고 묻자 “그런 건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씨는 윤 씨에게 “이해한다”라며 공감한다는 식으로 답하면서 심리적 지배를 이어갔습니다. 윤 씨는 숨지기 5개월 전인 2019년 1월에 조 씨에게 문자를 보내 “은해에게 쓰레기란 말 안 듣고 싶다. 은해가 짜증 내고 욕할까 봐 무섭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윤 씨는 결국 2019년 6월 30일 오후 8시 24분 경기 가평군 용소계곡에서 숨졌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악해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똑같이 세상에 이런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짓은 더하면 더했지 이은해 씨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잔인하게 물로 빠뜨립니다. 
  
    윤 씨가 살아날 수 있었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당연히 이 씨와 조 씨로부터 탈출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람이 악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줄 누군가를 만났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가스라이팅에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교회를 만나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교회는 자아, 삼구, 그리고 그 욕망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이 세상이 사탄 무리의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탈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이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먼저 만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빠져나와 광야로 나가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2013년 톰 크루즈가 출연한 ‘오블리비언’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오블리비언은 ‘(기억의) 망각’이란 뜻입니다. 잭 하퍼란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지구에 남아 있는 외계인들을 없애는 일입니다. 외계인들에게 잡혀 정보를 빼앗기면 안 되기에 그 사람의 기억을 일부러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 아내를 만나게 되어 기억을 되찾습니다. 아내는 잭 하퍼가 외계인들에게 잡혀가서 기억이 지워져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결국 그가 죽이고 있었던 것은 지구상에 남아 있는 자신과 같은 인간들이었던 것입니다. 잭은 인간들과 힘을 합쳐 외계인들을 물리칩니다. 
  
    단순한 내용이지만, 성경과 같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우리도 모르게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아내를 만납니다. 교회는 세상이 적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싸워야 할 대상임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받아 세상과 싸워 이기게 됩니다. 승리한 자만 구원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말이 들리지 않는 이유는 아직 세례자 요한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뱀으로 보이고 세상이 사탄의 집으로 보이게 해 주는 세례자 요한을 만나야 합니다. 아이들에겐 부모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할 때 자신에게 절하면 자신이 가진 세상의 영화를 예수님께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세상은 자신의 것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동굴 속에서 빛을 보려면 자신이 어둠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빛을 바라볼 수 있고 빛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 어둠에 속해있음을 보게 하는 이를 먼저 꼭 파견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사도 12,24)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8iST6SagyY0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 이유는, 그분이 유다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 12,37). 이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해 계셨는데, 그 바로 직전에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타니아에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기적까지 베푸셨던 터였습니다. 그런데도 유다인들은 혁명당원들처럼 그분을 내세워 민중 봉기를 일으킬 음모를 꾸미거나, 사두가이들처럼 그렇게 위험한 그분을 죽여 없앨 음모를 꾸미는 등, 도무지 당신이 일으킨 기적들에서 하느님의 표징을 읽거나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소생시키신 기적 이전에도 여섯 가지나 되는 기적을 일으키셨고, 이 기적들은 모두 당신 뒤에 계신 하느님을 보게 하기 위한 표징이었습니다. 특히 라자로 소생 기적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심으로써, 부활 신앙을 선포하기 위한 특별한 뜻으로 죽을 각오까지 하셔야 했던 위험한 상황에서도 감행하신 마지막 표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까지 유다인 군중에게 하신 후에는 더 이상 그 군중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오직 열두 제자들하고만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이 때 하신 가르침이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 매우 긴 분량으로 증언되고 있습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하시며 상호 섬김이야말로 비록 십자가 희생이지만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부활의 행동이며, 이로써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 뒤에 계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일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이 상호 섬김의 삶으로 당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이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부활 신앙과 아울러 이를 드러내는 방식이 서로 섬김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임을 일깨워주셨고, 이 두 가지가 하느님께서 새롭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섭리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과연 초대교회 신자들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말씀의 실체란 영적으로는 부활 신앙이요 사회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생하게 체험한 이들이 서로를 섬기면서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생활을 이룩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신자들은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을 증언하던 스테파노를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에서 죽인 터에(사도 7,54-60), 헤로데 영주가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는(사도 12,1-5) 등 박해가 심해지자, 이스라엘을 떠나 더 넓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선교사로 파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전개된 선교 활동을 통해 바오로는 소아시아와 그리스 등 로마제국 영토에서 유다인은 물론 이방인들에게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의 복음을 전하여 많은 공동체를 세웠고, 이 공동체들은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널리 퍼져나갔고, 끝내 로마제국으로부터 공인을 받고(313년) 국교로까지(380년) 인정받았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기원이 될 정도로 중요한 메시아 강생이 초래한 역사적 위력이여, 이를 증거한 초대교회의 빛나는 역사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빛이심을 드러내셨고, 그분의 하느님께서는 영광스럽게 서양의 역사에 드러나시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뜻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우리 현실에서는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머물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불가지론자들과 무신론자들입니다. 또한 신앙인들 가운데에서도,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생생하게 증언했던 부활 신앙을 관념으로만 간직한 이들도 많고, 그들이 부활 신앙의 표징으로써 목숨바쳐 이룩했던 공동생활을 막연한 이상으로만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생생하지 못하고 자라나지 못하며 널리 퍼져나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라자로 소생 기적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깨우쳐 주시려던 뜻은, 부활 신앙은 죽은 다음 내세에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서 신앙인들을 삼기 위해서는 신앙인들의 부활 신앙이 생생해야 하고, 또 세상을 구원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 위해서는 부활 신앙에 입각한 공동생활 양식이 더욱 자라고 널리 퍼져야 합니다. 

 

  부활 신앙이 생생하게 살아 있으면 세례 때에 우리가 받은 영적 탄생의 은총을 실감하게 되고 과연 우리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남을 깨닫게 될 것이며, 공동생활 양식이 뿌리내리고 퍼져나가게 되면 과연 이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새로이 창조되어 나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 이것이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조재형신부-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한국인 독자에게 잘 알려진 마이클 샌던 교수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회에 대한 우려를 이야기하였습니다어릴 때입니다동네 진흙탕에서 놀고불량식품을 먹고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지냈습니다그럼에도 요즘 아이들이 고생하는 아토피는 별로 없었습니다냉장고도 없었고깔끔한 마트도 없었습니다구충제를 먹어야 했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잘 지냈습니다마트에는 깨끗하게 정돈된 식품들이 진열되어 있고냉장고에도 신선한 재료들이 있지만 요즘 아이들이 예전 아이들보다 더 행복한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과학 분야에서 완벽함은 긍정적인 면이 분명 있습니다유전적인 질환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예전에는 고칠 수 없는 질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그러나 완벽함은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성형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성형중독에 빠질 수 있습니다근육 강화제를 지나치게 사용하면 경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지만 건강에 해롭습니다유전적인 방법으로 건강하고똑똑한 아이를 가질 수 있지만 자칫 건강하지 못하고부족한 아이들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완벽함을 추구하려고 선악과를 먹었던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들이 추구하는 완벽함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훼손할 수 있습니다그러기에 완벽함은 늘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너무 깨끗한 물에는 오히려 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합니다너무 완벽한 사람 곁에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제자들의 직업도 금수저는 아니었습니다어부였고세리였고열심 당원이었습니다. ‘흙수저가 많았습니다그러기에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겼습니다베드로는 3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의 표상이지만 그 길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다윗도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감당할 자 누가 있으오리까오히려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사와 더더욱 주님을 따르라 하시나이다.”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부족함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완벽함 때문이 아니라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완벽해진 것은 아닙니다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고여전히 나약함 때문에 좌절합니다그러나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습니다두려움과 나약함을 믿음으로 극복하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우리 모두 빛에서 빛으로 나아갑시다!

 -양승국신부-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2장 46절)

 

 

복음 구절 안에 빛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언제 어디서든 항상 똑같은 강론을 반복하는 동료 수도자 덕분에 이제는 거의 암기하다시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빛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우리는 지금 어디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곰곰이 반추해보니 나름 의미심장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줄창 어둠에서 어둠으로 직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그저 잘 먹고 즐기는 것이 전부입니다. 영혼이나 구원, 진리나 사랑 같은 개념과는 완전 등을 돌리고 살아갑니다. 애완견이나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에 못지않게 불행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빛에서 어둠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애초에는 흘러넘치는 축복과 은총 속에 빛의 삶을 살았지만, 충실성과 항구성의 부족으로 인해 자꾸만 어둠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자주 체험하는 유형입니다.

 

 

거룩한 아침 미사와 기도를 통해 하루 온 종일 주님 은총의 빛 속에 살았습니다. 순간순간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기도와 일을 삶 속에 조화시켰습니다. 말 마디 그대로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동으로 뿜어져 나오는 광채에 주변 사람들이 눈부셔할 정도로 찬란한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것, 마치 부서지기 쉬운 흙덩이와 같이 나약하고 변화무쌍합니다. 빛의 상태에서 하루를 잘 마감하면 좋으련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술잔을 기울입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잔이 되고...엉뚱한 말을 해대고, 이런저런 실수를 연발하고, 빛으로 충만했던 하루가 어둠으로 마무리됩니다.

 

 

어떻게든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비록 어제 짙은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할지라도 아침이면 아침마다 훌훌 털고, 다시금 빛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 어쩔 수 없는 한계와 부족함을 딛고 찬란한 광명의 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유달리 더 크게 다가오는 이 큰 좌절감과 우울감을 딛고 어떻게든 빛으로 건너가야겠습니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이영근신부-

 

요한복음을 '표징의 책'과 '영광의 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은 '표징의 책'이 끝나는 1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말씀해 온 것들을 요약하시면서, 간절함으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44)

그것은 네 번에 걸친 “나는 ~이다”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로,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요한 12,46)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46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시작인 1장의 '로고스 찬가'에서 “모든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의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6)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주제인 ‘빛의 자녀 찾기’를 반영합니다.

 

두 번째로,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47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전체 복음서의 핵심을 보여주는 제3장의 말씀, 곧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

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는 말씀을 상기시켜줍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요한 3,18 참조).

 

세 번째로,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요한 12,4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49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7장의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라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네 번째로,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50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한다.”(요한 8,38)는 말씀과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8,55)는 말씀을 밝혀줍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선언에 앞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라고 밝히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가 원천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원천임을 밝혀주십니다.

곧 당신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속하며, 아버지의 유일한 계시자로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보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분을 본 것이 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아버지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시는 빛으로 오셨고,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요한 12,47)

주님!

당신께서는 이루시되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제게 간청함은 제게 희망을 두심이요, 제가 더디어도 놀라운 인내로 기다리심은 제게 믿음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무릎 꿇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호의로 인내하고 때를 기다릴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반영억신부-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정적으로 바라는 것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기에 구원의 도구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구원을 실현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언제나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묶인 매듭을 풀어주십니다. 고해성사가 심판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다시는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과거를 치유시켜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일으켜 세워 줍니다. 그럼에도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심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어둠, 무지의 어둠, 불신의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을 비추는 빛으로써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에 심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안 하고는 우리의 자유의사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마땅히 선택한 사람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심판으로부터 벗어 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물러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사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요한12,35). 그러므로 빛이 우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로 굳건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언제든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명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항상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생명을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원치 않으시고 사랑을 원하셨다면 우리도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도 어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분께서 나도 보내셨다는 것을 인식하며 언제나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한 발 더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송영진신부-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이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계시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과 ‘본다.’는 말은 같은 뜻으로 사용된 ‘같은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 2,11-13).”

이 말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 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같은 신앙’이고,

‘하나의 신앙’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라는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은

서로 상관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중요한 것을 못 보는 것은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안 보기 때문이고, 중요한 것은 안 보고 하찮은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예수님은 못 보는 사람은 볼 수 있게 하고,

안 보는 사람은 회개시켜서 보게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계시를 믿는 것,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믿는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이 말씀은, 앞의 8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이 말씀들에서 ‘빛’은 ‘생명’을 뜻하고, ‘어둠’은 ‘죽음’을 뜻합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말은,

멸망하지 않는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47-50).”

 

이 말씀의 뜻은, “구원과 멸망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라.”입니다.

혹시라도 “나는 그런 선택 자체를 안 하겠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구원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다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들에 포함됩니다.

구원 문제에서는 중간지대도 없고, 중립도 없습니다.

생명이 아니면 죽음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이 아니면 ‘밖’입니다.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라,

‘회개와 구원의 때’ 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구세주가 아니라 ‘심판관’으로

오실 것이고,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은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그를 심판하시기 전에

그 사람 자신이 이미 멸망을 선택하는 것이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선택한 채로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그러니 멸망을 선고받은 뒤에 심판관이신 예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사는 사람은

구원을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말한다는

말씀은,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니, 당연히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라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명령’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버지의 하느님의 간절한 바람이고,

강력한 의지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아버지 하느님도, 또 예수님도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하게’ 바라시는데,

나는 나 자신의 구원을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가?

그냥 하루하루 세속 일에 묻혀서,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과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은,

과연 나의 구원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 일인가?

또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과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은,

과연 나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들인가?>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요한 12, 50)
-한상우신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를
이 아름다운
계절에 묻는다.

생명이신
하느님에게서
시작하여
생명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믿음의
정체를
결정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전달된다.

영원한 생명이란
생명을
실천으로
옮기는
생명의 가치이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가장 존엄한
명령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다운 삶에
우리가
눈을 뜨는
기쁨이다.

생명의 중심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믿음의
여정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시는 분이
생명의
예수님이시다.

생명의
예수님께서는
일상생활과
신앙적 삶이
생명으로
하나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모든 혼돈과
모든 무질서는
생명의 무지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믿음의 가치가
생명의 가치이다.

영원한 가치를
일깨워 주시는
예수님이시다.

생명의 방향을
결정짓는
생명이다.

생명이
참빛임을
가르쳐주시는
생명의 명령
주님이시다.

 

말씀 나누기 - 부활 4주 수요일-영적인 배후를 볼줄 아는 믿음의 눈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4월 28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