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13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2. 5. 13. 06:29

 2022년 5월 13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1-6)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You have faith in God; have faith also in me.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의 회당에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고, 사도들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난 3월, 사순시기에 들어서면서 외부 강의가 많아졌습니다. 사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난 2년간 거의 강의를 못 했습니다. 강의 일정을 잡아놓고도 취소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제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야만 한다는 말이 나오면서 강의 부탁이 계속 이어졌던 것입니다. 저를 필요로 한다는 말에 어떻게 안 가겠습니까?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같이 사는 신부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이 신부와 함께 차를 타기도 했고, 식사도 같이했었습니다. 더군다나 약간의 감기 기운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보건소에 가서 PCR 검사를 하고 하루 동안 방안에서 자가격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온갖 걱정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강의는 어쩌지? 성지 미사는 어떻게 하지? 또 안치 예식은 누가 하지? 혹시 직원들도 확진된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바로 그때,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제가 코로나 확진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미사와 안치 예식을 부탁할 신부도 충분히 있었고, 강의는 몇 주 미루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결과는 음성 판정을 받아서 모든 일정을 정상적으로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깨달음 하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걱정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해야 할 것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최후 만찬 때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시점에서도 제자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그들을 격려하고 안심시킬 만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성취는 오직 믿음뿐입니다. 주님은 분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스승이신 예수님의 부재가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혼란을 주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최악의 상황인 예수님의 죽음이지만,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거처할 자리를 마련하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많은 걱정의 소용돌이 안에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걱정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비누는 쓸수록 물에 녹아 없어지는 물건이지만 때를 씻어준다. 물에 녹지 않는 비누는 결코 좋은 비누가 아니다. 사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려는 마음이 없고 몸만 사리는 사람은 녹지 않는 비누와 마찬가지로 나쁘다(존 워너메이커).

 사랑의 흐르는 본성 때문에 사랑이 있으면 질서가 받드시 생긴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FloidZaqpX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당신이 아버지께 가시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는 것이 당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러 가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성막을 짓기 위해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 40일을 머문 것과 같습니다. 모세를 따르는 이들은 그래서 하느님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거처에서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거처가 곧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이 모든 신비를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정리해주십니다. ‘길’은 통로입니다. 모세가 곧 하느님께 머무는 통로가 되어준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집에 머물 수 있습니다. 

    ‘진리’는 계시입니다. 예수님을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진리와 은총을 흘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은총이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시는 방법은 십자가의 자기 봉헌입니다. 항상 제물 위에 성령의 불이 내려오십니다. 성령은 생명이시기에 당신을 생명으로 인정하는 이에게만 오십니다. 하느님을 생명으로 인정하는 이는 자신을 죽음으로 인정하는 이와 같습니다. 자기를 주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 기도입니다. 따라서 기도 때 내려오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땠습니까? 하느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방법이 선악과를 바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십일조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생명의 주인임을 자처하려 한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느님이 생명의 원천임을 인정하는 자기 봉헌이고 제사이고 기도입니다. 미사 때 이 봉헌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성체로 모셔도 그분을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생명의 주체로 여기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먹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그 사람이 생명의 주인을 자신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창조자로 두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 덕분으로 자신이 산다고 여기는지, 아니면 자기 능력으로 자기가 살고 있다고 믿는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 덕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 그 아이는 분명 다른 아이의 돈을 빼앗는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부모와 관계가 좋다면 생명까지 주신 원천이 옆에 있기에 굳이 타인의 것에 손을 뻗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EBS 육아학교’에서 ‘물건 뺏는 첫째, 뺏기고 우는 동생’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지민이는 언니이고 지윤이는 동생인 자매입니다. 처음에 지민이는 동생이 생겼을 때 매우 잘 대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지윤이가 기어서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지민이는 지윤이의 모든 물건을 다 빼앗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합니다. 엄마는 ‘둘째에게 갈 수밖에 없는 사랑에 첫째가 질투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자연스레 생각했는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입니다. 

  

    유아 전문가 선생은 엄마가 두 자매와 노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민이는 지윤이가 가지고 노는 것을 다 빼앗았고, 엄마는 지윤이에게 욕심 많은 언니에게 지윤이가 양보하도록 합니다. 지금 이것은 엄마가 질서를 해치는 행위입니다. 지민이를 포기한 것입니다. 오히려 더 지윤이를 어른 취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전문가 선생은 엄마에게 따끔하게 말해줍니다. 지민이를 언니로 먼저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지윤이에게 양보하게 가르치면 언니는 영원히 욕심쟁이로 남습니다. 지민이는 장난감을 빼앗긴 지윤이에게 심지어 엄마가 듣는데도 “너네 엄마 저기 있잖아!”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윤이는 이런 지민이에게 다가가면 안 됩니다. 그에게서 흐르는 사랑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기도할 줄 모르면 자녀들은 그 부모에게서 어떤 사랑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피를 빨립니다. 

    만약 지민이를 포기하고 지윤이에게 더 사랑을 주면 지윤이는 나중에 엄마에게 고마워할까요? 사랑은 흐르는 것입니다. 지민이가 엄마에게 먼저 다가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윤이를 위한 공간을 언니가 마련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모두에게 흐를 수 있습니다. 언니를 그렇게 외면한 엄마가 언젠가 자신도 외면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겨 지윤이도 결국 엄마가 주는 사랑의 부담 때문에 엄마를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군가를 인정해준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있다고 믿어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엄마는 그것이 지민이가 아닌 동생 지윤이에게 더 있다고 믿어주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게 깨집니다. 먼저 지민이가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그래서 지윤이에게 엄마에게로 오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정은표 씨 가족 지웅이의 예를 들어볼까요? 정은표 씨는 김하얀 씨와 테니스를 칩니다. 그리고 지웅이에게 동생을 마중 나가라고 시킵니다. 지웅이는 아빠 미소로 동생을 돌봅니다. 맛있는 것도 사주고 목욕도 시켜줍니다. 

    어떻게 중3 아이가 남동생에게 그렇게 잘할 수 있는 것일까요?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잘한 것입니다. 지웅이를 동생의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으로 삼은 것입니다. 동생은 형 지웅이를 통해 부모에게 올 수 있고 지웅이는 부모에게 가기 위해 동생을 보살핍니다. 

  

    아마 정은표 씨에게는 자녀들보다 아내일 것입니다. 아내도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자녀들을 위해 남편에게 먼저 가야 함을 알 것입니다. 이렇게 이 가족은 사랑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흐르는지 잘 아는 가족입니다. 그래서 한 명도 소외되지 않고 에덴동산에 사는 것처럼 삽니다. 

  

    민수기에 모세의 형인 아론과 누나인 미르얌이 모세에게 대든 적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이방인인 에티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미르얌은 하느님이 동생 모세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통하여도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이 셋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당신 사랑에는 질서가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길을 건너뛸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인 구름이 물러가자 미르얌의 피부에 나병과 같은 병이 일어났습니다. 깜짝 놀란 아론은 미르얌을 위해 모세에게 중재합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러자 미르얌의 병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당신 사랑에 질서를 잡아주시는 이유는 모두에게 사랑이 흐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제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사제를 무시하고 신자들끼리 주님께 은총을 청한다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길로 지정해 준 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은총보다 오히려 안 좋은 것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라고 교회를 파견하셨는데, 그 교회를 무시하고 직접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겠다고 하는 개신교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무시하는 꼴이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입니다. 사랑은 흐름이기 때문에 질서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hKsyPfg39gM

창조 신앙은 부활 신앙으로 구체화됩니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음을 믿는 창조 신앙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통하여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그 현실에서 그분은 당신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요 추구해야 할 진리요 누려야 할 생명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도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고 그분께서 선포하신 진리를 믿으며 그분이 열어젖히신 생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수 있음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도들은 교회를 세웠고 곳곳에 널리 퍼뜨렸는데, 이 교회는 새 인간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설계를 지니고 세워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새 인간이며, 개별 실존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 살아가는 실존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설계도는 부활 신앙의 실제적 표현입니다. 

 

  몸은 머리가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지난 날 걸어온 길과 오늘날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이해하고 또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예측하려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 기준의 한쪽 저울은 그분의 행적이요 다른 쪽 저울은 그분의 가르침입니다. 이 저울로 지난 날과 오늘날은 물론 앞으로 갈 날의 교회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머리의 시선은 역사성으로 과거를, 사랑으로 현재를, 공동체성으로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구세주의 성모로 삼으신 시점이 요셉과 정혼한 직후였던 이유는 아브라함 이후 유다인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구세주를 준비시키신 역사성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토록 시행착오가 많았고 허물 투성이였던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디딤돌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예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면서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오로는 놀라운 통찰력으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예언자들과 아나빔들에 의해서 메시아를 기다려온 인류 유일의 역사임을 꿰뚫어 보고, 해외 디아스포라에 살던 동족들에게 알림으로써 이를 알아듣는 선교활동의 동역자를 구하고자 진정성 있게 호소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의 내용입니다. 

 

  사랑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심을 그분은 온몸으로 깨우쳐주고자 하셨습니다. 마음과 몸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일깨워주셨을 뿐만 아니라 같은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도 깨우쳐주셨습니다. 적어도, 다른 이들이 원하지 않는 것은 우리도 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는데 이것이 오늘날 윤리와 법률이 되었습니다. 가능하면, 다른 이들이 원하는 것을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먼저 행하되 대가를 기대하지 말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것을 기대하며 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영성이 되었습니다. 윤리와 법률은 사랑의 최소한이요 영성은 그 최대한입니다. 이 가르침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상호 섬김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희생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의 모범으로 나타났고, 이 두 가지가 다 오늘날 미사 중 성찬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두 가지를 합해서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신 자기비허의 사랑이라고 전해 주었습니다. 

 

  사도들은 이 사랑을 교회라는 터전에서 공동체성으로 구현하고자 동분서주하였습니다.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 양식은 그들이 알아들은 교회의 기반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기반이 되어야 그리스도 교회라고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교들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세 가지 양식으로 재림하시고 현존하시는 그분을 만날 수 있음을 현대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에게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이요 성찬이며 사랑의 섬김입니다. 특히 이 섬김은 가난한 이들에게 되갚아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베푸는 사랑으로 이루는 공동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고백문에 옛 교부들이 정해놓은 교회의 기준, 즉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여야 한다는 기준보다 더 성경적이며 더 정통성 있는 기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공의회의 쇄신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가톨릭교회가 정통 그리스도 교회가 될 수 있는 기준을 더 추가하였습니다. 그것은 세례 받은 모든 신자들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는 일이 그 첫째인데, 이로써 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경청하고 소통하며 공동으로 합의하는 인격적이고 민주적인 구조로 교회를 세우는 일이 그 둘째인데, 이는 교황청이나 교구청만의 일이 아니라 사도직 현장에서 절실히 필요한 일입니다. 추가된 이 두 가지 기준은 신앙고백문의 네 가지 기준에만 집착하다가 잃어버린 냉담자들과 익명의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을 불러 모으는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공의회가 상기시킨 세 가지 기준은 새롭지만 더 오래된 기준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야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 있고 새로운 인간도 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신학교에 들어가면 신학을 먼저 배울 줄 알았는데 철학을 먼저 배웠습니다철학이 바탕이 된 후에 신학을 배우는 것이 합리적이었기 때문입니다철학은 신학이라는 보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자연철학고대철학중세철학근대철학형이상학동양철학을 배웠습니다자연철학에서 기억에 남은 것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만물의 근원을 찾았다는 것입니다어떤 철학자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하고어떤 철학자는 만물의 근원은 공기라고 하고어떤 철학자는 만물의 근원은 원자라고 하였습니다. ‘공기이 만물의 근원이라고도 합니다철학의 방법론도 배웠습니다연역법과 귀납법을 배웠고합리론과 경험론을 배웠습니다그리고 이러한 방법론으로 만물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배웠고그것이 신학이었습니다신학에도 종류가 많았습니다성서신학윤리신학교의신학실천신학교회법이 있었습니다하느님은 전선하시고전능하시고전지하시고한분뿐이시라고 배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자유의지의 결과는 은총과 죄라고 배웠습니다자유의지를 하느님의 뜻을 찾고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데 사용하면 은총이 주어집니다자유의지를 욕망과 욕심을 찾고남을 해롭게 하는데 사용하면 죄가 드러나고 고통이 따릅니다지진화산활동태풍화재와 같은 자연재해를 통해서 고통이 드러나지만 그것은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우리의 몸이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듯이 우리가 있는 지구도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구조적인 죄세상의 죄가 있습니다그것은 자유의지를 남용하고잘못 사용하는 인간의 죄입니다전쟁과 폭력이 있습니다. 2번에 걸친 세계대전은 인간의 구조적인 죄의 결과를 드러냈습니다인종차별식민지 지배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었습니다신분혈연성별세대이념으로 인한 차별 또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진리요생명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길진리생명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산에 오를 때 먼저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작은 표시는 큰 힘이 됩니다그 길을 따라가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길은 먼저 간 사람들의 땀과 노력입니다역사는 혼자 달리는 마라톤이 아닙니다역사는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입니다앞선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고후손들에게 더 낳은 미래를 남겨주어야 합니다그것이 인류가 만들어 온 문명이며 문화입니다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희생의 길사랑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군중들의 모욕이 있었고제자들의 배신이 있었고뼈를 깎는 아픔이 있었습니다그러나 그 길은 부활의 길이었고희망의 길이었고영원한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공식을 알면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 수 있었습니다원리와 이치를 아는 사람은 지도와 나침판을 가지고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유교에서는 삼강오륜을 이야기합니다불교에서는 팔정도를 이야기합니다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삶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이런 가치와 척도로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자유가 없는 진리는 때로 독선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광신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나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합니다그것은 참된 진리가 아닙니다진리는 독점하고 억압하는 도구가 아닙니다진리는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죽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작됩니다알은 깨어지는 아픔을 거쳐야만 비로소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아기는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끊어야만 비로소 스스로 숨을 쉴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순교하였지만교회는 온 세상으로 전해졌습니다예수님께서는 권위명예성공을 추구하는 생명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건강하게 오래 사는 생명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어주고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고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어주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참된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과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우리는 예수님께서 길이요진리요생명이라는 것을 신앙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말로는 예수님께서 길이요진리요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행동은 다른 길을 찾고다른 진리를 찾아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어두운 밤 항해하는 배를 안내하는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습니다다만 밝은 빛으로 안내할 뿐입니다밤길을 안내하는 등대도 배가 가까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등대는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등대가 밝히는 빛을 따라서 암초를 피하고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리 들어오너라. 여기가 내 집이고 곧 네 집이란다!

 -양승국신부-

 

헨리 나웬 신부님이 큰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맨 적이 있습니다. 비장이 크게 파열되고, 수술 중 출혈이 심해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수술을 집도한 의료진들도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다행히 헨리 나웬 신부님은 고비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소생하게 되는데...

  

생사가 오락가락하던 절체절명의 순간 헨리 나웬 신부님 역시 요르단강을 건너갔다가 되돌아온 임사 체험을 했고, 그것을 회복 후 뚜렷이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죽음 체험의 조각들은 나중에 소책자로 엮어 출간되었는데, ‘거울 너머의 세계’입니다.

  

헨리 나웬 신부님은 죽음 체험의 순간이 너무나 은혜로워 의외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순간 어떤 크신 분, 따뜻한 분, 충만한 사랑으로 가득한 분의 현존이 느껴졌는데, 예수님임을 확신할 수 있었답니다.

 

 그 순간 그분께서는 세상 자상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 헨리, 잘 왔다. 진심으로 환영한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문을 하나 열어주시면서 말씀을 이어가셨답니다. “이리 들어오너라. 여기가 내 집이고 곧 네 집이란다.”

  

그 순간 헨리 나웬 신부님은 자신이 평생토록 안고 살아왔던 걱정과 근심, 고통과 슬픔, 죄책감과 우울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신비 체험을 할 수 있었답니다. 크신 분의 뜨거운 사랑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모든 어둠이 사라지는 느낌, 다시 태어나는 느낌, 꿈에도 그리던 영원한 고향에 안착한 느낌을 받았답니다.

  

오늘 요한복음 사가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한 체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복음 14장 1~3절)

  

따지고 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수명이 다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특급 서비스를 베푸십니다. 당신 아버지 집에 우리 거처를 마련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아버지 집으로 안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살이가 힘겨워질 때마다, 고통과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마다, 언젠가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올 때마다, 우리는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황공스럽게도 예수님께서 친히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길이 머물 자리를 마련해놓으셨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를 그 집으로 친히 안내해주신다는 것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

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고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요한 14,1-2)

 

이는 당신이 가시는 곳이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동시에 그곳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는 것을 통해 당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것도 밝혀줍니다.

그리고 당신은 본 바를 말하니, 아버지를 믿고 또한 당신을 믿으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그 거처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거처할 곳이 많아도 가서 거주하지 않으면, 그 집은 나의 거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알아듣지 못한 토마스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요한 14,5)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4)

 

사실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엄청난 발언이요,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으며,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또 당신이 '진리'라 함은 '진리(áληθεια) 원어의 뜻이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은 곧 진리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이 됩니다.

 

또한 당신이 '생명'이라 함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임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5)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알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참된 앎의 길입니다.

그저 안다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그것을 믿을 때라야 그 앎을 진정 알게 됩니다.

 

참된 앎은 진리를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믿고서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요한 14,1)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흔들리지 마라」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예견하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마저 배신하는 끔찍한 세상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은 너희가 머물 곳을 아버지 집에 마련하러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산란함 속에 살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에서도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적인 이득을 따지게 되고 계산하면서 결국은 주님의 뜻과는 먼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다다르는 수단이십니다. 아버지와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니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길이신 그분을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셔서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께서 그 안에 사십니다.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참된 생명을 추구하기에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완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구원을 알립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내 삶을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걸으신 삶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분은 그저 좋은 분으로 머물 뿐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매사에 내 뜻을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힘들면 힘이 들수록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에 믿음을 두는 만큼 용기를 얻게 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송영진신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이 말씀 앞에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는 말씀이 있고(요한 13,21),

당신이 떠나신다는 말씀(요한 13,33)과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말씀이(요한 13,38) 있습니다.

그 말씀들을 듣고 제자들은 몹시 불안해졌을 것이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불안감과 두려움은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입니다.

(모르니까 무서운 것입니다.

만일에 모든 일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면 용감하게 맞설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수난 당시에는 겁에 질려서 달아났지만,

예수님 부활 후에는 모두 용감하게 순교했습니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을 때에는 죽음 자체를 무서워했지만,

이 세상을 지나가면 저 세상에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확신하게 된 다음에는

믿음과 기쁨과 평화 속에서 순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라는 말씀은,

곧 닥칠 일들 때문에 불안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믿음과 용기를 주기 위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불안을 극복하여라.” 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든지 간에 ‘인류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는 변함이 없고, 또 아무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니 눈앞의 일만 보고서 흔들리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크게 방해를 받은 일이 아니라,

구원 사업의 한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있다고 해도,

죽음과 이별은 슬프고 아픈 일이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도 신앙인은 ‘믿음과 희망’으로 사별의 슬픔과 아픔을 극복합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ㄱ.25).”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믿음,

그리고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에서 모두 함께 모이기를 바라는 희망.>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2-4).”

 

여기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다.” 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들어가려고 노력하면

모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악의 세력에게 패배하는 일이 아니라 부활의 전 단계라는 것입니다.

‘다시 와서’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재림’이 아니라 ‘부활’을 뜻합니다.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뒤의 18절에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로 고아처럼 버려두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믿음과 희망의 근거입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너희는 나의 수난의 의미와 결과를 알아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수난 예고와 부활 예고 말씀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 때문에 슬퍼하거나 두려워하기만 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말씀들을 완전히 깨닫고 이해하고 믿게 된 때는

예수님 부활 후입니다(요한 2,22).

오늘날의 우리는 사도들의 그 깨달음과 믿음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그 깨달음과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5-6)”

 

토마스 사도의 질문은, 당시에 사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는 말은, 예수님 수난의 끝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집’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길’을 모른다는 말은,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로 해석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신앙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비롯해서 많은 가르침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미 가르쳐 주셨고, 그곳으로 앞장서 가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예수님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고, 또 ‘문’입니다(요한 10,9).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들과 가르침들만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는 ‘진리’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참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진리도 없고, 다른 생명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을 필요도 없고, 또 읽으면 안 되는 책들도 많습니다.

많이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진리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4주 금요일-내 있을 곳은 어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4월 30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