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7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2. 5. 7. 06:23

 2022 5 7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 6,60-69)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리따에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고, 야포로 가서 병들어 죽은 타비타라는 여제자를 다시 살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라고 하시자, 베드로 사도가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고 고백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고등학교 2년 동안 짝으로 매우 친한 동창이 있습니다. 마음도 잘 맞았고, 재미있는 시간도 함께 많이 보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 후에,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 신부가 되었고, 이 친구는 유학을 다녀와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사는 장소도 달라서, 저는 강화에 그리고 친구는 강원도 원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끔 전화 통화를 하기는 하지만,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고등학교 때 그리 친하지 않았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친구와는 만날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신학생 때에도 자주 만났고, 신부가 되어서도 자주 만났습니다. 그렇게 친했었던 의사 친구보다 이 친구와 더 친해졌습니다.

자주 만나지 않으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어떤 분은 나중에 시간이 많이 남으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주 만나지 않은 관계가 나중에 저절로 가까운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미워하는 사람도 자주 봐야 친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워하게 되면 아예 보지 않는 쪽을 선택합니다. 무조건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계속된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많은 이가 예수님의 말씀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떠나게 됩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의 행적을 분명히 계속 보았을 텐데도, 자기 뜻과 다르다는 판단 아래 주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계속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을 만나야 커지게 됩니다. 그러나 떠날 생각만 하면, 떠나야 할 이유만을 찾으면서 믿음도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떠나는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도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에게 세속적인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면, 주님을 떠나고 싶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속적인 이익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을 만나고 함께하면서 베드로의 고백을 외쳐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 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존 드라이든).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TnGO1aRmxUk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6장의 결론으로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 사건과 이로 말미암은 군중의 반응과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무리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루살렘이 위치한 유다 지방은 물론 갈릴래아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 등 당시 이스라엘의 전 지역에서 늘어나 퍼져나가는 선교적 상황을 전해줍니다. 그 무렵에 사도 베드로가 중풍에 걸려 누워 있던 애네아스를 일으켜 세우고, 병 들어 죽은 타비타를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표징을 증언하고 있는 요한복음서에서 제6장과 제7장은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로서 당신을 드러내고 계시는 특별한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명백히,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여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 성체성사의 배경이요 예표가 되는 말씀입니다. 성체와 성혈은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음식이며 음료입니다. 성체성사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변화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부활의 영광으로 거룩하게 변화된 기반 위에서 성체와 성혈을 영하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요 메시아 백성으로 거룩하게 변화되라는 요청과 목표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 요청과 목표는 영적인 부담으로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기운을 주고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는 은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체와 성혈이 축성되고 거룩하게 변화되며 신자들에게 나뉘어지는 성찬례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일상의 성사적 발현이며 재림인가 하면, 성령의 강림입니다. 

 

  그런데 성체성사에 담겨 있는 이러한 의미와 은총을 알아보지 못하는 신자들이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 당시에도 빵의 기적을 목격하고 직접 배불리 먹은 군중은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려고 할 정도로 그분께 열광을 하다가도, 육신을 배불리 먹이는 빵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에 대해 말씀하시고 이것이 장차 당신의 살과 피로 내어주실 것임을 암시하시자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담긴 뜻과 신비를 알아듣지 못하고 또 알아듣고자 할 의지도 없었던 자들은 모두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자기들 뱃속과 잇속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도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이 물음은 제자들의 거취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갈테면 가라는 말이었습니다. 평소에는 군중들에게는 여러 가지 비유로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시는 경우에도 제자들에게만은 자상하게 풀이를 해 주시던 예수님께서 이 순간만은 매서울 정도로 까칠하게 굴으셨습니다. 그만큼 최후의 만찬을 염두에 두시고 또 당신 생애를 이어줄 제자들이니만치 야무진 답변을 받아내시려고 작정하신 듯한 눈치였습니다. 사실 당신의 신원과 직결된 이 문제, 즉 당신을 생명의 빵으로 여기는지의 여부는 믿든지 떠나든지 양단간에 결판을 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수제자인 시몬 베드로가 팽팽한 긴장이 감돌던 이 분위기를 풀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을 두고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요한 6,68). 그랬던 베드로이기에 사도가 된 후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에 힘입어 병든 애네아스를 고치고 죽은 타비타를 살리는 기적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더욱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이 신적 권능으로 도와주신다는 믿음과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이런 기적들을 일으키자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이 유다, 사마리아, 갈릴래아 등지에서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사도행전은 전해주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놀라운 선교 성과는 이런 경위로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가 겪었던 풍어기적과. 마법의 숫자 153의 현실적 모습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과연 얼마마한 믿음이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밀도는 순도 100%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나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믿음이 순도 100%의 섬김이요 순종이었듯이, 제자들도 예수님께나 서로간에 순도 100%의 믿음과 섬김이 요구됩니다.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서로간에 순도 100%로 믿을 수 있는 인간관계를 이룩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기적적인 일이 생겨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마치 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발을 씻겨 주셨고 제자들끼리도 서로 그렇게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또 그분은 적대자들에게 마치 중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욕과 매질을 당하시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어도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으로 참아 받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나의 구원, 우리의 구원, 세상의 구원은 이러한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차례입니다.

 -조재형신부-

 

팬데믹 기간에 신부님들과 함께 자전거를 마련했습니다처음에는 시간도 많고같이 다닐 기회가 많아서 자주 자전거 모임을 가졌습니다일상으로 돌아오고모임을 주도하던 신부님이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가면서 자전거 모임이 뜸해졌습니다자전거를 타려면 헬멧장갑물병과 같이 챙겨야 할 것도 있습니다자전거에 대한 흥미가 적기 때문에자전거 타는 맛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자전거는 지하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이제 부활과 함께 봄이 찾아왔으니 다시 자전거를 타보려고 합니다저뿐만 아니라많은 분들이 시작은 하였지만 끝을 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다른 것들에 시간을 빼앗기기도 하고흥미를 덜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민사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분들을 봅니다대부분은 바쁜 가운데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다만 청년들이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봅니다학생 때는 복사도하고한국학교에도 나오고신앙생활을 합니다대학에 가면서 언어에 따른 불편을 겪게 됩니다한국성당에 나오지 않고미국성당에도 나가지 않으면서 신앙생활과 멀어지는 경우를 보았습니다봉사와 직책을 맡으면서 열심히 다니지만 직책을 내려놓으면서 신앙생활과 멀어지는 경우도 보았습니다본당 신부님의 사목방침에 대한 갈등으로 신앙생활과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멀리 이사를 가면서 자리를 잡지만 신앙생활과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늘 말씀하셨던 것처럼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사람들이 예수님 겉에 모인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물을 포도주로 만들고병자들을 고쳐주고배고픈 사람들이 풍족하게 먹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의 말씀에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건강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대한 희망입니다로마의 식민통치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희생과 봉사 그리고 겸손과 나눔을 이야기하셨습니다하느님의 아들은 사람들 손에 넘겨져 죽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의 말씀에 실망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주님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랐던 베드로는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무서워 떨었지만다시금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 사도는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훌륭하게 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을 치유하고죽은 사람까지 살려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그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립니다.

 

동창 신부님 중에는 상설고해 사제를 신청한 친구가 있습니다상처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싶다고 합니다본당 신부를 해 보았기 때문에 후배들을 위해서 자리를 양보하고 싶다고 합니다오랜 시간을 보좌신부로 있어야 하는 후배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내린 결정입니다이 또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떠나지 않으려는 결정인 것 같아서 보기 좋았습니다. 20년 가까이 도시빈민 사목을 하는 동창들이 있습니다사제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해 준 것이가장 아픈 이들에게 해 준 것이가장 헐벗은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때로 힘들고때로 외롭고때로 거친 삶을 살아가는 동창들 역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몸은 교계제도에 있지만 마음은 세상의 것들을 따르려 한다면 이미 주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어두운 곳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의 삶을 외면하고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꽃의 삶을 추구한다면 역시 주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지금 당장 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양승국신부-

 

요즘 계속 봉독되고 있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성장하고 확장되어가는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님의 직제자들이었던 사도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수제자였던 베드로 사도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하루는 베드로 사도가 리따라는 고을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팔 년 동안이나 중풍에 걸려 고생하는 애네아스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사도는 지체없이 그에게 말합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사도행전 9장 34절)

  

그러자 꼼짝 못하고 누워있던 애네아스는 베도로 사도의 말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애네아스 입장에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자리에서 껑충껑충 뛰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활약상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야포라는 고을에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선행과 자선으로 유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틈만 나면 가엾은 과부들을 위해 옷을 지어 건넸습니다. 

 

그런 타비타였는데 그녀가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애통해하면서 그녀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옆 고을 리따로 사람을 보내 빨리 야포로 건너와 주기를 청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후 무릎을 꿇고 오랫동안 기도한 다음, 시신을 향해 돌아서서 외쳤습니다.

  

“타비타야, 일어나시오.”(사도행전 9장 40절)

  

그러자 놀랍게도 타비타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저같았으면 기겁해서 도망쳤을텐데, 베드로 사도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다음 사람들에게 데리고 가 그녀를 보여주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행한 치유와 기적들은 공생활 절정기 예수님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말 한마디에 오랜 중풍병자가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섰습니다. 일어나라는 외침에 죽었던 사람조차 소생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행한 기적과 스승님께서 행하신 기적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를 보십시오. 기적이나 치유를 하기 전에 반드시 행했던 예비 동작이 있습니다. 스승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주시라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것이 명확한 차이점입니다.

  

내 이름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성령께서 그 자리에 언제나 함께하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늘 자신과 동행하시며 힘이 되어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했던 사도들이 주님처럼 놀라운 기적을 행한 비결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께 청하고, 예수님을 믿기 보다 그저 자신의 이름,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그동안 우리가 들어오던 요한복음 6장의 끝부분입니다.

앞 장면에서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임을 선포하시자, ‘유대인들’은 서로 수군거리고(41절) 말다툼(52절)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도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라고 투덜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요한 6,61-63)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이 생명의 빵’일 뿐만 아니라 이제 당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씀'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고, '영'인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은 말씀을 발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발설한 말씀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이를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씀은 읽는 이 안에서 자란다.”고 표현합니다.

 

이토록 성령께서는 에제키엘서(37,1-14)에서 보여주듯이, 죽은 문자인 마른 뼈들에 생기를 돋게 하고 뼈와 살이 붙게 하고, 문자를 성체가 되게 하여 우리가 받아먹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은 “생명을 주는 영”(로마 8,2)이라는 합니다.

이처럼 참으로 신비롭고 놀랍게도 참 생명이 영으로 말씀이 되시어 육화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령으로 도유된 독서’(lectio untionis)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가 생겨나게 됩니다.

성령께서 '말씀의 동반자이며 해석자'가 되시어 성경을 읽는 이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계시헌장(12항)과 가톨릭교회 교리서(111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건네주는 것이므로,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 속내를 꿰뚫어 읽어야 한다.

그러기에, 성령을 통해서 쓰려진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가고, 예수님께서는 남은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하시며 자유로운 응답을 요청하십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8-69)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계시한 바에 따라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으며, 하느님의 거룩한 분임을 믿어 왔고 또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수님을 ‘떠난 제자’와 ‘남는 제자’가 분리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어왔고 그래서 아는 자들’은 남은 제자가 되었고, 반면에 알고 믿고자 한 제자들은 떠나갔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는 ‘알고 믿는 것’보다 ‘믿어서 알게 되는 삶’이 먼저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생명이신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먹음으로 실행하게 하소서.

저희가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 말씀과 함께 하고, 말씀 속에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요한 6,67)

주님!

제가 떠나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 제 자신이오니 저 자신을 떠나게 하소서.

떠나온 자신마저 떠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더라도 당신 장막에 머물게 하소서!

흔들릴수록 더욱더 뿌리 깊게 내리는 믿음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도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 희망에 달려 있게 하소서!

아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라」

 -반영억신부-

 

어떤 사람이 전혀 새로운 사실을 얘기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되지도 않는 소리라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기대를 지니고 귀를 기울이는데 전혀 다른 소리를 하면 속이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지니게 됩니다. 누구든 자기가 기대하고 바라는 쪽으로 얘기하면 신이 나고 기분 좋아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못마땅해 담을 쌓게 됩니다. 그러나 큰 사람은 자기의 기대를 뛰어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줄도 알고 거기서 깨우침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듣기에 거북해하였습니다. 모르면 스승의 가르침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인데 그렇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무엇인들 비위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도 내 마음이 인간적인 욕망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림의 떡'이 되고 맙니다.

 

어른 신부님들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본당의 책임을 맡으면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3분의 1이라도 되면 성공이라네. 3분의 1은 관망하는 사람이고 또 3분의 1은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그러니 누구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용기를 가지고 추진하게.”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되돌아가고, 더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나약함을 지니고 사는 신부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여전히 믿을 가능성을 두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자유를 허락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 물론 믿음은 하느님께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림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믿음이 부족하여 이 사랑을 망각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결국, ‘떠날 테면 떠나라. 잡지 않겠다.’라는 가슴 아픈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아있던 제자 중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6,69).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것을 버리고 그분의 것으로 채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바로 내 생각과 다른 예수님을 닮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입니다.

 

‘너도 떠나겠느냐?’ ‘아닙니다. 당신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따르다 보면 당신을 알게 되리라 확신하며 그저 따르겠습니다. 훗날 당신을 등질지 모르지만, 지금 이순간은 당신이 나의 전부입니다.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을 따르고 당신을 느끼기까지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당신을 저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고백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꼭 끌어안고 살아가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적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당신의 살과 피를 내주시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칩니다. 당신의 몸을 생명으로 주시지만 합당하게 모시기에도 벅찹니다. 그러나 지금 포기하면 당신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기에 당신께 매달립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8).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3주 토요일-쓸모없는 살덩어리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4월 24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