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5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2. 5. 5. 06:59

 2022 5 5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요한 6,44-51)

 

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whoever eats this bread will live forever;
and the bread that I will give is 
my Flesh for the life of the worl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필리포스는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를 만나 세례를 주고,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시며, 누구든지 그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어떤 형제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워낙 사교육비가 많이 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형제님께 “형제님 월급으로 세 아이 공부시키는 것이 만만치가 않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는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주는 기쁨을 돈으로 어떻게 환산하겠습니까?”

아이 키우는 비용이 적지 않지만 키우는 기쁨이 훨씬 크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이 키우는데 기쁨만 있을까요? 고통과 시련도 분명히 있고, 기쁨보다 더 많은 힘듦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오는 작은 기쁨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커다란 이익을 통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기쁨으로도, 자그마한 사랑으로도, 자그마한 만족으로도 충분히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작은 것들을 무시하면서 오지 않을 큰 것만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빵이십니다. 이 빵은 세상의 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을 주는 세상의 빵과는 달리,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영원한 만족을 줍니다. 그런데 이를 이 세상 안에서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삶의 순간순간에서 느끼는 사람만이 생명의 빵을 체험할 수 있으며, 이런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 배불리 먹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로,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만나를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이 커다란 은총이라고 생각했기에, 과거 조상들에 대해 부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총을 얻었던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큰 은총을 얻게 된 것일까요?

커다란 은총이 주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일상 삶에서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느끼고, 또 그 주님과 함께하는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느끼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적다고, 아니 없다고 말하며 힘든 삶이라면서 한숨을 내쉬고 눈물짓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일상의 순간에서도 주님께 감사할 이유를 찾을 수가 있으며, 큰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짐을 나누는 것은 서로를 향해 마음을 베푸는 일이다(구병모).

 '생명의 빵'이 되려면: 이웃을 하느님처럼!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Pv46YSTFSis

 

사람이 창조자의 삶을 살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자면 반드시 ‘생명의 빵’이 되어야만 합니다. 생명의 빵이 되는 것이 창조자의 삶이고 남의 생명을 먹는 삶이 피조물의 삶입니다. 피조물은 죽지만 창조자는 영원히 삽니다. 예수님은 창조자로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자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지 몸소 생명의 빵이 되시며 보여주셨습니다. 

  

    어제는 생명의 빵이 되는 사람은 자신을 내어주어야 하는 대상을 ‘아버지께서 보내주셨다’라는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이와 관련된 것인데, 나에게 보내주신 이를 대하는 방식이 곧 아버지를 대하는 방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4-45) 

 

    나에게 맡겨지는 이는 이미 주님께서 나에게 그 사람을 보내주시기 위해 낳으시고 기르시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안에는 이미 그 사람을 보내주신 분이 들어있다고 보아도 됩니다. 이렇게 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곧 그 사람을 보낸 이를 대하는 방식과 같아집니다. 

  

    이옥란(67세) 씨에게는 여섯 살 유치원생 윤하라고 하는 유치원 딸이 있습니다. 폐지를 주워 팔고 쪽방촌에서 사는데 윤하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다닙니다. 윤하는 엄마가 리어커에 자신을 태우고 가도 밝고 똑똑한 아이입니다. 할머니라 불리는 엄마를 너무나 따릅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이옥란 씨는 가끔 한 건물을 기웃거립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보자 급히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피합니다. 이옥란 씨가 가끔 찾아가 멀리서 얼굴만 바라보는 사람은 45세 민지원 씨입니다. 민지원 씨는 변호사로서 잘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옥란 씨의 친딸은 민지원 씨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라고 하는 사람이 지원 씨를 찾아와 3천만 원만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원 씨는 3천만 원이 애들 장난이냐며 돌아섭니다. 그러자 이옥란 씨는 그 어머니를 찾아가 통장을 주며 어려움이 있으면 지원이보다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합니다. 통장을 받은 엄마는 지원이는 자기 딸이라며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소리칩니다. 이옥란 씨는 이렇게 누구에게나 죄인입니다. 

  

    멀리서만 딸을 지켜보던 이옥란 씨는 자신도 모르게 지원 씨에게 다가갔고 급기야 자신이 친엄마라 고백합니다. 지원 씨는 매우 화를 내며 자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느냐며 매몰차게 친엄마를 몰아세우고는 떠납니다. 

    이옥란 씨가 몸이 아파 누워있을 때 제작진은 민지원 씨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가 아프다고 말합니다. 민지원 씨는 엄마가 있는 쪽방촌에 처음으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손녀딸로 보이는 윤하를 보고는 또 화가 치밉니다. 자기는 남의 집에 버려놓고 결혼해서 손녀딸을 키우고 있는 엄마가 가증스러워 보였던 것입니다. 

  

    사실 윤하는 딸도 손녀딸도 아닙니다. 쪽방촌 이웃인 술집 여자가 맡겨놓고 나중에 찾으러 온다고 하고 도망친 것입니다. 이옥란 씨는 스물두 살 때 아기를 갖습니다. 남자는 도망쳤습니다. 친정에서 쫓겨나 어린 나이에 아기를 키울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았던 시골 마을 제일 큰 부잣집에 아기를 몰래 놓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 집엔 아이가 없었고 덕분에 하늘이 내려준 딸이라 믿고 지원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잘 키웠습니다. 

  

    옥란 씨는 서울로 올라와 일하며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딸을 한 번이라도 만나고 죽겠다는 심정으로 굳은 일을 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비록 쪽방촌에 살지만, 윤하를 남부럽지 않은 비싼 유치원에 보내고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수 있었던 것이 어느 정도는 재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알게 된 지원 씨는 윤하를 보며 엄마가 지금까지 자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버린 죄책감을 버려진 윤하를 통해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지원 씨는 부잣집에서 자랐지만 부모가 아이를 낳자 구박 덩이로 바뀌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갖은 궂은일을 다 해야 했습니다. 양어머니는 시험 전날에도 일부러 지원 씨에게 일과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지원 씨는 우연히 옆집 어른들에게 자신이 친딸이 아님을 듣게 되었고 지원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독립하여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변호사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키워준 부모의 가세는 기울었고 이제는 지원 씨에게 와서 돈을 구걸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지원 씨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와 키운 어머니 중 누구를 택할까요? 지원 씨의 선택은 친엄마입니다. 친엄마는 자신이 아이를 버린 경험이 있기에 버려진 아이를 대하는 모습이 곧 자기 친딸을 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반면 지원 씨를 키워준 엄마는 지원 씨를 버려진 아이를 자기가 키워준다는 생각으로 키웠습니다. 이런 마음 안에는 그 버린 어머니에 대한 판단이 들어있습니다. 지원 씨의 친엄마를 죄인으로 여긴 것입니다. 

  

    지원 씨가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오열하는 모습은 코끝을 찡하게 합니다. 얼마나 먹고 싶은 밥이었을까요? 지원 씨의 친어머니는 윤하를 대하는 모습으로 지원 씨를 어떻게 대했을 것인지를 지원 씨가 믿게 했습니다. 이옥란 씨는 딸을 버렸지만 진정으로 생명의 빵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카카오 TV ‘모큐멘터리 진짜 사랑 5’에 소개된 사연입니다. 여기에 달린 댓글 중 하나입니다. 

    “지원 씨 양부모한테 아무것도 해주지 마세요. 그들은 지원 씨한테 부모 역할을 제대로 안 했어요. 차라리 고아원에 버렸으면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켜주고 적어도 집안일 다 시키지는 않았겠죠. 그리고 나중에 돈도 안 뜯어가고요. 어차피 고등학교까지만 살고 나와 혼자 알바하며 이 악물고 공부한 건데 양부모가 왜 지원 씨한테 돈을 요구하나요? 앞으로는 절대 아무것도 해 주지 마세요. 고마운 사람들 아닙니다. 지원 씨와 윤하 그리고 어머니,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이 댓글에 많은 동감을 표시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대하는 방식은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주신 하느님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에게 주이진 이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내가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보내주신 사람을 좋지 않게 대해서 그 사람을 보내주신 하느님을 죄인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이들이 귀찮은 존재라면 나는 그 사람을 보내신 주님을 귀찮은 존재라 여기는 것입니다. 

  

    지원 씨의 양부모는 지원 씨를 처음엔 하늘이 보내주었다고 여겼지만, 나중에는 지원이를 키우며 그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에게 생명의 빵이 될 수 없습니다. 아이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가 됩니다. 그러면 모기로 심판받게 됩니다. 

  

    교회에 맡겨진 이들은 하느님께서 그 교회에 머물 수 있도록 이미 교육하시고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마치 교회가 대신 키워주는 것처럼 여겨서는 교회가 그들에게 생명의 빵이 될 수 없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며 나는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더라도 그들을 하느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신자들을 하느님처럼 대하지 않는 교회는 그래서 생명의 빵이 될 수 없고 그러면 나중에 하느님도 고마움보다는 질책을 하실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 되기 위해 나에게 오는 이들을 그 보내주신 하느님처럼 보려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마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고 해 보십시오. 내가 생명의 빵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대하는 방식이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주신 분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XWf1vdCotbA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사기지은을 사도들에게만 발휘하신 것이 아니라 부제 필리포스에게도 발휘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나, 남쪽 에티오피아의 고관에게나 그리고 서쪽 해안지방의 아스돗과 카이사리아에게도 종횡무진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그에게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그가 한 곳에서 복음 선포 임무를 마치면 그를 잡아채듯 데려가셨습니다.

 

  필리포스가 사마리아에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나서, 악령을 몰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사도 8,6-8).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천사를 시켜 그에게 사마리아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라고 하셔서,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을 만났습니다. 왕실 고관이었던 그 에티오피아 사람은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는데, 필리포스에게 그 뜻을 풀이해 달라고 청해 왔습니다. 필리포스가 그 대목을 보니, 고난받는 메시아의 셋째(이사 50,4-11)와 넷째 노래(이사 52,13-53,12)였습니다. 그래서 필리포스는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기다려온 대망사상과 그 메시아가 영광 대신에 받게 된 수난의 운명을 내다본 이사야의 예언, 그리고 과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와 그 결과로 겪으셔야 했던 수난에다가 부활하신 이야기들을 그 고관에게 전해 주었더니 세례를 받겠다고 청해서 바로 세례를 주었습니다(사도 8,35-38). 

 

  그는 왕실의 고관이었으므로 그의 세례는 복음이 에티오피아를 비롯해서 인접한 북아프리카 지방의 여러 나라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본시 에티오피아인들은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의 자손들인 동시에, 바벨탑을 세우고 수메르 문명의 시조가 된 함의 아들 니므롯의 후손들이기도 했습니다(창세 10,6-8). 니므롯은 힘센 장사여서 많은 무리를 이끌었으며 신아르 지방에 왕국을 세우고 바벨탑을 세웠습니다(창세 10,10; 11,2-4). 그런데 니므롯과 그 수하들의 의도는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자신들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것이었으므로, 하느님께서 그들의 말을 흩어놓아 탑이 세워지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창세 11,4-8). 수메르 문명이 이렇게 시작되었는데, 이제 필리포스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짐으로써 2천 년 가까이 우상을 숭배하던 문명이 하느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를 만난 것입니다. 

 

  이에 반해 노아의 첫째 아들인 셈의 자손 중에서 4대손 에베르의 큰 아들인 펠렉과 작은 아들인 욕탄에게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맡기신 신앙의 문명은 바벨탑의 서방과 동방으로 나뉘어 퍼져나갔습니다(창세 10,21.25). 펠렉의 6대손인 아브람은 수메르 문명을 탈출하여 바벨탑의 서쪽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고(창세 11,16-27), 욕탄은 후손들과 함께 바벨탑의 동쪽인 메사에서 동부 산악 지방인 스파르 쪽까지 동방에 하느님의 신앙 문명을 세웠습니다(창세 10,30). 그 후 2천 년 가까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오셨고, 예수 부활 이후 그리스도 신앙이 바오로와 그 후임자 선교사들에 의해 서향했다가 1천6백여 년이 흐른 후에 아시아에 다시 전해졌다가, 다시 2백여 년이 흘러 아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에 자리잡은 한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신앙의 복음이 전해지던 그 무렵, 한민족은 욕탄과 그 후손들에 의해서 전해진 하느님의 신앙 문명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조선 왕조와 유림들이 가한 백년 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일단 받아들인 신앙을 굿굿하게 지켜냈습니다. 이 하느님 신앙 문명의 흔적은, 제천의식과 고인돌 유적, 천손의식과 홍익인간의 이념입니다.

 

  욕탄과 그 후손들이 노아로부터 전수받은 하느님 신앙 문명을 동방의 여러 지역, 특히 가장 동쪽에 살면서 밝은 해를 숭상하며 제관의 복장인 흰 옷을 즐겨입던 배달민족에게 전해준 지 무려 3천여 년만에 그리스도 신앙의 복음과 만났으니, 그 과정이 실로 오묘합니다.

 

  이벽의 5대조 이경상은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북경에 가서 아담 샬 신부를 만나 천주교 서적을 다수 얻어왔으므로 이벽은 어려서부터 마테오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를 비롯하여 당시 간행된 천주교 서적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기가 막힌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니 이 땅에 자생적으로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복음 진리가 들어온 과정이 하느님의 기묘한 섭리에 의한 결과였다고 교회사가들이 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과정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의 사기지은을 발휘하시어 필리포스를 움직이신 것처럼, 이탈리아 선교사인 마테오리치와 그의 초청을 받아 온 독일 선교사인 아담 샬 그리고 이경상을 통해서 복음 진리가 먼저 전해졌다가 150여 년, 다섯 세대를 거친 후에 그 5대손인 이벽을 통해 결정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가 한민족에게 전해지도록 섭리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이 장구한 역사의 과정에서 유난히 선과 의로움의 가치에 민감하고 신앙 진리를 스스로 받아들였으며 또 박해도 능히 이겨내고 아시아의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교회를 이룩할 수 없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주님의 성령께서 위 네 사람을 이끄시어 이룩하신 위대한 복음화의 역사입니다. 

-조재형신부-

 

제가 강의를 하면서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제목은 영원한 사랑입니다가사의 내용이 아름답기에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별처럼내 마음 깊은 그곳에고요히 밝아오는 빛의 향기로우리 사랑은 영원히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빛나는내 마음 깊은 그곳에마르지 않는 샘물 되어 흐르오./ 우리 사랑은 영원히때로는 외로움에 눈물지어도그대 나에게 등불이 되어말없는 눈빛으로 기도해영원한 사랑을 위해나 이제 당신 위해 꽃을 드려요눈빛 순결한 사랑의고요한 두 마음이 두 손을 모아영원한 사랑을 위해” 저는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별처럼이라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영원한 사랑은 갈망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는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이것을 수학적인 공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물리적인 법칙으로 알아내는 것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영원한 생명은 수학적인 계산으로 답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영원한 생명은 물리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영원한 생명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도 물어보십니다. ‘여러분들도 내 곁을 떠날 것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대답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그러니 우리는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사랑에서 시작됩니다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사랑 때문에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요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사도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았습니다스테파노 부제바오로 사도신앙의 선조들은 이런 삶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이분들에게 물리적인 방식의 영원한 생명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수학적인 방식의 영원한 생명도 소용이 없었습니다영원한 생명은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오지도 않은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지금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지금의 충실한 삶이 과거가 되는 것이고지금의 행복한 삶이 미래로 다가오는 것입니다영원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영원한 삶은 신앙 안에서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과 갈망이 만나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물건들을 모아서 아이티에 있는 꽃동네로 보내는 자매님이 있습니다귀찮은 일입니다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하지만 그 일을 몇 년째 하고 있습니다자매님의 사랑과 갈망은 굶주리고병들어가는 아이티의 고통 받는 이들에게 생명의 빵이 되고 있습니다물리학적인 시간생물학적인 시간은 유한합니다그러나 순간을 말씀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그 끝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그 끝은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매일 기도하십시오항상 기뻐하십시오.’ 

 

미사의 충만한 은총

 -양승국신부-

 

기도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하시는 분들, 이런저런 사연으로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계시는 분들에게 저는 즉시 매일 미사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장합니다. 왜냐하면 미사만큼 좋은 치료제, 미사만큼 좋은 해결책은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미사가 우리에게 건네는 은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성인·성녀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미사 중에 우리는 영광스럽게도 주님께서 마련하신 만찬상에 초대됩니다. 미사 중에 우리는 수많은 성인·성녀들, 천사들, 꿈속에서도 조차 그리운 사랑했던 사람들의 영혼들과 만나며 하나 됩니다.

  

이토록 부당하고 보잘것없는 죄인들 속으로 거듭 임하시고 현존하시는 거룩하신 주님의 몸을 모심을 통해 우리 역시 거룩하고 빛나는 존재로 재탄생합니다. 이보다 더 큰 영예와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복음서 역시 성체성사의 놀라운 은총에 대해서 명확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복음 6장 51절)

  

성체성사를 통해서 유한한 우리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존재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썩어 없어질 우리였는데 영원불멸하신 하느님의 존재에 스며듭니다. 주님의 거룩한 몸을 모심으로 인해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갑니다. 바로 성체성사가 매일 우리에게 건네는 은총입니다. 

 

“매일 우리의 밥이 되어 오시는 주님, 당신 성체를 통해 매일 우리를 구원하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기적을 찾아, 특별한 그 무엇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지만 사실 매일 거행되는 사랑의 성체성사보다 더 큰 기적은 없음을 우리가 깨닫게 해 주십시오.

  

우리 부족한 죄인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이 되풀이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그저 해치워야만 하는 숙제처럼 여기는 우리를 용서하십시오.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가 마치 마지막 미사이듯 정성을 다하게 도와주십시오. 매일 봉헌되는 미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선물임을 알게 도와주십시오.

  

매일의 미사가 우리가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기도임을 알게 해 주십시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영근신부-

 

요즈음 계속해서 빵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요,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예언서의 말씀을 일깨워줍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 6,44)

 

여기서 '마지막 날'은 육체적 숨이 멈추는 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기 직전의 날을 말해줍니다.

곧 생명의 주님을 만나면 이전의 자신이 죽고 나날이 변화되는 새로운 날이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임을 말해줌과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일이요, 아버지께로 이끄심임을 말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51)

 

여기서 '살아있는'이란 말은 당신의 실재성을 말합니다.

곧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다는 실재성입니다.

그 실재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생명의 빵이요, 건너와 관계를 맺는 활동 중인 빵임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곧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살리고 있는 활동 중인 빵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빵'은 동시에 '살리는 빵'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먹는 이 안에서 부활하는 빵입니다.

이 빵은 다름 아닌 신성의 '당신의 살' 입니다.

살아있는 살이요, 떼어 나누어지는 살입니다.

 

그리하여 먹는 이에게서 살아있는 살이 되고, 우리의 살을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당신의 생명이 됩니다.

곧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합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살은 우리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증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몸이 되게 하시고, 당신 생명이 되게 하시고, 당신 신성에 들게 하고, 우리에게서 부활하십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빵을 먹을 것인지 거부할 것이지는 우리 스스로가 응답해야 할 몫입니다.

만약 먹지 않는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이를 알면서도 먹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음은 일입니다.

 

오늘도 분명 우리는 살아있는 이 빵을,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곧 '그분의 살'을 먹습니다.

하느님의 이 큰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51)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쪼개어 떼어주십니다.

오늘 제가 저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건네주는 빵이 되게 하소서!

다름 아닌, 내가 만든 빵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빵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신앙은 선물」

 -반영억신부-

 

저의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신부님께서 상주하지 않으시는 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주일이면 성당에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어도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 갔고, 밭에 나가서 풀을 뽑는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기 싫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는 본이, 아니게 열심히 기도하는 착실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잘 보이려고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일찍 나서서 청소도 하고 주변 정돈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소회장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저는 지금 신부가 되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공소회장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자매는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시골 공소였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하여 저를 신앙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순간, 순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신앙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믿음은 미처 나도 모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셨지만 강하게 이끌어 주신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불러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름을 주님의 초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의탁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선물을 통하여 생명의 빵으로 다가오시는 아들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6,47).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48,5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에 대한 ‘눈높이’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참 하느님이시고 이 땅에 살과 뼈를 지니신 채 사셨던 분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시며 우리를 부르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효과 있는 은총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은 하늘이 되었고, 하늘은 이미 여기서 열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은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서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추구에서 벗어나 우리를 진정 살리는 것을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빵’은 살아있는 양식으로 모셔야 합니다. 살아있는 빵을 죽은 양식으로 모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모시는 거룩한 성체는 우리의 영혼과 삶 안으로 모셔야 살아있게 됩니다. 그저 입 안으로 성체의 빵만을 먹으면 결국, 이스라엘처럼 만나를 먹고도 죽은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야 합니다”(함께야). 신앙의 삶은 예수님을 닮는 여정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송영진신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4-45).”

 

이 말씀에서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으면”입니다.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는,

“내가 주는 구원과 생명을 받지 못한다.”입니다.

‘아무도’ 라는 말은 예외가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충실하게 응답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표현만 보면,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으로,

또 이끌어 주지 않으시는 사람도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18,14).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사람’과 ‘이끌어 주지 않으시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을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과 응답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가르침은,

하느님께서는 ‘나’를 구원하기를 바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동시에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부르심에 관해서 말할 때, “하느님께서는 ‘저런 사람도’ 부르셨다.”가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나 같은 사람도’ 부르셨다.” 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나의 구원’을, 또 ‘나의 응답’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저런 사람’의 구원과 응답을 특별한 일로 생각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위선자들의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 같은 사람’도 구원하려고 애쓰신다는 것을 믿는 겸손한 믿음과

그것에 대해서 감사드리는 마음에서 진정한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과 말씀들과 가르침들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곧 ‘예수님의 말씀’입니다(요한 3,34).

“나에게 온다.”는 “내가 주는 구원과 생명을 받을 수 있다.”입니다.

‘누구나’ 라는 말은, 자격을 갖추기만 하면, 억울하게 탈락하는 일 없이

모두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6,46).”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뜻입니다(요한 14,6).

예수님이 없어도 하느님과 직접 통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파가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또 메시아가 없어도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수행을 해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가 있는데,

그런 종교는 그냥 ‘다른 종교’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7-51).”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주신 ‘만나’는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양식이

아니었고, 광야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만일에 이스라엘이 ‘만나’만 보지 않고,

‘만나’를 주신 하느님을 제대로 섬겼다면,

또 ‘육신의 배고픔’만 생각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추구했다면,

결과가 다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라는 말에는, ‘만나’를 통해서도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었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만나’가 내릴 때의 장면을 보면,

이스라엘은 ‘만나’ 덕분에 굶어죽지 않게 된 것을 기뻐하지도 않았고,

‘만나’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만나’가 지긋지긋하다고 불평했습니다(민수 11,6.공동번역).

그들의 멸망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성체’를 받아먹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산 사람에게는 내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믿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는 말씀을, “나는 생명의 주님이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원천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생명의 원천은 예수님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룬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성체를 먹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라는 계시입니다.

“이 빵을 먹으면”은,

뜻으로는 “이 빵을 먹어야만”(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야만)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의 살이다.”는 “나 자신이다.”입니다.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빵

 -김찬선신부-

 

"나는 생명의 빵이다."

 

성경 말씀을 어떻게 번역하느냐 그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글자 하나로 뜻이 달라질 수도 있고 강조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은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번역한 것을

오늘 복음에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차이가 있는 것이라기보는 강조점이 있는 것일 겁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라는 번역은 다른 것이 생명의 빵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생명의 빵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러니 다른 빵을 찾지 말고 당신을 찾으라는 뜻도 있는 거구요.

 

예를 들어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고 우리는 산삼이니 영지버섯을 찾는데

그런 것들을 찾지 말고 참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만나를 운운하는데 그것이 생명이 빵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을 하신 다음

오늘 다시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은 강조점이 '내가'가 아니라 '생명의'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은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 다음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당신의 살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죽음의 빵이 아니고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이며,

더 나아가 죽어 있는 빵이 아니라 살아 있는 빵이라는 말씀이고,

그래서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효모와 유산균이 죽어 있는 살균 막걸리에 비해

생막걸리는 그것들이 살아 있는 것과 같이 생명이 생동하고,

그래서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는 생명을 주는 빵인 것입니다.

 

그러니 약으로 치면 알부민 주사와도 같은 것일 겁니다.

제 친구가 살아 있을 때 아주 가끔 알부민 주사를 맞았는데

그것을 맞으면 신기하게도 반짝 생기가 돌곤 했는데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일지라도

그것을 믿고 간절히 원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빵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마늘 빵보다도 맛없고 그래서 원치 않는 빵일 뿐입니다.

 

어제와 그제는 저의 식당에 젊은이들이 와서 봉사를 했습니다.

일은 어른들보다 서툴러서 제가 많이 그리고 더 힘들었지만,

식당에 생기가 돌고 저도 싱싱한 피를 수혈받는 듯 힘을 받았지요.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근자에 만났던 다른 젊은이들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인생을 낭비하고 특히 그 아까운 젊음을 허비하는 젊은이들 말입니다.

젊은데 시들시들하고, 사는 것이 재미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의미는 없고 재미로 살려고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잃거나 가져본 적이 없이 살다가 그리된 것입니다.

 

어찌하여 생명이 주어졌고,

어떻게 해야 생명을 잘 살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았기에

생명이 귀중하지 않고 생명이 있어도 생명력이 없습니다.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 소중한 이유,

태어나기는 했는데 먹을 것이 없어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들이

그래도 태어난 것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 영원한 생명을 생각지 않으면

젊은이건 늙은이건 사는 것이 다 허무하고 시들시들할 수밖에 없고,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모르고 살면 누구나 다 이렇습니다.

 

모두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빵을 먹고

생기있게 살게되기를 비는 오늘 아침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4월 22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