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3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Margaret K 2022. 5. 3. 06:28

2022 5 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필립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열두 사도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바르톨로메오로 짐작되는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려와 사도가 되게 하였다(요한 1,43-51 참조).  

성경에 나오는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과 알패오의 아들이 있는데, 오늘 기념하는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이다. ‘작은 야고보’라 불리기도 하는 야고보는 신약 성경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였다. 예수님의 형제로 불리는 야고보(마태 13,55 참조)와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요한 14,6-14)

 

"Have I been with you for so long a time
and you still do not know me, Phili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이미 전한 복음을 상기시키며, 그리스도께서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당신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분의 말 습관 중에 “아니죠”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심하다 싶게 “아니죠”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그렇게 잘못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점점 이 분과 함께 하는 자리가 힘들었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얼마 뒤 다른 분을 만나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앞의 분과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제 말에 “맞아요.”라면서 맞장구를 쳐주시는 것입니다. 이분과의 대화는 너무나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한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후딱 지나간 것 같았습니다.

이 두 만남을 기억하면서 주님과의 대화에 대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일에 대해서 “아니죠.”라고 기도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기도는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아마 나의 부정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말만 늘어놓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에 “맞아요”라고 하면서 기도한다면 어떨까요? 주님과 진정한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신나 하시며 이런 나와 함께 하려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당신만 따르면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이 곧 진리요 생명이시니 그분과 하나이신 예수님 자신이 진리요 생명이신 것입니다.

열두 사도 중 이론가로 통하는 필립보가 나서서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필립보를 향해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하시지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간직하기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제자들도 힘들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향해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없이는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어떻게든 믿음을 간직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입니다. 일상 삶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며, 예수님과 계속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계속된 대화를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요? “아니죠”라는 부정적인 말로 과연 대화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모든 일을 인정할 수 있는 긍정적인 말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맞아요.”라는 말의 시작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질 것입니다.
작은 걸음이 당신을 더 만족스러운 목표로 데려갈 것이다. 비행기는 경로를 살짝만 바꿔도 수천 킬로미터 후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한다(미리암 융게).

 '부족하기에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길이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0pj700Z2UUQ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길’이시라는 말씀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말로 설명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생명’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본성, 곧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회 정제천 신부님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셨을 때 통역을 맡으셨던 분입니다. 자신이 사제가 되도록 이끌어 주신 분을 이분은 그리스도라 확신하십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졌을 때 이분은 우선 출세와 정의 중, 어떤 편에 서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당시 군부 독재와 그 군부 독재를 지지하는 지식인층, 그리고 이를 묵인하는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정제천 신부는 그들 부류에는 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출세는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중에 “내가 왜 사는가?”라는 문제는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산다면 60, 70세가 되어도 인생이 허무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상한 환시 같은 것을 봅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창밖의 노을을 가리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천아 봐라. 저것이 인생이란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누구인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를 이리저리 공부한 후에 세례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제까지 된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교황님과 함께 헬기를 타고 오는 도중에 석양의 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 신부는 교황님께 노을이 아름답다고 말했고, 교황님은 그 노을을 보며 예수회에서 살다가 간 위대한 성인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정 신부는 여기까지 자신을 이끌어 주신 분이 그리스도라고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해 참 진리의 삶을 선택하는 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왜 정 신부에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셨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정 신부는 그때 노을보다도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압도되어 온전한 길을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리와 생명으로 이끄는 분은 항상 도달한 분이 아니라 ‘도정’에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담 없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이고 직접 그 길을 가시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유입니다. 

  

    이태석 신부를 생각해봅시다. 얼마 전 이태석 신부의 제자인 토마스가 의사가 되어 방송 프로그램인 유퀴즈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토마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신부님은 토마스에게 그리스도께 가는 길이었고, 그리스도의 삶의 계시였으며, 또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해주었습니다. 

  

    물론 히틀러와 같은 반대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아니, 길이고 거짓이고 죽음이었습니다. 알로이스는 술을 좋아하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면 난폭했습니다. 아이를 열등감의 길로 가게 만들어 그리스도가 아닌 거짓된 진리를 드러냈고 결국엔 자살로 이르게 하였습니다. 히틀러가 훗날 독일 수상이 되고 비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매일같이 계속되는 매질 속에서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조용히 매질의 회수를 새어 나갔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누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향하는 방향으로 누군가의 길이 되어준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려면 나는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은 그 좋은 예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이 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알에서 태어나서 나뭇잎을 먹으며 몸집을 불립니다. 그리고 남들이 하는 것처럼 애벌레 탑을 올라갑니다. 경쟁에 뛰어든 것입니다. 거기에서 노랑 애벌레를 만납니다. 둘은 경쟁에서 잠시 떨어져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줄무늬 애벌레는 탑의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탑을 오릅니다. 노랑 애벌레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위태로워 보이는 한 애벌레를 만납니다. 그는 고치를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랑 애벌레에게 그 고치를 만들고 있던 애벌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어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를 보렴. 나는 지금 고치를 만들고 있단다. 내가 마치 숨어 버리는 듯이 보이지만, 고치는 결코 도피처가 아니야. 고치는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잠시 들어가 머무는 집이란다. 고치는 중요한 단계란다. 일단 고치에 들어가면 다시는 애벌레 생활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고치 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노랑 애벌레에게 나비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대상은 나비가 아니라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같은 애벌레라는 것입니다. 나비는 애벌레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설사 말이 통한다고 하더라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변화의 과정에 있는 자라야만, 곧 내가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께 가고 있는 사람이어야만 그 사람을 이미 나비가 되신 그리스도께 초대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파견하신 이유입니다.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나타나서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예수님처럼 물 위를 부족하게나마 걸어본 베드로가 말하는 것이 우리에겐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이태석 신부가 되어 사는 것보다 이태석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모습이 토마스에겐 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의 길입니다. 하지만 내가 진리로 가고 있는지, 거짓으로 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몸을 가리며 거짓으로 향했습니다. 진리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거짓으로 이끄는 것은 죽음입니다. 거짓이 없으면 그 사람을 통해 진리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끕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bc11lCjzYTs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인물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열두 제자에 속했고, 사도가 되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습니다.

 

  필립보는 베싸이다 출신으로 본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서 파국이 임박했던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운동에 동참하고 있다가 요한의 추천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하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러 오신 분임을 알아보았는데,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함께 있다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으며(요한 1,40,43), 그분이 메시아임을 단번에 알아보고는 세례운동의 동지였던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천거하였습니다. 

 

  또한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이며 예수님의 친척이었습니다. 다른 친척 형제들이 인간적인 선입견에 사로 잡혀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던 반면에 야고보는 그분의 신성을 믿고 제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공동체의 첫 주교로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요구할 것인지 아니면 면제해 주어야 할 것인지를 놓고 격론을 벌였던 첫 사도회의에서 회의를 주재하며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의견을 존중하여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 면제 결정을 이끌어내어 이방인 선교의 물꼬를 튼 인물입니다(사도 15,13).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사도 요한의 형이었던 야고보와 동명이인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작은 야고보, 후자를 큰 야고보로 구분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의 마지막을 앞두시고 세족례와 성찬례를 세우신 다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고 말씀하시자,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 6-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덧붙여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1-14)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제자 시절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메시아이심을 알아보고 일생을 바쳐 투신하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안목과 열정이 뛰어났던 두 사람이지만, 그분이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이 정작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력에 대해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기 이전에도 이미 신성을 발휘하고 계셨고, 우리에게도 그 신성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세족례와 성찬례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세족례의 정신에 따라 다른 이들을 섬기기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며, 또 그 대상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인 경우도 많지만 그때마다 하느님을 만나뵙지는 못합니다. 경험과 인식 그리고 믿음과 깨달음의 분리 현상이 필립보와 야고보에서처럼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성찬례가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성사의 성변화를 알고 또 믿고 있지만 영성체를 하면서도 이로써 우리가 주님의 몸이 되었으며 그분과 일치되어 살아갈 기운을 얻었다는 사실에는 깨달음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발적으로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 가운데 주일미사를 나오지 않는, 이른바 냉담자의 비율이 80%를 넘는다는 통계가 이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던 시절에도 신성이 진하게 배어있는 말씀으로 군중을 가르치셨고, 더군다나 신성에서 나온 권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기적들을 숱하게 일으키셨는데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1-9)를 말씀하셔야 했던 사정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아들을 귀나 알아볼 눈이 없으면 하느님이 눈앞에 나타나셔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람이 육신으로는 하늘이 낸 공기로 숨을 쉬고 땅이 낸 양식으로 힘을 얻으며 살아가지만, 영혼으로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과 당신의 몸과 피로 내어주신 성체와 성혈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숨 쉬는 공기와 힘을 주는 양식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듯이, 우리가 추구하고 또 기대며 살아가는 온갖 의미와 진리가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데도 이에 대해서도 무심하게 살아가는 신자들 또한 부지기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물질문명의 현실에 있어서도 선도하는 사람의 비율은 0.1%, 이를 알아보고 그에 동참하여 시대의 선구자가 되는 사람들의 비율은 0.9%라고 합니다. 도합 이 1%가 인류 역사의 물질문명을 이제껏 이끌어 왔습니다. 나머지 99%의 사람들은 그 혜택을 누릴 뿐이었지요. 정신문화의 현실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조재형신부-

 

가톨릭평화신문에 허영엽 신부가 만난 사람들이라는 지면이 있습니다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배우언론인가수시인산악인교도관처럼 직업이 다양하였습니다그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첫 번째는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입니다그 성실함으로 인정받고존경받는 사람들입니다두 번째는 삶의 기준이 되는 신앙입니다그분들에게 신앙은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2022년 4월 20일 지면에 소개된 교정직 공무원 정여경 헬레나 씨의 이야기는 작은 감동이었습니다수형자들이 삶을 돌아보고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도관인 자신이 바른 길을 가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비록 몸은 감옥에 있어도 마음이 자유롭다면 새로운 날을 만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몸은 물론 마음까지 감옥에 갇혀있으면 새로운 날이 찾아와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야고보와 필립보 사도 축일입니다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성서는 12명의 사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사도들은 교회의 역사와 성서의 기록에 의해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요한 사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오늘 사도들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들 또한 사도들의 뒤를 이어 충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인간이 오랜 지구의 역사에서 우뚝 서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사자처럼 용맹하지 않아도곰처럼 힘이 세지 않아도독수리처럼 높이 날지 않아도표범처럼 빠르지 않아도 인간은 문명과 역사를 발전시켰고스스로의 힘으로 지구 넘어서 별을 향해 꿈을 펼치고 있습니다.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그 중심에 신용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화폐를 중심으로 경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화폐경제의 핵심은 신용입니다신용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도 물물거래를 해야 할 것입니다물물거래를 하는 상황에서는 지금의 경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지구상의 다른 동물들은 화폐를 이용해서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상대방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물건을 구합니다인터넷을 통해서 금융거래를 합니다이 또한 신용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신용이 사라지는 곳에는 대립과 갈등이 자라게 됩니다상대방에 대한 보복과 전쟁은 아름다운 문명을 황폐하게 만들게 됩니다남과 북은 엉킨 실타래처럼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협력문화교류상호방문군비축소는 남과 북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사랑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이해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면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합니다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 그 자체입니다바오로 사도는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고 이야기 합니다나중에는 칠삭둥이 같은 자신에게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말을 합니다이제 우리는 주님을 우리의 눈으로 보기보다는 우리의 가슴으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예수님께서도 토마사도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많은 분들이 세례를 받았고신앙생활을 합니다머리로는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지만가슴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물과 공기는 우리가 너무 쉽게 접하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그러나 우리는 물과 공기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주님께서는 우리 곁에 물과 공기처럼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우리가 다른 곳을 보기 때문에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우리 마음의 눈은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자주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탐욕과 교만은 우리의 가슴에서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아 버리기 때문입니다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필립보야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결핍은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양승국신부-

 

길에 대해서 묵상하는 날입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인 고독과 침묵 기도의 길을 걸으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참된 나를 만나는 길인 동시에 우리 속에 감춰진 가장 큰 생명과 만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어려우면서도 쉬운 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과 나 단둘이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무를 때만이 그분께서 내 삶의 근원이 되고, 내 정체성의 유일한 근원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을 바로 눈앞에 뵙듯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기도해야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아주 크고 사납고 나이도 먹어 산전수전 다 겪은, 그래서 사는 것도 지루해 보이는 큰 개와 인형같이 작고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도 모르고,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한 새끼강아지가 있다면 아이들은 어느 쪽으로 달려가서 놀겠습니까? 아마도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아이들은 작고 어린 강아지 쪽으로 달려가겠지요.

  

살레시오 회원으로 살아가면서도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잘 성장해서 체격도 이젠 당당하고, 공부도 곧잘 따라가고,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는 아이와 어린 시절부터 못 얻어먹어 체구도 또래 아이들과 크게 비교될 정도로 왜소하고, 자주 아프고, 늘 뒤처지는 아이가 있다고 할 때, 먼저 시선이 가는 쪽은 어느 쪽일까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당연히 덜떨어진 아이에게로 시선이 먼저 가겠지요.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일까요? 우리가 그간 쌓아온 업적 때문일까요? 우리의 성공, 승승장구해온 빛나는 삶 때문일까요?

  

제 생각은 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나약함, 우리의 한계,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의 결핍은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며, 우리를 향한 한량없는 하느님의 측은지심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을 한번 둘러봤습니다. 결핍, 작음, 나약함, 연약함, 소박함...이런 단어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성장제일주의 경제우선주의 구호에 파묻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홀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좁고 작은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작은 모습으로 오셨고 인간으로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겸손의 삶을 일관되게 살아가셨습니다. 그분은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 빠져들지 않으시고 초지일관 가난과 소박함을 바탕으로 한 무소유의 삶, 영적 삶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길’이라고 지칭하십니다. 오직 그 길만을 총해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그 길, 오늘 우리의 묵상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길은 작음과 겸손함, 한없는 자기 낮춤, 가난을 배경으로 한 빛나는 작은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하심을 통해, 당신 친히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정도(正道)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이 세상에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사랑이시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동시에 그 사랑을 몸소 체현(體現)하신 이유로 진리 자체, 진리의 화신이 되신 것입니다.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요한 14,7)

 

그러자 필립보는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4,8) 라고 간청합니다.

이 간청은 또한 우리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진정 우리도 그분 뵙기를 열망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9)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주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갔을 때, 요한이 베드로를 뒤따라 무덤으로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할 때 사용된 동사('호라오')입니다.

 

그러니 이는 보고 깨닫고 믿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깨달아 알아보는 것은 ‘믿음으로 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믿음으로 보는 것’이 깨달아 아는 것이요,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통합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뵙는 데는 믿음으로 깨달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요한 14,11)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볼 때 보고 깨달아 알게 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믿음’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보는 것’은 그것을 ‘믿는 것’을 넘어서, ‘보는 것’을 먼저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볼 때라야 참된 앎이 오게 됩니다.

곧 믿음으로 예수님을 볼 때 아버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무지가 여전히 믿음의 부족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한 11,40)

 

믿음이 그분을 뵙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알게 하고, 보게 할 것입니다.

결국 믿으면 영광을 볼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귀착됩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저에게서 결코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해 주십시오.

오늘 그 믿음으로 아버지를 뵙게 하소서.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시는 주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를 뵙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한마음 한 몸」
-반영억신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는 옛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짐작하여 알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오래도록 함께 지낸다 해도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를 내 보이지 않는 이상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내 보여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상대를 알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읽을 수 있는 관계형성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비록 어둔 밤일지라도 마치 남의 이목이 집중된 장소에서 하듯 눈속임이 없는, ‘동상이몽’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뵙게 하여 달라고 청하는 필립보에게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셨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는 필립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고 해도 마음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가정 안에서도 고부간, 부부간에, 부자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함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마음’으로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보면 작은 아들이 방종한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때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를 타이르자, 그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하며 불만을 토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아들이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훌륭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불평을 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읽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 있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섬겼으나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하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합니다.’하고 말하면서도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으니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2-13). 고 약속해 주셨음에도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나 봅니다.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은 고사하고 그분의 일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니 믿음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부족한 저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당신을 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송영진신부-

 

모세가 하느님께 ‘영광’을(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 33,2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고 사랑하고 섬기는 하느님을 직접 뵙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신앙인의 소망인데, 하느님께서는 왜 당신의 모습을 안 보여주실까?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피해서 숨었을 때부터(창세 3,8)

시작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일부러 당신의 모습을 감추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쪽에서 스스로 하느님을 볼 수 없는 처지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인간의 처지를 원상 복구시켜 주려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 14,8-9)”

 

아버지를 직접 뵙고 싶어 한 필립보 사도의 심정은 모세의 심정과 같습니다.

여기서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라는 말은,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라는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히브리서에 있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히브 1,3ㄱ).”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 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티토 2,13).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입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보는 것은 하느님을 보는 것과 같다.” 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두 신앙’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6-7).”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유일하고 참된 생명’입니다.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진리도 없고, 다른 생명도 없습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0-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요한 3,34).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요한 5,19).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라는 말씀은,

앞의 10장 38절에도 나오는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예수님의 신원을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이 말씀은, 당신이 승천하신 뒤에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입니다(마르 16,15).

‘내가 하는 일’은, 여기서는 ‘선교활동’을 뜻합니다.

‘그보다 더 큰 일’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규모와 범위가 더 큰 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역에서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일하셨는데,

승천 후에 제자들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런 뜻에서 ‘그보다 더 큰 일’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승천’을 뜻합니다.

<‘그보다 더 큰 일’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보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루카 6,40).

그리고 예수님처럼 된다는 말은, 예수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는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14).”

 

이 말씀은, 당신이 시키신 일을 수행하는 이들을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라고

약속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을 시키기만 하고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일을 해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무엇이든지’ 라는 말은, 아무거나 다 청하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려면,

그것이 예수님 뜻에 합당한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는 ‘내 뜻’만 생각하면서 고집부리지 말고,

결과를 ‘예수님의 뜻’에 모두 맡겨 드리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깨닫는 방법은?

나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겨 드리는 ‘겸손한 기도’입니다.>

말씀 나누기 -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헛되이 믿는 것이 아니려면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5월 3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