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4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2. 5. 4. 06:15

 2022년 5월 4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요한 6,35-40)

 

 I came down from heaven 
not to do my own will
but the will of the one who sent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며,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현대에도 영양실조에 걸리는 사람이 많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 못 먹어서’가 아니라, ‘잘못 먹어서’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쁜 일상에서 즉석식 또는 간편식으로 빠르고 간편하게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이 익숙해진 것입니다. 균형 잡힌 식단이 아니어서 영양 부족 현상을 보이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간편하고 편한 식사가 몸에는 좋지 않습니다. 또 자기 좋아하는 것만 먹는다면 어떨까요? 이 역시 몸에 좋지 않습니다. 특히 필수 영양소를 섭취하지 않으면 몸에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신앙인에서 필수 영양소는 ‘주님’이십니다. 영적 생명의 양식인 주님인데 우리는 주님께 얼마나 가까이 가고 있습니까? 편하고 쉬운 것만 생각해서,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성당 미사에 오시는 분은 팬데믹 이전보다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성당에 못 가고 방송 미사를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당도 안 가고 방송도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편하고 간단한 것만을 선택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생명의 양식이신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영양실조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사람들이 빵을 주제로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빵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식인 빵을 의미하는 줄 알고 그 빵을 자기들에게 좀 달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이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매일매일 먹어도 배고픈 일용품의 빵이 아니고, 양을 따질 수 없는 영적인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이다’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자기 계시를 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가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있는 나다.”(탈출 3,6)라고 말씀하셨지요. 이런 표현으로 요한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참포도나무요.’(요한 15,1)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하나임을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먹는 사람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편하고 쉬운 것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영적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으려면,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해야만 합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고독을 즐기게 된다는 것은 외로움을 슬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꺼이 혼자가 되는 것, 즉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 모두에게 이런 변화가 필요하다(러스킨 본드).

 나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람에게만 생명의 빵이 된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faRJeylhS9k

예수님은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생명의 빵은 창조자의 모습입니다. 나를 희생하여 누군가를 살리는 존재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창조자’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두 양식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피조물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자 방식입니다. 피조물은 모기처럼 이웃을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창조자는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빵으로 내어줍니다. 
  
    그런데 내가 피조물로 살 것인가, 창조자로 살 것인가는 내가 만나는 사람을 내가 어떤 모습으로 대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웃을 창조자 하느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으로 보는지, 아니면 내가 선택한 사람으로 보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나 당신에게 오는 이들이 당신이 아닌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한 6,37)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이웃을 대하는 방식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보내주신 이들이라 여기십니다. 다시 말해 내가 선택한 이들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이들로서, 이웃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빵이 되시는 것이고 영원한 창조자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가장 혐오스러운 유튜버가 있습니다. 구독자 300만이 넘는 유명한 유튜버지만 그는 인기와 돈을 얻기 위해 자신을 혹사하고 있습니다. 니코카도 아보카도라는 이 유튜버는 처음에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시식 장면을 방송했습니다. 가끔 바이올린도 켰습니다. 하지만 그런 맹맹한 방식으로는 구독자를 모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모으려 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기임을 입증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서 맡겨주시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빵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독자를 모으려 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해 음식을 모으는 피조물의 모습입니다. 
  
    어쨌거나 아보카도는 작전을 바꿔 친구와 함께 아보카도 1만 칼로리를 폭식하는 동영상을 내보냈고 엄청난 구독자 수의 증가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지금까지 유지하던 채식주의를 포기하고 인스턴트 식품을 폭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것도 안 되니 음식으로 엽기적인 행위를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독자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댓글 대부분은 이제 악플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엽기적인 행위를 멈출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비싼 집에 사는 영리치가 되었지만, 산소호흡기까지 쓰며 생활해야 할 정도로 몸을 망가뜨렸습니다. 심지어 산소호흡기를 끼고 먹는 방송을 합니다. 죽음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로 사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우리는 창조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이들도 창조된 피조물들이 됩니다. 주인이 계셔야지 사람을 만날 때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만납니다. 이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자 본성에 참여하게 도와주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생명의 빵이 됩니다. 생명의 빵은 창조자로서 영원히 삽니다. 
  
    하루는 떡볶이 가게에 한 아저씨가 찾아와 떡볶이 500원어치만 달라고 청합니다. 아주머니는 돈이 없어 보이는 아저씨를 위해 떡볶이를 푸짐하게 주었고 “아저씨, 배고프시면 아무 때나 오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아저씨는 정말 아무 때나 와서 아무 말 없이 당연한 듯 떡볶이를 먹고 계산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렸습니다. 
이렇게 공짜로 드리는 떡볶이 값은 매달 약 70만 원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그냥 먹고 나가는 그 아저씨에게 무려 8년 동안 그렇게 떡볶이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피조물일까요, 창조자일까요? 당연히 창조자의 마음가짐을 가졌습니다. 돈을 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창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저씨를 대하는 자세에서 드러납니다. 제작진은 묻습니다. 
    “사람을 돕는 게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억지로 했다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그냥 쉬웠어요. 오시면 드리기만 했으니까요.”
아주머니는 ‘떡볶이 천사’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말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천사일 수가 있겠어요. 저는 그런 분들을 많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분들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일어나니까요.”
  
    현재 그 남자는 지자체 복지팀의 도움으로 정신과 병원에 입원 치료 중입니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그 남자가 이번 달 말일쯤 의사 선생님의 결정으로 퇴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작진이 물었습니다. 
    “만약 그분이 퇴원하셔서 다시 당연한 듯이 요구할 수도 있잖아요?”
    “드려야죠. 그런 마음은 늘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부자나 권위가 있고 그런 분들한테는 순종이 쉽지만 이렇게 낮은 곳에 계신 분들한테는 무시하거나 이런 부분들이 많잖아요.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하는 그런 삶을 살면…. 그런 분들을 통해 낮아지고 그분을 통해서 순종하는 법을 배웠어요.”
  
    “낮아지고 순종하는 법”을 당연한 듯 무전취식 하는 아저씨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이는 자신도 피조물임을 믿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자녀를 키울 수 있는 이유는 부모가 자신을 키웠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받아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창조자가 있다는 사실은 자녀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창조자의 사랑을 할 줄 아는 이런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만날 때 창조자가 맡겨주신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면 우리도 생명의 빵이 될 수 있습니다.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은 죽지만 창조자는 영원히 삽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창조자는 그 생명이 마를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우리도 창조되었음을 믿읍시다. 그래야 사람들을 피조물로 보고 내가 창조된 그 창조의 소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창조의 대상으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창조된 피조물로 여기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요한 6,37-39)
  
    자신을 피조물이라고 여기는 사람만 창조자가 되고 생명의 빵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창조자만이 영원합니다. 우리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어서 좋을 게 무엇이겠습니까? 생존에 집착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다 죽습니다. 창조자로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려면 나도 창조되었음을 믿고 내가 만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맡겨주셨다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맡겨주신 이를 하나도 잃지 않으시려는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도 생명의 빵으로 영원히 살려면 내가 만나는 이웃을 주님께서 살리라고 보내주신 선물로 여겨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HQ1P2JJCDio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장차 당신을 믿을 신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생명의 물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며,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 6,35.41; 7,37-38).

 

  오늘 독서에서 부제 필리포스는 사마리아로 가서 생명의 빵이요 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였는데, 사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각별한 연민의 마음과 복음화 열망을 지니고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찾아가 만나셨던 지방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가 자리잡고 있었던 사마리아의 주민들은 남유다왕국에 속했던 유다 지방 주민들은 물론, 같은 북이스라엘왕국에 속했던 갈릴래아 지방 주민들보다도 더 기구한 운명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역사적 연원은 열두 지파와 요셉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집트 파라오는 당시 재상이었던 요셉이 대사제 포티 페라의 딸 아스낫과 혼인하도록 주선했었습니다(창세 41,45). 당시 서른 살이었던 요셉과 아스낫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므나쎄이고 둘째가 에프라임이었습니다(창세 41,51-52). 야곱은 죽음이 임박하자, 집안 일가를 대기근의 참사에서 구한 요셉의 공로를 보아 자신의 열 아들에게 축복을 내려주면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나쎄와 에프라임에게도 요셉과 동등한 자격을 주었습니다(창세 48,5). -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단, 납달리, 갓, 아셀, 요셉, 베냐민)이 있었는데 레위 지파가 하느님의 소유가 되면서(민수 1,47-54; 3,12) 레위지파는 열두 지파에서 제외되었습니다 – 손자뻘인 므나쎄와 에프라임을 아들 반열에 올려준 조치는 야곱이 요셉에게 감사하는 마음에서 내려준 특별한 배려였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자기 자리에 두 아들을 모두 올려서 두 아들은 나중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시조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에프라임 지파 출신으로는 여호수아(민수 13,8)와 드보라(판관 4,4), 압돈(판관 12,13), 사무엘(1사무 1,1) 등이 있습니다. 모세가 죽은 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열두 지파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었는데, 에프라임 지파는 비옥하고 초지가 넓은 팔레스티나 중부 지역을 할당받았습니다. 이들은 커다란 세력으로 자라났고 솔로몬 이후 왕국이 분열했던 기원전 931년 당시 북이스라엘 왕국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 당시에 에프라임 지파와 므나쎄 지파의 후손들은 자신들 지파의 시조들만큼이나 가까운 사이로 지냈습니다. 

 

  므나쎄 지파 출신으로는 기드온(판관 6,11)과 입타(판관 11,1)가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이후 므나쎄 지파 역시 팔레스티나 중앙부에 정착했지만 요르단 강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져 살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교류가 뜸해지는 바람에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었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왕국이 기원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해 정복되면서 비옥한 초원 지대를 탐낸 앗시리아의 인구 재배치 정책에 의해 지도자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로 전락했고 그 대신에 에프라임 지파가 살던 지역에는 앗시리아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정착하게 했으므로 남아있던 백성들은 이들과 어울려 혼혈로 살아야 했으니 이들이 훗날의 사마리아인들입니다. 

 

  ‘사마리아’라는 이름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여섯 번째 왕인 오므리가 원래 땅 주인인 ‘세메르’로부터 그 산을 샀던 데에서 유래하였습니다(1열왕 16,24). 사마리아인들은 앗시리아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서 앗시리아인들과 혈통상으로도 혼혈이 되었음은 물론 이민족이 들여온 우상숭배 풍습과 이교적 문화에 동화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했으며, 자기 탓 없이 타의로 혼혈과 우상숭배 풍습을 받아들여야 했던 사마리아인들도 자신들을 경멸하던 유다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서로 상종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알고 계셨을 예수님께서 이방인 통치자의 잘못된 결정으로 꼬일 대로 꼬여버린 역사적 매듭을 풀어주시려고 의도적으로 비운의 땅 사마리아에 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이러한 역사적 사연과 예수님의 뜻을 알고 사마리아를 찾아가서 생명의 빵이시오 물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자기 탓없이 정치가들의 뜻에 따라 갈라지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으며 헤어져 살아온 북녘과 남녘은 사마리아와 유다 및 갈릴래아의 처지와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들은 이들이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을 남녘과 북녘에 사는 겨레 모두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5천년 동안 함께 살아오다가 겨우 70년 동안 그것도 남의 탓으로 헤어져 살아온 겨레를, 서로 미워하라고 부추기는 자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그분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이시며 생명의 물이십니다.

 -조재형신부-


개신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분을 만났습니다개종한 이유는 행복해 보이는 친척이 가톨릭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개신교회와는 많이 다른 가톨릭의 전례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았습니다개신교회에는 없는 예식들이 가톨릭에는 있기 때문입니다성수고상성상들에 대해서 궁금해 했습니다정화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드렸습니다가톨릭에서 이야기하는 존경공경흠숭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드렸습니다목사님과는 와인을 마셔본 적이 없는데 사제와 와인을 마시는 것이 생소하다고 합니다젊은 날 교회에서 음주를 금하는 것이 아쉬웠다고 합니다가톨릭은 음주에 대해서 상당히 관대한 것이 놀라웠다고 합니다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가톨릭은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덜 한다고 하였습니다가톨릭에는 수도원 영성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영신수련도 있으니 나중에 피정에도 참석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개신교회를 떠나서 가톨릭으로 온 것에 대해서 변심’ 한 것에 대해서 마음에 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가톨릭이슬람개신교유대교는 뿌리가 같다고 설명해 드렸습니다같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바오로 사도의 변심이 아니라회심에 대해서 설명해 드렸더니 마음의 짐이 가벼워졌다고 합니다개신교회에서 했던 열심한 신앙으로 가톨릭에서도 열심히 하면 하느님께서 같은 축복을 주실 거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변심은 나의 욕심과 욕망 때문에 마음이 바뀌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드라마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재물 때문에성공에 대한 미련 때문에 모든 것을 바쳐서 헌신했던 연인을 버린다면 그것은 변심입니다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리를 찾아 나선다면 그것은 회심입니다대기업에서 성공이 보장된 자리를 버리고 아프리카로 선교사로 떠난 분을 보았습니다회심이라 생각합니다종교라는 옷을 갈아입는 것이직분을 바꾸는 것이 회심이 아닙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의 것들과 결별하는 것이 회심입니다.

 

우리에게 균형 잡힌 신앙이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어떤 분은 철야가 좋다고 철야기도를 주로 다니기도 하고어떤 분은 좋은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매일 강의를 들으러 가기도 합니다어떤 분은 성지순례가 좋다고 성지순례를 많이 다니기도 합니다그러나 신앙생활도 적당한 균형이 필요합니다어떤 것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일까요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분심과 잡념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과로하지 않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세상의 일과는 멀어지게 된다고 합니다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까지 세상의 일들 때문에 주일에 성당에 못나오는 것을 봅니다.

둘째는 자주 기도하는 것입니다손을 자주 씻는 것만으로도 질병을 예방할 수 있듯이우리가 자주 기도드리면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기도는 나의 영혼에 묻어 있는 허물들을 씻어내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사도들도 모든 일들을 감사하게 여기고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성사에 자주 참여하는 것입니다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받아 모시는 것은 나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고백성사를 통해서 영혼을 정화시키는 사람은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곧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성당에서 시작하는 교육과 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은 신앙생활을 더욱 활기차게 할 수 있습니다늘 그렇지만 열심히 기도하고신앙생활을 잘 하는 분들이 교육과 피정에 더 많이 참석하는 것을 봅니다그분들은 교육과 피정의 효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정말 교육을 받고피정을 통해서 지친 영혼을 정화시켜야 하는 분들은 아무리 좋은 피정이 있어도 교육이 있어도 함께하지 못합니다바쁘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시작되었어도사도들은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그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모든 능력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셨고자신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교만욕심이라는 장애를 넘어서야 합니다우리는 희생과 봉사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그럴 때 사랑으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존재의 기반이며 존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양승국신부-

 

하느님 아버지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뜻이 전해지는데,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지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나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복음 6장 39~40절)

  

이로써 우리 인생 각자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 의지, 최종 목표가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은혜롭게도 우리가 죽어도 죽지 않는 것, 또 다른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 부활하는 것, 구원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백번이고 천번이고 틈만 나면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마땅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우리 각자 인생 안에 적용하고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 측의 노력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매일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생명의 빵인 예수님을 지극정성으로 영하는 것입니다. 과분하게도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의 몸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성체성사가 우리에게 건네는 핵심 교훈인 희생과 자비의 삶을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라는 진리, 우리 역시 존귀하신 성체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우리 역시 그 성체로 인해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진리를 굳게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독생성자 예수님께서 매일 내 인생 여정 안에 굳건하게 현존하시고, 매일 내가 걷는 인생길에 친구처럼 동반하시며 함께 걸으심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비록 어쩔 수 없는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수시로 죄에 떨어지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영원히 존재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존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을 통해서 성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 존재에 합일함을 통해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각자를 포함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존재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근원이며 존재의 기반이며 존재 그 자체이십니다.

  

매일 매순간 하느님 존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그분 존재 안에 숨 쉬고 머무르며, 그분 뜻 안에 살고, 그분 뜻을 실천함을 통해 우리 존재의 빛을 발하는 그런 하루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빵을 청하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곧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선언문입니다.

곧 당신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 신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신 생명의 신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빵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한참 뒤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성찬의 빵’이 거기에 강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육체의 고통을 없애 줄뿐인 육체의 양식이 아니라,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라는 뜻입니다.

본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이제 죽음을 이기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육체를 썩지 않게 보존해 주십니다.

곧 당신이 ‘참 생명이요 참 양식’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이 빵을 먹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곧 예수님께 와서 믿고 받아먹는 이 안에서 실현되는 생명의 빵입니다.

그리하여, 이 빵은 믿는 이의 생명을 참된 생명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요한 6,39-40)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 데 전념합니다.

곧 당신께 와서 보고 믿는 이들을 살리십니다.

이렇게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보고”(Θεωρεω)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각작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참되게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십자가 아래서 “이 일들을 보고”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라고 고백할 사용된 동사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아들을 보면서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보는 것’(요한 12,45)과 같은 그런 봄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우리의 내적인 눈이 열려야 할 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열리는 눈입니다.

믿음으로 보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는다.”

(요한 6,37)

주님!

아래로 흐를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 주고, 사랑해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며,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제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지금 여기서, 오늘이 중요하다」

 -반영억신부-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연 구원받게 될 것인가? 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 순종하면 족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끝까지 순종하는 믿음의 삶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뜻은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은 미래의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지금 그때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준비하는 오늘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문은 세상에서 이미 열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신앙생활은 먼 미래에만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서 내 삶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이미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성체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면 좋겠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전적인 자기희생의 삶, 겸손의 삶을 추구하고 이웃을 위해 밥이 되어주고, 영양이 되어주는 삶을 엮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편하게 계시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는데 그 어떤 장애물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송영진신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요한 6,35-36).”

 

여기서 ‘배고픔’과 ‘목마름’은,

우리가 인생살이와 세속 생활에서 겪는 고통들과 슬픔 등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그 ‘배고픔’에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생명의 빵’이신 분이고,

또 그 ‘목마름’에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생명의 물’이신 분입니다(요한 4,14; 7,38).

묵시록에서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나라” 라고 말합니다(묵시 21,4).

예수님은 바로 그 나라로 우리를 데려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생명과 평화와 안식은

죽은 다음에나 얻어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서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시작되고,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이곳에서 시작해야 그곳에서 완성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화와 안식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미리 누리는 생활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많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화와 안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인생의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리는 것은 같은데,

그들은 그 배고픔과 목마름을 탐욕과 집착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탐욕과 집착 때문에 더 큰 배고픔과 목마름에 빠집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1-4).”

베드로 사도는 신앙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탐욕과 집착으로 무엇인가를 얻는다 해도(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그것은 허무하게 말라 떨어질 풀꽃을 얻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 허무에서 해방되려면 탐욕과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탐욕과 집착을 버리려면 영원하신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요한 6,37-38).”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끝까지 책임지겠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이라는 말과

“나에게 오는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따로 정해 놓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예수님은 그 뜻을 실천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여기서 ‘하나도 잃지 않고’ 라는 말과 ‘누구나’ 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이 그렇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고,

‘모든 사람’이 무조건 그렇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도 잃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지만,

스스로 떨어져 나가서 잃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뒤의 60절과 66절을 보면, 예수님 말씀이 듣기가 거북하다면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났고,

열두 제자만 남았습니다(66절-67절).

그런데 열두 제자 가운데에서도 한 명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70절-71절).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 예수님을 보고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즉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라고 해도,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탈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탓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부르심’은 변함이 없는데,

인간 쪽의 ‘응답’이 확고하지 않아서 그렇게 됩니다.

‘응답’은 한 번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완성’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그것이 ‘응답의 완성’입니다.

‘마지막 날’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 즉 종말의 날을 가리킵니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중간에 떨어져 나가지 않고 끝까지 노력한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끝까지’는 ‘종말 때까지’가 아니라, ‘이 세상의 인생을 마칠 때까지’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회개할 기회도 없고, 새로 시작할 기회도 없습니다.

따라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신앙생활에 ‘나중’은 없습니다.

위기가 전기가 되고 기회가 되도록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파노의 순교가 교회에 크나큰 전기가 됨을 보여줍니다.

큰 박해가 시작되고 사도들 말고는 신자들이 흩어집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지키지만,

그밖의 신자들은 예루살렘 아닌 곳으로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도 교회가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받기 시작했다고,

신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교회란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데 하느님 백성이 흩어졌으니

그때 당장은 그리고 겉으로 보면 교회가 풍전등화입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 곧 바람 앞의 등불이니 예루살렘 교회가

하느님 교회요 우리 교회의 전부라면 정말 암울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신 것은 흩어진 양들을 모으기 위해 오셨고,

당신 교회를 세우기 위해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는데

주님의 그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지경이 된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고,

그 바람은 바오로를 비롯하여 유대교 골수분자들이 일으킨 광풍입니다.

 

이 광풍 앞에서 신앙이 미약한 사람은 믿음의 불이 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광풍이 불어도 꺼지지 않고,

박해자의 광풍이 성령의 바람이 되어 오히려 열정을 불타오르게 하고

그래서 교회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가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박해자의 광풍을 성령의 바람으로 얼마든지 바꾸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마음에 신앙만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으면 바람을 타고 갑니다.

 

그러면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려 가 떨어지는 그곳에 씨를 뿌리듯

흩어져간 곳이 복음의 꽃을 피울 곳이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많은 교우촌이 박해를 피해 숨어든 곳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앙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간직하고 있으면 어디 가든 신앙을 퍼트리고,

영성을 간직하고 있으면 어디 가든 영성을 퍼트릴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만 있으면 위기가 아니고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앞서 스테파노의 순교와 박해가 교회에 큰 전기가 되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처럼 교회의 위기가 전기가 되어 기회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도 위기가 전기가 되고 기회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4월 21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