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일 부활 제3주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19)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Peter was distressed that Jesus had said to him a third time,
“Do you love me?” and he said to him,
“Lord, you know everything; you know that I love you.”
Jesus said to him, “Feed my shee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사도들은 신문하는 대사제에게,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다며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제1독서). 요한은, 모든 피조물이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무궁하기를 비는 소리를 듣는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이나 물으시고는, 당신 양들을 돌보라고 하신다(복음)
선교의 힙
-키엣대주교-
사도행전에는 대사제가 사도들을 심문하는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추종자들은 비록 배우지 않은 어부들이었지만 매우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증언을 하였기에 대사제는 놀랐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기꺼기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다”고 하였으며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라며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대사제는 너무나도 강력하고 명확한 증언으로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초기 개척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의 존재를 확신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사도들의 설교는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신도들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으며, 서로 연대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직접 눈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야 스승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한 그들에게 물가에 서 계시던 예수님이 다시 그물을 던지라고 하자 그들은 아주 많은 물고기를 잡아 올렸고 그제서야 스승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은 당시 바다 밑 물고기의 종류를 백쉰세 종류로 보았기 때문에 바다 속 모든 물고기를 잡을 만큼 많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어부의 배와 같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선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교회는 영혼을 건져 올리는 곳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의 영혼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어부는 닻을 내리고 둑에 앉아 한가로이 쉬는 것이 아니라 돛을 달고 깊고 넓은 바다로 나가야 비로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영혼을 구원하려면 교회가 조용히 그 자리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멀고 험한 길을 찾아 떠나는 노력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거센 파도와 바람을 무릅쓰고 나가야 하며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선교는 수 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받아들이고 감내해야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야 하는 것은 주님의 바램이며,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사명-선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의 노력에 의해 결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밤새 지치도록 일을 했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한 교회 활동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니 그들은 기적처럼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고, 그들과 같이 배에 올라타지도 않았으며, 제자들을 위해 파도를 가라앉히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늘에 계셨기에 호숫가 어느 곳에서라도 제자들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만을 알려주셨습니다. 비록 우리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언제나 교회 안에 계십니다.
“나는 세상이 끝나는 곳까지 언제까지나 너희들과 함께 할 것이다”
교회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하신 주님이지만, 그분의 존재 속에는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강력한 힘은 규율과 힘이 아니라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이 깊고 용서가 많을수록 교회는 강해집니다. 좋은 결실은 안정되고 정착되었을 때가 아니라 어려움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갔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떠날 때만이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고, 고통이 클수록 교회는 강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교회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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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셔야만 했던 것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2. 수많은 어려움과 박해를 겪었지만 2000년이 넘게 지금까지 교회는 굳건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와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3.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만일 주님께서 나에게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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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께서는 조직이 아니라 가정과 같은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명령과 지휘가 아닌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돌보는 사랑의 공동체, 그 사랑이 바로 교회를 이끄는 원천입니다. 사랑이 영원히 유지된다면 교회는 굳건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가는 교회는 허물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가족과 교회가 영원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함께 보듬고 사랑을 나누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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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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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 방에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물론 전임 신부가 보던 텔레비전이 있었지만, 이것으로 인해 시간을 너무 낭비하는 것 같아서 치워버렸습니다. 텔레비전만 켜면 볼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정말 많은 채널이 있습니다. 전에는 공영방송만 있어서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케이블방송에 종편까지 너무나 많은 채널이 있어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한번은 바쁜 일과를 모두 끝내고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그때 채널을 하나하나 옮기면서 무엇을 방송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영화, 드라마, 예능, 뉴스, 스포츠…. 이렇게 채널을 돌리다 보니 1시간이 금방 지나가는 것입니다. 1시간 동안 리모컨 버튼만 누른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 도둑이라는 생각에 텔레비전을 치웠지요.
우리 삶에는 전념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상관없지만, 영향을 받고 있다면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전념하지 못하는 것들도, 다른 것들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는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엄청난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하지요. 이는 교회의 상징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하기만 제자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인해서 인간적인 모든 예상을 뒤엎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여 커다란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특별히 이 기적 후에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마지막으로 당부하십니다. 이는 교회를 맡기는 중대한 순간입니다. 우선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시지요. 이때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수난 전에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라고 장담했었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했고,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에 함께하면서 이런 자신감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예수님과 함께했기 때문이지요.
이제 베드로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대신 담대히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면서, 질문하시는 주님께서 사람의 마음속까지 다 아신다고 겸손하게 아뢰고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재주는 주님 앞에서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전념해서 굳은 믿음을 갖춰야 합니다. 사실 이런 부족함도 주님께서는 함께하셔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전념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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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거짓말이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ZpJpToslMOA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습니다. 숫자 ‘7’은 성령을 상징하기도 하고, 일곱 개의 성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 배는 7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들’(히브리어로 ‘하느님의 자녀들’의 숫자 값은 ‘153’)을 잡는 교회를 상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당신 자신을 어떻게 교회에 나타내 보이시는지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새벽에 나타나셔서 밤새 허탕을 친 제자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십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그분이 누구신지 모르면서도 그분 말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마치 예수 그리스도처럼 크게 볼 줄 아는 겸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자아의 죽음입니다. 내 주인을 죽였으니 참 주인이신 ‘나는 나’이신 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완벽히 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겸손이 그 모범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겸손이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여깁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입니다.
한 번은 제가 자아를 죽여야 한다고 말할 때 어떤 분이 신학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보다 더 공부한 많은 신학자가 있는데 그들이 전부 틀렸고 저만 맞았다는 말이냐고 다그쳤습니다. 저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분은 무서운 눈초리로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이런, 교만한….”
또 어떤 신부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라는 말에 대해 하느님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신데 한 하느님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그럼 우리가 신학생 때 배운 게 잘못됐단 말이야?”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교만한 것이라 말할까요? 자신을 낮추고 무조건 자신이 틀렸다고 해야 할까요? 제가 초등학교 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것을 외우며, ‘내가 우리 민족을 중흥하기 위한 목적으로 태어난 것이란 말이야?’라는 말을 했지만 아무도 긍정해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혼자 맞는다고 주장하면 교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진실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높이는 것입니다.
성 크리스토포로는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장사였습니다. 성인은 자신보다 힘이 센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처음에는 왕을, 그다음에는 악마를 찾아갔습니다. 악마가 십자가를 보고 도망치는 것을 보자 그는 그리스도가 가장 힘이 센 분일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은수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은수자는 성인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며 강가에 머물며 가난한 여행자들을 건네주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따라 성인은 강가에서 돈이 없어 배를 타지 못하는 순례자나 여행객들을 어깨에 올려 태우고 건네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어린아이를 어깨에 앉히고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물속으로 들어갈수록 아이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하더니 물살은 더욱 거세져 마침내 강을 건널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성인이 “너무 무거워 마치 세상을 짊어진 것 같구나!”라고 하자 어깨에 앉은 어린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마라. 너는 세상뿐만 아니라 세상의 창조자를 짊어지고 있다. 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성인의 원래 이름은 레프로보스였지만 그리스도를 업는다는 의미로 크리스토포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성인이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존재였다가 어린아이조차 제 힘으로 업을 수 없는 약한 존재임을 자각해나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해지려면 약한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고 큰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세 번이나 당신을 배반한다는 말에 콧방귀도 안 뀌었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크심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관상입니다. 하느님의 엄위를 본다면 내가 먼지처럼 작아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겸손도 혼자 힘으로 작아지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인이 주님을 뵐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주님은 절대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그분의 크심에 나는 끊임없이 작아지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이 영성의 진전을 위해 끊임없이 세상 것으로부터의 이탈과 겸손을 강조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제가 오래전 처음에 설악산 권금성에 올라갔을 때 그 놀라운 광경에 신이 나서 절벽 끝을 뛰어다니다시피 하였습니다. 기껏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와서 산을 정복했다고 느낀 것입니다. 산이 나의 발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다 바람이 불어와 옷이 부풀었고 자칫 바람 때문에 날려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하였습니다. 그때 저 자신의 작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설악산은 나의 발아래 있었습니다.
몇 년 뒤 사제가 되어 다시 그곳에 올라왔을 때는 기분이 달랐습니다. 저는 한 발짝만 뒤로 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산이 커지니 내가 작아졌습니다. 그런데 왜 산이 커졌을까요? 주님이 만드신 것이란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성장하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모든 것은 주님 창조일부분이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산이 커진 것입니다.
겸손은 고양이가 쥐인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자 앞에 서는 것입니다. 겸손은 내가 작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의 비법은 이것입니다. 내가 작아지려 하지 말고 내 주위에 있는 것들, 사람들의 크기를 키우는 것입니다. 무대공포증도 마찬가지입니다. 떨지 않으려고 연습을 죽도록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청중을 하느님으로 보고 압도당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란 기도를 계속 바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도를 바치다 보면 혼자 있을 때는 주님 안에서 존재하게 되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주님의 창조 능력 안에 머물게 됩니다. 어쨌건 사자 앞의 고양이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목소리에 순종하게 되고 그 사람이 곧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겸손의 노력은 참 그리스도를 뵈옵는 관상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님은 가장 작은 이를 통해서도 나에게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영성의 유일한 지향점은 그분의 커지심과 나의 작아짐입니다.
처음 베드로가 오른쪽에 그물을 던져 많은 물고기를 잡았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자신을 떠나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자신이 더 이상 작아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 뛰어갑니다. 겸손해지는 맛을 알았기 때문이고 예수님 아니면 겸손해질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진정으로 겸손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시나이다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W8-E1uJlT7c
1. 말씀의 흐름
부활 제3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말씀은 예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여러 상황을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이번에는 단지 당신 부활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사도로 진급시키고 그들이 사도로서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날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 보면, 과연 제자들은 이전의 비겁하고 소심했던 태도를 버리고 용감하고 지혜로운 사도가 되어 대사제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신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사도 5,30).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박해와 수난에 대해서 천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즉, 지상에서 진리를 위해 의인들이 당하는 수난이 지니는 영적인 의미와 품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천상에서 전례가 거행되는데, 악인들의 계략과 죄인들의 방관으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이제 권능과 지혜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천상의 성인들이 입을 모아 찬미하는 것입니다.
2. 변화무쌍한 사람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죄를 저지르거나 이익을 도모할 때 똑똑해집니다.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은 나름대로 치밀하게 완전범죄를 기획했었습니다. 군중이 집에 돌아간 어두운 밤을 틈타서 밀고자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체포하는 과정이 그러했고, 혁명당원들과 야합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후에 빌라도를 윽박질러 정치범에게나 내리는 십자가형을 예수님께 언도하도록 유도해 낸 과정이 그러했으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무덤이 비게 되자 이 빈 무덤이 부활의 징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자기 스승의 시신을 훔쳐가서 무덤이 빈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라고 경비병을 매수하여 여론을 날조하고자 나름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예수 부활로 이 모든 범죄 기획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악인들이 부질없이 저지르는 일들이 이렇습니다.
또한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던 여러 사람들도 머리를 많이 썼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마귀 들린 딸을 고쳐 보려고 강아지도 주인이 상에서 흘린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느냐는 기발한 논리로 예수님의 양보를 이끌어냈으며, 로마인 백인대장은 죽을 병에 걸린 자기의 유다인 종을 고쳐 주기 위하여 군인다운 충성심과 극진한 예우로 예수님을 감동시키기도 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군중은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는 예수님께 열광하여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겠다고 갈릴래아 호수를 거의 반바퀴나 돌아서 그 먼 거리를 쫓아오기까지 했었습니다. 눈 앞의 이익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눈물겨운 구석이 있습니다. 흔히 얻을 이익보다 더 큰 희생을 바치곤 하기 때문입니다.
3. 깨달음에 굼뜨고 무딘 제자들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 딱했습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엄청난 결단을 내려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자기가 종사하던 생업이 있었고 가족과 이룬 가정도 있었는데, 이를 버리고 따라나섰지만 결단에 따른 기대가 너무 커서 계산을 하느라고 바쁜 나머지 예수님의 가르침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도 답답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아서라도 믿으라고 하시며, 숱한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제자들은 자기들 눈앞에서 일어난 기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머릿속에 꽉 차 있던 생각은 스승의 능력과 명성에 기대어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현세적 이익과 출세였습니다. 그러기에 스승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던 당시에도 서열 다툼을 일삼았고 정작 스승이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자 믿지 못했던 것이겠지요. 부활시기를 맞이하면서도 도무지 부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즈음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제자들에게서 미리 볼 수 있습니다.
4. 예수님의 대책
악인들이 저지르는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책은 십자가 수난이었고, 이익만을 좇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은 부활이었으며, 제자들에 대한 대책은 발현이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은 후속 대책을 마련하셨으니 이것이 오늘 복음의 상황입니다. 일단 당신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보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래아로 불러 모으셔서 풍어의 기적을 보여주시는 한편, 제자들의 으뜸으로 삼으신 베드로는 따로 독대를 하시며 신앙을 확인 점검하셨습니다. 이 기적과 독대가 그분의 심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과 이익을 도모하느라 어지러운 상황을 완성하시려는 사랑의 심판입니다. 의로운 사람을 그 의로움에 그치지 않고 거룩하게 성숙시키시어 어지러운 상황을 정리할 만한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구원의 심판입니다. 죄악의 혼돈 속에서 사랑으로 가득 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시는 창조의 심판입니다.
5. 지상의 혼돈, 천상의 전례
복음서를 쓰기 전에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에서 에페소를 비롯한 일곱 교회에 복음을 전하다가 황제의 상에 경배하라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를 거부한 요한은 파트모스라는 외딴 섬에 갇혀서 채석장 중노동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같은 박해를 받고 있는 일곱 교회 신자들이 걱정되어서 틈틈이 동굴에 가서 기도하다가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묵시록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도 어린 시절에 그분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그분의 수난도 목격했거니와 그 자신도 똑같은 수난을 당하게 되자, 그 수난의 영적인 의미를 한결 수월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묵시록의 4,5장은 지상에서 의인들이 겪는 수난이 천상에서는 거룩한 전례로 그 의미와 품위를 선포하는 것임을 믿음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기록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어좌에 앉아 계시고, 복음을 증언했던 의인들을 상징하는 네 생물 즉 사자와 황소와 사람과 독수리가 찬양하며 수난을 겪고 순교한 무수한 신자들이 찬미하는 목소리가 그 핵심이었습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묵시 5,12-13).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로지 천상의 관심사이며 이 일들을 선과 악으로 분별하고 그 중 선한 일에 대해서는 천상에서 전례로 거행함을 요한은 알려주었습니다.
6.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용기
그러니 사도 요한이 천상에서 거행되는 전례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찬양하는 기도 소리를 현실의 박해 상황에서도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사도로 거듭난 제자들도 더 이상은 대사제와 유다교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 살리셨다고 그 살벌한 자리에서 당당하게 선포하고 나섰습니다. 그네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을 대놓고 공개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천상에서 전례로 찬미할 만한 지상에서의 영적 전투 상황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군다나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다고 응수했습니다. 그랬더니 대사제는 사도들을 매질하면서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협박을 하고 나서 풀어 주었습니다.
7.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
사도들은 사람에게보다 하느님께 순종할 수 있는 용기만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사제로부터 매를 맞고 공갈 협박을 당하는 모욕을 당하고 나서도 기뻐하며 최고의회를 물러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없는 자격이 이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
사도들의 이런 모습은 대사제와 유다인들이 보기에는 정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후대의 신앙인들이 보기에는 이런 심리 상태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지 못했던 죄를 뉘우치는 마음의 발로입니다. 도덕적 부채의식을 느낄 만큼 사도들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또 달리 보자면, 그만큼 예수님과 영적으로 한 마음 한 몸이 되었다는 변화이기도 합니다.
8. 나를 사랑하느냐?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따로 만나셨습니다. 풍어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이 사도직 소명을 새로이 다짐한 바로 그 자리에서 모두가 둘러 서 있는 가운데, 독대 아닌 독대로 신앙을 고백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실 때 두 가지가 특별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라고 당신이 이름지어주신 대로가 아니라, 당신을 만나기 전의 이름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호칭을 부르신 뜻은 이제까지의 일은 다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자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고백 즉 당신을 믿느냐고 고답적으로 묻기보다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인격적으로 물으시면서, 그 자리에 둘러있는 다른 제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베드로의 마음을 배려하신 예수님의 깊은 마음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하느님께 순종하는 용기와 예수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조차도 기뻐할 만한 자격이라고 생각하게 된 변화였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라면 백쉰세 마리로 상징되는 선교적인 풍성한 성과는 따놓은 당상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서 당신을 사랑한다는 다짐을 세 번이나 받으시고 다음의 한 말씀으로 사람 낚는 어부로 낚으셨습니다. “나를 따라라”(요한 21,19).
-조재형신부-
신학교에서 처음으로 기타를 배웠습니다. 그때 배운 노래 중에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신학적으로 참 의미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추구하고, 사랑하는 ‘돈과 잘못된 가치’를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남들이 가니까 무조건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돈은 하느님을 대신하는 이 시대의 우상입니다. 잘못된 가치는 성공, 명예, 권력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신념입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며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의 사랑아 이제 네 눈을 떠봐요./ 삶의 참된 의미를 찾아보아요./ 네가 올라있는 그들은 너의 사랑/ 이제 내려와 모두 함께 노래 불러./ 나의 귀여운 사랑 나비야 날아라./ 세상의 저 모든 꽃들에게 희망을/ 너의 줄무늬 쳐진 겉옷을 벗어라/ 그때 세상의 모든 꽃들 노래하리./ 네가 추구하던 세상에 허황된 것/ 허공에 쌓아진 시기와 질투의 탑일 뿐/ 오욕과 싸우면서 세상에 아름다운 사랑 이루어요./ 너 비록 추한 몰골의 자그만 애벌레이나/ 너 죽어 사라질 때 그 위에서 떠 나르는/ 한 마리 나비되어 들판에서 피어있는/ 이 꽃들에게 희망을”
주인공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이 가고 있는 길을 따라가다가 드높은 기둥에 오르게 됩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남들이 가니까 가야 할 것처럼 여기며 따라 오릅니다. 거기서 운명의 노랑 애벌레를 만나는데 이들은 오르던 일을 멈추고 내려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에 집중합니다. 그러다가 줄무늬 애벌레는 자신이 오르다가 내려온 그 기둥을 떠올리며, 가보지 못한 기둥 꼭대기에 대한 갈망으로 사랑하는 노랑 애벌레를 떠납니다. 줄무늬 애벌레가 다시 오른 그 기둥은 다른 애벌레를 딛고 오른 애벌레 기둥이었습니다. 자신이 남을 딛고 오르지 않으면 남이 나를 딛고 오르는 치열함 속에서 줄무늬 애벌레는 마침내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줄무늬 애벌레가 그 위에서 목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애벌레들에게 밟히지 않기 위해서 올라오는 다른 애벌레들을 떨어뜨리고, 밟아야 한다는 현실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곁에 날아오르는 나비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나비의 시선에 익숙한 사랑을 느끼며, 내려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내려오는 동안 ‘저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혼자 내려와 노랑나비를 다시 만나고 나비의 인도로 고치를 만듭니다. 그리고 멋진 호랑나비가 되었습니다.
떨어트려야만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욕망의 사다리가 있습니다.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여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던 헤로데가 올라갔던 사다리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모두의 죽음 보다 좋다며 예언을 했던 가야파가 올라갔던 사다리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무죄한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던 빌라도가 올라갔던 사다리입니다.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던 유다가 올라갔던 사다리입니다. 나약함과 두려움을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가 올라갔던 사다리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 몰았던 러시아의 대통령이 올라가는 사다리입니다. 안일함과 나태함으로 주어진 직무를 소홀히 하면서 일상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올라가려는 사다리입니다. 복음의 기쁨을 소홀히 하고, 세상 속으로 세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인이 올라가고 있는 사다리입니다. 저 역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저의 이기심과 저의 욕심을 따라 갔던 적이 많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베드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면서 박해를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면서 멸시와 비난을 받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돌에 맞아 순교했던 스테파노 부제가 걸어간 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했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걸어간 길입니다. 환경 미화원을 위해서 따뜻한 어묵 탕을 준비한 포장마차 주인이 걸어간 길입니다. 헌혈증을 가져오면 국밥을 무료로 주었던 국밥집 주인이 걸어간 길입니다. 홀로 성당에 남아 조용히 기도하는 어르신이 걸어간 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따라, 우리도 우리가 가졌던 신앙을, 우리가 만났던 소중한 이웃들을 처음처럼 간직하고 사랑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와서 아침을 먹어라.”>
-이영근신부-
생명이 생생하게 돋아나는 5월은 영원한 생명을 잉태하신 어머니 성모님의 달입니다.
오늘은 부활 3주일이며, 생명주일입니다.
봄이 싹을 틔우며 생명을 증명하듯이 오늘 말씀전례도 생명을 증언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증언합니다.
최고의회 앞에 선 베드로는 성령의 감도를 받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언하여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사도 5,30)
제2독서는 하느님나라의 천상전례에서 수많은 군중이 환호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곧 하늘과 땅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생물들이 바치는 경배와 찬미의 노래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생생한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아침을 해 먹이시며 생명을 섬기시고 살리시는 장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절망에 빠져있고 과거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날 아침을 열치시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부르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요한 21,12)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드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부르시기보다 우리를 당신이 사랑하시려고 부르십니다.
결국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믿는 것보다도 당신은 훨씬 더더더~ 저희를 믿으십니다.
그러니 사실은 저희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 믿음으로 저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당신은 훨씬 더더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저희를 사랑하십니다.
사실 오늘도 저희는 주님의 그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희망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더더~ 저희를 희망하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저희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 받으신 당신의 몸을, 그리고 당신이 몸소 준비하신 ‘빵’은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바쳐 부활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인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퍼 먹이시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을 아는 일이요, 그리고 그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님이심을 아는 일입니다.
그래야 부활생명으로 살아나 당신의 사랑과 부활생명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저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형제를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구워 드려야 할 일입니다.
기쁨으로 부활생명을 경배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은 제가 저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리렵니다.
내 형제들을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겠습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굽겠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오시어 아침을 드십시오.
사랑합니다.
주님!
<오늘의 말 · 샘 기도>
“와서 아침을 먹어라.”
(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고 자란 제가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오늘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아주 구체적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빵을 들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사랑이신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주님께서는 모든 능력을 지니셨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믿는 이들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대개는 머리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새기고 손발로 움직여서 열매를 맺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머리에서 머무는 믿음은 삶에서 아무런 역사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결국 그런 사람은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앞날만 걱정합니다. 그렇지만 참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문제는 믿음을 보여줄 기회입니다. 환난은 두려움으로 다가오지만 믿음의 눈은 기회로 포착합니다. 그야말로 문제는 최선을 다할 기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제자들은 실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철석같이 믿었던 구세주께서 힘없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으니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시쳇말로 끈이 떨어졌으니 앞날이 막막합니다. 이제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체념한 듯 다른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가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동거 동락하던 예수님과의 생활을 내려놓고 고단한 일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고기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경황이 없는 그날 고기가 눈에 보였겠습니까?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힘들고 지친 상태인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못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못잡았다.’는 것은 자기들의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무력함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자리입니다. 바로 이 절망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대로 하였더니 감히 생각지도 못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시키는 대로 하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낳는 법입니다. 또한 순명은 눈을 뜨게 해 줍니다. 말씀대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고 놀라운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 받던 제자가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눈이 뜨인 것입니다. 사실 그때까지는 옆에 계신 분이 예수님인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지금 육적인 눈을 뜨고 있지만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눈 뜨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졌듯이 말씀에 순명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1-22). 우리를 구원할 힘이 하느님 말씀에 있는데 왜 말씀대로 실천하기를 주저하십니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렇게 했을 때 정말 축복이 주어질까?’ 하는 의심 때문입니다. 지금당장 불이익을 당하고 손해 보는 것 같은 마음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귀한 말씀이 주어져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말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사도5,41)하였습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14,23).하고 말씀을 지키는 사람과 함께 사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거기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구워주고 빵을 주시는 행위는 바로 우리에 대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고기를 끌어올리기 전에 이미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수고로 잡은 고기를 보태서 나누어 주셨습니다.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은 ‘내가 아침상을 준비해 놨는데 너희가 보탤 것이 뭐 좀 있느냐?’ ‘내가 나눌 음식을 준비했으니 너희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은총에 우리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통해 더욱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기운을 북돋아 주시고 원기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그분을 보고 누구도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 입니다. 이른 아침 왠 젊은이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는데 그들이 어부라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을 한 것입니다.
순명은 비합리적이고 상식에 어긋나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고 지극히 마땅하고 옳은 일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순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선원들이 선장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배가 산으로 갑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군대는 오합지졸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늬만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순명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했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낳기도 했습니다. 순명은 이성과 판단의 희생입니다. 어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삶이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데서 오는 포기의 순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말씀에 순명하는 가운데 주님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곳에 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십니다.“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너를 내치지 않았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41,9-10).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하시며 길을 알려주시는 주님, 말씀 그대로 행하여 그물을 가득 채워서 당신의 말씀이 곧 진리임을 가르치신 주님, 몸소 생선과 빵을 들어 나누어 허기진 배를 채워주시는 생명의 주님께 대한 믿음이 더해지길 기도합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믿음의 순명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10년째 강의 노트를 바꾸지 않는 교수에게 학생이 물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어찌 10년이 넘도록 똑같은 강의 노트를 그대로 사용하십니까?”그랬더니 교수님께서 당당히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그것도 모르나? 진리는 영원한 거야!”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가르침은 진리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한주간 되기 바랍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송영진신부-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요한 21,3).”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예수님 부활 후의 일들’을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곳은 예루살렘일까? 갈릴래아일까?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갈릴래아로 가라는 지시가 있고,
예수님과 사도들이 처음 만난 곳은 갈릴래아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카복음과 요한복음에는 그런 지시가 없고,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은 일은,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기준으로 하면,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루카복음과 요한복음을 기준으로 하면,
예수님을 만난 뒤에 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한 일이라면,
사도들이 물고기를 잡은 일은 ‘배가 고파서’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사명을 버리고 ‘먹고사는 일’이나 신경 쓰자고
한 일은 아니고, 심심해서 한 일도 아닙니다.)
2) 예수님을 만난 뒤에 한 일이라면, 사도들이 물고기를 잡은 일은,
아직 성령을 받지 않았는데도, 즉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시도한 것을 상징하는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성령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라는 예수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루카 24,49).>
1)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구하려고 노동을 한 것이라면,
그 일 자체는 인간 세상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노동일뿐이고,
사도들이 잘못한 일은 아닙니다.
그 경우에, 사도들이 아무것도 잡지 못한 일은, 그들이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처음에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처럼
‘현세의 무상함’을 다시 깨닫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되도록 하신 것은 아닙니다.)
2) 성급하게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시도한 일을 상징하는 이야기라면,
사도들이 아무것도 잡지 못한 일은, ‘예수님 없이는’, 또 ‘성령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상징적인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1) 만일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 전에 사도들이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면?
그래서 ‘배고픔’을 해결하고(배불리 먹고),
행복한(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가 되었다면?
그런다고 ‘현세의 무상함’이 극복될까?
세속에서 갖고 싶은 것을 다 갖고, 누리고 싶은 일을 모두 누린다고 해서,
또는 권력과 재물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차지하고 그것을 누린다고 해서
‘허무하지 않은’ 인생을 살게 될까?
가진 것이 많을수록, 또 누린 것이 많을수록,
더 심한 허무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놓아두고 빈손으로 떠나야 합니다.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이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1-2)”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얻지 못하면
하루살이와 다를 것 없는 인생으로 끝나게 됩니다.
2) ‘예수님 없이’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시도한 일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경우에, 만일에 사도들이 ‘예수님 없이도’, 또 ‘성령 없이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러면 교만해지고, 자만심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를 흔히 봅니다.
“예수님이 안 도와주셔도 내 힘으로 이 일을 해냈다.” 라는 자만심은 ‘악’이고,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실패도 은총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패 자체가 은총이라는 것은 아니고,
실패가 은총을 향해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된다는 뜻입니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 21,4-6).”
사도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왜 누구인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의 지시에 순종했을까?
사도들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들었던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느낀 것 같습니다.
고기를 잡은 뒤에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오른쪽’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7).”
<이 말씀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는
“아무거나 다 청하여라.”가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기를 청하라는 뜻입니다.>
어떻든 사도들은 ‘고기잡이 기적’을 통해서 ‘새로운 부르심’을 받았고,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12절에 있는 “와서 아침을 먹어라.” 라는 말씀과
13절의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라는 말에는,
먼 길 떠나는 자식을 든든하게 먹여서 보내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예수님의 사랑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 17)
-한상우신부-
성모성월
오월은
사람을 물들이고
공동체를
물들인다.
사랑의 시작은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빛나지 않은
것이 없는
모두가 푸른
사랑의
오월이다.
어머니의
사랑에서
태어나는
사랑의 푸른
새날이다.
주고 받는
것이
사랑의
신비이다.
성장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랑
연약함을
모르는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십자가와
연약함까지
받아들이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랑으로
변했다.
사랑은 사람이
되게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복음은
우리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사랑의
나눔이다.
사랑이란 서로를
돕고 보살피는
사랑의 참된
만남이다.
사랑은
지나가버린
어제가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오늘 이순간이다.
예수님
사랑의 일생이
바로 뜨거운
부활이다.
뜨거운
예수님의
부활은
베드로를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변화시킨다.
허약한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공동체로
바뀌는 것이다.
공동체의
가난함을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마음이
깊어지는 것이
부활의 사랑이다.
부활은
헤피엔딩이다.
오직 사랑뿐인
부활의 길이다.
세 번의
닭울음 소리에도
다시 돌아와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참사랑을
체험한 까닭이다.
십자가와
그림자
그늘과
연약함을
사랑하는
부활이다.
그래서
부활은
어머니같이
아프고
뜨겁다.
예수님,
당신의 일생에
풍덩 빠져
예수님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공동체의 사랑이
부활의 당부이며
부활의 선물이다.
공동체에서
다시 시작하는
오월의 첫날이며
부활의 생명
실천의 새날이다.
생명은 사랑으로
아름답고
생명은 실천으로
사랑의 연대를
이루어간다.
사랑의 뜨거운
것은
십자가로부터
다시 시작된다.
사랑을 잃어버린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오월의
사랑, 공동체이다.
말씀 나누기 - 부활 제3주일-우리의 사랑과 약함을 다 아시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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