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4월 30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2. 4. 30. 06:43

 2022 4 30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요한 6,16-21)

 

"It is I. Do not be afra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아 식탁 봉사를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기로 한다(제1독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금도 초등학교 때의 성당 친구들을 만납니다. 종교로 뭉친 우정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큰 것은 어렸을 때 신앙학교를 비롯해서 함께 했던 시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만 해도 어디를 여행 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당에서 ‘신앙학교’라는 이름으로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가기 전에는 솔직히 낯설고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신앙학교를 다녀온 뒤 우리는 너무나 친해졌습니다. 처음의 집 떠남이 겁났었지만, 새로운 만남에서 깊은 유대감을 얻은 것입니다.


종종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야 더 이로울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안에서 사람들과 새로운 만남을 만드는 것이라면 절대로 피해서는 안 됩니다. 40년 넘게 유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주고, 소중한 기억을 남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세상의 익숙한 것에서 자유로워지길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관점 안에 살라고 하십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통해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세상의 눈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놀라운 모습을 직접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십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은 예로부터 하느님이 구원의 길을 걸으시는 동작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욥기에는 하느님은 바다의 등을 밟으신 분(욥 9,8)으로 표현하고 있고, 시편 77,20에는 바다를 밟고 가로질러 다니시는 분으로 표현하며, 이사 43,16에는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시고 거센 물 속에 큰길을 내신 분으로 전해줍니다. 이제 하느님의 능력이 오늘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께 옮겨져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밤중에 물 위를 걷는 사람은 누구나 놀라고 무서워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배에 받아들였을 때, 그 순간 배가 그들의 목적지에 닿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일 때 우리 구원의 목적지에 닿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절대로 익숙한 일상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하느님의 일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더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소중한 관계를 새롭게 만들게 되고, 이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행동이 없는 비전은 꿈에 불과하다. 비전이 없는 행동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행동이 함께하는 비전이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조엘 바커).

 시노달리타스, 소통-경청-공동합의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88y44vWV3bg

오늘 복음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으로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자 군중이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겠다고 쫓아오는 바람에 이들을 피해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가 겪으신 일입니다. 그 동안 제자들은 따로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호수 건너편에 가 닿기 전에 날이 어두워지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이는 바람에 호수 한가운데에서 위험에 처했습니다. 이 바람은 북쪽 헤르몬 산에서 불어 내려오는 바람과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이 마주치는 맞바람이었습니다(마르 6,45-52). 새벽이 되자 더욱 거세어진 바람에 밀려 배가 뒤집히거나 또는 높은 파도로 인해 스며든 물이 가득 차서 배는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마태 14,22-33). 

 

  며칠째 군중을 가르치시느라고 힘드셨던 데다가 큰 기적까지 일으키셨던 예수님께서는 홀로 조용히 기도하시고자 하셨더랬습니다. 그래서 군중도 제자들도 다 돌려보내시고 헤르몬 산에 올라 하느님께 기도하신 것인데 문득 제자들이 처한 위험이 감지되셨나 봅니다. 그리고 그 위험은 매우 다급하게 느껴지셨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타고 가실 배도 없었던 형편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구하러 서둘러 가시느라고 물 위를 걸어가서 구해 주셨습니다. 

 

  생전 처음 물 위를 걸어가는 모습을 본 제자들은 놀라서 유령인 줄 착각하기도 했지만(마태 14,26), 예수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하고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분이 배에 오르시자 그렇게 거세게 불던 바람이 갑자기 멈추었습니다(마르 6,51). 기적 같은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을 때는 맞바람 때문에 노를 젓기가 그렇게 힘들더니(마르 6,48), 그분이 함께 계시니까 노를 젓지 않았는데도, 배가 어느새 제자들이 가려던 곳에 슬그머니 가 닿았던 것입니다(요한 6,21). 

 

  오늘 독서가 전하는 상황의 배경이 이러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들은 유다 최고 의회로부터 툭하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고, 매질도 당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 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사도 4,20)고 버티면서,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사도 5,29) 하고 항변했습니다. 이렇게 신생 교회가 유다교로부터 대대적인 박해를 받고 있던 와중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군중 앞에서 태생 불구자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고, 이 기적을 목격한 군중과 소문을 들은 이들을 합해 무려 5천 명 이상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하는 또 다른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며, 몹시 분주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외부에서 격렬한 박해 속에서도 적지 않은 선교적 성취를 이루고 있던 와중에, 공동체 내부에서는 그리스계 유다인 과부들이 식량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은 일로 해서 불평이 터져 나오는 일이 터졌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은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사도 6,3)을 뽑아서 신자들에게 예수님 말씀도 가르치고 식량 배급을 비롯한 공동체 내부의 질서를 전담할 부제 직무를 신설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조치는 사도들이 예수님 없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공동으로 합의한 첫 결정이었습니다. 이로써 교회의 내부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통이 수립되었습니다. 서로 소통하고 진정성 있게 경청하며 공동으로 합의하는 ‘시노달리타스(Synodaltas)’ 즉, “함께 걷는 길”의 전통입니다. 

 

  박해에 대한 대책이나 복음을 선포하는 등 대외적인 활동에 있어서나, 내부의 갈등이 생겼을 때 소통을 원활하게 정상화시킴으로써 갈등을 해소시키는 대내적인 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회 전통이 이 시노달리타스입니다. 이야말로 인격적이고 복음적인 민주주의 질서로서 세상의 빛을 비출 수 있을 중요한 표지입니다. 그러자면 교회 내 지위나 처지를 막론하고 누구나 예수님의 현존을 청해야 합니다. 그 표지는 말씀과 성찬과 사랑의 섬김이라는 세 가지 기본 양식에 더하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에게 성령이 주어져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서로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는 가운데 함께 교회의 목적지에 가 닿을 수 있다는 체질 개선이라는 두 가지 필수 양식입니다. 

 

  빵이 늘어난 기적이나 물 위를 걸은 기적, 또는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지는 자연현상의 기적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가려진 이 기적 현상이 부제 직무를 신설한 사도들의 행위와 맞물려서 교회에 관한 매우 중요한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그것은 사제든 부제든 교회의 직무는 예수님의 현존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는다는 점이고, 그래야 성령께서 이끄시는 지혜로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우리 교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무기력한 체질을 개선하고 당면 과제나 장기 목표를 우리 교회가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취감을 고취시키는 일 자체가 가야 할 일차 목적지라고 보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교회에서도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찾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어릴 때입니다학교 화장실에 낙서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옆을 보시오뒤를 보시오앞을 보시오일이나 보시오.’라는 낙서도 있었습니다최근에 화장실 낙서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빌딩의 화장실에 이런 낙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은 죽었다니체’ 그러자 그 아래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니체도 죽었다’ 그리고 끝에 이런 낙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니들 다 죽었어청소 아줌마’ 청소 아줌마에게 신은 죽었다고 한 니체나니체도 죽었다고 한 신이나 큰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다만 청소해야 하는데 낙서를 해 놓으니 그것이 짜증이 났을 것입니다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을 교리로 고백합니다니체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았어도 교회는 매년 삼위일체 중의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례를 통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유교는 공자가 세웠습니다. ‘이라는 덕목을 이야기합니다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습니다살아 있는 세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살아 있을 때의 일도 바쁘기 때문에 굳이 죽음 이후의 삶을 성찰하거나고민하지 않습니다공자의 탄생일을 기념하기는 해도공자의 죽음을 매년 기억하지도 않습니다불교는 부처가 세웠습니다인생의 고통을 이야기합니다원수를 만나야 하는 고통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하는 고통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고통을 이야기합니다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합니다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바르게 말하고바르게 행동하고바르고 생각하는 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역시 부처님의 탄생일을 기억하지만 부처님의 죽음을 따로 매년 기억하지는 않습니다유독 교회는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매년 성대하게 기억하고축제로 지내고 있습니다그 이유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가는 파스카(부활)의 여정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노인과 바다와 같은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카펜터스도 ‘Yesterday once more'와 같은 노래로 사랑을 받았습니다그러나 이 두 사람은 모두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그들이 받았던 찬사와 사랑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 지선이라는 학생은 온 몸에 3도 화상을 입을 정도의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날 때부터 손가락이 3개 밖에 없던 현이라는 학생도 있습니다이들은 자신들의 고통과 불의의 사고까지도 감사하게 여겼고하느님께서 그런 자신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고 믿었습니다장애와고통은 그들에게는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되었습니다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가 주십시오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방법은 3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화를평안하냐.’와 같은 말입니다막달레나에게도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도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다정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토마 사도에게는 직접 만져보라고도 하셨습니다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이 유령인줄 알았기 때문에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 것입니다제자들은 직접 만져보고서야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었습니다고기를 준비해서 나누어 주시기도 하셨고그물에서 잡아 올린 고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함께 드시기도 했습니다엠마오의 제자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기쁨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남을 죽이는 말상처를 주는 말분열을 가져오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사랑과 나눔기쁨과 평화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도 주님께서 못에 찔리셨던 발과 손을 보여 주셨듯이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 주셨듯이우리들의 희생과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우리들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가난한 이들에게 내미셨던 바로 그와 같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의 소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신앙인들이 신앙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형편이 좋아져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나누면 형편이 좋아 집니다살을 빼서 건강해 지는 것이 아니라건강해 지면 살이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무한한 인내와 용서, 그리고 끊임없는 대화와 의견수렴!

 -양승국신부-

 

초대교회 공동체 신자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을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는 소중한 자료가 있으니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그런데 오늘 소개되고 있는 내용은 좀 웃기기도 하고, 부족한 오늘 우리 공동체에도 큰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공동체 중의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모델 공동체, 사도들이 이끌던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체도 다양한 문제와 갈등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발단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배급을 받을 때 홀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6장 1절)

  

보십시오! 아무리 초대교회 신자들이었다고 할지라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먹는 것에서 차별대우를 받았던 사람들이, 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예루살렘 모 교회에는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본토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들었습니다.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해외로 이민 갔다가 조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에 정착한 역이민자들로 그리스어에 익숙했습니다. 일곱 봉사자들이 대표자들입니다. 이와 달리 본토 히브리계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열두 사도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는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히브리계 그리스도인들은 성전 제사에 참석하였고 율법에도 충실했지만,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은 별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오랜 이민 생활에서 갖은 고초와 서러움을 겪다가 귀국한 그리스도계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큰 기대를 안고 돌아왔지만,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달랐기에 적응하느라 다들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안그래도 힘든데,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이 본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매일의 급식에서 차별대우를 받다 보니, 대폭발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이 히브리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의를 하고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사도들의 신속하고 구체적인 대응입니다. 사도들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평판이 좋고 영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에게 매일의 배급 봉사를 맡기려고 사람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들 자신은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보다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직무인 복음선포, 그리고 이를 위한 기도생활에 좀 더 헌신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사도들이 문제의 원인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과 책임의 일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지니고 있었던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해 사도들이 어떻게 대처했는가 하는 것은 오늘 우리 공동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문제는 곧 오늘 우리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커다란 도전과 문제 앞에서 세 가지 구체적인 노력을 되풀이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한한 인내와 용서, 그리고 끊임없는 대화와 의견수렴, 그도 안될 때는 아주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데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인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출애굽의 만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또한 ‘5천명을 먹인 이야기’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준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줍니다.

곧 '믿음'으로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됨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떠나온 제자들의 ‘호수’에는 어둠이 짙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납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10여리쯤 떨어졌고 호수는 이미 어두워졌는데,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이 일었습니다.

두려움과 고통, 절망과 죽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하셨듯이,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바다는 밟혀졌기에 요한 묵시록의 “새 하늘 새 땅”(21,1)에서 ‘새 바다’는 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당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요한 6,20)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탈출기(3,14)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계시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느님이다”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때에야 제자들은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지만, 배는 “어느새”(6,21) 이미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습니다.

곧 배가 뭍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 닿은 것이 아니라, 호수 한복판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배가 제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어느새” 목적지인 가파르나움에 도착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짧은 장면 안에서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물 위를 걸으심으로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요, “나다”라고 당신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요, 풍랑 속의 배를 '즉시' 뭍에 이르게 하시는 구원자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오늘도 풍랑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이 ‘건너감’, ‘지나감’이라는 파스카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풍랑과 좌절 속에서도 언제나 돛대를 높이 세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아니 흔들릴 때라야 오히려 앞으로 나아감을 알기에, 흔들림 속에서 주님께 믿음으로 의탁하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곧 고통과 좌절에서도 언제나 '믿음'과 '기쁨'을 간직하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 떠오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 6,20)

주님!

오늘도 끊임없이 항해 하게 하소서.

항구에 평온히 정박해 있기보다 어두움을 헤치고 풍랑을 뚫고 가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 믿음과 의탁을 배우게 하소서.

하오니 주님,

성령의 바람을 태워 제가 가야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어려움은 최선을 다할 기회」

 -반영억신부-

 

나를 지켜줄 후원자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지 않고 남모르게 후원하는 이도 있습니다. 후원받는 이들은 누가 후원을 하였든, 든든한 그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노력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늘 지켜주고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신나는 일이고 힘이 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후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산에 올라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큰 바람이 일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짙어졌을 때 호수 위를 걸어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요한6,21).

 

여기서 어둠은 세상의 빛(요한8,12)이신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자체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배가 원하던 곳에 닿았다는 것은 자연의 힘, 파괴하는 힘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행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모든 방해물과 모든 거리를 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의 위력, 그 어떤 혼돈의 소용돌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바람에 휘둘리고, 물결에 흔들리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그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늘 나와 함께하셨지만 나는 밖에서 허둥거렸습니다.

 

이 상황은 우리 인생 항로에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기치 않은 바람과 물결은 뜻하지 않은 위기 상황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이 어디 계시냐? 고 투덜댑니다. 위기에 처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안에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 앞에서는 어떤 바람이나 물결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은 좋은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갈망한다면 우리는 평정을 되찾을 것이며 어느새 가려던 목적지에 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걸림돌이 많습니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려고 해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지금 당장 희생하고 베푸는 것이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욕되지 않게 포기하는 모든 것에 대해 반드시 주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에페6,8). 사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밑지고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하느님을 선택하십시오. 희생은 주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향해 걸어오시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십니다.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에 추호의 의심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 20)

-한상우신부-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두려움이다.

주님과
멀어질수록
더욱 사납게
몰아치는
두려움이다.

삶이란
큰 바람이 불고
높은 물결을
체험하는
십자가의
연속이다.

삶이란 그래서
고정되어
있지 않은
시간의
호수 위를
걸어가는
십자가의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살아있음의
현주소이다.

그래서 풍랑은
우리 믿음의
밑바닥을 다시
보게한다.

두려움이
시작되는 곳에
완고한
우리들이 있다.

평화가
시작되는 곳에
사랑의
주님이 계신다.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향하는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의 현실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우리의 마음이
안주할 곳은
그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두려움은
주님 사랑을
이길 수가 없다.

풍랑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시간이다.

삶이란
믿음 없이
살아갈 수가
없다.

풍랑과
십자가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은총이 된다.

끝까지 믿음이
필요한
믿음의 여정이다.

우리의 십자가
안으로 모셔
들여야 할 분은
주님이시다.

어느새
주님과 함께
목적지에
가 닿게 되는
풍랑의 은총이다.

우리 삶의
풍랑과
십자가는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보여주는 삶의
뜨거운
모습이다.

말씀 나누기 - 부활 2주 토요일-방심은 금물, 방령은 더 금물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4월 17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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