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8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 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요한 3,31-36)
The one who is of the earth is earthly
and speaks of earthly things.
But the one who comes from heaven is above all.
He testifies to what he has seen and hea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사도들은 대사제의 심문에,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삼아 당신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용서받게 해 주셨으며 성령께서 이 일의 증인이시라고 대답한다(제1독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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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스포츠 경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응원하는 팀이 있었는데, 그날따라 최악의 경기를 하는 것입니다. 질 것이 뻔해 보였습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고 그래서 텔레비전의 전원을 껐습니다.
저녁에 스포츠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히 졌을 것으로 생각했던 경기에서 막판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지며 행복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의 이 감정은 응원하는 팀의 승리를 통해서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내 생각을 통해 얻은 행복이 아닐까요? 운동 경기 자체가 행복으로 이끈 것이 아니라, 경기를 바라보는 내 생각이 만든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나의 감정을 만듭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라보면 분명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은 내 모든 부정적 감정의 원인이 되고 맙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상황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상황 자체가 바뀌는 일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상황을 대하는 내 감정은 분명히 바뀌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는 이유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 생각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젯밤 꿈꾼 것을 두고 계속해서 연연하며 힘들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꿈이니까 그냥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생각이 있다면, 이를 흘려버릴 수 있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두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 믿음을 두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믿지 못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내 생각을 믿지 않는 방향으로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자리에 위치시킵니다. 결국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내 생각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책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생각을 하게 될 때는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또 그런다.”
그때 내 생각을 다시 전환할 힘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주님을 향한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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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곧 사람이다; 말씀 (말 +숨)이 흐르게 하라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U0Hy9q5O8nI
오늘 복음도 요한복음입니다. 요한이 설명하려고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아드님이 하느님이 되시는 방식입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이 짧은 문장 안에서 ‘삼위일체 신비’가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아드님을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아드님을 통해 당신 ‘말씀’을 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게 하시는 힘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께서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주시는 피입니다.
성령은 내 안에서 나의 말을 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인도하신다기보다는 나의 말을 불태우십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쉼 없이 재잘대는 자아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를 받아 전하면 나는 자아와 하나가 되고, 반면 성령으로 자아를 죽여 하느님의 목소리를 받아 전하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정은표 씨가 주말에 자녀들이 공부하지 못하게 농장에 가자고 할 때 자녀들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반대합니다. 이때 김하얀 씨가 어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데 토를 다느냐며 남편 편을 듭니다. 그렇게 그들은 주말농장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습니다. 김하얀 씨는 여기에서 남편의 말을 받아 전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남편의 사랑입니다. 남편의 것은 다 아내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당신 말씀을 받아 전하는 아드님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전부인 하느님의 ‘신성’(神性)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
아드님을 믿는다는 말은 ‘어떻게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지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드님을 믿으면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을, 곧 신성을 받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4-36)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하신 성경 말씀을 예수님은 거부하시지 않고 오히려 옳은 말로써 당신의 주장을 위한 근거로 삼으십니다.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을 신이라” 한 말씀은 참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신이 되셨습니다. 본래 신이시지만 세 분이 한 신성으로 하느님이 되셔야 하기에 누군가는 파견하고 누군가는 파견받고 누군가는 파견하신 분의 말씀이 파견된 이를 통해 전해질 수 있도록 힘을 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세 분이 한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영화 ‘바람’(2009)은 유명 배우 정우의 실제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정우는 엄한 아버지와 더 무서운 형 밑에서 자랐습니다. 형과 누나는 공부를 잘했지만, 정우는 공부를 못하여 상고에 진학합니다. 상고에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담배를 피우고 자율학습을 땡땡이치는 일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아버지와 형에게 꼼짝 못 했습니다.
그런데 불시로 학교 폭력을 조사하러 나온 경찰들에 의해 구치소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다행히 하루 만에 나오기는 했지만, 부모님은 정우가 빼앗은 돈의 열 배씩을 돌려줘야 했습니다. 아버지도 정우의 가방 속의 담배를 보고 뺨을 때리고, 형은 더 심하게 때렸습니다. 그런데도 정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아버지께서 간암에 걸려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정우는 그때부터 아빠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목욕탕에서 등을 한번 밀어드리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아서 바로 돌아옵니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정우는 장례식장에서 오열합니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아버지 사랑합니다.”
군대에서 돌아온 형은 정우를 보고 “다 컸네!”라고 합니다. 정우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갑니다.
며칠 전에 예로 들었듯이 ‘파친코’에서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줄 알면서도 할머니에게 계약서에 사인하지 말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이유는 자신 안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가 사인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우도 자신의 말을 하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와 형의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성장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오는 것은 피이고 성령입니다. 말로만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말을 하게 만드는 힘이 성령, 곧 피여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정우는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여 이제 아버지처럼 됩니다.
우리 각자는 누군가의 말이 나를 통해 흘러나오게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자아일 수도 있고, 부모님일 수도 있고, 선생님일 수도 있고, 애인일 수도 있으며, 하느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누구의 말이냐에 따라 내가 누구인지가 결정됩니다. 말이 곧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피를 준 이의 말을 하도록 합시다. 정우는 친구들이나 선배의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모만큼 자신에게 피를 흘리며 말을 가르친 이들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말은 곧 누군가를 계시하고 그 누군가가 내가 됨을 잊지 맙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말씀을 ‘말’(진리)과 ‘숨’(은총)의 결합이라고 하듯, 성령과 함께 오시는 말씀만이 나에게 생명을 줍니다. 우리는 생명이 섞인 말씀을 받아 전하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창조자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피조물은 타자의 생명을 먹고 생존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4-25)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5)
말을 받아 전하는 것이 곧 그 말씀을 하시는 분과 하나가 됨을 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기 위해 그분께 다가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_LjdraUTu3s
-조재형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베드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부활의 삶은 이제 세상의 것, 사람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다가서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먼저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소외된 이, 장애인, 죄인들, 여성들에게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늘 세상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셨고,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신앙인은 늘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경청하기’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은 먼저 제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도 먼저 들어 주셨습니다. 의사가 환자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올바른 처방을 내릴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먼저 나의 주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본당의 단체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먼저 듣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생기곤 합니다.
세 번째는 ‘존중하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모상을 닮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피부색, 신분, 성별, 지역, 이념, 종교 때문에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 죄인, 세리, 가난한 이, 병든 이들 모두를 소중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을 존중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참여하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고, 제자들과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모두가 함께 모여서 기도하였고, 가진 것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을 이끌어 가는 것은 참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조금은 부족해도, 모두가 함께 일을 나누어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능력이나 재주를 보고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남에게 미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기’입니다. 봄에는 많은 꽃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개나리, 진달래, 철쭉, 채송화, 나팔꽃, 장미’와 같은 꽃들은 자신이 최고라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다른 꽃들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공동선과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 다양한 종교들이 있습니다. 나와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공동선을 위해 함께 연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욕망, 시기, 질투, 불신, 분노, 원망의 삶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신뢰한다면, 함께 나눈다면, 조건 없이 사랑한다면 바로 이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을 다시 한번 우리 삶의 중심으로!
-양승국신부-
저희 수도회 본부에서 내려오는 지침이나 과제 가운데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영적 생활에 대한 우선권’ ‘하느님에 대한 우선권’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복음의 표현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게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복음 3장 31~36절)
오늘 내 삶 안에서도 하느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는가, 오늘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과 선택 앞에서 하느님께 우선권을 드리는가, 하느님은 오늘 내 삶 안에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가, 한번 점검해볼 일입니다.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미묘하고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동물적인 본능이 깊숙이 숨어있는가 하면,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정도의 이타성도 잠재되어 있습니다. 정말 나약해서 흔들리는 갈대같이 별것도 아닌 존재 같지만 때로 얼마나 선해질 수도 있는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이런 우리 인간이기에 고른 성장이 필요합니다. 지적인 교육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숙을 위한 노력, 인간적 성숙을 위한 노력, 육체적 성숙을 위한 노력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디 그렇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죽기 살기로 달달 외우고, 반복해서 문제를 풀어 좋은 성적 내는 것이 지상과제입니다. 무한 경쟁 체제, 일렬로 줄 세우기 문화 앞에서 함께 가는 동료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어떻게든 나만 잘 풀리면 그만입니다.
하느님의 영역, 신앙이 설 자리가 점점 축소되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우리 청소년들에게 하느님과 교회에 대해, 신앙과 배려에 대해, 가난과 겸손의 덕에 대해 이야기 하면 웃어버리는 경향도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정말 어려운 시대, 참으로 다양한 도전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그럴수록 신앙인들은 더 외쳐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이사야나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그분의 참되심을, 결국 그분께서 승리하실 것임을.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위치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소홀히 해오고 등한시해왔던 하느님의 위치를 다시금 재설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상 모든 것 위에,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내 삶의 최우선 순위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존경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 인생의 No. 1이며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역시 당연히 내 사랑에 상응하는 노력을 보여줘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 계속 눈길을 돌립니다. 그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방긋방긋 웃으며 다가갑니다. 그런 순간 느낄 배신감과 비애감은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각자를 향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이 지상에 잠시 머무시는 동안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시는지를 온몸과 마음으로 잘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일회적이거나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영원히 구원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십자가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런 무한정의 사랑, 정말이지 우리를 향한 불타는 사랑, 이글거리는 뜨거운 사랑, 어찌 보면 바보 같은 사랑을 끝도 없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태도는 너무나 냉랭합니다. 감사는커녕 그 큰 사랑을 헤아려보지도 않습니다. 거의 배은망덕 수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하느님, 우리 뇌리 속에서 점차 외곽으로 밀려나시는 하느님을 다시 한번 삶의 중심으로, 정신이나 사고의 중심으로 회복시키는 작업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여 말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요한 3,36)
왜 그럴까?
왜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졌다고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것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의 신원과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을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곧 아드님(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보내진 사랑입니다.
여기서 ‘위’ 혹은 ‘하늘’이란 단순히 하늘과 땅, 위와 아래라는 상대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와 ‘오신 분’이라는 차이, 곧 본질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난 이'가 아닌,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오신 분', 곧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 곧 우리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해를 넘어선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자신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내면적인 응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곧 응답을 통하여 자신을 건네 드리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인 'CREDO'라는 단어 역시, 'CRO'라는 ‘가슴, 심장, 생명’이라는 말과 ‘DAER'라는 ’주다‘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곧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심장, 생명, 곧 자기 자신을 건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인 결속을 의미합니다.
곧 실제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서는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곧 ‘오신 분’이 이미 ‘와 계신 분’이 되고,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곧 현재가 되고, 현세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생명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필리 3,20) 입니다.
땅에서 부활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골로 3,1-2)
<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요한 3,36)
주님!
저희는 당신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지지 않는 것을 줄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께서는 그것을 내어주시기에 진정, 사랑이십니다.
주님!
당신을 믿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당신을 믿는 우리가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을 이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5,5)
'위에서 오신 당신'(요한 3,31)을 받아들여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 살기에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
아멘.
말씀 나누기 - 부활 2주 목요일-생명도 운명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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