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4월 26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2. 4. 26. 06:32

 2022 4 26 활 제2주간 화요일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요한 3,7ㄱ.8-15)
 

"‘You must be born from above.'
The wind blows where it wills, 
and you can hear the sound it makes,
but you do not know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goes;
so it is with everyone who is born of the Spir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벌어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후에 황제에 직위 했습니다. 실각한 후 남대서양 외딴섬인 세인트 헬레나에서 보낸 6년의 세월을 제외하고, 그는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날은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다.”

미국 작가인 헬렌 켈러는 시각, 청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생후 19개월 되었을 때, 성홍열과 뇌막염으로 얻게 된 시각과 청각의 장애였습니다. 어렸을 때 얻은 이 장애로 얼마나 힘들을까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행복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하고,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행복은 상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받아들일 때는 행복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로 새로운 관점, 하늘 나라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유명한 스승으로 알려진 니코데모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만사를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던 타성에 굳어져서 영성적인 하느님 나라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나라는 믿음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까요?

믿는 그 사람이 원하는 모습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또 다른 표현으로 ‘사랑’이라고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하기에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발 믿으라고, 또 제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을 인간적으로만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주님의 자리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도 사라지고, 사랑도 찾기 힘들게 됩니다. 세상은 그 모든 것을 욕심과 이기심으로 채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이라는 하늘 나라의 관점을 내 삶의 중앙에 위치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생각의 씨앗을 뿌리면 행동의 열매가 열리고,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가 열리고, 습관의 씨앗을 뿌리면 성격의 열매가 열리고, 성격의 씨앗을 뿌리면 운명의 열매가 열린다(나폴레옹).

 빛이 되기 위해 살지 말고, 빛임을 증명하기 위해 살라!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G57Ek_RK4uI

예수님은 밤에 당신을 찾아온 니코데모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로부터’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태어날 때 갖는 것을 ‘본성’이라고 합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새로운 본성’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본성이 크게 둘로 나뉩니다. 바로 빛의 본성과 어둠의 본성입니다. 빛의 본성은 하늘의 본성이고 어둠의 본성은 땅의 본성입니다. 빛의 본성은 창조자 하느님의 본성이고 어둠의 본성은 피조물의 본성입니다.  

 

    본성을 알아보는 방법은 ‘욕구’를 통해서입니다. 피조물의 욕구가 있고 창조자의 욕구가 있습니다. 피조물의 욕구는 이 세상에서의 생존이고 창조자의 욕구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피조물의 생존 욕구와 대치됩니다. 

예수님은 이 욕구를 변화시키는 방법이 ‘십자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하늘의 본성을 가진 이가 땅의 본성을 끌어올리려면 십자가에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짐승 – 인간 – 하느님’의 세 단계로 탄생하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본성으로 탄생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라고 하시는 이유는 세상에서도 새로 태어남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 새로 태어남은 동물의 본성으로 태어나서 인간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때 부모는 하늘입니다. 하늘은 자녀들을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합니다. 자녀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십자가의 희생이 아니면 자녀들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하지만 인간도 여전히 피조물이라 생존 욕구의 노예일 뿐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인간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교리가 그렇습니다. 인간이 부처가 된다는 말은 인간이 노력하면 스스로 신적인 본성으로 승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기가 부모 없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본성은 본성에서만 나옵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에게서 나오고 동물의 본성은 동물에게서, 그리고 하느님의 본성은 하느님에게서만 나옵니다. 하느님 없이 하느님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지닌 이가 먼저 존재하지 않으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인간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빛이시고 그 본성이 하느님이신 이유는 인간 안에 사랑의 욕구를 심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동물의 본성이 아닙니다. 동물도 그 사랑의 수준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동물은 무리생활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일정 기간 부모에 의해 사랑을 배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에는 자신이 부모와 같은 본성이기 때문에 부모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지배하는 시기입니다. 그분이 나의 부모이고 내가 부모처럼,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믿지 못하면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본성으로 태어나는 방식은 내가 그 새로운 본성임을 증명하는 삶을 통해서입니다. 누구나 매일매일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증명하며 삽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창조자시라는 이유는 사랑이란 본성은 내가 창조자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아니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에서는 사랑의 본성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피조물 안에 넣어진 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사랑입니다. 어떤 동물도 동료를 위해 대신 자기 생명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처럼 심지어 몰랐던 이들을 위해서도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게 하느님으로 새로 태어난 인간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나는 것이고, 하느님이시기에 죽지 않으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웃을 새로 태어나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고 있다면 창조자의 본성으로 올라오는 중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태어납니다. 빛은 빛으로만 태어납니다. 이 세상의 유일한 빛은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빛일까요? 그러면 빛임을 증명하고 있을 것입니다. 최근 애플 TV에서 발매한 드라마 ‘파친코’에서 이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선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목사와 결혼하여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사는 할머니입니다. 선자의 손자는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미국의 잘 나가는 회사 직원이었으나 승진에서 제외당합니다. 

  

    그런데 일본 지사에 좋은 일거리가 있습니다. 한국계 할머니가 그들이 건물을 지으려는 땅에 알박기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그 일을 해결하고 오면 부사장 자리를 내어달라는 약속을 하고 일본에 건너옵니다. 솔로몬은 할머니에게 10억 엔을 주겠으니 집을 팔라고 합니다. 할머니는 막무가내입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지혜를 냅니다. 바로 자기 할머니 선자를 그 할머니와 만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은행에 사인하러 옵니다. 일본인들은 깊은 인사를 하며 겉으로는 할머니를 공경하는 척합니다. 그러나 시선은 매우 따갑습니다. 솔로몬은 할머니에게 기쁜 얼굴로 말합니다. 

    “할머니가 이겼어요. 오늘 대대손손 물려줄 큰돈이 생기는 거니까요. 오늘 내 할머니가 뭐 하시는지 아세요? 고향 떠나시고 처음으로 한국 가세요. 50년 전 여기 오실 때는 빈손으로 오셨는데 오늘은 일등석 타고 가신다고요.” 

 

    그러나 할머니는 계약서 내용을 꼼꼼히 훑어봅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친절했던 일본 사람들의 눈빛이 바뀝니다. 어떤 임원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님, 이 중요한 사람들을 다 기다리게 하고 계세요.”

할머니가 여기서 사인하면, 그냥 돈 많이 벌려고 알박기하려던 또 한 명의 조선족이 될 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사인하려던 펜을 멈추고 유일한 한국 혈통인 솔로몬을 바라보며 이렇게 한국말로 말합니다. 

    “처음 왔을 때 일본 사람들은 우리에게 집을 내어주지 않았다. 우리를 바퀴벌레라고 불렀지. 잘 생각해 봐. 그게 너한테 하는 얘기니까. 어디 한 번 들어보자. 네 할머니가 저 히죽대는 면상들 쳐다보며 여기 앉아 계시는데 그 몸속에 한 맺힌 피가 그 핏방울 하나하나가 이걸 못 하게 막는다 하면 뭐라 말씀드릴 거야? 그래도 사인하라고 하겠니?”

 

    솔로몬은 눈빛이 바뀌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씀드렸을 거예요. 하지 마시라고.”

솔로몬은 회사에서 잘립니다. 그런데 넥타이를 풀어 헤친 솔로몬은 비를 맞으며 길거리 버스커들의 음악에 몸을 맡깁니다. 정체성을 찾은 자유의 행복을 만끽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둠에 머물러 있게 만드는 본성이 있고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참 자유는 내가 하느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행동이 나옵니다. 또 그렇게 하루하루 하느님의 본성에 가까워집니다.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며 삽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고 요한 복음이 줄기차게 말하는 믿음입니다. 

  

    나는 내가 사람임을 증명하며 삽니까, 하느님임을 증명하며 삽니까?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며 삽시다. 그래야 조금씩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갑니다. 빛이 되려 하지 말고, 이미 빛임을 믿고 증명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 핏속은 이미 하느님의 핏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부활하여 살아갈 것인가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Bw1Rg3eR59I

오늘 복음은 세례 받은 이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에 대해 알려주고 있고, 오늘 독서는 초대교회가 이룩한 공동생활을 전해줍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이유, 공동생활을 하는 목표가 다 부활에 있습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 유럽 사회 전반에 그리스도교 문화를 파급시킨 교회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였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확보되었으나, 신앙이 사사화되고 세속화되는 바람에 성경이 증언하는 공동생활이 어려워지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정치권력이 되었고, 부자와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차별하는 신분제도 안에서 상대적 자유를 누린 반면 대다수의 신자들은 가난했습니다. 평등이 실현되지 않는 종교의 현실에서 신앙의 자유란 빈 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유럽식 교회 모델을 다른 대륙으로 옮겨놓는 일이 선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이 위기 속에서 세속화되어 버린 신앙 진리를 쇄신하고자 하는 선각자들이 나타나서 수도회 운동을 개척했습니다. 수도생활은 성경이 가르치는 공동체를 실천함으로써 이를 통해 부활 신앙을 선포할 수 있는 사도직 활동으로 선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자면 공동체를 위한 약속을 해야 했는데, 이것이 세 가지 복음적 덕행이었습니다. 

 

  복음삼덕의 첫째는 순명의 덕행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순명하신 것처럼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순명하였으며, 초대교회 신자들도 사도들을 통해 하느님께 순명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순명은 하느님께 대해 우리의 자유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받아들이시고 그 자유를 더욱 온전하게 성숙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요 인간 구원을 위한 은총입니다. 공동체를 대표하는 장상은 수도회원들이 서원하는 순명의 약속을 받아 하느님께 맡겨둡니다. 이러한 과정에 의해서 주어지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순명 행위가 세상의 죄를 없앨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명은 복종을 넘어서서 더 큰 자유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정결의 덕행입니다. 정결은 회원들끼리 서로 섬기는 공동체의 질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도로 그리고 신자들은 공동생활에로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담대하게 만드시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셨는데 그 첫째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려는 태생적인 이기적 경향을 극복하여 형제적 사랑을 실천할 용기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받은 후에 가장 먼저, 유다의 자리를 대신 채울 사람으로 마티아를 뽑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사도 1,15-26). 자신들이 각자 따로따로 불린 처지가 아님을 알고 애초에 열두 사람을 부르셨던 예수님의 역사적 선택을 보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를 대신하고자 감행하셨던 예수님의 선택은 열두 사도의 공동체로 역사 안에 구현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공동체적인 선택에 따라서, 초대교회 신자들 역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빵을 나누는 일, 즉 미사를 봉헌하면서 한마음이 되고자 예수님께 기도하였습니다(사도 2,42-47; 4, 32-37). 미사는 영성체를 하는 일 이전에 더 중요한 일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신자들과 서로 섬김으로써 예수님의 유언을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직자들은 동료 사제들을 형제로 받아들이고 수도자들은 동료 수도자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며 평신도들은 자기가 선택한 배우자에게 부부애를 실천합니다. 그래서 정결은 독신생활을 넘어서서 더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는 청빈의 덕행입니다. 청빈은 자발적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공동의 소유로 내어놓고 공동으로 사용하게 개방하는 태도입니다. 본시 하느님의 소유인 모든 재화를 소유주이신 하느님의 뜻대로 소유함으로써 그 재화가 필요한데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덕목이 청빈입니다. 그래서 청빈의 덕행도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는 일이며, 나누어서 가난해 지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청빈은 빈곤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는 나눔입니다. 


  이 복음삼덕에 대한 서원을 기초로 세워지는 수도생활의 이상과 목표는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이었습니다. 수도생활이 교회의 영혼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평신도들의 가정이 성화될 수 있는 모범이 되어 주는 공동생활의 가치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평신도들도, 부부가 하느님께 대해서 순명을, 배우자에 대해서 정결을,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청빈을 실천함으로써 성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렇듯 복음삼덕은 우리 모두를 사랑 안에서 새로 태어나게 함으로써 부활의 은총을 입을 수 있게 해 주는 해방의 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이요, 하느님 나라의 사회적 실체입니다. 또한 이것이 오늘날에도 하느님을 믿는다는 일이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는 세상의 질문에 대해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이에 순명하는 것이라고 응답하는 길이요, 인간관계에 있어서 믿는 이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묻는 세상에 대해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정결의 덕행으로 서로 섬기는 공동체라고 응답하는 길이며, 물질 소유와 가난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 공동체에서 청빈 덕행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는 일이라고 응답하는 길입니다. 

 

  교우 여러분!

순명과 정결과 청빈의 덕행으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이 우리를 들어 올려 부활시키는 길입니다.

 -조재형신부-

 

성령기도회에서 주관하는 하루 피정을 다녀왔습니다군대에서는 주특기에 따라서 임무가 주어집니다성령기도회의 피정을 보면서 신부님들과 봉사자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았습니다암으로 투병 중임에도 감동을 주는 강의를 하신 신부님이 있었습니다성령기도회를 뒤에서 든든하게 지원해 주는 지도 신부님이 있었습니다성령의 이끄심을 청하는 찬양 봉사 팀이 있었습니다노래와 심령언어는 피정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울림을 주었습니다참석자들이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와 다른 신부님들은 고백성사를 주었습니다깊은 성찰이 있어서인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성사를 보았습니다고백성사의 사죄경의 의미가 떠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온 세상을 하느님과 화해 시켜 주셨습니다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교회의 직무 수행으로 용서와 평화가 주어졌습니다저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의 사함을 말하였습니다.’ 비빔밥은 재료가 섞이면서 새로운 맛을 냅니다많은 분들이 함께 하니피정이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십자가의 무게가 줄어들지는 않았겠지만성령의 이끄심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행복은 환경능력재능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나고부모님께서 능력이 있어서 뒷받침을 잘 해 주시고본인도 똑똑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행복할거라 생각합니다주변을 둘러보면 이렇게 3박자를 모두 골고루 갖춘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3박자를 모두 얻은 사람들이 100%로 행복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행복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그것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런가 하면 행복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가난한 나라에 태어났어도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어도능력이 모자라서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어도겨우 직장을 얻어서 밥은 먹고 살아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욥 성인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도 감사합니다하느님께서 내게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를 드렸으니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신다 해도 감사를 드립니다.’ 욥 성인에게 행복의 기준은 재산능력화목한 가족이 아니었습니다행복의 기준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사도들은 공동체를 이루었고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으며모두가 부족함이 없었다고 합니다바르나바는 자신의 것을 공동체를 위해서 봉헌하였지만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왜 그렇게 되었을까요사도들이 처한 환경이 더욱 좋아진 것도 아닙니다아직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감시하고 있었고박해의 칼날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습니다사도들의 능력이 갑자기 커진 것도 아닙니다그들은 능력도 재산도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그럼에도 사도들이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 그들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를 묵상하면서 예전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시골의 작은 성당에서 3년간 있었습니다벌써 23년 전의 기억입니다신자들과의 첫 미사에는 5명이 함께 했습니다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한분은 해설이셨고한분은 독서였고두 아이는 복사였습니다다른 한분은 아들 신부가 본당신부가 되었다고 찾아오신 어머니였습니다. ‘주님께서 어머니와 함께라고 미사를 드렸던 기억입니다주일 미사에서 헌금을 정리했습니다헌금액수는 195,000원이었습니다그럼에도 저는 3년 동안 재정적인 문제로 고민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성당을 떠날 때는 거금 삼천만원을 남겨드리고 떠날 수 있었습니다뜨거운 열정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시골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서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행복은 내가 바라보는 대로 주어집니다원망과 미움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면 그만 큼 나는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감사와 찬미희망과 겸손의 바람이 불면 나는 그만큼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 얻게 되는 은총과 축복!

 -양승국신부-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체험하고 통과해야 하는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위로부터 새로남’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마음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당면한 과제에 연연하고 집착하느라 위를 올려다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저 단 한 치 앞의 것들, 육적이며 세상적인 것들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가끔 고개를 쳐들고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볼 일입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가련한 내게 임하시어 내가 주님 은총 안에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 우리가 받게 될 은총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겪어야만 하는 갖은 고통과 우여곡절,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도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할 힘을 지닐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다가올 병고와 죽음조차도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려니 생각하고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쉼 없이 흔들리는 지상 여정 안에서도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절대적인 존재가 계십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은 마치 바람 같다고 설명하십니다. 바람이 동서남북 어디로든 자유자재로 부는 것처럼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도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하느님의 성령도 바람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네 인생도 마치 바람 같습니다. 나름 버틴다고 두 다리에 힘을 딱주고 지상에 서 있지만, 성령의 세찬 바람이 언제, 어디에서 확 불어올지 모릅니다.

  

그 바람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더 머물러 있고 싶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성령께서 ‘자, 때가 되었다! 일어나자!’ 그 한 마디면 그걸로 끝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과 축복은 놀랍습니다. 물과 성령의 세례로 다시 태어난 우리 영혼과 육신은 마치도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워질 것입니다. 

 

평소 잘 들리지 않았던 부드러운 주님 음성을 더 명확하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벼워진 몸을 성령의 바람에 내맡겨 어디로든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서든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지긋지긋하던 십자가가 사실은 가장 큰 하느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지루하고 고달프게 만들었던 일상생활이 눈부신 경이로움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성가시게 했던 이웃들이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말끔하게 정화되어 순수해진 영혼의 눈으로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 안에 들어있는 값진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나게 될 때 주변 모든 사물들이 다 스승으로 변할 것입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잎들, 푸른빛을 더해가는 대나무 숲, 출렁이는 물결, 고요한 호수, 황금빛 석양...이 모두는 다 인생의 진리를 말해주는 스승이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 예수님은 더 이상 멀고먼 옛 사람, 이천년 전의 나자렛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내 일상생활 전체를 동반하시는 ‘나의 주님, 나의 스승님’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이영근신부-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은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살다, 다시 살다'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서다, 다시 일어서다'입니다.

곧 ‘부활’과 ‘들어 높여짐’입니다.

 

지난 부활 8부 동안의 말씀전례에서는 첫 번째 뜻,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드러내주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두 번째 뜻인 '들어 높여지다,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뜻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놀라운 사실, 아니 억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을 전합니다.

곧 분명 누명을 쓰고 죽은 실패인데도 오히려 승리라 하고, 분명 죽었는데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도 놀라운데,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리하여 드높여졌다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아래’로 내려갔으나 ‘위’로 올라가는 역전의 대전환이라는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요한 3,7)

여기서, ‘위’(ano) 혹은 ‘아래’(kato)라는 말은 '위'란 산을 오른다든지 로켓을 타고 우주 위로 올라가는 것을 물리적인 위치나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위’와 ‘아래’라는 말을 쓸 때 이는 ‘두 가지 질서(방식)’을 가리킵니다.

곧 ‘아래’는 자기중심적인 ‘나’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요, ‘위’의 질서는 사랑의 ‘성령’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지상에 묶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요한 3,9)

 

이는 어디선가 이미 들은 낯익은 질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천사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처럼 이 질문은 우리가 전 인격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곧 성모님처럼 ‘피앗’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하물며 어찌 믿겠느냐?”

(요한 3,12)

 

이는 우리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이유가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에 대한 고집 때문에 새로 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영으로부터 곧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믿음(피앗)으로 응답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역전의 대전환이 있고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모든 것을 새롭게 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눈’으로 봅니다.

곧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워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요한 3,13)

 

주님!

당신은 패배하셨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으셨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고, 추락하셨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숨겨져 있는 저의 생명이 당신과 함께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행동하는 믿음」

 -반영억신부-

 

개나리, 진달래, 라일락, 벚꽃, 영산홍, 사과, 배, 복숭아꽃이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미선나무도 하얀 꽃을 피웠습니다. 긴 겨울의 추위를 견뎌 낸 나무들이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자태를 뽐냅니다. 곧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영양을 충분히 지닌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들이 드러납니다. 밑거름이 중요한데 웃거름으로 겉만 다스렸던 나무들은 힘이 없습니다. 밑거름이 충분하면 필요할 때마다 알맞은 영양분을 흡수하지만, 밑거름이 충분하지 못하면 일시적인 효과를 내는 웃거름에 매달리게 됩니다. 결국은 튼실하지 못하여 쉽게 명을 다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밑거름이 소중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는 꾸준합니다. 그러나 기도 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효과를 찾아 헤맵니다. 세상에 떠도는 유명한 곳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신심 단체활동 등 생색내는 일에는 열심히 하면서도 미사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큰 믿음을 지니려면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기도 생활로 밑거름을 줘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믿음의 생활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4-1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고,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행함으로써 증거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됩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3,10). 는 주님의 꾸지람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닫힌 마음에는 진리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17,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분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 관계는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의 삶이 중요합니다. 알프레드 디 수사 신부는 말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안에서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하게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송영진신부-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7ㄱ.8).”

 

이 말씀 앞에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위로부터’는 ‘하느님에 의해서’, 또는 ‘물과 성령으로(세례성사로)’입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또 하느님에 의해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새롭게 태어나는(변화되는) 일은

‘성령의 작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라는 말씀은,

‘성령의 작용’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소리를 듣고서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아도 그 바람을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에 의해서, 또는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일은,

‘체험’할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람’을 예로 들어 말씀하신 것은, ‘성령의 작용’에 대한 설명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작용’은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신비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사람의 변화된 모습을 볼 때도 많고,

또 그 사람 자신이 새로 태어났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얼마나 변화되고 새롭게 되었는지는

세례 받은 사람 자신도 설명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은 얼마나 변화되었는가?

나는 ‘새로운 삶’을 잘 살고 있는가?” 라는 점입니다.

‘변화의 힘’은 하느님에게서 오지만,

우리 쪽에서 그 힘을 능동적으로 받아야 하고, 변화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 노력도 없이 저절로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세례성사를 받았으면 세례 받기 전과 다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고,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요한 3,11-12)”

 

이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뒤의 32절에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3,32).”

‘예수님의 증언’은 당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에 관한 증언이기 때문에

‘확실하고 분명한’ 증언입니다.

<‘예수님의 증언’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

또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뜻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눈에 보이는 ‘표징’만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요한 3,2).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표징만 찾고, 표징에만 의지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세상일’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성령의 작용이지만,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세상일’이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하늘 일’은 하느님의 신비와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일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신비와 계시에 관한 일들을 믿으려면,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들을 실천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해야 한다.”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3-15).”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하늘로 올라간 이’ 라는 말은, ‘승천하신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요한 3,34).

예수님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는 말씀은,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하늘 일’을 알아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일은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에서 ‘들어 올린 뱀’은 회개와 구원을 상징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라는 말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목적입니다.

‘사람의 아들 안에서’ 라는 말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신앙생활을 뜻하기도 하고,

그분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 밖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부활절을 지냈다고 해서 십자가를 잊어버려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여정은 ‘회개와 보속의 십자가 여정’입니다.

신앙생활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2주 화요일-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도 가난하지 않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4월 13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