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3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마음이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꼬 16,9-15)
He appeared to them and rebuked them
for their unbelief and hardness of heart
"Go into the whole world
and proclaim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최고 의회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전에 교통사고가 크게 난 적이 있습니다. 자동차 엔진까지 수리할 정도의 큰 사고였습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차량 수리 가격이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차에 이상이 계속 발견되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자동차 머플러에서 검은색 매연이 쏟아집니다. 신호대기를 하며 잠깐 정차하는데 시동이 꺼집니다. 핸들을 꽉 잡지 않으면 똑바로 가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갑니다. 계속 정비소에 가서 정비받았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차를 타는 것 자체도 겁이 났습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긴장이 되었습니다. 이 차를 어떻게 했을까요? 결국 중고차로 팔아버렸습니다. 운전하는데 믿음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당신이 직접 창조하신 이 세상 안에서 편한 마음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늘 불안하고 초조해하면서 힘들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은 이 영역이 우선 보이지 않는 실재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을 수 있을까요?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있음을 아는 것처럼, 주님 존재를 굳게 믿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 부활 후의 발현을 세 번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것, 그다음으로 시골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 마지막으로 열한 제자들이 식탁에 앉아 있을 때 나타나신 것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세 번에 걸쳐 발현하셨다는 기사를 쓰면서 한결같은 어조가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제자들 앞에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누구보다도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할 제자들이어야 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컸습니까? 특별한 사랑으로 함께 하셨고, 그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세 차례에 걸쳐 이야기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느님 나라의 신비도 끊임없이 전해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주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가 힘듭니다. 세상일에 집중하고 있으면 마음이 완고해지고 의심이 많아지면서 주님을 알아볼 수가 없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요? 주님께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세상의 것들에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나요?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집중해보십시오.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인격적 체험, 믿음의 열쇠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VvLENmlXLRY
일곱 마귀에 들려 고생하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서 마귀도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인격적 체험을 했습니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밝은 세상에로 해방되는 체험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바로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 체험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시중도 들어 드렸으며 십자가 죽음의 순간까지 지켜드렸습니다. 그 결과로, 가장 먼저 발현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마리아가 부활도 가장 먼저 체험한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십자가와의 거리가 부활과의 거리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부활 소식을 마리아로부터 전해 받은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동료들의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 불신과 완고함은 결국 다시 한 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도 인격적 체험을 하게 해 주시자 그들도 별 수 없이 부활을 믿게 되고 사도로 거듭 났습니다. 그리하여 사도가 된 제자들은 더 이상 유다교의 박해를 겁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사도 4,19)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보다 더 당당하게 나왔습니다. 이러한 자신감과 자존감은 그들이 제자 시절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겪은 것과 같은 인격적 체험을 했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체험이 사랑의 체험이요 진리의 체험입니다. 절실하고 절박하며 용기를 내게 만들어 준 정신적 에너지요 신앙의 기운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방식은 먼저, 그리스도인들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게 변화되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사 생활입니다. 미사 봉헌은 말씀으로도, 성체성사로도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귀한 자리입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마귀들이 있다면 이 성사로 쫓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불신이 있다면 이 성사로 몰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를 가두어 놓고 있는 완고함도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믿지 않고 불신과 완고함에 사로잡혀 있었던 제자들과의 차이를 극복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거듭 날 수 있는 길이 바로 성사 생활에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에 힘입어 이 불신과 완고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종교적 장치를 마련했으니, 그것이 성사입니다. 성사의 연원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정하신 성찬례이고, 교회는 이를 성체성사로 부릅니다. 그리고 이를 준비할 수 있는 세례 및 견진 성사와 고해 성사를 제정했고, 이를 사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병자 성사를 마련했으며, 이를 주관할 수 있는 사제를 선발하는 성품성사와 함께 가정을 이루는 신자들을 위한 혼인 성사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사는 성자 그리스도의 제정에 뿌리를 두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목적 필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교회가 제정한 것이고, 부활하신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 주는 영적인 장치입니다.
무릇 모든 성사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념하여 이를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실천하도록 하는 데 그 취지가 있습니다. 성사야말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영적인 도구입니다. 교회가 제정한 종교적 제도이지만 그 본질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을 일상화시키며 그로 인한 현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기운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서, 영적인 도구의 지위를 얻습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성령의 사기지은을 발휘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시러 동분서주하십니다. 손상되지 않고, 빠르며, 빛나고, 예민한 성령의 에너지를 분출하고 계십니다. 이를 끓는 물에 비유하자면, 99도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상온에서 물은 나머지 1도를 더 가열해서 100도가 되어야만 비로소 끓게 됩니다. 이 1도에 해당되는 것이 우리의 깨달음과 노력입니다. 은총은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상수(常數)이며, 변수(變數)는 오직 우리의 몫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풀기 위해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상수인 그리스도의 은총을 깨닫는 일과 변수인 우리의 노력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본질은 인식과 실천의 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 소식을 가지고 제자들을 찾아갔을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소식이 거짓이었거나 또는 제자들이 사도가 될 의지가 전혀 없었더라면 그들의 믿음은 성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을 받아들여 믿음을 지니게 된 제자들은 사도로 거듭 났고, 그들의 사도직 활동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성사 생활에서 그리스도와 만나는 인격적 체험을 소중히 가꾸시기 바랍니다. 절실하고 절박하며 인격적인 만남의 체험을 성사에서 하는 것, 지금 우리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을까요?
-조재형신부-
2005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황우석 사건’을 생각합니다. 당시 황우석 박사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줄기세포’연구를 하였습니다. 결과가 좋으면 난치병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고, 국익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방송에서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황우석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윤리적인 면입니다. 여성들에게 난자를 채취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설명도 없었고,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연구 결과에 대한 조작이 있었고, 진상에 대한 은폐와 왜곡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가톨릭교회는 연구의 윤리적인 문제를 지적하였습니다.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국가의 이익을 망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는 언론의 과장된 보도와 정부의 감독 소홀에도 책임이 있었습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이는 신앙인이 선택해야 할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적자생존, 승자독식, 약육강식, 무한경쟁,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신앙인이 가야할 길은 아닙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정민 교수의 ‘한국교회사 숨겨진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정민교수는 한국천주교회의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만천유고’는 위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인 이벽 세례자 요한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성교요지’도 위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사 학자들은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않고 만천유고와 성교요지를 이승훈 베드로와 이벽 세례자 요한의 작품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학계의 검증을 통해서 두 작품은 위작이라는 것이 드러났음에도 만천유고와 성교요지를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들의 작품으로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신앙의 선조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작품들을 쓰지 않았어도 이승훈 베드로는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세례자로 존중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작품을 쓰지 않았어도 이벽 세례자 요한은 그의 학식과 인품으로 한국천주교회를 이끈 창립자로 존중 받을 수 있습니다. 진실을 가리기 위해서 거짓으로 또 다른 잘못을 주장한다면 이것은 무식한 것이 아니라 무지한 것이 됩니다. 무식한 것은 몰라서 범한 실수이지만 무지한 것은 알면서도 범한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황우석 사건’이나 ‘만천유고와 성교요지 논란’에는 욕심과 욕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으면 거짓이라는 덫에 걸릴 일도 없습니다.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으면 앞에 놓인 진실을 너무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커다란 걸림돌 또한 욕심과 욕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과 죽음을 겪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그렇습니다. 욕심과 욕망에 빠지면 꽃은 보지만 땅 속에 있는 뿌리를 보지 못합니다. 욕심과 욕망에 빠지면 십자가 없는 부활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욕심과 욕망을 버리면 십자가는 부활을 향해 가는 이정표가 됩니다. 우리가 욕심과 욕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또 다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사도행전입니다. 그리고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또 다른 사도행전이 될 때,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선물이 될 것입니다.
![](https://blog.kakaocdn.net/dn/pF8nA/btqQ0PG6aOz/UDuWeXSP91LjxbotLRQ6l0/img.jpg)
기회가 좋던지 나쁘던지 삶의 모든 순간을 복음 선포를 위한 최적의 순간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저같이 작은 자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를 주고 있습니다. “그 무렵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사도행전 4장 13절)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사도들이 세상 앞에 보인 모습은 가히 놀랄만했습니다. 별로 배운 바도 없고, 용기도 부족했고, 믿음도 형편없었던 사도들이었는데, 이제는 완전 다른 모습입니다. 마치 또 다른 예수님을 뵙는 듯했습니다.
이제 사도들은 명실공히 제2의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공생활 절정기의 예수님처럼 담대히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살아생전 권능이 충만한 주님처럼 놀라운 기적을 행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변화된 사도들의 모습 앞에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놀랍게 변화된 사도들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제 지난 인생 여정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변화된 제 모습에 저 자신도 깜짝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어린 시절 저는 극도의 가난으로 인해 유치원이라든지 조기 교육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정규 교육 과정도 겨우겨우 통과했습니다. 수도회 입회 후 어렵사리 신학교에 입학했었는데, 여기저기 시름시름 앓다 보니 제대로 된 신학 과정도 밟지 못했습니다. 나름 큰 포부를 안고 유학이라고 다녀왔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던 관계로, 배운 것이라곤 유학의 쓴맛과 나 자신의 한계에 대한 절실한 체험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토록 부족하고 무식한 저이지만, 요즘 나름의 방식으로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한없이 부끄럽지만 최선을 다해 어려운 복음 말씀을 잘 가다듬고 정련해서 세상과 공유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제 과거를 굳이 들춰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 선포는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과제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저같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 저같이 죄가 많고 부당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복음 선포를 지상 과제로 여기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못 배웠으니, 나는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니, 나는 복음 선포와는 무관한 사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큰 오산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기회가 좋던지 나쁘던지 삶의 모든 순간을 복음 선포를 위한 최적의 순간으로 여겨야겠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하느님께서 부여해주신 소중한 선물, 탈란트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 선물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하느님과 세상, 이웃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이영근신부-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시 118,24)
그렇습니다.
오늘 이날은 제가 만든 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시고 건네주신 날입니다.
인간에게 큰 사랑이 베풀어진 날이요, 당신의 죽음으로 부활생명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날입니다.
이 날의 아름다움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36항)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막달레나 마리아도, 엠마우스의 두 제자들도, 모여 있던 열 한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맑고 투명한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미 듣고 보았지만, 믿지를 않은 까닭입니다.
이를 믿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를 우리는 요즈음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통해서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 안에서 어떠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믿음’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믿음이 삶이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되고 증거됩니다.
믿음이 삶이 될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매달 듯 그렇게 자신을 내어놓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마르 16,15)
여기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우리는 온 세상에로 '가라'는 파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 안에만 머물지 말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원임을 말해줍니다.
마치 당신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향하여 먼저 다가오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파견 받은 자'가 되어야 하고, 파견하신 분의 뜻을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파견 받았으되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파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족 온 인류에게로 가라는 것이요, 또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로 가라는 파견이요,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파견입니다.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살라는 말씀이요,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동료와 손을 잡고 걷되 다름 아닌 당신과 함께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2015.6.18.)에서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사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어머니”(1항)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피조물에 관한 책임을 성경의 전승에 비추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그렇다면 오늘 나는 내 형제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어주고 있는가?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걸으며,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기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복음을 선포하여라」
-반영억신부-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과의 선한 관계가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 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완고한 마음은 말씀이 전달되는 것을 막고 부활이 선포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 마음이 거칠어지고 굳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완고해진 내 마음을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고쳐주시길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어영부영, 양다리 걸치기는 증거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자가 되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여기서부터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으로서 다른 것도 그렇지만
부활 사건도 다른 복음과 비교할 때 가장 짧고 단순하게 전해 줍니다.
그래서 이 짧은 복음의 내용은 단 두 가지입니다.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과 그런데도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얘기 들었지만
모두 믿지 않았고 그래서 이번에는 주님께서 친히 사도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꾸짖으신 다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여기서 우리는 생각게 됩니다.
그렇게 믿지 못하고 완고한 사도들에게 주님께서는
어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시는지.
이런 사도들에게 막중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겨도 될는지.
게다가 사도들은 특출난 사람도 아닙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요한에 대한 당대 지도자들의 평과 반응을 전합니다.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렇습니다.
유식하고 특출한 사람이 사도가 되고 복음 선포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선포자로 부르실 때 그 부르심을 받아들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복음 선포자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복음 선포자가 되지 않을 것이고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개신교 신자는 부르심 받고 천주교 신자는 안 받았을까요?
그리고 나는 그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이면 좋겠습니까?
너는 무식하고 평범하니 방 구들이나 지키고 있으라 하면 좋겠습니까?
너는 무식하니 빠지라고 하면 매우 서운하고 자존심이 상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생각하고 그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복음 선포자가 될 터인데 그러나 사도들처럼 꼭 세상 끝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여기가 중요하고 여기부터가 중요합니다.
멀리까지 생각하면 할 수 없고 엄두도 나지 않지만
가까이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나부터 복음화하고 내 가정부터 복음화하면 됩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유교에서 말하는 수신제가修身齊家입니다.
사실 복음은 머리와 능력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고,
복음 그 자체로 선포되는 것인데 이 말은, 복음은 그 자체로 힘이 있기에
우리가 복음을 지니고 있기만 하면 그 복음이 스스로 선포하는 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복음은 머리와 능력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이런 힘을 믿는 믿음과 사랑으로 선포되는 것입니다.
나는 코란을 통해 하느님을 믿거나 율법을 통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하느님을 믿어서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이
복음에서 가르치는 사랑으로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하는 것,
이것이 자기를 복음화하고 세상을 복음화하는 복음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복음으로 행복한 사람,
복음 선포가 의식화된 사람,
복음 선포의 열정이 있는 사람, 곧
복음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 여기서건 저기서건
그리고 저 멀리 땅끝까지 가서건 선포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4월 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0) | 2022.04.25 |
---|---|
2022년 4월 24일 일요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0) | 2022.04.24 |
2022년 4월 22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0) | 2022.04.22 |
2022년 4월 2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0) | 2022.04.21 |
2022년 4월 20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0) | 2022.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