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4월 22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Margaret K 2022. 4. 22. 06:23

2022년 4월 22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요한 21,1-14)
 

"Cast the net over the right side of the boat
and you will find somethi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라며 담대하게 증언한다(제1독서). 고기를 잡지 못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엄청난 양의 고기를 잡게 되었고,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알아본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술을 좋아하고 담배도 많이 태우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술과 담배를 끊은 것입니다. 워낙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술도 많이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는 골초였는데 그 모든 것을 끊어버렸으니 주변에서 다 의아해했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졌나 싶었는데, 이 청년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여자 친구가 생겼거든.”

여자 친구가 술과 담배를 너무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데, 여자 친구가 싫어하는 것을 하겠습니까? 싫다는 술과 담배를 단번에 끊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술과 담배를 더 사랑했다면 여자 친구와 헤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이 훨씬 커서 불가능해 보였던 금주와 금연이 가능했습니다.

세상 안의 유혹이 너무 크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유혹을 끊기 힘들다고 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유혹에 빠져서 죄짓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죄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의 유혹이 너무 힘들 때, 주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커질수록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티베리아스 호수에서는 어민들이 낮보다 밤에 출어합니다. 밤에 고기가 더 잘 잡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아침에 신선한 상태로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사실 베드로가 전문 어부 출신이지만 그의 고기잡이는 그리 신통하지 못합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도 그리고 이번 역시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힘과 재주만으로는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얘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이 말은 부모가 귀여운 자녀들을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그만큼 제자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시지요. 그때 비로소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요한이 주님이심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듭니다. 신속한 행동파 같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까요? 사도 요한처럼 예리한 통찰력으로 주님을 알아봅니까? 또 주님이라는 확신에 곧바로 실천하는 행동파 베드로의 모습입니까?

두 모습 모두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주님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과 바로 행동했던 것은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멀리서도 주님이심을 알 수 있고, 사랑하기에 주님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당신의 성숙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와주는 고통을 쉽게 거절하지 마라(게리 토마스).

 삶은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살 때 의미 있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pnTTDG6ILGo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첫 번째는 토마스가 없는 가운데 나타나셨고, 두 번째는 토마스가 돌아왔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지금 세 번째에는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밤새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되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요한 21,6)

 

     오른쪽은 ‘의식’을 상징합니다. 의식적으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백쉰세 마리’나 잡혔습니다. 숫자 ‘153’은 히브리어 ‘하느님의 자녀들’(베니 하엘로힘)을 의미하기도 하고 ‘파스카’(하파사크)의 숫자 값이기도 합니다. 

    배에는 일곱 명이 타고 있었는데, ‘7’은 성령을 상징하기도 하고 창조를 상징하며 칠성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칠성사, 곧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배는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탄생시킵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느님의 자녀는 어떤 사람일까요?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요한 8,41)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도 그들은 살인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는 사람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는 것이 곧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밀가루 안에 넣어 밀가루도 하느님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성체를 말합니다. 하물며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 곧 하느님이 됩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4-36)

  

    여기서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을 하느님이라 했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잘못되었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왜 사람이 신이 될 수 없다고 말하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교리서도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CCC, 460)라고 말하고, 사제란 이 믿음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사제란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CCC, 1589)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성경과 교리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있었을 때 많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믿어도 벗어날 수 없는 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하느님으로 믿을 때 그런 욕망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 곧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개라고 믿으면 네 발로 걷고 싶은 욕구가 나오고, 사람이면 두 발로, 하느님의 자녀라면 물 위를 걷고 싶은 욕구가 나옵니다. 이는 성체가 그리스도이시고 그 성체를 영한 우리도 그리스도, 곧 본성상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을 때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깨닫고 책을 내었지만, 너무 많은 반대에 부딪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이라 말할 것입니까?”라고 물어보면 거의 100% 다 인간이라고 대답할 것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겸손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하느님 부모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 부모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성당을 다니면서도 꼭 가져야 하는 믿음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이 믿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것이 밤이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책을 낸 것은 제 의지로 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밤새 노력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헛수고만 한다는 생각으로 힘이 빠져있었습니다. 

  

    이때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하던 일들을 다 멈추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성체 앞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유튜브를 시작하라는 강한 열망이 솟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튜브 채널조차 만들지 못하는 거의 컴맹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분들에게 도움을 구했더니 생각보다 유튜브를 어렵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팀을 꾸려서 녹화하게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유튜브를 보며 채널을 만들고 그냥 복음 묵상을 올려보았습니다. 

    처음엔 카메라를 보면서 하는 게 매우 어색하였습니다. 카메라를 봐야 하는지 모니터를 봐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많은 조언을 들었고 그렇게 조금씩 발전해갔습니다. 물론 나의 동영상을 보는 분들의 숫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백쉰세 마리란 숫자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행복은 물고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순종하여 열매를 맺게 해 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있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집을 부리고 그물을 내리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에게 부활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부활하신 분이 되려면 내가 물고기가 아닌 그분을 위해서 그물을 던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만날 때 입을 겉옷을 선물합니다. 그리스도를 부활시키는 것이 그분의 가죽옷을 입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영화 ‘레이스’(2016)는 미국에서는 흑인 차별, 독일에서는 유색인 차별이 심했던 1930년대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베를린 올림픽 4관왕에 오른 제시 오언의 이야기입니다. 제시는 자녀까지 있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래리’라는 코치를 보고 대학에 입학합니다. 래리는 제시의 능력을 보고 잘 가르쳐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웁니다. 이렇게 제시가 유명해지자 그를 유혹하는 여인도 많았습니다. 그런 모습이 신문에 나자 제시의 애인은 결혼이고 뭐고 다 취소라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후로 이상하리만큼 실력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래리는 제시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줍니다. 제시는 애인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사과하고 청혼하여 결혼합니다. 

  

    베를린 올림픽 때 히틀러는 흑인과 유대인은 경기에 뛰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은 뛰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신적으로 혼란한 제시를 돕기 위해 래리는 사비를 털어서 베를린으로 옵니다. 이 사실을 안 제시는 래리를 코치로 함께 연습하게 해주지 않으면 경기를 뛰지 않겠다고 말해서 자신의 스승을 높여줍니다. 그리고 함께 모든 역경을 뛰어넘고 금메달을 네 개나 따게 된 것입니다. 

    제시는 처음에 기록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계가 흐트러지고 결국 기록도 하강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위해 뛰기로 다시 결심한 순간부터 다시 기록이 좋아졌습니다. 이때 아마도 목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위해 뛰어야 함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코치 래리를 위해 뛸 줄도 알았습니다. 

  

    사람은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 뛰어야 합니다. 특히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을 위해 뛰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기록도 좋아집니다. 베드로가 기뻤던 이유는 물고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물을 던진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이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감사한 일은 유튜브를 하라고 하셨던 그 음성이 주님의 음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분명 부활하셔서 나를 도구로 쓰고 계십니다. 그래서 내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합당하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는 참 행복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분 목소리에 순종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합당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죽옷, 그것이 나를 참으로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과 창조 신앙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5YvTudqYEyM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부활의 눈으로 이전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고, 부활의 언어로 향후 미래를 새롭게 선포하도록 우리를 재촉하십니다. 18,19세기 한국인들은 한자와 한문에 이런 생각을 구겨 넣어서, 부활 이전의 모든 역사를 선천개벽(先天開闢)의 현실이라 하고, 부활 이후의 역사를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미래라 하며 부활의 위력에 대해 경탄하였습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창조의 뜻도 새로워집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한처음이 시간 속으로 강생 부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타볼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내시어 세 제자에게 빛나는 얼굴로 변화되신 모습을 보여주신 뜻(마르 9,2-10)도, 또 열한 제자를 모아놓고 하늘과 땅의 전권을 받았으니 부활의 복음을 전하라고 분부하신 뜻(마태 28,18-20)도 다 여기에 모아집니다. 

 

  개별 사도들을 둘러싼 많은 신앙인들의 네트워크가 작동되었고, 이 연결망을 통하여 각성된 개별 신앙인들의 연대와 통공이 시작될 수 있는 배경과 바탕이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의 혼돈은 의로운 변화를 원하는 부활 신앙 세력의 도약대입니다. 선교의 풍어 기적이 기다리고 있었고, 태생 불구자처럼 현실 개혁의지나 역사 창조의지가 무기력했던 이들이 일어서고 걷기도 하며 뛰기까지 하고 하느님을 찬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리하여 복음화된 문명은 구체화된 마법의 숫자 153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킨 기적과 선포한 복음의 결과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유다인들이 믿게 된 것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제국이 박해를 멈추고 신앙을 공인하며 국교로까지 승인하게 된 현실적 변화도 또 다른 153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소아시아로 건너간 초대교회의 신앙 공동체들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하느님의 섭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실현되었다는 감격과 확신에 차서 박해를 이겨내고 오히려 박해하던 로마 문명을 복음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한민족이 살던 땅에서도 부활의 위력은 놀라웠습니다. 

 

  민족 최초로 지성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선비 이벽은 이승훈과 함께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명례방 활동으로 한양에서만 천 명의 입교자를 얻었습니다. 그 동료들이었던 강학회 선비들은 이벽이 문중박해로 세상을 떠나자 명륜동과 회현동에 꾸린 자발적인 성사조직으로 그 노력의 뒤를 이어 4천 명으로 신자를 늘렸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강완숙 골롬바와 정약종의 노력으로 신유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만 명으로 신자가 늘어났습니다.

 

  이 복음의 씨앗으로 피어난 신앙의 꽃, 한국의 초대교회는 박해시대 교우촌입니다. 이 신자들이 백년의 박해라는 역경을 물리치고 오히려 늘어만 갔던 교세 신장의 비결, 치명자 뒤에 더 많은 신자들이 순교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교회의 신비도 결국 핵심은 부활 신앙의 위력입니다. 이 힘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성령의 사기지은과 마법의 숫자 153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기억은 밤새 허탕을 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풍어 기적을 체험시키신 오늘 복음으로 우리의 묵상을 이끌어줍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가 전하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킨 태생 불구자의 기적을 다시 상기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불구의 상황 때문입니다. 한국은 경제대국의 길을 걸으며 문화강국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만은 당면한 공동선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후진국 수준으로 주저앉아 있어서 불구자 수준입니다. 허무맹랑한 무속과 주술이 판을 치고 있어도 부활 신앙을 믿는 신자들이 손을 놓고 있는 형국도 불구자 수준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진실을 외면하는 언론이나 정의를 내동댕이친 검찰을 보고 있으면서도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이 구경만 하고 있는 사태도 불구자 수준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이 공동선을 외면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백 년 전에 뼈저리게 겪고도 아직도 기득권 카르텔은 공동선 대신에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인들과 교회가 침묵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외신 기사를 봐야 한국의 본 모습을 진단할 수 있는 이상한 나라, 지금의 대한민국입니다.  

 

  이제 마법의 숫자 153이나 풍어의 기적은 이미 5백만이라는 숫자를 찍은 이상 더 이상 신자가 늘어나지 않아도 이미 세례받은 신자들이 깨어나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의 불구자 신세를 일으켜 세우고, 걷게 하며, 뛰게 해서 결국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까지 이르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이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덤으로 얻어지리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의 사기지은과 풍어기적으로 제자들을 사도들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온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창조하시고자 하신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그 깃발을 따라서, 기묘한 섭리로 이 땅에 그리스도 신앙을 진리로 알아보고 기꺼이 목숨 바쳐 길을 닦으신 신앙 선조들의 바람 역시 우리 나라를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새 땅으로 높이 세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조재형신부-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뽑을 때입니다마르코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그리고 안드레아필립보바르톨로메오마태오토마스알패오의 아들 야고보타대오열혈당원 시몬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됨됨이를 잘 아셨습니다그 중에 예수님을 배반할 제자도 아셨습니다제자들은 능력과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두려움에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하고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도 하고십자가를 포기하고 다락방에 숨어 있기도 했습니다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능력과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셨고사람들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셨고사람들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셨던 것처럼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는 것입니다사람들의 삶을 공감하는 것입니다표징과 기적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알베르트 까뮤는 페스트에서 성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페스트가 창궐한 세상에서 사제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이야기합니다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성스러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페스트가 창궐한다고 이야기합니다도망가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스러움의 또 다른 모습을 이야기합니다내가 도망가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는 것은 의사로서 나의 직무에 성실하고 싶어서라고 이야기합니다내가 내 직무에 성실하지 않고 도망간다면 나는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성실함은 곧 성스러움이라고 이야기합니다까뮤는 페스트를 옮기는 세균은 어쩌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진정한 페스트는 자아를 잃어버린 인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자신의 직무에 태만한 인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마틴 루터 킹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부활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게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부활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의 제자로서 규율은 지키지만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함께 신앙을 고백하고성당에 다니는 것은 혼자만의 신앙은 외롭고불안하고두렵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합니다누군가 길을 만들었고그 길을 함께 걷는 것은 축복이고 은총입니다베드로와 동료들은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그들이 어부였기 때문에 고기를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너희들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겠다.’라고 하신 분, ‘중풍병자를 치유하시고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풍랑을 잠재우셨던 분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복음을 전하셨던 분’ 과의 기억은 하나의 추억이 되어버렸습니다빌딩 숲에 있던 한 그루의 목련처럼 제자들은 외로워보였고그 향기가 도시의 화려함에 묻혀버린 것처럼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이제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제자들은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다시 기운을 차립니다역시 주님과 함께 해야 힘이 나고주님께서 이끌어 주셔야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물고기를 많이 잡고주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는 외로움도두려움도쓸쓸함도 찾을 수 없습니다밤새 충전한 핸드폰의 배터리는 한참을 통화해도 충분한 것처럼주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에게는 박해도시련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생겼습니다그렇습니다주님의 부활은 이웃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이웃의 기쁨과 희망을 함께 공감하는 것입니다그 안에 나눔이 있고그 안에 위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 이루어지는 삶의 현장입니다.

 

매년 주님의 부활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주님의 부활이 단순히 매년 왔다가 가는 행사와 전례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을 향해 모든 것을 버리고 뛰어내려야합니다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그것이 주님의 부활을 삶 속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주님께서도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얻으셨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주님이 이루신 일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실패의 밤을 건너온 우리에게 건네시는 주님 위로의 말씀, 와서 아침을 먹어라!

 -양승국신부-

 

그날 새벽 티베리아스 호숫가 제자들의 마음은 착찹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스승님께서 그리도 무기력하고 끔찍하게 세상을 떠나신후, 제자들은 삶의 의미요 기둥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돌아버리겠다는 생각에, 몸이라도 좀 움직이면 나을까 싶어, 야간 작업을 나간 것입니다. 고기라도 넉넉히 잡혀주었다면, 매운탕이라도 끓여놓고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쓰라린 심정을 달랠 수 있었을텐데, 그날 따라 단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뭘해도 안되는 자신들의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해서, 큰 상심에 빠져있는 제자들 사이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스승님의 부재상태에서 임재상태로 상황이 전환되자 우울했던 제자단 분위기는 급반전됩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던 밤 바다는 어두웠던 실패의 밤이었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이른 아침의 신선함 속에 주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부재 사이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에, 우리 공동체 안에 부재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절망과 낙담, 우울함과 나약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활발히 현존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기쁨과 희망, 따스함과 풍요로움, 강한 생명력과 낙천성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시련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손수 맛갈지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실패의 밤을 지새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다정한 위로의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고수해온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계명을 선택하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 속에 새로운 판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헛된 망상의 그물을 거두어들이고 주님께서 건네시는 새로운 그물을 펼칠때 놀라운 사랑의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이영근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절망에 빠져있고, 과거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날 아침을 열치시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부르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요한 21,12)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는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드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 받으신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빵’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바쳐 부활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신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요, 당신의 사랑을 아는 일이요, 그리고 그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을 증거하고 부활생명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곧 저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형제를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구워 드려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상을 차려 올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와서 아침을 먹어라.”

(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고 자란 제가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오늘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반영억신부-


우리 앞길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리막길은 쉽고 편하지만 밋밋하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왕이면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거듭나는 길은 어렵고 힘든 것을 통해서 입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결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간 고된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마음을 잡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할 수밖에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하며 그들에게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은 이미 빵을 준비해 놓고 당신의 식사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물고기의 유무를 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부활 식사를 위해 너희가 할 수 있는 몫이 무엇이냐?’그분의 나눔에 우리 역시 무엇인가를 준비하기를 바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행이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식사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밤새 애섰으나 그들의 손에는 그 어떤 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힘없이‘못잡았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무력함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이르셨고 이 말씀을 받아들인 순간 나눔의 자리는 풍성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베드로에게“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덜컥 겁을 먹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내지 못할 사건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는 포기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주님을 알아봤고, 베드로는 빠르게 행동으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깨달음과 행동의 조화로움이 어디에서든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잡은 고기 몇 마리를 직접 요리하시고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 입니다. 이른 아침 왠 젊은이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는데 그들이 어부라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을 한 것입니다. 순명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했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낳기도 했습니다. 순명은 이성과 판단의 희생입니다. 어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삶이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데서 오는 포기의 순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근심과 걱정, 실망과 좌절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함께하십니다. 다만 문제에 집착해서 그분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잃은 것이 더없이 큰 아픔이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통해 믿음을 키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수 차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누구십니까?”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거듭날 수 있는 기회로 알고 기뻐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송영진신부-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 21,3-6).”

 

이 이야기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로 해석됩니다.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자기들만의 힘으로 선교활동을 해 보려고 하다가 실패했음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밤’은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있음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자기들만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다가

실패한 일이 연상됩니다(마르 9,18).

그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는지를 예수님께

물었고(마르 9,28),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는 말씀은, 그들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고,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예수님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선교활동을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의(신앙인들의) 선교활동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예수님의 힘을 받아서 해야 하는 ‘예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은, ‘예수님 없이’ 제자들(신앙인들)만의 힘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겉으로는 크게 성공한 것으로 보이더라도,

예수님 없이 한 일이라면 그 성과는 오래 가지 못하고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선교활동에서 큰 성과를 거둔 것 같았는데

결과적으로 냉담자만 대량 생산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영적으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으면서도 그분의 지시대로 행동합니다.

왜 그랬을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아주 잊어버린 것은 아니고, 또 복음서에는 아무 설명이

없지만, 실패한 후에 예수님을 그리워했거나 찾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라는 질문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라는 지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새롭게’ 부르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에서, 처음에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체험했던

‘고기잡이 기적’이(루카 5장) 기억났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그분의 지시에 순종했고,

기적을 체험한 뒤에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하자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 성과는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거두신 성과입니다.

<선교활동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서 잘난 체 하면 안 됩니다.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협력자일 뿐입니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9-1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 일에서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예수님은 쉴 틈도 주지 않고 제자들을 마구 부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지쳐 있으면 ‘새 힘’을 주시고,

실망하고 낙담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힘’과 ‘용기’를 잘 받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신앙인은 기도를 통해서 힘과 용기를 얻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기도하지 않으면 점점 힘이 빠지다가 결국 모든 힘을 잃게 되고,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어쩌면 배반자 유다는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153’은 교회의 ‘완전함’과 ‘충만함’과 ‘보편성’을 상징합니다.

그 완전함과 충만함은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그 완전함과 충만함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찢어지지 않은 그물’은 교회의 ‘일치’를 상징합니다.

그 일치도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여러 종파로 갈라져 있는 것이 교회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도 역시 완전한 일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길에서 겪는 과정입니다.

마지막 날이 되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모두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고(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설명하는 단계는 이미 지났고),

이제는 ‘믿는 대로 사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경우에는 그렇지만,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안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설명하는 일은 아직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말’보다 ‘삶’이 먼저입니다.

‘부활 신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믿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말로 부활을 증명하고 설명하는 것은

헛된 ‘빈말’을 되풀이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팔일 금요일-힘을 빼고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4월 9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