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4월 19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Margaret K 2022. 4. 19. 07:42

2022년 4월 19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 
(요한 20,11-18)
 

"Stop holding on to me,
But go to my brothers and tell th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가 오순절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를 용서받으라고 하자 삼천 명가량이나 되는 이들이 세례를 받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당신께서는 하느님께 올라간다고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로고테라피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모든 절망의 기초가 되는 것은 결국 우상화밖에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절망하는 것은 우상화한 것이 깨졌거나 환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어머니라는 것에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는 것을 우상화했지요. 그래서 자녀에 대한 집착이 심했고, 자녀와의 커다란 다툼이 생겼을 때 크게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우상화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절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돈 많이 버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등을 우상화하면 절망에 빠질 확률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영원하지 않기에 실망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우상이라는 환상이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절망하게 됩니다.

우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즉, 우상에 기대어 사는 삶이 아닌 자기 본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참 하느님이신 주님이 중요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으로 생각한다면 세상의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주님만 잃지 않는다면 절망에서 벗어나 늘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에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왔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비어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처음 소식을 알렸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여전히 무덤을 지키며 울고 있었습니다. 누가 주님의 시신을 꺼내 가서 훼손할 것을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요. 하긴 직접 부활 예고를 들었던 제자들도 깨닫지 못하는데, 마리아 막달레나가 어떻게 부활을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됩니다. 그만큼 주님께 대한 사랑이 컸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울면서 빈 무덤을 지키고 있었으며, 얼마나 여기에 집중하고 있었으면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을까요? 주님께서도 그 사랑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마리아야!”라고 부르십니다.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마리아에게 사명을 내리십니다.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먼저 키워야 합니다. 그 사랑이 주님의 따뜻한 말과 함께 주님으로부터 커다란 사명을 받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희망을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희망을 발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을 알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다(알프레드 아들러).

 나와 동행하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인가?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JPI_hPMWED4

오늘 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엔 이 순간이 무덤이 아닌 ‘정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정원지기’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원은 단순한 정원이 아닙니다. 바로 에덴동산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은 생존에 대한 문제, 심지어 죽음에 대한 문제도 해결된 곳입니다. 계속 설명해 왔지만, 사람이 악해지는 것은 생존에 대한 문제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죽음까지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에덴동산에 들어간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동산지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동산지기는 아담이었습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 창세기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한 여인을 “마리아야!”라는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모님조차 마리아란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이 순간을 위해 참아온 것입니다. 

 

     아담은 동물처럼 살고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주며 새로운 존재라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그 아버지는 곧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에게서 나온 예수님도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도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소명을 마리아에게 넘겨줍니다. 새로 태어난 이는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처러 누군가에게 에덴동산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부활을 믿으면 그래서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신 분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분이 모든 것을 책임지지 못하실 분처럼 두려워하며 세상 것에 다시 집착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우리가 믿게 하려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줄 알기를 기다리십니다. 

  

    유기성 목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함을 믿으려면 내가 죽었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생명이시기에 내가 죽었다고 믿어도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을 때 그분의 부활이 더 명확히 믿어진다고 합니다. 

    그는 군종 목사가 되기 위해 훈련받던 도중 발이 부러집니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 훈련을 받아서 발을 거의 맞출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의사는 발을 절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유 목사는 수원에서 목사로 있던 아버지만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버지와 통화가 될 수 없었고, 수술 대기실에서 혼자 마지막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유 목사는 울부짖었습니다. 하느님은 찾지 않고 자신의 아버지를 먼저 찾았던 목사로서의 부족한 신앙이 죄책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부족한 자신에 비해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느껴지자 이젠 주님께 자기 발을 바치고 싶어졌습니다. 영원한 생명까지 주실 능력이 있으신 분께 의탁하지 못한 자신이 후회되었고 이젠 제발 자신이 절름발이 목사로 살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세 번 수술하고 나서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죽음까지 이기신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면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다음 시련은 목사가 된 이후 찾아왔습니다. 한 장로님이 불쌍해서 더 많은 기도를 해 주었는데, 신도들 사이에 유 목사가 그 장로에게 돈을 꿔가서 갚지 않아 그렇게 잘해 주는 것이란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신도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더는 유 목사와 함께 할 수 없다며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때 느낀 배신감과 허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는 목사로서 일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복음을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지 않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스스로 살려고 했던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나는 죽었습니다. 당신 마음을 주소서!”라고 기도했고, 마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없는 아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마냥 기쁘고 행복하신 것이 아니라 찢어지게 아픈 마음으로 이런 모습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시련은 계속 왔습니다. 대학원을 나와야 담임 목사가 되는 것이 당연한 시절 주님은 공부를 좋아하는 마음을 없애고자 논문을 포기하라는 강력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위 모든 사람이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 했지만, 마음 안에서 울려오는 목소리가 너무 컸습니다. 고민을 너무 한 탓에 열이 끓어올랐고 몸이 아주 아팠습니다. 이불을 쥐어뜯으며 울었습니다. 석사가 되는 게 뭐라고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또다시 “나는 죽었습니다. 주님께 의탁합니다”라고 몇 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한없는 평화가 오고 열이 갑자기 내렸습니다. 유 목사는 석사가 되지 않고도 담임 목사가 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여서 다행히 석사가 없는 거의 유일한 학사 담임 목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정말 우리 옆에 동행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죽음까지 이기신 분임을 우리가 믿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 믿음은 나의 모든 것, 결국엔 생명까지도 요구하시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생명까지도 기꺼이 그분께 봉헌할 수 있을 때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분께서 죽음까지 이기신 분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작은 것을 잃는 것도 얼마나 두려워합니까? 한 번은 다른 곳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아내가 전화로 방금 암 판정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강의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 빨리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계획하신 것이고 이것이 지금 자신처럼 마음 아픈 사람들이 와서 앉아 있는데 그들에게 큰 위로의 복음이 될 것이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아픔까지도 주님께 바친다는 강의를 했고, 결과적으로 강의도 잘 되고 아내도 수술이 잘 되어 건강해졌습니다. 아내도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고 집에 오는 길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많은 이들에게 선교하며 돌아왔다고 합니다. 

  

    유기성 목사가 강조하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결국 나를 죽이는 삶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죽음까지 이기신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능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인정하는 방법은 내가 모든 것을 잃어도 감사하다는 믿음뿐입니다. 우리는 진정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가요, 아니면 아직 부활하기 전에 기적을 많이 일으키신 그 예수님과 동행하나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면 그분이 말하지 않아도 맡기기만 하면 다 해 주실 분임을 압니다. 그래서 무엇을 잃을 걱정도 없고 또 무엇을 청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웃에게 전해야 하는 “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라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동행으로 나와 만들어집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표현한 것이 이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할 때 그분 손바닥에서 나 때문에 뚫리신 구멍을 확인합시다. 그 구멍이 있는 것을 본다면 나는 에덴동산에서 사는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입니다. 하지만 아직 구멍이 없다면 나는 아직은 완전한 부활을 체험한 것이 아닙니다. 

    나와 동행하시는 그분 손의 못 자국을 항상 확인하십시오. 죽음을 이기셨다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나도 죽음을 이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OCO2O5jxw3I

2016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령 「사도들을 위한 사도(Apostolorum Apostola)」, 2016.6.3.)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막달라의 마리아를 ‘사도를 위한 사도’로 부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으셨듯이, 막달라의 마리아는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강생의 신비에서 성령의 동정 잉태 전갈에 순명하신 성모 마리아의 역할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 섭리 역사에서 탁월했다면, 부활의 신비에서 부활의 첫 증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 역시 교회의 탄생과 성장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마리아는 혼자가 아니었고, 요안나, 수산나 등 공생활 시절에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을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던 여인들(루카 8,2-3)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들 모두에게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명예가 주어져야 마땅합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부터 이 여인들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모여(사도 1,14) 사도들이 주축이 된 초대교회의 공동생활과 복음선포활동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드러나지 않게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숨은 주역들이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 역할을 수행한 여인들은 열두 제자 출신 사도들에게서만이 아니라 별도로 사도로 부르심 받아 돋보이는 선교활동을 수행한 바오로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했습니다(로마 16장). 사도 바오로 역시 20여 년 가까이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 등 로마 제국의 드넓은 영토에 복음을 전하러 세 차례나 선교여행을 하고 곳곳에 신앙 공동체들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부활의 증인역을 자처한 여인들의 도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오로에게 20여년 동안 내내 한결같이 돈독한 도움을 준 여인은 필리피에서 만난 리디아였을 것입니다(사도 16,14-15; 필리 1,5; 4,15). 

 

  오늘 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삼천 명 가량 되는 유다인 군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 부활을 증언하고 나서 세례를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초대교회를 활성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드러나지 않게 예수 부활의 증인이자 사도를 위한 사도의 역할을 수행한 이 여인들 덕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놀라운 변화의 단초가 되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뵈온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전한 한 마디 증언이었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보편교회의 역사 2천 년을 돌이켜 보아도, “주님을 뵈온” 여성들의 역할은 지대하였습니다. 성경에서도 성전에서도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그러하고, 특히 한국교회의 지난 2백여 년 역사를 돌이켜보아도 그러합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가부장의 역할이 기록상 두드러지게 보이지만 가모장의 역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가정이 존속할 수도 없듯이, 교회에서도 그러합니다. 박해시대 교우촌에서도 “주님을 뵈온” 여성들의 역할은 독보적이었습니다. 앞장서서 치명한 경우도 있었지만, 가장이나 아들들이 치명한 경우에 남은 자기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심지어 부모가 모두 치명한 경우에 그들의 자녀들까지 거두고 돌보는 역할은 죄다 “주님을 뵈온” 여성들의 몫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의 대표로서 우리는 강완숙 골롬바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강 골롬바는 1791년의 신해박해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도리어 옥에 갇히기도 했고, 1794년 말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주 신부를 물심양면으로 정성껏 보필하였습니다.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함부로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 사회의 풍습을 이용하여, 주 신부를 자신의 집 안에 숨겨 두고 6년 동안 교우들을 모아 성사생활을 하게 하면서 자신은 여회장으로 여성 교우들을 이끌었습니다. 천진암 강학회 선비들이 시작한 한국교회는 이벽과 동료 선비들의 활약으로 1794년까지 4천 명까지 늘어났는데, 주 야고보 신부와 강 골롬바의 이러한 활약으로,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1만여 명에 달하는 신자들로 교세가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강 골롬바 외에도, 동정녀 공동체 회장을 맡아 수많은 동정녀들을 지도하며 가르쳤던 윤점혜 아가다, 맏아들 최양업 토마스를 사제가 되도록 봉헌하고 교우촌 회장을 맡았던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함께 교우들을 돕다가 세 아들을 남기고 치명한 이성례 마리아, 철저한 애긍생활의 모범을 보여준 송 루치아와 유 마리아 등 “주님을 뵈온” 여인들은 희생과 순교와 애덕의 영성으로 박해시대 교우촌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밖에, 황사영 알렉산델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관비로 신분이 격하되어 제주도 대정으로 유배갔지만, 치명을 하거나 전교활동을 할 수는 없었어도 뛰어난 애덕을 증거한 덕분에 지금까지도 제주에서 공경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을 뵈온” 수많은 마리아들이 교회를 뒷받침하고 돌보며 지켜왔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도 또 앞으로도 마리아들의 사도직은 그러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아침 산보 길에 자주 보는 것들이 있습니다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새입니다새는 날개가 있기에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닙니다날개가 있는 새는 걸어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새가 걸어 다닌다면 날개에 이상이 있거나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걸어 다니는 새는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다람쥐도 볼 수 있습니다다람쥐는 새들처럼 날지는 못하지만 나무를 아주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곡예사처럼 높은 전선 위를 이동할 수 있습니다다람쥐에게는 단단하게 움켜잡을 수 있는 발톱이 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새들에게는 날개를다람쥐에게는 발톱을 주셨습니다새들처럼 날개는 없지만다람쥐처럼 발톱은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는 신앙을 주셨습니다그래서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면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고나무를 오르는 다람쥐를 보면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모든 것이 기쁨입니다.

 

예전에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커피를 마시면 컵에 경품이 있었습니다저는 아는 자매님과 커피를 마시면서 평소처럼 제 것이 당첨이 되면 가지시라고 말을 했습니다될 리도 없고 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그날 그분이 제가 마신 컵을 가지고 열어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동차 나와도 저 주는 거예요?” 저는 그럼요!”라고 말을 했습니다그런데 정말 컵 말린 부분을 여는데 그분 표정이 변하는 겁니다보통은 ‘Please try again.'이라고 나오는데 처음 글자가 ’W'인 겁니다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 이상하다고 하는 겁니다그런데 제 마음이 더 이상해졌습니다정말 자동차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신부가 되가지고 반씩 나누자고 할 수도 없고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결국 ‘Win coffee'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커피의 경품은 나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는데예수님의 부활은 정말 나를 완전히 딴 사람으로 만들 정도로 흔들어 놓는지 생각하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기쁨과 영광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꼭 해야 할 어떤 일을 해냈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성삼일을 지내면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묵상하며 그 의미를 내 삶에 받아들이기 보다는 아올해도 주님의 부활이 지나갔구나이런 생각들을 하였습니다주님의 부활이 그렇게 나에게 의미 있고그렇게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큰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날개가 있음에도 날지 못하는 새와 같았습니다날개를 믿지 못하고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새와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 복음을 선포하고어떤 고통과 두려움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그것은 이제 그들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생명도재산도명예도욕심도 다 버렸을 때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느끼고만날 수 있었습니다. 10개월 동안 엄마의 몸속에 있는 아이에게 탄생은 어쩌면 죽음과 같은 두려움과 고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탯줄에 연결되어 매일 아무 수고 없이 양식을 받아먹고엄마의 몸 안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는 아이에게 세상은 그렇게 자유롭고 편안한 곳이 아닐지 모릅니다그러나 아이는 엄마의 몸에서 나와야 하고나오지 못하면 결국 아이도 엄마도 위험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자신을 먹여주고 지켜주던 탯줄을 끊어야만엄마의 몸에서 나와야만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아이에게는 죽음과 같은 체험일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탄생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주님께서 오늘 마리아를 부르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십니다걱정과 근심두려움과 슬픔을 다 떨쳐버리고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편안한 하루 되십시오.

 라뿌니! 나의 사랑하는 선생님!

 -양승국신부-

 

별것 아닌 내용인데 장황하고 어렵게 풀어나가는 책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난해하고 어려운 주제라 할지라도, 잘 갈고 다듬어 쉽고 친숙하게 우리를 안내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존경하는 송봉모 토마스 신부님께서 최근 출간하신 ‘요한복음 산책 7, 평화가 너희와 함께’(바오로 딸)를 눈여겨볼 만합니다.

  

신부님께서는 7권이나 되는 요한복음 산책 시리즈를 통해, 그 어렵고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요한 복음서를 성경 초심자들도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하고 계십니다. 흥미로운 예화들과 생생한 체험들이 성경 본문과 어우러져 우리를 요한복음의 생생한 현장 속으로 안내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번에 내신 책은 요한복음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21장~22장,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부활을 맞이한 우리 모두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예수님 부활 사건의 최초 목격 증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송봉모 신부님의 해설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다시 뿜어져 나오는 대목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가 모셔가겠다고 한다. 장정의 시신을 나르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몰약과 침향을 섞어 만든 34킬로그램의 향료 가루와 아마포 수의로 감싸 있는 예수님의 시신을 운반하다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러한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야!: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자 주님께서는 “마리암!” 하고 부르신다. 아람어로 마리암은 그리스식으로 마리아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말로 쓰였기에 마리암을 마리아로 번역한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자 즉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마리암!”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자신을 불러주시는 분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뿐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라뿌니!: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시자 즉시 예수님임을 알아본다. 그리고 슬픔과 비탄, 절망으로 죽어있던 그녀의 마음이 순식간에 기쁨과 환희와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부활을 체험한 것이다. 그러고는 아람어로 “라뿌니!” 하고 외친다. 라뿌니는 ‘나의 사랑하는 선생님’이란 뜻이다. 안셀무스 성인에 따르면 그녀가 “라뿌니!” 하고 외칠 때 이미 그녀의 눈에서는 조금 전까지 흐르던 눈물과는 완전히 다른 눈물, 환희와 기쁨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스승이라는 뜻인 “라삐”라고 불렀다. 라뿌니는 제자가 스승에 대해 특별한 애정과 친밀함과 존경을 가득 담아 부를 때의 호칭이다. 학자들은 이 외침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최고의 신앙고백이 들어간 외침이라고 한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부활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 마리아의 사랑이야기 2탄입니다.

사랑의 장소는 동산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처음 준비되고 이루어진 곳도 동산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산에서 사랑으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 또 다시 동산에서 사랑으로 부활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그렇게 에덴동산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주십니다.

 

두 제자는 이미 돌아갔건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차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울다”의 원어의 뜻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큰소리로 통곡하여 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사랑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무덤을 들여다보고 하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두 천사를 봅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습니다.”

(요한 20,12)

 

성 그레고리우스는 천사가 있었던 '머리맡'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는 사실을, '발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곧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또한 그녀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랬고(루카 24,13-35),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의 일곱 제자들도 그랬습니다(요한 2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무엇인가를 요청하고 무엇인가를 도와달라고 하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러기에 부활 체험은 ‘낯선 이’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낯선 이’의 요청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고 ‘눈이 열리어’(루카 24,31)야 할 일입니다.

 

그분은 나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이집트에서 불러내듯, 동굴에서 불러내듯, 나를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는 당신이 더 이상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자신이 모르는 낮선 예수님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든다.’고 말합니다.

 

결국 부활은 다름 아닌 사랑의 승리이며,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은 예수님처럼,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주님!

제 사랑이 아니라 당신 사랑에 붙들리게 하소서.

보이는 당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사랑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온통 사로잡히게 하소서.

아멘.

「더 많이 사랑합시다」

 -반영억신부-

 

너무도 큰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을 보고는 ‘넋이 나갔다.’ 또는 ‘혼이 나갔다’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마리아는 빈 무덤을 보고 너무도 놀라 자신을 추수 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슬픔 속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른 아침 무덤을 찾아왔는데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절망 속에 있는데 예수님께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가득해 다른 어떤 것도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고 하나 봅니다. 자기 안에 갇히면 들리지도 않고,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마리아는 넋이 나갔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직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20,16)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부활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마리아는 “라뿌니!”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10,14). 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는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직접 보여주기까지는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그분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20,17).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사명을 줍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의 하느님이 곧 나의 하느님이시니 나는 그분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당신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몽땅 내어주셨습니다. 내어줌이 없이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진리를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삶을 본받아 나를 내어주는 만큼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20,18).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듯이 우리도 그 아들과 딸로서 주님을 전해야 할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을 뵙고 전하였듯이 우리도 더욱 간절한 사랑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리아가 절망의 어둠 속에 '서서 울던' 사람이었지만, 제자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는' 이가 되었듯이 우리도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고서는 사랑이신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사랑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고서는 참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을 바라보며 내 안에 가득 찬 무언가를 비워내며 믿음의 사람이 된다면, 비어있음으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인정할 줄 안다면, 부활은 큰 기쁨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일은, 마리아를 당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 일이고, 부활 소식의 ‘첫 선포자’로 삼으신 일입니다.

“왜 마리아 막달레나인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온 삶’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일에서 마리아가 가장 앞섰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똑같은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분명히 사도들도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은

사도들보다 더 깊었고, 더 능동적이었고,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편애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 쪽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고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20,11-15).”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님은 돌아가셨다.” 라는 생각에만 단단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슬픔에 잠겨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신 분’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눈앞에 ‘살아 있는 분’이 예수님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많이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여인아, 왜 우느냐?” 라는 천사들의 말은,

원래는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셨는데 왜 우느냐?”였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누군가가 마음대로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 갔다는 생각 때문에,

또 예수님의 시신을 빨리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천사들을 보면서도

놀라지도 않았고, 천사들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바로 네 앞에 있는데, 너는 왜 울면서 나를 찾느냐?” 라는 뜻입니다.

<또는 “마리아야, 울지 마라. 내가 바로 네 앞에 있으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입니다(묵시 21,4).>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6-18).”

 

여기서 “마리아야!”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원문에는 ‘마리암’이라는 아람어로 되어 있습니다.

‘라뿌니’는 히브리말이 아니라 아람어입니다.

평소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마리암’이라는 아람어로 부르시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라뿌니’ 라는 아람어로 불렀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 듣던 예수님의 음성과 호칭 덕분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

이 장면은, 10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3-4).”

마리아가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서 예수님을 알아본 일을,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요한 14,21).

아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을 받으려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나를 붙들지 마라.” 라는 말씀은,

“여기서 지체하지 말고, 바로 가라.” 라는 뜻입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라는 말씀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곧 올라간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정리하면, “내가 곧 아버지께 올라가니까

너는 지체하지 말고 바로 사도들에게 가서 나의 부활 소식을 알려라.”입니다.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표현은, 전에는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와

‘신앙인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구분되었지만,

예수님 부활 후에는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관계가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제부터는 내 아버지는 곧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이 되고,

내 하느님은 곧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이 된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같은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2ㄱ.3).”

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ㄱ).”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아버지의 집에서 당신과 신앙인들이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당신의 부활 소식만 알리라고 시키신 것이 아니라

곧 승천한다는 것도 알리라고 시키신 것은,

“내가 가는 곳으로 너희도 따라와라.” 라고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고,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살자.” 라고 초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은,

그 부르심과 초대도 함께 전해 주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 ‘영원한 삶’을 희망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하고,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자격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 15)

-한상우신부-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신다.

"마리아야!"
부르시며
우리를
돌아서게 하신다.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난다.

모두 다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이다.

참된 사랑이
바꾸어 놓은
새롭고 새로운
부활의 모습이다.

서로의
사랑 안에서
만나게되는
빛나는
부활의 모습이다.

우리 삶의
아름다움을
다시
깨닫게하는
참된 사랑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다시금
서로의
사랑임을
부활로
보여주신다.

우리의 울음과
눈물 또한
사랑을
향해있다

더 깊이
사랑하였기에
더더욱
간절한 것이다.

이 슬픔을
걷어내는
부활의
참기쁨이다.

같은 분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신다.

부활은
단정과 규정을
뛰어넘으며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

부활은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어지는
것이 된다.

신앙은
보고 믿는
뜨거운
체험이다.

우리 뒤에
이름을
불러주시는
주님이 계신다.

다시 새롭게
보는 봄(春)
연두와 초록의
순수한
부활이다.

시각과 관점을
바꾸면 이미
와 있는
새로운
부활이다.

새롭게
새롭게
만나는
부활의 기쁜
소식조차
붙들지 않는다.

우리의
하느님을 향해
올라가는
사랑의 새로운
소식이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요한 20, 18)

새롭게
만나고
새롭게
보는 사랑이
부활이다.

 말씀 나누기 - 부활 팔일 화요일-붙들지도 붙들리지도 말고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4월 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